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53
53
절혼마녀는 이를 악물었다. 반면에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이, 웃음 속에는 염기(艶氣)가 묻어났다.
혈도를 제압당한 상태는 똑같지만 그녀는 다른 여인들처럼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비장의 한 수가 남아 있다.
마야가 손봐준 탈백섭심공은 상단전의 진기가 아니라 뇌력을 사용한다. 마야처럼 진기 없이도 펼칠 수 있는 무공이다.
문제는 그녀가 새로운 탈백섭심공을 시전해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진기를 사용하는 무공이라면 호기심에서라도 한두 번쯤 수련해 보았겠지만, 뇌력이라는 낯선 분야는 손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뇌력을 사용하여 탈백섭심공을 펼칠 수 있을까? 효능은 어느 정도일까? 진기를 사용한 것만큼 강력할까? 마야는 뇌력을 과도하게 사용한 나머지 혼절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자신도 그렇게 되는 것일까?
모든 것이 미지의 세계다.
그래도 해봐야 한다. 어쨌든 해볼 수 있는 수단이 한 가지는 있는 셈이니.
그녀는 사내의 혼을 단숨에 빼앗을 듯 더욱 교태스럽게 웃었다.
옷을 벗을 필요가 없으니 준비는 이미 갖춰졌는가. 그녀는 가슴과 비소를 활짝 드러내며 일어섰다.
“호호호! 우리, 말은 나중에 하면 안 될까? 그리고 그쪽…… 나부터 안아주면 안 돼? 하악! 오랜만에 사내를 봤더니 주책없이 몸이 달아오르네. 몸이 뜨거워져서…… 나…… 시달리고 싶어.”
그녀가 몸을 꿈틀거릴 때마다 야릇한 방향이 번져 났다.
욕정의 내음, 열락의 내음.
사내는 치솟는 흥분을 참을 수 없는 듯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흐흐흐! 낙화향 창기는 달라도 확실히 다르군. 과연 요물이야. 네년한테 빠져들면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다는 더러운 예감이 드는군. 흐흐흐! 그래, 네년도 꼭 짓눌러 주겠어.”
“말로만 하지 말고…….”
절혼마녀는 천천히 다가갔다. 그런데,
“마야의 여자는 겁간을 당할지언정 스스로 몸을 열지 않아요. 당하는 것은 내버려 둬요. 개한테도 물릴 때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스스로 몸을 열면…… 두 번 다시 마야 앞에 설 수 없어요.”
다담선자, 도대체 지금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선루의 루주까지 지냈던 여자가 사내의 욕정을 읽어내지 못한단 말인가. 지금 저놈은 욕정에 눈이 뒤집혀……
절혼마녀는 피식 웃었다.
다담선자가 한 말은 금연화가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다담선자는 물론이고 금연화도 절혼마녀가 무슨 행동을 하려는지 읽었다. 그리고 결과도 예측해 냈다. 사방천마를 상대로 한 번도 시전해 보지 않은 탈백섭심공을 펼친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꼴이 된다.
몸을 잃는 것은 약과다. 자칫 탈백섭심공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절혼마녀는 백치가 되고 만다.
안 될 것이라면 포기하자는 말이다.
금연화는 다담선자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녀의 표정이 아늑해진다. 눈길은 꿈길을 찾아 나섰다. 겁간을 당하는 여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고요하고 행복한 모습이다.
가지고 싶으면 가져라. 네가 가지는 것은 빈 껍데기. 네가 묻힌 침, 네가 뱉은 정액…… 씻어내면 그만이다. 대신 넌 값진 것을 내놔야 한다. 네 목숨. 마야는 반드시 네 목숨을 취할 것이다.
정조를 유린당하면서 웃는다면 광기 어린 여자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 다담선자는 본인이 직접 광녀가 되라고 말했으니 그녀 자신 역시 광녀가 될 생각이다. 이제 금연화가 제정신이라고는 볼 수 없는 광녀 집단에 발을 들여놓았고, 일령도 잔뜩 곤두세웠던 긴장을 푸는 것으로 보니 광녀가 되기로 작정한 것 같다.
‘마야…… 만약에…… 만약에…… 네 그릇이 그만밖에 되지 않아서…… 세인들의 잣대로 여자의 정절을 말한다면…… 죽여 버릴 거야. 마야, 당신만은 너무 믿고 싶으니까.’
절혼마녀는 탈백섭심공을 거두고 물러섰다. 그녀 또한 광녀가 될 생각이다.
이제부터 닥쳐올 폭풍은 욕정의 배출밖에 없다. 막을 사람도, 거부할 사람도 없다. 하나 세상사란 왕왕 의외의 변수가 있는 법, 무저항은 뜻밖에도 묘한 사태를 불러왔다.
“뭐야? 마음대로 하라, 이거야?”
사내는 축 늘어진 금연화를 이리 만지고 저리 만졌다. 그녀의 가슴, 배, 비소, 다리…… 저항할 줄 모르는 가녀린 육신이 사나운 발톱에 이리저리 휘둘렸다.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한마디만 해봐. 네년 대신 저년을 건드릴 테니까. 저년…… 어린 년이 가슴 하나는 정말 좋군. 흐흐흐! 말해봐.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금연화는 말하지 않았다. 무심에 가까운 눈길로 사내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산 자를 쳐다보는 눈길이 아니다. 죽은 자를 보는 눈길이다.
“제길! 이거야 원…….”
사내는 흥미를 잃어버렸는지, 싸늘한 눈길에 욕념이 사그라졌는지 손을 털고 일어섰다.
사내가 왔다 간 흔적이라면 불 밝혀진 유등 하나밖에 없다.
금연화는 사내와 접촉했던 부분을 때 밀듯이 박박 문질러 냈다.
너무 세게 문질러서 살갗이 벗겨졌다. 그래도 주문에 걸린 여자처럼 망연자실,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언니, 미안해요. 제가…… 제가 했어야 했는데…….”
일령이 금연화를 부둥켜 안으며 울었지만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는 금연화의 눈길은 좀처럼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절혼마녀는 금연화의 심정을 가장 잘 안다.
원치 않는 사내와 살을 부딪치는 기분은 똥물을 먹는 것만큼이나 역겹다.
그 기분, 너무 잘 안다. 하나 위안을 해주거나 다독거려 주지는 않았다. 삶과 죽음을 머리에 이고 사는 무인에게 남녀 구분이란 있을 수 없다. 정조란 것도 지킬 힘이 있을 때에만 지켜지는 것이다. 지킬 힘이 없으면 윤간도 당하고, 간살도 당한다.
무림은 생각처럼 깨끗한 곳이 아니다. 똑바로 알아야 한다.
다담선자도 말리지 않았다.
금연화의 아픔을 알지만 신경이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을 짓누르는 묵직한 기분은 자신이 겁간을 당했다고 해도 무시할 만큼 불안했다.
‘그 사람…… 안전하지 않아. 너무 고통받고 있어.’
마야가 정상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마야는 잡혀도 죽을 염려가 없다. 남도문이고 북검문이고 마야는 죽이지 못한다. 마야의 진가가 드러난 이상, 아무도 죽이지 못한다. 시간이 걸려도 회유하는 방법을 택하리라.
금연화는 물론이고 사내를 잘 안다는 절혼마녀조차도 간과하고 넘어간 문제가 있다.
사방천마 중 한 명으로 짐작되는 사내는 뇌옥으로 들어설 때부터 순백지신(純白之身)인 금연화와 일령을 노렸다. 겁탈할 목적으로 일부러 찾아온 것이다.
그런 자가 반항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목석처럼 축 늘어졌다고 해서 포기하고 물러날까? 천만에! 그럴수록 더욱 잔인하게 짓밟는 족속이 그런 자들이다.
저들에게서는 인성을 기대하면 안 된다. 저들에게 여자란 강한 자는 갖고, 약한 자는 내놓아야 하는 살아 있는 물건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순순히 물러갔다. 왜?
아무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다.
마야다. 마야가 가까운 곳에 있으며, 사물을 보는 눈인 만공심안으로 지켜주고 있다.
생각이 맞다면 마야는 금연화가 강간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뇌파를 사용했다. 사방천마가 일으킨 욕정을 잠재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마야밖에 없으니 단정해도 좋다.
그가 아프다는 느낌이 든 것도 방금 전 사건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마령음이나 만공심안을 아무리 써도 괜찮았다. 한데 얼마 전부터 극심한 공황에 시달린다. 뇌력을 사용할수록 점점 더 심해진다.
무엇인가 몸에 탈이 생기고 있다.
다담선자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어떻게든 그를 찾아야 돼.’
마야를 찾는다. 그와 영통한다.
누가 들으면 귀신 들린 사람들 이야기라고 코웃음칠 일이지만 만공심안으로 사물을 읽고, 영파로 생각을 전달하는 능력이라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그와 영통한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은 없겠지만.
고오오오……!
방금 눈으로 보고 읽은 듯 머릿속에 차곡차곡 채워지는 글자들.
그가 죽어가고 있다. 몹시 아프다. 자신이 아픈 것처럼 절절이 느껴진다. 그래도 그는 끊임없이 말을 하고 있다.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글자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으로 보아서 분명히 그가 말하고 있는 게다.
‘바보 같은 사람…… 안 돼요. 더 이상은 안 돼요. 쓰지 마요. 당신이…… 당신이 아프잖아요.’
고오오……!
다담선자는 눈물을 흘렸다.
슬픔이 북받쳐 올라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슬픔이 사무치면 사무칠수록 정신을 더욱 또렷이 하여 글자들을 되새겼다. 한 자라도 놓친다면, 그래서 그가 한 말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한다면 그만 아프게 한 셈이 되니까.
‘해볼게요. 어떻게든…….’
다담선자가 소립파와 영통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금연화는 냉정을 회복했다.
“막내야, 손에 잡을 것 좀 구해봐.”
그녀의 목소리는 맑았고, 단호했다.
일령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잖아도 구석구석까지 다 찾아봤는데, 지푸라기 하나 없어요.”
“벽에서 뭐 좀 구할 수 없을까?”
“석벽이라서…….”
“휴우! 우리가 어디쯤 있는 걸까?”
이번 물음에는 절혼마녀가 대답했다.
“초겨울인데 옷을 벗고 있어도 춥지 않아. 지하로 이십여 장쯤 내려왔을 거야. 다시 말해서 이곳을 벗어나도 지상으로 올라가기는 요원하다는 거지.”
산 넘어 산이요, 물 건너 물이다. 이토록 앞뒤좌우가 꽉 막히기도 드물 게다.
“언니, 탈백섭심공. 쓸 수 있겠어요?”
평소 같으면 입에도 올리기를 꺼려했는데, 이제는 서슴없이 사용 여부를 물어온다?
많이 변했다. 심경이 변했는데, 변하는 과정이 너무 단순해서 두렵다. 이런 변화는 극과 극의 양면성을 지니기 마련이니까.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거나, 지극히 잔인해졌거나.
“휴우! 쓰지 않을래. 난…… 휴우! 그래, 난 마야의 여자야. 내 스스로 옷을 벗을 수는 없어.”
낙화향 창기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나?
“그럼 방법이 없네요. 누가 구해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금연화는 실망한 표정을 내색하지 않았다.
네 여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데, 지금이라도 절혼마녀가 뇌력이란 것에 대해서 신경 써주길 바랐는데.
‘방법은 있어. 찾지 못해서 그럴 뿐. 마야가 이곳에 있다면…… 그가 찾아오지 못한다면 우리가 찾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돼.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지금 믿을 건 머리밖에 없다.
그녀는 온 신경을 집중하여 빠져나갈 방법을 모색했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하다. 다담선자가 앉아 있는 곳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다.
금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다담선자를 쳐다봤다.
“저, 저……!”
그녀는 경악성이 새어 나오는 것도 몰랐다.
제2장 관뢰옥(關牢獄) ― 감옥에 갇혀
1
후우우욱……!
다담선자의 몸에서 일어나는 기류의 변화.
아! 운공조식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지 않은가!
다담선자가 혈도를 풀었다. 분명하다. 두 눈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운공조식하는 모습을.
다담선자는 삽시간에 대주천(大周天)을 마치고 일어섰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요.”
그녀는 재빨리 절혼마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등 뒤 신도혈(神道穴), 근축혈(筋縮穴), 요유혈(腰兪穴)을 건드린 다음 양쪽 팔의 노회혈과 천유혈을 팔이 떨어질 만큼 강하게 쳤다.
“컥!”
절혼마녀의 입에서 격한 숨이 토해져 나왔다.
‘혈도가 단숨에 풀렸어! 둘째의 무공은 도대체 어느 정도야!’
몸을 묵직하게 짓눌렀던 통제가 홀연히 사라지며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전신에 무궁무진한 힘이 샘솟는다.
“시간이 없어요. 운공조식해요.”
다담선자는 빠르게 말한 뒤, 금연화에게 다가가 혈도를 풀어주었다.
절혼마녀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몸에 이상 여부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다. 운기행공을 하여 점혈로 인해 생긴 울기(鬱氣)를 완전히 소통시켜 주어야 한다.
금연화와 일령도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차후로 미뤘다.
다담선자는 한쪽 귀퉁이에 다소곳이 앉아서 운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후웁!”
가장 먼저 시작한 절혼마녀가 가장 빨리 끝냈다. 금연화가 바로 뒤를 이어 숨을 깊이 갈무리했고, 일령은 좁은 뇌옥에서 선유비조신법까지 펼쳐 보였다.
무공을 되찾았다. 흥분 때문에 몸을 가누지 못하겠다.
뇌옥에 갇혀 있는 몸이니, 그리고 무공을 되찾았어도 사방천마나 천멸도 살수들을 상대할 수 없으니 아주 작은 자유에 불과하지만 하늘이라도 날듯한 기분이다.
이윽고 모두들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해졌다.
금연화가 제일 먼저 봉목을 반짝이며 물었다.
“언니, 솔직히 말해봐요. 이건 언니 실력이 아녜요. 그렇죠?”
“맞아.”
“그 사람……? 설마 정말 마야와……?”
다담선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밝게 웃었다.
지금 이 순간, 마야는 몹시 고통스러울 게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을 것이다. 온몸이 석고처럼 딱딱하게 굳어가는 고통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다.
뇌력을 사용할수록 육신을 지탱하는 원기가 소멸된다. 또 소멸된 만큼 육체는 더욱 굳어져 간다.
그가 영파로 말을 해준 만큼 그는 아프다.
“정말이에요! 정말이야! 마야와 연락이 됐어!”
금연화는 속도 모르고 좋아했다. 일령과 절혼마녀도 죽음 속에서 구명줄을 발견한 사람처럼 들떴다.
마야, 그는 곁에 있다는 존재감만으로도 삶의 희망을 준다. 독사가 바글거리는 뱀 굴에 들어가 있어도 그가 지켜보고 있으면 살 것이라는 희망이 생긴다.
다담선자는 그녀들의 마음을 알았다.
‘안 돼. 지금은 아무도 내색해서는 안 돼. 절대적으로 경거망동은 삼가해야 돼. 점혈이 풀린 것을 알게 되면 상당히 곤혹스러워져. 마야의 계획에도 차질이 생기고.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