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49
49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언니, 아무 말도…… 보는 눈이 많아요. 조용히.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혈유도 눈치가 빨랐다.
그는 재빨리 등을 돌리며 주저앉았다.
“마야, 좀 빨리 가야 될 것 같으니까 업히도록 해.”
소립파는 팔을 들어 팔짱 낀 다음 양 팔꿈치를 찍듯이 혈유의 등에 붙였다. 그 상태 그대로, 허리를 꼿꼿이 펴고 머리를 바짝 든 상태로 소립파의 의식은 점점 멀어져 갔다.
“모두 조용히, 침착하게, 지금까지처럼…… 마야에게 이상이 생긴 걸 알면 우린 살아남지 못해요.”
천하무적일 것 같던 파쇄진이 너무 나약해 보인다. 천멸도가 아니라 철궁대만 나서도 무너질 것 같다.
거침없이 뚫고 나갈 수 있는 곳이 모두 사지가 되었다.
“은마, 길을 뚫어줘요.”
소립파가 이런 말을 했다면 은마는 두말 않고 움직였다. 하나 지금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어디로…….”
“지도 있죠?”
“말만 해.”
“가장 안전한 곳이요.”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어양하(漁洋河)가 나와. 수로가 복잡하니까 숨을 곳이 있을 거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소립파는 정신을 잃었다. 과도한 뇌력 사용은 탈진을 불러왔고, 그의 몸과 마음은 일시간 공백 상태가 되어버렸다.
반각 있다가 깨어날지, 한 시진 정도가 소용될지, 아니면 깨어나는 데 몇 날 며칠이 걸리게 될지, 소립파의 상태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다못해 소립파가 뇌력을 과도하게 사용할 경우, 이런 증상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조차 없었다. 소립파의 분신인 다담선자조차도 처음 겪는 당혹스런 일이었다.
지금까지 소립파는 한두 번만 뇌력을 사용하면 되었다. 마령음을 사용하는 데 뇌력이 쓰인다고 가정해도 마찬가지다. 짧은 시조 한두 편 정도면 힘든 상황이 해소되었다.
영파와 만공심안을 동시에 사용한 경우는 없었을 게다. 더욱이 반 시진 동안이나 끊임없이 영파를 쓴 적도 없다.
어쩌면 소립파조차도 처음 겪는 혼절일지 모른다.
“파쇄진을 유지하세요. 가로막는 자가 나타나면 가차없이 베어버리세요. 조금이라도 손속에 인정을 담으면 마야 신상에 탈이 생긴 걸 눈치챌 거예요. 날이 밝기 전까지 최대한 빠져나가고…… 마지막 상황이 닥치면…… 혈유, 마야를 부탁해요. 마야를 데리고 최대한 멀리 가주세요.”
“재수없는 소린 하는 게 아냐.”
혈유는 다담선자의 말을 일축했다.
마도와 수검은 지금까지처럼 거침없이 걷기 시작했다.
‘맙소사! 이건…….’
날이 밝자 가슴을 묵직하게 짓누르던 답답함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수백…… 아무리 못 잡아도 족히 천 명은 넘을 것 같은 무인들이 주위를 에워쌌다.
“공격해 올 의사는 없어요.”
금연화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복장들이 제각각이다. 그들 대부분은 남도문의 무복을 입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남무림 무인이기는 해도 남도문과는 상관없는 자들이다.
군웅은 멀찍이서 포위망만 형성한 채 지켜보기만 했다.
몇몇 무리는 시종일관 비슷한 거리를 유지하며 쫓아왔다.
철궁대가 그들 중 하나이며, 보이지 않는 찝찝한 기운은 천멸도나 사방천마들일 것이다.
“이 작자들은 뭐지?”
“마령음이 소문난 거예요.”
금연화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려 천여 명에게 포위당한 이상 남몰래 빠져나간다는 건 어림없다.
“모두들 마령음을 노리고 온 놈들이란 말이지.”
수검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모두 같은 마음이다. 이 시점에서 탈출이란 꿈도 꾸지 못하고, 마령음이나 만공심안의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해도 투항은 없다. 죽는 순간까지 싸우다 죽는다. 오히려 마음껏 무공을 펼칠 기회가 도래했으니 반갑다.
마도는 수검보다는 냉정했다.
“모두 마령음을 노리고 왔지만 알력이 있어.”
“알력이라니?”
“마령음을 차지할 우선권이 남도문에 있다는 거지. 그걸 알면서도 저렇게들 모여든 거야. 마령음은 목숨이 아깝기는 해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유혹덩이지. 우리도 봤잖아. 사방천마가 손도 써보지 못하고 물러나는 것. 후후후! 모두 같은 생각을 할 거야. 마령음만 얻으면 당장 천하제일 문파를 만들 수 있다 하고 말이야.”
“오긴 왔는데 지켜만 보려니 답답하겠군.”
“그 틈을 노리면 살길이 있겠어. 다담, 마야 대신 네가 우릴 이끌어줘야겠다. 여기 칼질 잘하는 인간들은 있어도 머리 잘 쓰는 인간은 없거든.”
“아녜요. 저도 그렇게 머리 좋은 편은 못 돼요.”
다담선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우리 중 머리가 제일 좋은 사람이 누군지는 알아요.”
“빨리 하자. 자칫 저놈들이 눈치라도 채는 날에는…….”
“셋째! 네가 마야 대신 지휘를 맡아줘. 마야가 깨어날 때까지만 어떻게 해봐.”
다담선자는 금연화를 지목했다.
금연화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묵묵히, 말없이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혈귀대주의 복수를 하겠지 싶었다. 무공도 뛰어난 사람들이고, 특히 마야의 경우는 인간 같지 않은 괴물이고. 정말 자신이 할 일은 없었다. 자하쌍구검의 놀라운 위용으로도 간신히 한쪽 팔을 거드는 데 불과했다.
이들에게 자신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 어쩌면 귀찮기까지 한 존재.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지휘를 맡겨오니 당황하지 않을 수 있나.
“어, 언니, 저는…….”
“좋아, 다담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어디 그럼 자하일봉의 머리 좀 빌려볼까.”
마도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금연화의 명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승낙하고 말고도 없다. 권한이 넘어왔으니 명만 내리면 된다.
절혼마녀가 마음껏 해보라는 뜻으로 눈을 찡긋거렸다.
자하일봉으로 불릴 만큼 재지가 뛰어났던 그녀다. 무공 성취도 높았으며, 학문도 상당한 깊이까지 파고들어 지론(持論)을 정립하는 단계까지 왔다.
혈귀대주가 죽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아름다운 날개를 활짝 펴고 창공을 나는 봉황이었다.
금연화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은마, 근처에 쉴 만한 곳이 있나요?”
“조금만 더 가면 개울이 있는데, 큰 바위들이 많아서 바람을 막을 수는 있다.”
“좋아요. 거기로 안내해 줘요.”
금연화는 다담선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어떻게든 안전한 곳으로 가고 싶을 텐데 자신은 오히려 정반대의 명을 내렸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쉬어 간다고. 다담선자는 서운해할까? 아니면 믿고 따라주는 것인지.
다담선자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삼엄한 눈빛으로 사방을 쏘아보며 금방이라도 추명반을 발출할 수 있는 태세를 유지했다.
파쇄진은 유지되었다.
달라진 점은 마야의 등을 지켜야 할 일령과 금연화가 바위 위에 앉아 있다는 점이다.
그것 역시 위치로 따지면 마야를 지키는 것이 맞다.
마야는 바위 밑, 바람이 들지 않는 곳에 몸을 뉜 채 깊은 잠에 빠졌다. 그곳에는 마야 외에도 절반에 가까운 마인들이 잠을 청했다. 밤새도록 싸우고, 긴장한 채 걸어왔기 때문에 누구 한 사람 빼놓을 것 없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무공을 모르는 마야는 특히 피곤해야 한다.
그가 잠자는 것을 의심할 사람은 없다. 오히려 피곤함을 무릅쓰고 억지로 움직일 때 더 많은 의심을 낳는다.
정오가 될 무렵, 잠을 청한 사람과 청하지 않은 사람들이 위치를 맞교대했다.
체력을 충분히 비축해 놔야 한다.
장강을 건널 때부터 지금까지 오백여 명이라는 남무림 무인이 목숨을 잃었다.
남무림 무인들에게 있어서 이 자리에 있는 무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살려 보낼 수 없는 철천지원수다.
금연화는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다.
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 난다고 했는데, 자신의 생각이 악수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오직 그 한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도 최대한 쉬어야 해.’
금연화는 바위에 등을 기대고 깊이 잠들었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서서히 어두워지는 중이었다.
마야도 일어나야 한다. 그들을 둘러싼 무인들은 더 이상 기다려 주지 않는다.
한 가지 생각은 옳았다.
답평이라고 자신을 밝힌 남무림 야광 총사는 선택을 해야 한다. 버릴 것인가, 가질 것인가.
마야는 마령음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천멸도, 철궁대, 사방천마를 상대로 어떤 위력이 있는지, 불가능이 어떻게 해서 가능하게 변하는지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야광 총사는 ‘가진다’는 쪽에 비중을 둘 수밖에 없으리라.
삼십여 년이나 이어진 남북 전쟁 때문에 이쪽이고 저쪽이고 피폐함이 극에 달했다. 언제까지 지속될지 기약도 없다. 마령음은 혼돈을 단번에 깨뜨릴 천병(天兵), 천무(天武)다.
이런 걸 어떻게 버릴까.
가진다는 것이 확실해지면 다음은 방법상의 문제가 된다. 어떤 식으로 가질 것인가.
마야가 마령음을 써대고 있으니 쉽게 공격할 수 없다. 가지자니 어렵고 버리자니 너무 아까운, 말 그대로 계륵(鷄肋)이지 않나.
피해가 없이 가지자면?
방법은 있다. 진(陣)이나 독(毒)을 쓰면 된다.
하루 동안의 여유는 금연화에게도 필요했지만 야광 총사에게도 필요했다.
‘답평이라는 사람도 준비는 끝냈을 거야. 모질고 빈틈없는 사람 같았으니까 확실하게 목줄을 움켜잡을 수 있는 방법을 준비했겠지.’
금연화는 혼잣말처럼 조용히 말했다.
“하늘의 별을 따올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살 거예요.”
“아이야, 걱정 마라. 이미 각오하고 있으니까.”
시마가 그를 만났던 이래, 최고로 자상한 말투를 사용했다.
“모두들 마야를 얼마나 믿죠?”
“…….”
“마야가 못 깨어나면 우리 모두 죽을 거예요. 그것도 앞으로 반각 안에 깨어나야 되는데, 가능할까요? 단지 뇌력을 심하게 쓴 것뿐인데 하루 넘게 혼절 상태라는 게 이해되지 않네요.”
“마야는 반드시 깨어날 거야.”
다담선자가 확신했다.
“잠들기 전에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우리 모두 마야에게 목숨을 걸고 있다면 마야만이라도 살리자고. 우리가 살아나서 복수를 한다는 보장이 없지만 마야는 복수를 할 것 같으니까.”
“이런저런 말 필요없네. 확신이 서면 명령을 내려. 그게 우리를 이끄는 방법이야.”
“명령만 내리면 된다는 건가요?”
“그래, 이유를 설명할 필요 없어.”
“그래서 마야가 그렇게 무뚝뚝했군요.”
“그건 그놈 성격이고!”
금연화는 잠시 더 생각하다가 결단을 내렸다.
“마야를 땅에 묻어요.”
2
밤이 되면서 파쇄진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혈유의 등에 업힌 마야는 간간이 손을 들어 방향을 가리키곤 했다.
열두 명, 팔남사녀.
철궁대 하나만 움직여도 단숨에 핏물로 녹여 버릴 것 같은 인간 몇 명이 애간장을 참 많이 녹인다.
답평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무척 맑고 시리다. 높은 하늘, 반짝이는 별들만큼이나 마음도 상쾌하다.
“천멸도주, 다시 한 번 움직여 주시오.”
“…….”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대답 소리는커녕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가급적이면 사상자 없이. 부탁드리겠소.”
휘이이잉……!
찬바람이 옷깃을 스치며 지나갔다.
마도와 수검은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쳐다봤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저려 울리는군.”
“빌어먹을! 당한 건가!”
“야광…… 천비대보다 한 수 위인 것 같지 않아? 대비를 하고 있었는데도 당하고 말았어.”
금연화는 야광의 공격 방법으로 독을 염려했다.
진(陣)은 노출을 지극히 꺼리는 특성이 있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걸려들어야 효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 수천 명의 무인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이 자리에서 사용한 진법은 두 번 다시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진을 창안하기가 쉬운 일인가? 그토록 오랜 고심 끝에 창안한 진을 이런 식으로 쓰고 버릴 리는 없다. 일단 진은 배제시켜도 좋다.
다음은 독이다.
독도 사용하기 곤란하다.
명문정파라는 사람들이 독을 사용하여 암습을 가한다면 세상을 대할 낯이 없어진다.
그래도 마령음을 무력화시키려면 독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중독 증상이 없는 독,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도 치명적인 독.
사실 치명적일 필요까지는 없다. 그들을 공격할 사람들은 세상에 한 번도 모습을 선보인 적이 없는 천멸도 살수들이니 마야만 중독시키면 된다. 마령음을 낼 수 없고, 만공심안으로 보지 못하는 한 승산은 천멸도에게 있다.
야광의 공격은 이런 수순으로 진행된다.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걸려들고 말았다. 두 다리가 자르르 저리면서 마비되는 것으로 보면 마비산 계통의 독 같다.
“음……! 나도 당한 것 같아.”
절혼마녀가 비틀거렸다.
“크크크! 이런 하찮은 독으로…… 땅이야. 주변이 온통 독 가루 천지야. 발을 옮길 때 돌부리나 나무뿌리 같은 것을 차지 말고 땅만 밟아.”
말이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독분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런 방법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때,
파앗! 파아앗……!
갑자기 앞서 걷던 마도의 몸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전신이 폭발하듯이 살갗이 쭉 갈라지며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허리, 등, 다리…… 몸을 베고 지나간 검흔만 다섯 가닥이다.
“다담, 날 보호해 줘야지?”
“미안해요. 독에 잠깐 신경이 팔려서.”
“이미 지난 상처는 어쩔 수 없고…… 다음이나 확실히 부탁해.”
마야가 없다.
온전한 파쇄진과 천멸도 살수들의 싸움이다.
파아앗! 츄우우웃……!
수검은 옆구리를 헤집어놓은 검기를 쫓아 검을 뻗어냈다. 하나 절정 쾌검인 수검의 검도 허공을 베는 데 그치고 말았다. 형체도 없고, 소리도 없고…….
그 순간, 다담선자의 팔목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팟! 촤아악!
확실히 추명반은 효험이 있다. 그토록 잡히지 않던 투명귀신들에게서 핏줄기를 뽑아내고야 말았다.
독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시마는 집중적인 공격을 당했다.
팟! 파앗! 팟……!
짧은 섬광이 그려질 때마다 시마의 몸은 붉은 피로 물들어갔다.
녹혈마공의 시독도 천멸도 살수들에게는 무용지물이다. 접근 자체를 못해야 하는데, 유유히 공격하고는 사라진다. 실은 공격하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번쩍! 하는 순간에 피가 튀는 것만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