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5
5
처음에는 분기가 치밀어 발길로 턱을 차버렸다. 두 번째는 뺨을 올려붙였다. 세 번째부터는 웃어주기만 했다.
오늘도 웃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낙화를 짓밟을 용기는 어디서 나온 거지?”
추레한 노인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치다가 꽁지가 빠지라고 도망쳤다.
낙화향에는 낙화가 있다.
낙화향 폐기들의 수호신.
낙화를 들먹인다는 것은 거절의 의미이며, 그런데도 수작을 계속 부리거나 힘으로 어찌해 보려고 한다면 낙화를 짓밟는 것으로 해석된다.
낙화를 짓밟은 결과는 참혹하다.
산목숨이 죽은 목숨보다 불행할까? 그럴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처참한 몰골로 변하는 순간,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닌 몰골이 되어 온갖 멸시와 학대를 받으며 여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소원을 빌게 된다.
절혼마녀라는 이름이 낙화향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무림은 모르고 있다. 하나 낙화향을 들락거리는 사내들은 낙화를 보호하는 여인이 절혼마녀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래서 온갖 행패를 부리다가도 낙화를 짓밟을 용기가 있냐는 말만 튀어나오면 부리나케 도주한다.
추측은 옳다. 절혼마녀는 낙화향에 있다. 지금도 그녀는 낙화향의 폐기들을 지켜보고 있으며, 누가 여인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지 예의 주시한다.
금연화는 낙화향 한복판에 위치한 동방(冬房)으로 들어섰다.
“어서 옵…… 엇! 누님!”
점소이가 반가운 얼굴로 쪼르르 달려왔다.
“방주님은?”
“안에 계시죠. 어서 들어가세요.”
점소이가 손을 들어 술 마시는 흉내를 내며 말했다.
숨이 막힐 만큼 요염한 여인이 가슴을 풀어헤쳐 놓고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은 무서운 욕정을 불러일으킨다.
타락한 여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나 ‘타락’이라는 글자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여인이 그녀이기에 당장 죽어도 좋으니 흠뻑 빠지고 싶다는 열망만 일으킨다.
마른 몸매, 가는 얼굴, 윤곽이 뚜렷한 이목구비에 큰 눈.
그녀는 우물(尤物)이다.
사내라면 그녀를 보자마자 우물이라는 말이 생각날 것이다. 그녀를 보는 순간 이곳이 폐기들만 모여 사는 낙화향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낙화향에서는 동방을 이끄는 방주요, 보이지 않는 낙화이며, 무림에서는 절혼마녀라고 불리는 여인이다.
“언니.”
“어서 와.”
그녀는 정인을 대하듯 사글사글 웃었다.
매번 올 때마다 이런 모습이다. 절혼마녀를 만난 지 다섯 해가 넘어가지만 이런 모습 외에 다른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말투도 늘 이렇다. 조용한 가운데 버들가지처럼 휘청휘청 휘어지는 음성은 뼈라도 녹일 듯하다.
금연화는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앉아.”
금연화가 앉기도 전에 절혼마녀는 그녀 자리에 술잔을 갖다 놓고 술을 따랐다.
“마셔. 참 팔자도 박복하네. 혼인도 하기 전에 서방 잡아먹었으니 겁(劫)이 씌어도 단단히 씌었네.”
“훗! 그러게요.”
금연화는 맞은편에 앉아 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뱃속에서 불이 붙는다. 명치 부근에서 치솟기 시작한 불길은 느낄 사이도 없이 목구멍까지 솟구친다.
“크으!”
괴성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오만 가지 인상이 단번에 그려졌다. 경기 들린 사람처럼 부르르 치도 떨었다.
“술도 마실 줄 모르면서 객기 부리긴…… 그래, 마셔. 여기서 안 마시면 어디서 마시겠어. 실컷 마시고 취해.”
절혼마녀가 다시 술병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금연화는 술을 받지 않았다. 술잔을 내려놓고 화사하게 펴진 얼굴로 방긋 웃었다.
“이제 그만 마실래요. 벌써 취기가 돌아요.”
절혼마녀가 눈웃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쳐다봤다. 한참 동안을. 그러다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잔을 채웠다.
“할 말이 있어서 왔구나. 해봐.”
금연화는 절혼마녀가 술을 들이켤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뗐다.
“혼인하려고요.”
“…….”
“혼인해서 그 사람 고향으로 갈 거예요. 잘은 모르겠는데, 단문협을 거쳐서 간다고 하네요.”
“그러는 거 아냐. 애꿎은 사람 죽이는 일이잖아.”
조금만 거센 바람이 불어도 툭 꺾여 버릴 듯한 모습. 이런 여인의 이면에 세상을 공포로 몰아넣는 무공과 독심이 숨겨져 있는 것을 짐작이나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날 보낼 수는 없어서…… 그 사람을 찾아갔죠. 거기서 만났어요. 공동묘지에서. 수묘인이에요.”
한 가지 잊고 있었던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수묘인의 배짱이 의외로 두둑하다는 점이다. 그는 혈귀대주의 묘비를 만들었다. 북검문의 명을 거역한다는 있을 수 없는 일을 행했다. 무공만 수련했다면 뛰어난 무인이 되었을 게다. 불행히도 조만간 죽을 운명이 되었지만.
“징그러. 시신을 만지는 사람이라니. 동생이 선택한 걸로 봐서 얼굴은 괜찮겠네? 아! 동생은 강한 사내를 좋아했지? 수묘인이지만 무인 냄새도 풍기겠어. 그 정도는 되어야 자하부 금지옥엽이 눈을 맞추지. 안 그래?”
“언니.”
“술이나 마셔.”
절혼마녀는 술병째 들이붓기 시작했다. 불을 붙이면 확 하고 타오를 독주를 냉수 마시듯이 들이켰다.
절혼마녀의 행동 중에 가장 기이한 부분이 술을 마시는 모습이다. 나긋나긋하고 조용하지만 술을 마실 때만은 두주불사(斗酒不辭)다. 그런 모습이 단아함을 깨서 그녀를 더욱 요염하게 만들지만.
‘어려운 이야기였나. 그렇겠지. 죽을 공산이 큰데.’
금지(禁地)로 선포된 단문협을 둘러보겠다는 발상은 목숨을 걸지 않는 한 행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도 북무림의 패주나 다름없는 북검문을 상대로.
“언니, 괜히 왔나 봐요. 부담만 되게.”
“부담은 무슨…… 내가 들은 말이라고는 혼인한다는 말과 남편 될 사람과 고향에 간다는 말밖에 없는데. 그런 일에 내가 부담을 느낄 이유가 어디 있어?”
쪼르르……!
절혼마녀는 금연화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마셔. 동생도 참 독하네. 어지간한 여자 같으면 울고불고 난리치기도 바쁠 텐데.”
“많이 울었죠.”
“말은 들었어. 매복에 걸려 죽었다고. 매복 따위에 죽을 사람이 아니니 누군가 함정을 판 거겠지. 복수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해. 마셔.”
금연화는 술잔을 집어 들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절혼마녀는 술병을 입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
“이 세상은 두 종류의 사람이 살아.”
“맨정신으로 살 수 있는 인간과 술에 취해야만 살 수 있는 인간요. 귀가 따갑게 들었어요.”
“축하해. 내 세계에 들어온걸.”
금연화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독주를 들어 마셨다.
온몸에 불이 붙은 듯 화끈거린다. 양 볼이 불기라도 쐰 듯 뜨겁게 달아오른다.
“호호호! 정말 복수심에 몸이 달았네? 좋아, 수렁에 빠져 보자. 날 죽여줄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기도 하고. 동생이 쩔쩔매는 모습을 어떻게 봐.”
“언니!”
“자하령에서 몇 명만 빼. 여기도 살펴야지. 불쌍한 여자들이야. 내가 없으면 사내들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두들겨 맞아. 그런 사내들은 내 방식대로 처리해야 돼. 마땅한 사람 있어?”
‘언니만큼 독해야 한다면…… 육령, 구령. 둘이면 되겠어.’
“있어요. 언니에게는 비교도 되지 않지만 ‘얼음’ 정도는 될 애들이 있어요.”
“호호! 얼굴 펴지는 것 봐. 동생은 아직 멀었어. 마음이 타서 재가 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 살아간다는 자체가 무의미해져. 죽이는 것도 대수롭지 않고, 누가 날 죽여줘도 괜찮고. 동생은 마음이 남았어.”
‘마음은 죽었어요. 복수만 남았을 뿐.’
자하부는 느닷없이 터져 나온 금연화의 혼인 소식에 발칵 뒤집혔다. 아니, 북무림을 뒤흔들기에 충분한 소식이었다.
“실성하셨나? 혈귀대주는 죽었는데 누구와 혼인한다는 거야?”
“다른 놈이래. 얼마나 기가 막힌지 듣고도 못 믿겠다니까. 혈귀대주가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아무리 아씨라도 그러는 게 아니지. 무덤에 흙도 마르지 않았는데.”
“난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온다. 혈귀대주와 죽네 사네 할 때가 엊그제인데 난데없이 다른 놈이라니. 그놈은 도대체 누구야?”
“몰라. 어떤 놈인지. 누가 되었든 혈귀대주만은 못할 거야. 그러니 혈귀대주에게 바싹 붙어 있었지. 대주가 죽으니까 꿩 대신 닭이라고 그놈한테 찰싹 붙어버린 것 아니겠어?”
“양다리 걸쳤던 거네? 양손에 떡을 들고 궁리하다가 혈귀대주가 죽자 마음을 정했다 이거지. 햐! 아씨는 다를 줄 알았는데…… 하여간 여자들이란 믿을 게 못 된다니까.”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또 그만큼 큰 배신감도 느꼈다. 이슬보다도 청초했던 금연화의 모든 행동이 가식처럼 여겨졌다.
감히 넘볼 수 없는 성녀(聖女)에서 ‘너도 여자’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소란스러운 바깥과는 다르게 내원(內院)은 조용했다.
“꼭 이렇게까지…….”
“아버지,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건 없다. 내가 미안할 뿐이지. 이해해라, 못난 아비를.”
자하부주는 뒷짐을 진 채 바깥 풍경을 쳐다보며 말했다.
금연화는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봤다.
항상 당당하시던 아버지의 어깨가 오늘따라 축 늘어져 보인다. 북검문의 회유와 협박 속에서도 당당하시던 분이셨는데, 조그만 일에 움직이지 못하는 자괴감이 십 년은 더 늙게 만들었다.
부모님까지 완벽하게 속이려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파렴치한 자식이 되어 쫓겨나려고 했다. 사내가 없으면 하루도 못 사는 화냥년이 되려고 했는데.
아버님은 그녀보다도 자신을 훨씬 더 많이 알고 계셨다.
이유도 묻지 않으셨다. 내막도 캐지 않으셨다. 오로지 자식의 무사함만 소원하셨다.
“한 가지만 부탁드릴게요. 무슨 일이 있어도 자하부가 움직여서는 안 돼요. 이 부탁만은 꼭 들어주세요.”
아무 응답이 없으시다. 차마 대답하실 수 없으신 게다.
객관적으로 보나, 유리한 것만 골라서 보나 자하부는 북검문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하부를 내버려 두는 것은 ‘심신 수양’만이 무인 본연의 자세라는 명분을 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하부가 무림사에 간여한다면 북검문의 살점이 되어 묻어 들어가든가 멸절당하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북무림이 하나로 뭉쳤고, 주축으로 우뚝 선 문파가 북검문이니 그 앞에서 자하부는 한없이 초라할 수밖에 없다.
“소녀, 인사드립니다.”
금연화는 아버지의 등 뒤에 대고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너도 하나만 명심해라. 네가 무사할 수 있다면 자하부 따위는 언제든지 던져 버릴 수 있다는 것. 조심, 조심…… 튼튼한 돌다리도 반드시 두들겨 보고 건너거라.”
자하부주는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2
‘이 사람이 수묘인?’
금연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깔끔해진 청년을 바라봤다.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온몸에서 썩는 냄새가 진동했는데, 새가 둥지를 틀 만큼 머리카락이 지저분했는데…… 아무리 목욕을 시키고 새 옷으로 갈아입혔다고 해도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는 것인가.
눈이 참 맑다. 깨끗한 시냇물처럼 투명해 보이기까지 한다. 피부가 검게 그을리고 거칠지만 알맞게 자리잡은 근육과 함께 아름다운 조화를 일궈낸다.
검을 허리에 차고 있는 모습도 잘 어울린다. 시중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삼 척 장검이지만 그를 영락없는 무인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행동거지도 단아하다. 사내에게 단아하다는 표현이 어울릴지는 몰라도 일거수일투족에 군더더기가 전혀 없다.
다른 느낌도 있다.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수묘인이라는 직업과 아주 어울린다. 수묘인을 오래 했다면 주검 또한 많이 다뤄봤을 테니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직업 냄새가 아닌가 싶기도 한데…… 어쨌든 죽음과 익숙해 보인다.
“꼭 이래야 한다기에 입긴 입었는데 남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것 같아서 영 찜찜하군. 보기 어때? 괜찮나?”
수묘인은 겁도 없이 하대로 말을 건네왔다.
‘다짜고짜 반말? 이런 건방진…….’
생각이 맞았다. 수묘인은 상대가 무인이라고 해서 겁부터 집어먹는 약골이 아니다. 아무래도 언젠가는 무인을 얕본 대가를 톡톡히 치를 게다.
이상한 점은 수묘인의 반말이 너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살아오면서 그녀에게 반말을 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던가. 하대보다는 올린 말이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았던가.
그런데 수묘인의 하대는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 같지 않은가. 같은 또래의 벗들이 주고받는 말처럼 친근함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리라.
금연화는 주의를 줄까 하다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기껏해야 보름 남짓 같이 여행하는 것뿐이고, 일이 잘못되면 목숨까지 내놔야 할 불쌍한 사내이니 이 정도의 무례는 눈감아줘도 되지 않겠나.
“아주 보기 좋아. 물건은 건네받았지?”
수묘인은 가슴을 툭툭 쳤다.
기루와 아흔아홉 칸 집의 양도 문서를 품 안에 찔러 넣고 다닌다?
일가붙이 하나 없는 천애고아라는 소리다. 기루며, 집이며 죽으면 휴지 조각이 되어버린다. 아무나 부자가 되고 싶으면 사내의 품속에서 문서만 훔쳐 가면 된다.
“이번 여행은 힘들어. 알고 있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들었는데…… 없는 금광을 찾아다니는 사람도 많은 판국인데 이 정도 대가면 죽은 사람도 일으켜 세울 수 있지. 적은 수고에 큰 대가가 주어진다면 위험도 그만큼 큰 것이고.”
수묘인은 다시 한 번 가슴을 토닥거렸다.
“그럼 됐어. 가는 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 내가 죽기 전까지는 보호해 줄 테니까.”
수묘인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자신만만하다. 믿는 구석이 단단히 있는 사람처럼 두려움이나 공포가 엿보이지 않는다.
금연화는 격기(擊氣)까지 해가며 전신을 훑어 내렸다.
무공을 수련한 흔적은 조금치도 찾을 수 없다. 반대로 기혈이 정순하지 못하고, 혈기가 뻗치고 있어서 한참 힘 자랑을 할 만한 나이의 청년임이 다시 한 번 확인된다.
수묘인이 불쑥 말을 건네왔다.
“이름이 뭐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