Maya RAW novel - Chapter 41
41
그렇지 않았다. 마령음은 경맥뿐만이 아니라 단전이란 그릇도 크게 넓혀놨다.
금연화는 아직까지도 자신의 단전 크기를 재지 못하고 있다.
운공을 할 때마다 진기는 쌓이는데 망망대해에 조약돌 하나 던져 넣은 것처럼 흔적없이 녹아버린다.
도대체 이놈의 단전을 언제 다 채운단 말인가.
분명한 것은 최강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강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넓디넓은 단전만 꽉 채운다면 중원제일의 무신도 바라볼 수 있다.
‘자하밀공은 극상승 내공심법. 하지만 부족해. 좀 더 현묘한 내공심법이 필요해.’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금연화는 자하밀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저녁놀 사이로 한줄기 바람이 흐른다는 자하풍류신법(紫霞風流身法)을 펼쳤다.
그녀는 한 줌 기척도 흘리지 않고 갈대밭 사이로 스며들었다.
남무림은 무려 삼십 년간이나 북무림과 싸워왔다.
어느 한쪽 큰 득도, 큰 손해도 보지 않은 채 하루에도 수십 명의 무인들이 장강에 피를 뿌린다.
장강은 반드시 사수해야 할 방어선이며, 반드시 뚫어야 할 공격선이기도 하다.
장강에 대한 경계가 삼엄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남무림은 장강이 뚫렸다 싶으면 즉각 도령(刀令)을 발동한다. 뚫린 부분을 중심으로 방원 삼십여 리에 걸쳐서 천라지망이 펼쳐지는 것이다.
천라지망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다. 힘으로 그물을 찢을 수는 있겠지만 흔적없이 빠져나갈 수는 없다.
‘반원 형태. 스물네 명. 그럼 이들이 이십사현살검객(二十四玄煞劍客)? 족집게가 따로 없어. 이십사현살검객이 막아설 거라더니.’
금연화에게 주어진 시간은 다섯 호흡이다. 다섯 호흡을 넘기게 되면 삼백여 명에게 포위된다. 형문산(刑門山)을 근거를 둔 현살문(玄煞門)이라고 했나? 삼십여 년 전에는 살수 문파였지만 지닌바 기예가 뛰어나 남도문으로 영입된 문파.
착! 차악!
보통 장검보다 한 뼘 정도 길이가 작은 쌍검이 양손에 쥐어졌다.
‘후웁! 하나!’
숨 한 모금, 갈대 사이를 누비듯 스며들며 쌍검을 떨쳐 냈다.
“컥!”
“크윽!”
“허억!”
짜릿한 단발마가 세 마디나 울렸다.
조금 아쉽다. 무공에 자신을 가졌다면 다섯 명쯤 해치울 수 있었는데. 자하밀공을 십성까지 터득했다고는 하지만 실전에서 사용하는 것은 처음인지라 자신을 갖지 못했다.
삐익! 삐익! 삐익!
십여 장 쯤 떨어진 갈대숲에서 호각 소리가 터졌다.
‘치잇! 이제 기습은 틀렸어.’
남은 건 네 호흡, 호각 소리를 들은 무인들이 메뚜기처럼 날아오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파팟! 사사삭…… 슈우욱!
자하풍류신법으로 펼치는 자하쌍구검.
이번 적들은 먼저처럼 쉽게 당하지 않았다. 허식을 일체 배제하고, 자신의 목숨까지 도외시하고 오로지 나도자신(拿刀刺身), 찌르는 검식 하나만 구사하는 살수검을 떨쳐 왔다.
수우욱! 우우웅!
금연화의 양손에 들린 쌍검이 각기 다른 기음을 토해냈다.
노을을 아는가?
노을은 해 뜨기 반각 전과 해 지기 반각 전에 일어난다.
해 뜨기 전에 물드는 노을은 붉은색으로 시작하여 노란색으로, 그리고 점점 옅어져 하얀 광명과 동화한다. 저녁노을은 정반대다. 광명에서 노란색으로, 그리고 붉은색으로 변하고 종래에는 어둠 속으로 숨는다.
자하쌍구검은 이기일원검(二氣一元劍)이다.
우검(右劍)은 소리 없이 일어나나 불꽃이 폭발하듯 강력한 파괴력을 담고 현란하게 펼쳐진다. 어둠에서 밝음으로, 음에서 양으로, 대지에서 천공으로 치솟는 검이다.
좌검(左劍)은 눈부신 변화를 일으키며 펼쳐진다. 하나 초식이 전개될수록 변화가 줄어들어 무미건조한 검세로 약화된다. 그렇다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때야말로 진정한 암흑의 검이 목숨을 노리는 순간이니까.
우검과 좌검을 뒤섞으면 수많은 검형(劍形)이 창출된다.
가짓수를 헤아린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천지자연, 삼라만상에 내포된 모든 변화가 깃들어 있는 검형을 무슨 수로 헤아린다는 말인가.
자하부는 역사를 거듭하면서 검형을 줄여왔다.
정제하고 또 정제하여 가장 강력한 검형만 존재시켰다.
그래야 범인들도 수련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초상승 검공이라 할지라도 신인(神人)만 수련할 수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금연화의 손에 넘겨진 자하쌍구검은 검형이 백 가지로 압축되어 있었다. 그래서 일명 백형검법(百形劍法)이라고도 부른다. 자하쌍구검이란 백형검법 중 아홉 검형을 막아낸 사람이 없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니 광오하지 않은가.
고루쌍마의 고루음공과 고루양공이 영적 교류에 의한 음양합격술이라면, 자하쌍구검은 한 사람이 펼칠 수 있는 음양공의 조화라는 점에서 한 단계 앞선 무공이라고 할 수 있다.
츄츄츄…… 사라라랑!
대붕이 날아오르듯 양손을 좌우로 쫙 벌려 가슴을 드러냈다. 우검은 소리없이 밑에서 일어나 오른쪽으로 반원을 그렸고, 좌검은 일수에 여섯 가닥의 변화를 내포한 채 앞을 갈랐다.
“크윽!”
“컥!”
“헉……!”
좌검에 걸린 생명이 세 명, 우검에 두 명. 검세를 마무리했을 때 걸려든 생명이 넷. 백형검법 서른네 번째 검형을 끝냈을 때는 아홉 명의 생명이 이승을 달리했다.
‘이제 세 호흡. 남은 자는 열두 명. 가능해.’
마야에게 말을 들었을 때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가능해 보인다. 할 수 있다.
금연화는 갈대밭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지도 한 장을 꺼내 펼쳤다.
세상이 환하게 밝았다. 아침때도 벌써 넘겼다.
품에서 육포 한 조각을 꺼내 씹어 먹으며 주변 지형과 지도를 번갈아 살폈다.
육포 맛이 이상하다. 짭짤한 맛 속에 비릿한 맛이 섞여 있다.
피다. 육포에 피가 배어 있다.
금연화는 두 손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이십사현살검객과 삼십육천강수(三十六天剛手), 육십 명이나 죽였다. 그들 중 산 자가 있을까? 있으면 다행이고, 없어도 그만이고.
그들의 피가 검신을 타고 흘러 양손을 물들었다. 소맷자락도 온통 피투성이고, 튀긴 핏물 때문에 옷도 혈의(血衣)로 변했다.
흉신악살이 따로 없다.
자신이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일 줄이야. 그들의 피가 찐득찐득하게 달라붙은 손으로 육포를 꺼낼 씹을 만큼 무감각해질 줄이야.
자신을 정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혹, 혈관 속에 마인의 피가 섞여 있는 것은 아닌지.
이게 전부 심지 뽑기를 잘못한 탓이다.
심지가 열두 개나 되었는데, 하필이면 자신 것이 가장 길 게 뭔가 말이다.
자신이 남도문의 천라지망을 뒤흔들고 있는 동안 다른 열한 명, 아니, 철탑거추까지 열두 명은 유유히 남무림 땅을 밟고 있을 것이다.
마야가 ‘한 사람의 희생으로 열두 명이 안착하는 계획’이라고까지 말한, 재수없는 미끼가 그녀다.
그들도 뭉쳐 있지는 않다. 자신이 홀로 이듯이 그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걱정되지는 않는다. 오직 한 사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철탑거추만이 신경 쓰인다. 그는 단번에 시선을 빼앗을 만한 신체를 가지고 있으니까.
누가 누굴 걱정하고 있나.
‘여기서 남동쪽으로 가라고 했으니까…… 저 논을 가로질러…… 산과 산 사이로 빠져나가야 해. 논에 장양문(長陽門)이 매복해 있을 거고, 인원은 칠십. 사시정(巳時正)이 되면 빠져나갈 수 없다고 했는데…….’
하늘을 올려다봤다.
태양이 떠 있는 모습으로 보면 사시초(巳時初)를 넘어 사시정으로 다가가고 있다.
마야가 야속하다.
주위에 난다 긴다 하는 마인들이 득실거리는데 꼭 여자들까지 심지 뽑기에 끼어 넣었어야 하나. 하기는…… 무공도 모르는 마야 자신도 심지를 뽑았으니 할 말이 없지만.
‘육십 명을 죽였는데, 또 칠십 명. 오늘 대살성이 등장하겠네.’
백삼십이로(百三十二路) 파해(破解).
백육십팔 명 사망, 예순한 명 중경상.
광살녀(狂殺女)의 등장은 강남무림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남무림으로서는 남북광란(南北狂亂)이 일어난 이후 세 번째로 겪는 치욕이다.
오 년 전, 사십삼로가 혈귀대에 의해 붕괴된 적이 있다. 당시 사십삼로를 지키던 무인 삼백오십 명은 채 하루가 지나기 전에 차디찬 시신이 되었다.
혈귀대는 치고 빠지는 게 귀신같았다.
은영문주(隱影門主)를 제거한다는 목적을 이뤘을 뿐만 아니라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내지 않은 채 무사히 철수했다.
삼 년 전, 천랑대주가 육십오로를 무너뜨렸다.
그는 절반의 성공만 이뤘다. 강남의 소룡(小龍)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급부상하던 사자림(獅子林) 림주를 죽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가 이끌고 온 백 명의 천랑대는 모두 전멸했다.
천랑대주도 심한 중상을 입은 채 간신히 장강을 넘었다.
이제 또 일로가 파해되었다.
더욱 기막힌 것은 혈귀대나 천랑대와 같이 일단의 무리가 아니라 혈혈단신이라는 점이다. 그것도 사내도 아닌 아녀자다.
치욕을 넘어서 개망신이다.
남무림은 흉수가 쓰는 무공조차 찾아내지 못했다.
옆구리를 파고 들어와 늑골을 가르고 몸통을 반이나 찍어버린 검법은 너무 패도적이다. 반면에 사혈만 네 치 깊이로 손상시킨 섬세한 검흔도 보인다.
한 사람이 지닐 수 없는 극과 극의 검법이 전개되었으니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다.
“쌍검을 사용하니…… 자하부주가 아닐까?”
“이 사람아, 여자라잖아.”
“그럼 자하일봉 아닐까? 자하부에서 뛰쳐나왔다던데.”
“자하일봉이 비록 후기지수로 거론되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아냐. 자하일봉 같았으면 백삼십이로를 뚫기도 전에 척살당했어. 뚫는 게 뭐야? 이십사현살검객도 당하지 못할걸?”
“희한하네. 음검과 양검을 동시에 사용하는 문파는 자하부밖에 없는데. 또 다른 문파가 있나?”
“모르지. 기인이사가 산재한 곳이 중원이니까.”
주점에서도, 다루에서도, 길을 오가는 사람들도 한결같이 광살녀를 입에 담았다.
“금 매도 이젠 마도인으로 낙인찍히겠군요.”
다담선자가 차를 마시며 말했다.
“그렇겠지.”
소립파도 차를 마셨다.
부잣집 자제와 그를 모시는 시녀로 변신한 그들에게서 소립파와 다담선자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수염을 정갈하게 기른 유생과 얼굴 하나 가득 주근깨가 박혀 있는 시녀를 주목하는 사람도 없었다.
“다른 무공이 있어야 해요. 지금은 긴가민가하지만, 결국 자하부로 눈길이 돌아갈 거예요.”
“자하부주가 자하밀공과 자하쌍구검을 함께 펼친 적은 딱 한 번뿐이야. 수강채(水江寨)를 몰살시킬 때. 자하공법을 쓴 것과 자하밀공을 쓴 것은 검흔이 완전히 달라. 괜찮을 거야.”
“조금 손대줄 수는 있잖아요.”
“내력이 딸려서 안 돼.”
“지금…… 내력으로도 모자란단 말예요?”
“백형검법을 손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야. 무위자연(無爲自然). 검형을 없애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어. 대를 이어오며 거르고 거른 검형이야. 더 거를 게 있나.”
“자하쌍구검이 현존하는 최강의 검초라는 말인가요?”
“최강의 검초 중 하나지.”
“풋! 돼지 목에 진주군요. 그런 검초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북검문에 핍박당하고 있으니.”
“그놈이 사랑한 여자야. 그런 식으로 말하면 곤란해.”
“알았어요. 잘못했어요.”
“그냥 한 말이란 것 알아. 마음이 울적하니 신경이 예민해진 거지.”
“놀라운데요? 마야도 예민해질 때가 다 있다니요.”
“후후! 나도 사람이야.”
다담선자는 곱게 웃어주었다.
마인들은 마야를 전지전능한 신처럼 여긴다. 그가 나서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 해낼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눈길들이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다. 병이라면 병이고, 아니라면 아닐 수 있는 경맥경화증을 지닌 사람이 업고 가기에는 너무 큰 짐이다.
의원들이 흔히 말하는 경맥경화증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백이면 백, 처음 보는 경화라고 하니 치료 방법인들 어찌 찾을까.
일신조차 가누지 못하는 사람이 이런저런 세파에 휘말리고 있으니.
“한두 명쯤 막힐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자하일봉이 워낙 잘해줬어. 몇 명이나 모일지 내기할까?”
“제가 모두 무사하다는 쪽에 걸어도 되죠?”
“반칙이야. 무슨 말을 할지 알면서.”
“마야는 언제나 지는 사람이잖아요.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요. 어쩔 수 없는 천성이에요.”
“그렇군. 적은 안에 있었어. 어쩐다?”
“어쩌긴요. 지면서 살아야죠. 호호호! 가요.”
“그래.”
두 사람은 일어섰다.
다담선자는 행복했다.
‘오랜만이야. 정말 오랜만에 웃는 대화를 했어.’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는 허름한 폐가. 살인이 일어나도 알 길이 없는 버려진 농가.
철탑거추처럼 눈에 확 띄는 체형 때문에 적잖이 염려했던 고루쌍마는 먼저 와서 불을 피워놓고 있었다. 고루쌍마는 마야와 다담선자가 들어서는 모습을 보자 반색하며 맞이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잘못 찾은 게 아닌가 하고 불안했잖아.”
“어서 와. 날이 많이 싸늘해졌지? 아침저녁으로 제법 차다니까.”
마야와 다담선자는 그들 맞은편에 앉았다.
“여긴 뭐 하는 곳이야? 시키는 대로 찾아오긴 했지만…… 마을 놈들, 보통 놈들이 아니던데.”
소립파는 눈을 감고 불기를 쬈다.
고루쌍마도 말을 걸지 않았다. 원하는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마야가 단순히 생각에 잠기려고 눈을 감은 게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에 방해하지 않았다.
다담선자는 조용히 농가 한쪽에 버려진 솥을 가져와 물을 끓였다.
솥은 버려진 것처럼 보일 뿐 버려진 게 아니다. 오래된 솥이고, 깨진 곳도 있지만 깨끗이 닦여져 있다.
솥에 든 물이 팔팔 끓을 무렵, 시마가 휘적휘적 걸어왔다.
“염병할…… 더럽게 찾기 어렵네.”
시마는 힘들었는지 앉기가 무섭게 드러눕더니 코를 골아댔다.
물이 졸아든다. 다담선자는 찬물을 다시 부었다.
그로부터 반각 정도가 지났을 무렵, 마도과 혈유가 거의 동시에 들어섰다.
그들 몸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말라붙어서 검은색에 가깝게 변한 핏자국과 아직도 선홍빛이 선명한 핏자국이 함께 어울렸다.
“아이고, 죽겠다.”
혈유는 진이 다 빠진 듯 털썩 주저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잠시 후, 쿵쿵거리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철탑거추가 들어섰다. 그는 어깨에 걸머메고 있던 대호(大虎)를 구석진 자리에 던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