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46
46
소립파는 근심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마치 예상했던 일을 만난 것처럼 태연했다.
“뒤에 스물, 좌우에 마흔, 앞에 마흔. 철궁대가 원래 백 명인가?”
“삼백이라고 들었는데.”
“다행이군. 전부 다 왔으면 꼼짝없이 죽을 뻔했어.”
“수검, 앞을 봐라. 너와 내 승부. 여기서 갈라보면 되겠네. 똑같은 조건이니까 누가 많이 죽이나 해보자고.”
마도와 수검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
소립파는 마도와 수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절혼마녀에게 찰싹 붙어서 귓속말로 무엇인가 소곤거렸다.
절혼마녀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스슷……!
절혼마녀의 신형이 흐릿해진다 싶더니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저벅! 저벅! 저벅……!
길 저쪽에서 발 맞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로 보면 수십 명은 되는 것 같다.
철궁대…….
장군들처럼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었다.
철사문도가 뚫리지 않는 현음철갑으로 무장한 것은 알고 있지만 철궁대까지 갑옷을 입고 있는 줄은 몰랐다.
북무림에서만 오갔던 탓인가? 남무림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 자신들은 그렇다 치고 마야와 혈유조차도 철궁대가 이런 모습인 걸 몰랐단 말인가!
갑옷을 입은 것과 무복을 입은 것은 큰 차이가 난다.
평범한 갑옷 같았으면 입지도 않았을 게다. 현음철갑처럼 진기가 실린 병기에도 뚫리거나 베어지지 않는 갑옷이리라.
“죽겠군.”
“걱정 마, 수검. 네 몫까지 베어줄 테니까.”
“마도, 너 이 자식, 끝나고 보자고.”
저벅! 저벅! 저벅……!
철궁대 사십 명은 거침없이 걸어왔다.
강궁에 철전을 재워 밑으로 늘어뜨린 채 열과 줄을 맞춰 걸어왔다.
삼 열 종대.
이윽고 서로 간의 거리가 십여 장으로 좁혀지자 철궁대가 일제히 강궁을 들어 소립파 일행을 겨눴다.
“병기를 버리고 포박을 받아라! 목숨은 해치지 않을 터!”
대주인 듯한 자가 두 걸음 앞으로 나서며 산천초목이 쩌렁 울리도록 고함을 내질렀다.
“귓청 떨어지겠군. 나도 저렇게 소리 질러봐?”
“넌 검무나 춰.”
마도와 수검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진기를 끌어올렸다.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무릎을 꿇어라!”
“자슥들, 되게 꿱꿱되네.”
철탑거추가 망치를 뽑아 들며 씨익 웃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한다! 두 손을 머리 위로…….”
그가 말을 뚝 그쳤다.
미간에서 빨간 물방울이 송송 솟더니 물줄기가 되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건 뭐, 뭐야……?”
그는 손을 들어 물줄기를 훔쳤다.
그렇다고 멈춰질 것도 아니거늘. 미간에서 솟구치기 시작한 물줄기는 점점 굵기를 더해가더니 금방 그의 갑옷을 빨갛게 물들였다.
절혼마녀의 귀적무와 육경검법이 극성으로 펼쳐진 결과이니 남은 것은 죽음뿐.
쒜엑! 쒜에에엑……!
네 사람이 동시에 신형을 솟구쳐 짓쳐 나간 것도 그때다.
마도와 수검은 단숨에 십여 장을 달려나갔다. 고루쌍마는 좌우측으로 갈라져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시마, 그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싸울 준비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의 싸움은 까마득히 잊은 양 앞서 달려나간 네 사람의 움직임만 지켜보았다.
쒜에엑! 쒜에에엑! 타타타타탁……!
철궁이 벌 떼처럼 달려들었다. 아니다. 벌 떼라면 날아오는 모습이나 구경하지, 이건 숫제 벼락만이 존재하는 벼락의 대지 한가운데 서 있는 꼴이었다.
철전의 위력은 대단했다. 굵은 나무 몇 그루만 철전을 막아냈을 뿐, 웬만한 나무들은 종잇장 찢어내듯 발기발기 뜯어내며 날아왔다.
마도와 수검, 고루쌍마는 더 이상 접근하지 못했다. 다급히 몸을 숨기거나 신법을 펼쳐 내기에 급급했다.
철궁대는 삼조가 시간 차를 두고 철전을 쏘았다.
제일 먼저 쏘아진 철전이 바닥에 박힐 무렵이면 두 번째 철전들이 허공에서 맹렬한 기세로 다가왔고, 세 번째 철전은 시위를 떠나고 있었다.
숨 돌릴 틈도 없는 맹공이다.
소립파는 철전을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눈도 깜짝이지 않고 철전을 쳐다보고 있으니 대범한 건가, 멍청한 건가.
요행인지 아니면 그만은 제외시킨 것인지, 철전은 그를 침범치 않았다. 그를 중심으로 방원 일 장 안에는 단 한 대의 철전도 떨어지지 않았다.
“여하호천(如何昊天: 어찌하오리까 하늘이여) 벽언불신(僻言不信: 옳은 말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구나) 여피행매(如彼行邁: 마치 막다른 길을 치닫듯)…….”
소립파가 나직이 시조를 읊조렸다.
순간 맹위를 떨치던 철전들이 뚝 멈췄다.
아! 철궁대가 시위를 당기지 못한다. 그들 자신들도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 틈은 마도와 수검, 고루쌍마가 남은 거리를 좁히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파앗! 철컥! 쑤우욱! 철컥……!
활을 당기지 못하는 철궁대는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그들은 활만 쏘는 것이 아니라 철전을 수창(手槍)처럼 사용할 줄 알기에 근접전도 강했다. 하지만 그들이 싸워야 하는 사람들은 중원천하에서 초강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이니.
싸움이 아니라 도살이다. 일말의 인정도 가미되지 않는 살초에 애꿎은 목숨을 떨어뜨릴 뿐이다.
“아악!”
“아아악……!”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한적한 산길에 비명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뒤, 뒤에서는 왜……?”
일령은 말을 하면서 소립파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염병! 뒈진 놈들을 뭘 걱정해. 네년도 잘 봐둬. 뭐? 삼 장만 벗어나면 돼?”
금연화가 일령의 손을 살짝 잡으며 속삭였다.
“오면서 녹혈마공을 펼쳤는데 몰랐구나. 시독을 뿌려놨으니 저긴 당분간 금지(禁地)야. 누구든 발을 들여놓으면 죽어.”
“피이! 별것도 아니었잖아.”
일령이 입을 삐죽거렸다.
제9장 사로생(死路生) ― 죽음 속의 삶
1
하오문주가 알려준 행로는 죽음의 길로 변했다.
“마인도 마인을 안 믿어. 왜냐? 목적을 달성하면 뒷골을 까거든. 하물며 쓰레기를 믿었으니. 염병할! 마야, 그 십비지공인가 뭔가 하는 것, 정말 뛰어난 거야? 딱 고놈들만 제압할 수 있는 무공 같은 건 없어? 아예 강호에 쫙 뿌려 버리게.”
시마는 분이 삭지 않는지 연신 씨근덕거렸다.
마도는 신중했다.
“이제 우린 꼼짝없이 공적이 됐어. 장강을 넘으면서 죽인 사람도 만만치 않은데 철궁대까지 이 모양으로 만들었으니, 이제 남무림이 본격적으로 나설 거야. 북무림하고 우리하고 동시에 나타났다면 우리에게 먼저 달려들걸?”
“은마, 길을 열어.”
소립파는 코에 물든 피 냄새를 지워 버리려는 듯 쌀쌀한 바람을 흠씬 들이켰다.
“계속 석문으로 가자는 거야? 이 길로?”
언장은마도 움직이지 않았다. 숨어 있어서 보이지는 않지만 움직임이 읽히지 않는다.
“은마, 가자니까.”
“마야, 우리에게 지도가 있으니 아무래도 다른 길로…….”
사람은 보이지 않고 음성만 들려왔다.
“장강을 넘을 때 목숨을 내게 맡긴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나 보군.”
“마야, 그런 게 아니라…….”
“북무림에 적선서가 있다면, 남무림에는 혈취향(血醉香)이 있어. 아주 냄새가 상쾌한 향이야. 향을 피워놓고 운공하면 사마(邪魔)가 침범치 못해 주화입마를 막아준다고 하지.”
“…….”
숨소리 한 올 들리지 않았다. 모두 귀를 열어 소립파의 말을 들었다. 적선서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혈취향에 대한 호기심을 숨길 수 없었다.
“혈취향은 단순히 마음만 상쾌하게 해주는 향이 아니야. 향내가 몸에 배서 사향 냄새처럼 향을 뿌리게 돼. 추한 사람도 귀공자로 만들어주는 맑은 향이야.”
“한 번 맡아보고 싶네.”
일령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남도문은 이걸 묘한 데 이용하지. 반각 정도 향을 맡으면 백 일간 지속된다는 점을 이용한 거야. 즉, 혈취향을 풍기는 사람은 남도문 무인들밖에 없어. 남도문 무인들을 죽이거나 만지면 살인자의 몸에도 향이 배이는 거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혈취향에 예민한 남도문 무인들의 후각을 속일 수는 없어.”
“제길! 딱 걸린 건가.”
수검은 옷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래 봤자 필요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께름칙해 털 수밖에 없었다.
“우린 만지지도 싸우지도 않았는데, 괜찮겠지?”
시마가 슬쩍 마도 곁에서 비켜섰다.
“상쾌한 냄새를 풍기는 향인데 혈취향이란 이름이 붙은 게 이상하지 않아?”
“난 안 이상해. 안 이상하니까 나와 엮지만 마.”
“살에 배인 향이 피와 섞이면 본래의 혈취향과는 약간 다른 향내가 나. 연기처럼 피어난 향내는 주위 십 장을 물들이고. 수목, 동물, 인간…… 모두 냄새를 피할 수 없어.”
“남도문의 추적술은 어느 정도지?”
수검은 잔뜩 찌푸려진 인상을 풀지 못했다.
마야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실이겠지만, 지금부터는 남무림 전체를 상대로 싸워야 한다. 밥 먹을 시간도, 쉴 틈도 없으리라. 잠을 잘 때도 신경의 반쯤은 세상을 향해 열어놓고 자야 되리라.
같이 뭉쳐 있어도 살기 힘들다. 떨어지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죽는다.
철궁대…… 마야가 없었다면 참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일행 중 한 사람이 그들과 만났다면 백이면 백 죽었으리라. 이런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테고.
북검문에는 무신이라 일컬어지는 사람이 네 명이나 있다. 절대무인이 남무림을 파죽지세로 휘저을 수 있다면 그들 중 한 명이 벌써 움직였으리라.
남무림이나 북무림이나 생각한 것만큼 만만하지 않다.
“추혼단이라고 있어. 혼까지 뒤쫓아 지옥도 뛰어든다는. 북검문의 천비대는 추혼단을 본떠서 만든 거야.”
“뭐, 뭐라고!”
“처, 천비대가 추혼단을 본떠?”
“빌어먹을! 이제 꼼짝없이 뒈졌네.”
모두 한마디씩 중얼거렸다.
세 여인도 놀라기는 마찬가지다. 죽었다는 느낌이 든 것도, 앞으로는 정말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도 마인들과 같다. 그러나 그녀들은 놀란 심정을 토해내기 전에 다담선자부터 봤다.
다담선자는 어떤 말이 오가든 담담하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마야 곁에 서 있다. 숨 막히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옅은 미소까지 배어 문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게 이런 것인가.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신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마야는 무뚝뚝한 편이다. 달콤한 밀어를 속삭여 줄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다른 마인들을 대하듯 담담하게 대한다.
다담선자의 일방적인 헌신인가?
다담선자는 마야 역시 자신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지만, 보기에는 전혀 아닌 것 같은데.
다담선자에게는 마야와 함께라면 지글지글 타오르는 용암 속도 천국이리라.
‘마야를 믿어야 돼. 마야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 돼.’
이상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진다. 혈취향인가 뭔가가 몸에 잔뜩 묻어 있다고 해도 전혀 불안하지 않다. 다담선자는 항상 이런 마음인가?
“이 길로 가나 저 길로 가나 매한가지라는 이야기야. 그럴 바에는 아는 길로 가는 게 낫겠지. 지도가 있으니 매복할 만한 위치도 짐작할 수 있고.”
“엠병할……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네.”
“은마, 길을 열어.”
움직임이 일었다. 언장은마도 더 이상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파쇄진(破碎陣)을 유지해. 조금이라도 생명을 연장하는 길이니까.”
‘삼첨양익진이 아니라 파쇄진…… 언젠가 물어봐야겠어. 도대체 사문이 어딘지.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자신만큼이나 잘 안다고 생각했던 혈귀대주,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은 겉모습뿐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다 가도록 예상했던 공격은 없었다.
모두들 파김치가 되어 힘을 잃었다.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채 알지도 못하는 곳을 걷는다는 것은 상당한 심력 소모를 가져왔다.
“파쇄진은 풀어도 되지 않을까요?”
소립파 옆에 바짝 붙어 걷던 절혼마녀는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푸는 순간 죽어.”
“예?”
잠시 느슨해졌던 긴장이 팽팽하게 돌아온다.
“빌어먹을 자슥들! 나타날 거면 빨리 나타나지.”
철탑거추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보이는 사람은 없다. 중원무림 초강자로 분류되는 마인들의 이목에도 잡히지 않는다.
마도도 잠시 눈을 감고 주위에서 일어나는 소리와 기를 감지했다. 하나 아무 이상 없다.
“잠시 쉬어도 될 것 같은데?”
“마도, 안 믿는군. 우리 몸에 칼이 드리워져 있는데 못 느끼고 있어. 후후후! 이 칼날들…… 오래전부터 몸을 노리고 있었다면 믿을까?”
“추적대가? 믿지, 네가 한 말이니 믿을 수밖에. 한데 내 이목에는 잡히는 것이 전혀 없으니…… 이놈들, 뭐 하는 놈들인지 짐작 가나? 추혼단인가 하는 놈들인가?”
“아니, 추혼단은 상대도 안 되지.”
“그…… 정도인가?”
“전문 살수들이니까.”
“설마……?”
“맞아.”
“으음……!”
“정말 그들이에요?”
다담선자도 놀란 표정이었다.
소립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답답해서 미치겄네. 대체 어떤 놈들이란 거야? 알고들 있으면서 왜 말은 안 해!”
다담선자가 피식 웃었다.
“시마께서도 아는 사람들이에요.”
“나도? 내가? 에잉…… 내가 아는 놈들 중에는…… 서, 설마!”
순식간에 시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시마가 놀랄 만한 사람들이라니. 이번에는 세 여인도 궁금해졌다.
절혼마녀는 급히 다담선자의 옷소매를 잡았다.
“동생, 도대체 누구란 거야?”
“언니는 모를 거예요. 세상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천멸도(天滅島)라고 들어보셨어요?”
“아니, 처음 들어봐.”
“이 세상의 끝자락. 남해 외딴 고도에 천멸도가 존재해요. 천형의 땅. 나환자들만 모여 사는 곳이죠.”
“나환자?”
“언젠가 나환자 몇 명이 마야를 찾아왔어요. 그들이 요구한 건 병을 고쳐 달라는 게 아니라 무공을 손봐달라는 것이었죠. 그 무공들…… 손대기 전에도 세상에 못 죽일 사람이 없는 절공이었어요.”
‘사실이야.’
절혼마녀는 다담선자의 말을 믿었다.
그녀는 거짓말도 못할 뿐만 아니라 과장이라는 것도 모른다. 있는 사실 그대로만 열거한다.
다담선자는 천멸도가 무섭다는 말 이외에도 무언중에 두 가지 말을 했다. 하나는 마야가 그들의 무공을 손봐줬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손보기 전에 천멸도의 무공을 견식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