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52
52
금연화와 일령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녀들만 들은 게 아니다. 시마도 들었다. 마도와 수검도 들었다.
그는 잡히지 않았다. 남무림 무인들도 잡지 못했다고 보고하지 않았나. 두 귀로 똑똑히 들은 소리다.
다담선자는 행복을 느낀 여인처럼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부터인가…… 마야를 받아들이면서…… 뭐랄까? 육신이 하나로 연결된 듯한 느낌. 아니…… 혼이 이어져 있는 느낌. 그런 느낌이 들곤 했어.”
세 여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다담선자의 음성은 나직하고 평화롭다. 하나 말속에 스며 있는 분위기는 불길함으로 가득하다. 그녀의 말을 들으면 마야가 잡혔다는 말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될 것 같다.
귀를 막고 싶다, 다담선자의 입을 틀어막고 싶다.
“여기 들어오기 전에 그 사람의 느낌을 받았어. 여기 있는 거야. 믿어야 돼. 그 사람은 잡혔어.”
남무림 무인들이 잡지 못했다는 보고를 했고, 그의 영파까지 전해 들은 사람이 많은데 유독 다담선자만 잡혔다고 한다. 그것도 느낌이 그렇다면서.
가장 신빙성 없는 말이 느낌을 믿고 말하는 것이지 않나. 그런 말을 믿어야 하는 건가.
“말도 안 돼. 이건 아냐…… 이렇게 끝날 수는 없어.”
금연화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다담선자가 몇 마디 더 말하는 것 같았지만 귀머거리가 된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순간, 그녀에게는 세상이 정지했다.
‘그래!’
금연화는 누었던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다.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쳐 가는 생각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누워 있을 수 없었다.
다담선자의 말은 사실이다.
그는 언제 사로잡혔을까?
자신들이 싸워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손을 거뒀을 때…… 마야는 자하부의 지장술로 땅에 묻혀 있었다. 자신들은 마야를 땅에 묻고 돌아서자마자 사로잡혔다.
자신들이 백기를 들었을 때, 답평은 흘리듯 한마디 했다.
“자하부에 지장술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걸 쓴 건가?”
답평이란 자는 자하부의 지장술을 알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지장술’이라는 말이 흘러나왔을 때, 막연히 불안감을 느꼈는데…… 사실이 되어버렸다.
자신들은 마야를 적에게 내주고 난 다음에 싸움을 벌인 게다. 즉, 자하부의 지장술로 마야를 묻고 돌아선 직후 그는 곧바로 캐내졌다.
답평은 마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서슴없이 사방천마와 천멸도 살수들을 투입했다.
싸움이 쉽게 끝날 것을 알고 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싸움이 조금만 오래 지속된다고 해도 마인과 살수들을 남무림 무인들 앞에 내놓는 일은 벌이지 않았을 게다. 하나 순식간에 끝날 싸움이라면 누구를 내놓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남무림 무인들은 남도문의 숨겨진 힘이라고 생각할 터이니까.
사실 그대로 진행되었다.
당시 현장은 남무림 무인들이 에워싼 상태였지만 사방천마의 무공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싸움이 너무 빨리 끝났다. 마야만 빨리 잡히지 않았어도, 마인들 일행에 마야가 빠졌다는 사실을 답평이 몰랐어도…… 싸움은 그리 쉽게 끝나지 않았다. 사방천마와 천멸도 살수들이 가담할 수 없었을 테니까.
‘마야는 잡혔어. 우리도 잡혔고. 이건 불변이야.’
불변은 말 그대로 움직일 수 없다. 하면 움직일 수 있는 것을 찾아내야 한다.
답평은 마야를 놓친 척했다. 왜?
간단하다. 삼척동자도 그 정도의 수는 읽는다. 마령음을 독식하려는 수작이다.
‘우린 미끼조차 되지 못했단 말이군. 만약 살기 위해서 발버둥쳤다면 가차없이 죽였을 거야. 일벌백계의 표본이 되기에 아주 적당한…… 아냐, 이게 아냐. 답평은 우릴 사로잡으려고 했어. 그렇다면 우리의 용도가 남아 있다는 것인데…….’
금연화는 어느 정도 상황을 추리해 냈다.
마인들과 그녀들은 미끼다. 아직 미끼로서의 용도가 남아 있기에 사로잡은 거다. 마야를 잡기 위한 미끼가 아니라 마야로부터 마령음을 끄집어내기 위한 미끼다.
옷을 벗겨놓는다?
잡아서 가둬놨으면 됐지, 무엇 때문에 옷을 벗긴단 말인가?
이것 역시 미끼와 연관시켜서 생각하면 간단하게 풀린다.
마야의 유일한 약점은 정(情)이 깊다는 점이다.
그는 무정하게 보인다. 하나 그를 아는 사람은 절대 무정하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말을 무뚝뚝하게 할 뿐이지 내면에 심어놓은 정은 누구보다도 깊다.
답평이 그런 점을 파악했다면?
네 여인…… 아마도 평생 동안 잊지 못할 치욕을 당할지 모른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미야가 보는 앞에서.
‘각오를 단단히 해둬야겠어.’
2
아아악! 끄윽……! 으아악!
펄펄 끓는 기름 가마 속에 던져진 사람은 자신이 비명을 지르는 것조차 모른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죽고 싶다는 생각만 들뿐, 비명 따위는 지르고 싶지도 않다.
지저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가 그랬다. 비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고통의 실체가 느껴져 몸이 얼어붙었다.
티끌만 한 잡념도 떠오르지 않는다. 잠을 청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도 없다.
“저건 혈유 음성 같은데…….”
일령이 풀 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고문을 하는 것 같다.
사람을 어떻게 다그치기에 제 살을 뜯어먹어도 웃음을 흘릴 사람들이 비명을 내지른단 말인가.
저들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비몽사몽간에 무의식적으로 고통에 반응하고 있을 뿐이다.
한 사람, 한 사람……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밤새도록 비명을 질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게로 짓누르면 잠시 눈을 붙였고, 눈이 떠지면 밤이 지났구나 하는 정도만 느꼈다.
비명 소리는 한시도 끊이지 않았다.
성대가 풀려 비명조차 터뜨릴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고문 도구가 다른 자에게 넘어갔다.
다행히 여인들에게는 아직 고문 같은 것이 없었다.
첫날에 옷을 벗겨 간 이후로는 사람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곤란한 점은 있다. 유등의 기름이 다한 후로는 컴컴한 어둠만 존재했다. 어둠 정도는 참을 수 있다. 음식이 제공되지 않는다. 갈증을 풀어줄 물조차 주지 않는다.
무인도 범인들처럼 굶으면 죽는다. 범인들보다 오래 견딜 수는 있겠지만 고통을 당하는 것은 똑같다.
걱정되는 것은 육체보다 정신이 먼저 풀어지는 것이다.
금연화는 손가락을 잘끈 깨물었다.
“입 벌려. 기운을 내야 돼.”
“언니!”
“빨리 입 벌려. 피가 많이 쏟아지면 나도 곤란해.”
일령은 눈에 독기를 띠고 입을 벌렸다.
뚝! 뚝! 뚜욱!
핏방울이 방울져 일령의 입 속으로 떨어졌다.
“전 이제 됐어요. 빨리 상처를 감싸요. 두 언니는 제가…….”
“아냐. 하루에 한 명씩 하는 게 좋아. 쉽게 빠져나가는 건 틀린 것 같으니까. 보아하니 흉험한 일도 생길 것 같고. 언니, 입 벌려요.”
금연화는 절혼마녀에게 다가갔다.
“난 견딜 만해.”
“그래서가 아녜요. 모두 아직은 견딜 만해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최상의 정신력이에요. 정신이 조금이라도 흔들려서는 안 되니…… 입 벌려요.”
절혼마녀는 눈가에 파랑을 일으키며 입을 벌렸다.
뚝! 뚜욱! 뚝……!
피를 제공하는 일은 절혼마녀에게서 끝났다.
다담선자는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혈이 제압되어 있으니 진기를 이끌 수가 없다. 운공조식을 한다는 건 말도 안 되고, 마야와 혼이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라면서 침묵 속으로 잠겨들었는데…….
천리만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도가에서는 영통(靈通)이라고 한다. 무인(巫人)들은 동기감응(同氣感應)이라고 하며, 불가에서는 육통신(六通身), 일반적으로는 이의제신(以意制身)이라고 한다.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으며, 느낌으로 알 수도 없는 곳의 일을 알아내는 것이니 신인(神人)이 아닌 다음에야 불가능한 일이다.
다담선자는 자신있게 말했다.
“혼이 연결된 사람들은 육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어. 난 느껴.”
아무래도 좋다. 무엇이든 상관없다. 다담선자의 느낌이 말도 안 되는 억지라고 해도 믿을 수밖에 없다.
금연화는 피를 지혈시켰다.
‘제발 마야 좀 찾아줘. 마야가 나타나지 않으면 희망이 없어.’
저벅! 저벅!
회랑을 걷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쇠와 돌이 마찰하는 기음이 새어 나오며 결코 열릴 것 같지 않던 철문이 열렸다.
눈을 시리게 하는 불빛이 환하게 밝아왔다.
네 여인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어둠에 길들여진 눈은 미약한 유등 불빛조차도 쳐다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며칠 굶겼어도 몸들은 좋군.”
‘사내!’
네 여인은 부르르 치를 떨었다.
낯선 사내가 발가벗은 몸을 속속들이 쳐다보고 있다. 송충이가 기어가는 느낌이 이럴까? 춥지도 않은데 소름이 돋는다.
“후웁! 정말 미치겠군.”
사내는 욕정을 참을 수 없는지 두어 걸음 다가와 금연화의 어깨를 잡았다.
손이 몹시 투박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잔뜩 박여 있어서 굵은 모래에 쓸리는 느낌이다. 반대로 사내에게는 솜뭉치를 만지는 듯 부드럽게 느껴질 게다.
‘가가도 만져 보지 못한 살…… 이렇게…….’
옷을 벗겨놓을 때부터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 예상은 했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아니다. 이건 예상했던 순간이 아니다. 자신들이 능욕당할 때는 마야를 협박할 때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무 일도 없지 않은가.
‘이렇게 당할 수는 없어. 강력한 대응 수단……. 현재 상태에서 권각을 내지르는 것은 서툰 발악이야. 소리를 지르는 따위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고. 강력한 것…… 효과적인 것…… 돌멩이든 나뭇가지든 손에 무엇이든 잡을 게 있다면…….’
“떨고 있군. 살이 떨리고 있어. 불안, 초조…… 기대감도 없을 순 없겠지. 처녀인가?”
“추잡한…….”
아차! 실수다. 흥분해서는 안 된다. 절대 평정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놈을 자극하여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일만은 피해야 한다.
“후후후! 혈귀대주라는 작자…… 참 미련한 놈이군. 이런 여자를 내버려 두다니.”
사내의 손길은 거침없었다. 어깨를 만지작거리던 손길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살에서 빛이 난다는 말을 믿지 않았는데, 빙기옥골(氷肌玉骨)이란 말이 실감나. 살에 꿀을 발라놓은 것 같지 않나. 손이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니 이거야 원…….”
사내의 손은 척추를 지나 엉덩이로 향했다. 그때,
“마야의 여자를 건드릴 셈인가요?”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다담선자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뭐라고?”
사내는 반문했다.
다담선자의 한마디는 사내에게 큰 충격을 준 것 같았다. 여체를 더듬던 손길이 뚝 멈춰지고 두 눈에서는 연신 매서운 섬광이 토해져 나왔다.
“방금 뭐라고 했지?”
“마야의 여자를 건드릴 셈이냐고 물었어요.”
다담선자는 차분했다.
“마야…… 후후후! 마야가 잡혀왔다는 걸 알고 있었나? 제법 영악한 계집이군. 아! 흐흐흐! 알았어. 네년이 다담선잔가 뭔가 하는 계집이군. 그놈하고 접 붙은 년이 네년이지?”
접? 사람이 아니라 개돼지로 취급하는 것인가.
다담선자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마야는 잘 있나요?”
“잘 있지. 아주 잘 있어. 손가락 몇 개 부러지고 정강이뼈가 바스러진 것 외엔 별로 이상 없어. 갈비뼈도 몇 대 나갔던가? 아마 그랬을 거야. 몇 대 때리지는 않았지만 워낙 약골이라서.”
사내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이성적인 말보다는 순간적인 감정에 따라서 살인이라도 저지를 기세였다. 그는 그런 눈으로 다담선자의 전신을 쓸어 내렸다.
“허세군요. 그 사람은 잘 있어요.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았고. 마야 이야기는 그만 하죠. 당장 그 손부터 놓아야 하지 않나요?”
“흐흐흐! 손을 놓아라…… 내가 왜?”
“천하제일의 미녀를 갖는 게 목표인 사내도 있죠. 그런 의도라면 잘 선택하신 거예요. 마야의 여자치고 괜찮지 않은 여자가 없으니까요.”
“후후후! 그러니까… 자하일봉이 마야의 여자라는 말인가? 그런 소리는 처음 듣는군. 언제부터 혈귀대주의 여자가 마야의 여자로 둔갑했지? 아니지. 혈귀대주가 죽은 지 꽤 됐으니, 그럴 만도 해.”
다담선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생각하든, 어떻게 보든 상관없어요. 분명한 건 하나 있죠. 마야와 여자, 둘 다 차지할 수는 없다는 것.”
“지금… 나한테… 협박하는 건가?”
사내의 눈에 광기뿐만이 아니라 살기까지 어리기 시작했다.
그는 말을 하면서 잠시 멈췄던 손길을 부단히 움직였다.
사내의 손이 제일 먼저 닿은 곳은 요유혈(腰兪穴)이다.
원래가 허리의 기를 움직이는 곳으로 허리병[腰病]을 치료하는 혈인지라 혈도의 이름도 요유(腰兪)라 하지 않았던가.
요유혈을 제압당하자 금연화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난감하다. 수치스럽다. 당장이라도 사생결단을 내고 싶다. 하나 금연화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징그러운 사내의 손길이 온몸을 더듬도록 내버려 두었다.
사내의 손이 가슴으로 돌아왔다. 거친 손길이 우악스럽게 육봉을 움켜잡았다.
“한 가지, 네년들이 착각한 게 있어. 우리에게는 마령음 따위…… 존재하지 않는 게 더 좋아. 무슨 말인지 알아?”
사내의 호흡이 급격하게 빨라졌다.
‘끝났어!’
절혼마녀는 사내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다담선자가 마야를 거론할 때만 해도 망설이는 기색이 보였는데, 이제는 결심을 확고하게 굳혔다.
금연화를 겁간한다. 아니, 그의 욕구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금연화를 탐하면서도 일령의 알몸을 훔쳐보는 것으로 보아서는 결코 좋은 결말이 있을 것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