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45
45
가슴이 덜컥 무너져 내려앉는다. 또 실패……. 수천 권의 비급, 수백 가지의 진기 운용법으로 풀리지 않는 경략. 정말 천형인가. 도무지 방법이 없는 건가.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일절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활짝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실망했어요?”
“세상에 존재한다는 무학은 거의 보았는데 실망은.”
“몸은 괜찮고요?”
“하하! 널 선루에 보내놓고 여자 없이 사는 법을 배웠지. 걱정 마. 튼튼해.”
“다행이에요.”
다담선자는 무너지는 마음을 억지로 붙잡았다.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사람. 맹수는 죽는 순간까지도 아픈 내색을 하지 않는다고 했나요? 온몸이 갈가리 찢어져도 생생한 포효를 내지른다고 했죠. 당신이 꼭 그런 사람이에요.’
마야가 회포를 풀기도 전에 볼품없는 노인이 불쑥 찾아왔다.
염소수염, 작은 키, 데룩데룩 굴러가는 눈동자. 하오문주다.
“됐나?”
하오문주는 사립문을 밀치고 들어서기 무섭게 용건부터 물었다.
“그쪽은?”
“히히! 하오문을 뭐로 보고. 캐내려고 한다면 황후 속곳 색깔까지 알아낼 수 있는 곳이여.”
소립파는 마당에 놓인 평상(平床)에 앉았다. 하오문주가 쪼르르 달려와 맞은편에 앉았다.
소립파가 먼저 얄팍한 책자 네 권을 꺼내 건네주었다.
“말한 대로 각기 하나씩. 안공(眼功) 하나, 은신술 하나, 감각을 세 배로 증폭시키는 각공(覺功) 하나, 기관진식의 근본 요해본 하나.”
“이것이…….”
하오문주는 눈을 굴리지 않았다. 장난기도 사라졌다. 그의 얼굴은 누구보다도 엄숙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야말로 하오문주의 진실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하오문주는 안공을 꺼내 파라락 넘겼다.
“이게 뭐야? 이런 게 가능한가? 내 자세히 보지는 않았지만…….”
“다섯 가지 직업 중에 도비를 택한 건, 도비의 능력이 다른 직업군과도 상통하기 때문. 각공을 배수에게 주면. 또 도곤에게 주면. 안공, 각공, 은신술. 도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오문도 모두에게 공통된 사항이지. 감안해서 손봤는데, 믿기지 않소?”
“아니…… 이게 말처럼만 된다면야…….”
“이제 그쪽 물건을 주쇼.”
하오문주는 헝겊에 싸인 책자를 내밀었다.
“상조문, 철사문, 독조림, 궁왕 강창도에 대한 건 속속들이 다 들었네. 그들의 거처에 감쪽같이 숨어 들어갈 수 있는 행로도 만들어놨고. 잡을 수 있는 방법도 머리를 쓰긴 썼네만…….”
“자신이 없다? 약속이 틀린데.”
“빌어먹을! 야광이 끼어들었어!”
갑자기…… 찬물을 끼얹어놓은 듯 조용해졌다.
남무림 무인들이 생사를 거머쥐고 모든 행동을 지휘하는 두뇌 집단. 북검문보다 열악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삼십 년간이나 팽팽하게 균형을 맞춰온 현자들.
북검문에 삼뇌가 없었다면…… 어쩌면 싸움은 벌써 끝났을 것이다. 남무림 세상으로.
싸움은 무력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니다. 문(文)도 같이 어울려 줘야 하고, 막대한 돈도 투입되어야 한다. 이러한 세 가지 요소를 최대한으로 이끌어낼 때 승기를 엿볼 수 있다.
소립파는 담담한 표정으로 헝겊에 싸인 책자를 받았다.
“한 가지 더 주고 싶은 게 있소만.”
“뭔데?”
하오문주의 눈알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 나름대로는 십비지공(十秘之功)이라 이름 붙였소만.”
“시, 십비지공! 그럼 그게 바로…….”
“영원히 잡히지 않는 도비, 삼십 년 면벽한 고승도 파계시킬 수 있는 요녀, 불패의 승부사 도곤. 더 듣고 싶소?”
“천하의 돈이 모두 내 돈인 배수. 펴, 편자는?”
“사람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누구든 속일 수 있지 않겠소.”
“독심술(讀心術)쯤은…….”
“그럼 십비지공도 필요없겠군.”
“그, 그럼 이, 이건 뭔가?”
하오문주는 소립파가 건네준 책자들을 들어 보였다.
“그건 문주께서 원하신 것 아니오. 뭐뭐 해달라. 요구에 맞춰준 것이오. 그걸 어떻게 응용하느냐는 문주의 몫이지 않겠소.”
꿀꺽!
하오문주가 침을 삼켰다.
“해주긴 했는데 십비지공보다는 떨어진다는 생각이오만. 조건을 잘못 거셨소. 차라리 최고의 도비가 되게 해달라고 했다면 일비지공이라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내 발등을 내가 찧은 꼴이군. 하루만 말미를 주겠나?”
소립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십비지공이라……. 허허! 수대에 걸친 염원도 별것 아니었나. 한 달 만에 풀리다니. 그까짓 것…… 그까짓 것을 취하려면 하오문을 거덜 내야 할 터. 흐흐흐!”
하오문주의 웃음은 허허로웠다.
하오문주의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반나절도 되지 않아서 다시 돌아왔다.
“야광까지 끼어들었는데 정말 할 텐가?”
소립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게 중원일 테지? 혈귀대의 죽음은 남무림만 연관된 게 아니니까.”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남무림과 북무림. 전 중원. 대상이 무신들 일곱 명이라도 할 텐가?”
“염라대왕이라도.”
“중원을 취할 생각인가?”
“복수만 할 뿐이오.”
“마인들의 세상을 원하나?”
“이 사람들의 행동을 간섭할 권한은 없소. 하나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 복수뿐이오.”
하오문주는 한참 동안 소립파를 쳐다봤다. 그리고 힘들게 말했다.
“십비지공을 주게.”
2
“은마.”
대답은 없었다.
“길을 열어. 간격은 일 리. 속도는 완보(緩步).”
소립파는 하오문주에게서 받은 여러 장의 지도 중에 한 장을 떼어내 마당으로 던졌다.
휘익!
매가 병아리를 낚아채듯 시커먼 그림자가 허공에서 뚝 떨어지더니 지도를 움켜잡고 사라졌다.
“저, 저놈! 숨는 재주만 있는 줄 알았더니 신법도 제법일세. 허! 저놈 얼굴 보기가 더 어려워진 건가.”
“방금 완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야광이 끼어들었다면 한시라도 빨리 가야 되는 것 아닌가? 야광이 손을 쓰기 시작하면 옴짝달싹 못하게 될 텐데.”
시마와 수검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소립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떼었다.
“염병! 주둥이는 뒀다 밥 먹을 때만 쓰는 건가. 말 한마디 해주면 입술이 부르터, 혓바닥이 썩어. 저놈은 꼭 제멋대로 할 때면 입을 다물더라고.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라, 이거지? 썩을!”
“풋!”
일령이 손을 들어 입을 가리며 웃었다.
“계집아, 넌 뭐가 웃기다고 낄낄거리는 거야! 그러잖아도 부아가 치미는 판에 별게 다 까불고 있어.”
“그러면서도 따라가는 건 뭐예요?”
“뭐, 뭐야! 어쭈! 이제 무공이 늘었다 이거지? 한 번 해볼텨?”
“녹혈마공의 단점을 알아요. 시독은 천하제일독이지만 한 번 방출하고 나면 일시간 공백 상태에 빠지죠. 범위는 삼 장. 삼 장 정도는 벗어날 수 있을 것 같고…… 해볼래요?”
시마가 입을 쩍 벌렸다.
“뭐, 뭐 이런 게…… 관두자, 관둬. 손녀뻘 되는 계집과 손 섞어서 뭐 하겠다고. 에잉! 빌어먹을 년 같으니라고.”
“호호호!”
일령은 그동안 당하기만 했던 것을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 곁을 졸졸 따라다니며 놀려댔다.
언장은마가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살 수 있었던 능력 중에 하나를 꼽으라고 하면 미세한 것도 놓치지 않고 잡아내는 주의력, 관찰력을 말할 수 있다.
무인을 평가할 때 거의 대부분이 무공만 논한다. 조금 덧붙인 것이 협사나 마인이냐는 구분이고, 더 깊이 들어가면 성격이 온후하냐, 급하냐는 정도다.
성격 속에 포함되어 있는 선천적인 능력은 간과하기 쉽다.
언장은마만 해도 뛰어난 은신술은 모두가 알아주지만, 신법을 펼치면서도 개미가 입에 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까지 파악하는 관찰력은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그런 그이기에 세월이 남긴 흔적과 인위적으로 만든 흔적 정도는 쉽게 구분한다.
‘사람이 다녔어!’
당연하다. 하오문주가 알려준 길은 하오문도만 사용하는 비밀 행로다.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길, 토박이라도 그런 길이 있었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만큼 은밀한 길이다.
언장은마가 놀란 것은 최근에 지나간 흔적을 찾았기 때문이다.
한두 명이 아니다. 수십 명이다.
‘이런 길은 대체로 한 명 내지는 두 명 정도밖에 다니지 않는데, 수십 명씩이나…….’
좋지 않다.
무엇인가 머릿속을 휘젓는 느낌이 든다면 십중팔구 사단이 난다.
언장은마는 숨은 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호흡도 감추고, 몸 냄새도 숨기고,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기도마저 감췄다. 두 귀는 활짝 열어놓았다. 두 눈도 사방을 훑었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다. 하나 느낌이 좋지 않다.
“그 늙은이 입이 쭉 찢어졌겠네. 십비지공을 얻었으니 얼마나 좋을까. 돼지 목에 진주지. 하오문 놈들이 무슨 십비지공이야.”
“저도 하오문도였어요. 지금도 사내들 땀 냄새를 맡고 있을 낙화향 창기들도 하오문도고요. 그래요. 하오문 같은 건 상관없어요. 하오문이든 상오문이든 뭐라고 부르던 상관없지만, 무시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네요.”
시마는 움찔해서 절혼마녀를 쳐다봤다.
힘이 없으면 무시당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힘이 있을 때는 결단코 무시를 간과하지 않는다. 다칠 것 같으면 엎드리지만, 누를 수 있을 때는 무시당하지 않으려는 속성이 몸에 배어 있다. 그런 사람들이 하오문도다.
하기는 어떤 사람인들 무시당하길 좋아하랴.
“자네보고 한 말 아닌 걸 알면서 딴죽은……. 그런 식으로 따지면 다담도 싸잡아서 욕한 거네?”
“…….”
“내 말인즉…….”
“그만!”
소립파가 우뚝 멈춰 섰다.
“마도, 수검, 앞으로.”
마도와 수검은 천천히 걸어나와 전면에 섰다.
“다담, 삼첨(三尖).”
다담선자가 마도와 수검의 등 뒤에 섰다.
“절혼, 혈유, 내 옆으로 와.”
한 사람은 빠름에서 제일, 한 여인은 은밀함에서 제일을 자부한다. 은밀함으로 따지자면 일령이 절혼마녀보다 한 수 위였지만, 몇 달간의 고련이 두 여인의 위치를 바꿔놓았다.
절혼마녀는 무엇을 하려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소립파 옆에 섰다. 혈유가 삼 척 정도 거리를 벌리고 섰기 때문에 그녀도 따라서 했다.
“쌍마, 뒤를 받쳐.”
고루음마가 혈유의 뒤에, 고루양마가 절혼마녀의 뒤에 섰다.
“일령, 일봉, 내 뒤로.”
“자하일봉이에요. 두 마디 더한다고 어디 덧나나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두 여인은 신속히 움직여 소립파의 뒤에 섰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고루쌍마의 뒤에 섰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단지 하나, 언장은마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 소립파의 이런 조처는 언장은마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쯧! 언제 손발을 맞춰봤어야지. 거기가 아니고…….”
시마는 일령과 금연화의 팔을 잡아끌어 소립파의 등 뒤에 세웠다.
“그렇지. 여기야. 아니, 어깨를 바짝 붙여. 그래, 이 자리의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해. 첫 번째, 마야의 등을 보호한다. 화살이 날아오면 꿰뚫리는 한이 있어도 자리를 비켜서면 안 된다는 거지. 두 번째, 쌍마의 등을 보호한다. 우선순위를 분명히 알아둬. 첫째가 마야고 둘째가 쌍마야.”
“이런 것…… 본 적 있어.”
금연화가 부르르 떨었다.
“크크! 본 적 있을 테지. 혈귀대주, 그놈이 요걸 약간 변형시켜서는 삼첨양익진인가 뭔가 하는 것을 만들었으니까. 이게 원형이야. 영광인 줄 알아.”
“시마.”
“알았어, 알았다고. 자리 지키면 될 것 아냐.”
철탑거추와 시마는 맨 뒤로 물러났다.
‘이걸 변형시켰다고? 그럼 상공이 마도인……? 아냐, 그럴 리 없어. 상공의 무공은 광명정대했어. 털끝만치도 사기나 마기가 엿보이지 않았어.’
금연화는 믿고 싶지 않았다.
“이제부터 평보(平步)다. 탈출을 시도할 때의 속도는 마도와 수검에게 일임하되, 가급적 급속(急速)하도록.”
“혈유, 따라올 수 있겠어?”
마도가 혈유를 돌아봤다.
“마야 정도 업는다고 못 따라갈까 봐? 걱정 마. 내 발이 중원제일이야.”
“그러길 바란다.”
마도와 수검은 동시에 걸음을 떼어놓았다.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어 들이닥쳤다.
쒜에엑!
소리는 들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암기! 순간 다담선자가 퍼뜩 팔을 들어올렸고, 번쩍! 하는 섬광이 파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창공으로 뻗어나갔다.
따앙!
추명반은 날아오는 암기를 허공에서 떨궈냈다. 그리고 어느 틈엔가 되돌아와 다담선자의 팔 속으로 스며들었다.
쇠와 쇠의 부딪침을 이끌어낸 암기는 뜻밖에도 화살이다.
반짝반짝 윤기가 흐르는 검은색 철전(鐵箭).
“철궁대…….”
마도가 가는 신음을 토해냈다.
궁왕 강창도에게 직접 사사받아 하나같이 명궁 반열에 올랐다는 궁수들이다. 길보다는 흉이 많다. 죽이고자 했으면 화살을 무더기로 쏘아댔을 텐데, 한 대만 날린 것은 멈추라는 이야기. 사로잡고자 함인가.
“내,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 썩을 놈의 늙은이가 우릴 팔아먹을 줄 알았어. 어쩐지 간신새끼마냥 눈깔을 디룩디룩 굴려대더라니. 그 새끼 지금쯤 배 두들기고 있겠네. 십비지공에다가 저놈들한테도 무언가 얻어먹었을 테니 배가 터질 거야.”
“시마, 뒤쪽에 스물이다.”
“싸가지없는 새끼들. 걱정 붙들어 매둬.”
“어떻게 자신있다는 거예요?”
일령이 뒤돌아보면서 물었다.
“계집아, 어딜 한눈파는 거야! 네년은 마야 뒤꼭지에서 눈 떼지 말라고 했잖아!”
일령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시마의 음성이 예전 같지 않다. 거친 말투는 여전하지만 전신은 긴장으로 팽팽하게 곤두서 있다.
일령이 고개를 돌리자 시마는 능글맞게 웃었다.
“흐흐흐! 계집아, 아까 뭐라고? 삼 장쯤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고? 저 싸가지없는 자식들, 분명히 오십 장 밖에서 철궁을 쏴댈 거야. 똑똑히 봐둬, 이년아. 이 어르신이 저놈들을 어떻게 요리하는지.”
일령은 대꾸하지 못했다.
오십 장 밖에서 쏘아대는 철전이라면 막기에도 급급하다. 하물며 처리까지 하겠다니. 시마에게 다른 무공이라도 있는 것인가.
“좌우로 이십 명씩. 쌍마.”
“자신없는데. 왼쪽은 숲이야. 놈들은 나무 위에 있고. 거리가 너무 멀어.”
“오른쪽도 마찬가지네. 파고들기 전에 고슴도치 되겠어.”
“걱정되나?”
“뭐? 이런…… 썅! 너 또 뒈진 놈은 아무 근심걱정 없다고 하려고 그러지? 알았다! 알았어! 뒈져 주면 되잖아!”
“전방은 마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