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56
56
길고 지루한 싸움이 되리라.
알려는 사람과 말해주지 않으려는 사람. 그리고 그 사이에서 십여 명의 목숨이 위협용으로 사용될 것이다. 비밀을 토하는 순간 이용 가치가 사라지게 되니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 죽음을 각오할 때만 입을 열 것이니 정말 힘든 싸움이 되리라.
그런데 정녕 믿을 수 없게도 소립파는 담담히 심결을 흘렸다.
“순(順)으로는 타타개두뇌 천공병차타대화이요, 역(易)으로는 불용벽력수단(不用霹靂手段) 현불출보살심장(顯不出菩薩心腸).”
‘옳은 길은 마음을 여니 하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고, 거스르는 길은 단호한 수단을 쓰지 않으면 보살의 마음을 나타낼 수 없다는 뜻으로 강경하게 나가야 한다는 것인데……. 이게 마령음과 무슨 관계지?’
금연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야가 한 말과 마령음과의 연관성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만사무불통지(万事無不通知) 도숭부(陶崇富)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답평도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마음을 열면 하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마령음의 심결은 확실한 것 같은데, 상세한 운용 구결을 모르는 한 공허한 염불에 불과할 뿐이다.
“이 이치를 잘 살펴보면 마령음이 나올 것.”
“풋! 사람 바보 만드는 법도 가지가지네. 결국 순순히 내놓지는 않겠다는 뜻이잖아? 그렇지?”
사방천마 중 여인이 비릿한 비음을 토해내며 말했다.
그녀는 손짓 하나, 말 한마디도 유혹 아닌 것이 없다. 얼굴 윤곽이며, 몸매가 조각상처럼 매끈하게 다듬어져서 이목은 단숨에 끌어당기지만 인간적으로 다가가기는 쉽지 않다.
그런 여인이 유혹의 손길을 보내면 거절한 남자가 몇이나 되랴.
소립파는 여인의 자태나 유혹이 인위적인 것, 욕금진기라고 말한바 있다.
“야광 총사가 방금 전에 선을 그어줬는데 잊었나 보군. 서로 알 만큼만 알면 되지.”
“더 이상은 말하지 못하겠다?”
“몇 마디 말뿐이지만 마령음의 진체(眞體). 진체를 접하고도 본신을 보지 못하는 것은 당신들의 눈이 어둡기 때문이니 날 탓할 일을 아니라 보는데.”
“호호호!”
여인은 교태롭게 웃으며 살짝 팔을 들어올렸다.
소매 사이로 빙옥 같은 살결이 드러났다. 옷섶도 벌어지며 탄력있는 육봉이 보였다. 냄새도 풍겼다. 밤꽃처럼 은밀함을 자극하는 냄새가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다른 사람은 다 무시하면서 유독 자신에게만은 언제든지 몸을 열어줄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백 마디의 교언보다도 확실한 유혹이다.
“새카만 후배한테 당신이라는 소리나 듣고. 하지만 듣고 보니 그러네. 말해줘도 알아듣지 못했으니 우리 잘못이지. 그러니 어떡해? 머리가 우둔하니 하나하나 잘 일러줘야지.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그만 접어두고…… 내 방으로 가지 않을래?”
소립파는 승려도 색광(色狂)으로 만든다는 욕금진기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때, 답평이 여인을 제지하며 나섰다.
“잠시 참으시지요. 욕금진기로는 해결이 안 될 자인 듯싶군요.”
“흐흐! 맞아. 저 자식 저거… 눈깔을 보니 아주 멀쩡해. 네 그 뭐야, 젖…… 뭐 하고 아랫도리 그 뭐시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인데, 저 자식 저거 고자새끼 아냐?”
금연화는 고개를 번쩍 들어 말하는 사내를 봤다.
죽는 순간까지 잊을 수 없는 음성이다. 사랑하는 사람도 만지지 않은 알몸을 마구잡이로 더듬었으며, 오욕스럽게 침까지 발랐다. 비소를 더듬던 거친 손길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더러운 놈…… 네놈은 내게 죽어.’
사내를 두 눈 가득 새겨 넣었다.
보통 키. 네모난 얼굴에 거친 수염이 가득하고…… 이마와 턱에 비해서 코와 볼 부분이 함몰되어 있는 특이한 얼굴형이다. 눈은 뱁새처럼 작으며, 눈초리가 위로 치켜 올라가 있어서 포악한 성질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무인이 아니더라도 술 취하면 주사깨나 부릴 사람 같아 보인다.
잘끈 깨문 입술에서 짭짤한 피가 흘러나와 입 안을 적셨다.
분노는 삭힌다. 그때처럼 달려들어 능욕한다면 당해준다. 아니, 받아준다. 하나 언젠가 마야가 일어설 것이고, 그의 입에서 죽이라는 말이 떨어지면…… 놈은 죽을 수밖에 없다.
‘그때까지만 참는 거야.’
“고자는 아니죠. 어젯밤 운우지락에 날을 새웠으니 그만한 정력가도 드물죠. 지금 마야는 뭐랄까…… 불문(佛門)의 부동심(不動心)과 비슷한 수양을 쌓은 듯싶군요. 욕금진기가 통하지 않는 건 그 때문일 겁니다.”
답평은 사방천마를 어른 후 소립파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어제 분명히 말했지만 난 자넬 잡았네. 자네 말대로 진체를 대하고도 본신을 못 알아보았으니 무식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만…… 어쩌겠나? 자네는 잡혀 있는 몸이니 소상히 말해줘야지. 그렇게 생각지 않나?”
“불응하면?”
“어리석기는…….”
“후후후!”
마야는 웃었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싱그럽게 웃었다. 밝고 편안하게, 아무 근심 걱정 없는 사람처럼.
“웃지 말게. 자네의 웃음은 사람의 심기를 건드려.”
“이미 시험해 보았으면서 또 써먹는군. 저 사람이겠군. 언젠가 금 소저 손에 죽을 사람이.”
마야는 손가락을 들어 금연화가 이를 갈며 머릿속에 담아놓은 사내를 가리켰다.
“금 소저는 모든 걸 줄 생각이었지. 그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그래. 그런 거라면 계속해도 괜찮아. 어차피 내 여자도 아니고.”
어쩌면 금연화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말일 수도 있지만, 그는 태연히 말했다. 그리고 답평과 사방천마는 쳐다보지도 않고 길게 기지개를 켰다.
“역시!”
답평이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손으로 무릎까지 털썩 쳤다.
“겁간이 이루어지기 직전, 갑자기 욕념이 사라져 버리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지. 몰라도 당하고 알아도 당할 수밖에 없겠지만…… 영파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 후후후! 알겠나? 자네가 진정으로 이 여자들을 버리지 못하는 한, 자네는 내 손에 잡힌 거야. 그러니 얕은 수는 그만 쓰고 내 말을 똑똑히 듣게.”
답평은 강압적인 말투를 버리고 평온한 말투를 사용했다.
한 가지 사실이 명명백백해졌다.
여인들의 옷을 벗기고, 겁간을 하려 한 것은 충동적이거나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답평의 치밀한 계산하에서 연출된 행동이었다. 마야의 능력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려는 심산에서. 마령음, 만공심안, 영파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너무 여유 부리지 말고 잘 듣게. 그때 남방천마께서는 정말 자하일봉을 겁간할 생각이었어. 지금도 마찬가지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자하일봉은 반드시 남방천마의 품에 안길 걸세. 이건 자네들이 이 뇌옥에 들어선 순간부터 정해진 인생이지.”
“흐흐흐!”
남방천마는 금연화를 보면서 음충맞게 웃었다.
소립파는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픽 웃었다.
“두 가지 길이 있네. 하나는 지난 일을 회개하고 남도문과 힘을 합치는 것. 봉공(奉公)을 줌세.”
마인에게 봉공을 준다?
파격적인 제안이다.
어떻게 마인에게 봉공이라는 자리를 줄 수 있을까? 위장 신분이라면 가능하다.
사방천마와 천멸도 살수들은 공공연하게 나돌아다닌다. 뇌옥을 오가면서도 도무지 거침이 없다. 그렇다는 것은 그들이 남도문 무인들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지 않나.
남도문 무인들이 마인을 용납하고 인정할 리는 없다.
결국 한 가지 결론에 이른다. 사방천마와 천멸도 살수들은 명가의 후예나 신비 집단 혹은 은거 집단쯤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것. 야광에 천하의 수재라는 자들이 천여 명이나 머리를 맞대고 있는데 무슨 수작인들 부리지 못할까.
무명을 떨치고자 한다면, 권력에 욕심이 있다면 떨쳐 내기 힘든 제안이다.
마야는 담담하게 말했다.
“다른 길은?”
“가장 쉬운 길이지. 죽으면 되니까.”
“방금 전에는 당장이라도 마령음을 빼앗을 듯이 달려들더만 그새 생각이 바뀌었나 보군.”
“쉽게 가는 게 좋지. 자네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령음이나 영파, 만공심안을 내놓지 않을 거야. 내놓지 않으려는 걸 억지로 얻으려는 것처럼 미련한 짓도 없고.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얻지 못한 능력이 커 보이기는 하지만…… 마령음 같은 게 북검문 손에 넘어가지 않았으니 된 거지.”
“사방천마와 천멸도로 부족한 부분은 채웠다?”
“유계와 천멸도라면 북검문주도 상대할 수 있으니까.”
소립파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북검문주의 소맷자락도 건드리지 못해. 남도문주의 소맷자락을 건드리지 못하는 것처럼.”
사방천마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뇌옥 안의 공기도 미미하게 파랑을 일으켰다. 천멸도의 살수들이 살기를 띠었다는 증거다.
소립파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내가 제삼의 길을 제안하지. 내 선택은 이것뿐이며, 당신 선택도 이것뿐이야. 상조문, 철사문, 독조림. 그리고 궁왕 강창도를 내놔. 그러면 마령음을 준다.”
답평은 손을 들어 이마를 탁 쳤다.
“이거, 이거…… 내가 걸려들었군. 마야를 잡아온 게 아니라 안방으로 모셔왔어.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우리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투인데……. 자네는 이 안방이 어떤 곳인지 짐작이나 하고 있는 건가?”
소립파는 가볍게 주위를 쓱 훑어봤다.
“이 뇌옥은 특이한 구조군. 둥그런 원의 형태. 토평(吐坪) 적토(赤土)를 발라놨으니 방음(防音)에 탁월한 효과가 있지. 내가 마령음을 토해내도 뇌옥 밖에까지는 영향을 미칠 수 없겠어. 그래도 한다면…….”
“뇌옥 밖에 있는 궁수들이 자넬 벌집으로 만들어놓을 걸세. 만공심안이라는 제삼의 눈을 가졌으니 이미 봤을 것이네만. 이 뇌옥에는 사방을 빙 둘러 삼백이십사 개의 구멍이 있지. 철궁대 삼백여 명이 쏘아내는 화살이라면 벌집이 되고도 남을 걸세.”
“적토 뒤에서 쇠 냄새도 나는데?”
“자네 사람 가운데서 가장 무식한 자가 철탑거추지? 철탑거추 다섯 명이 힘을 합쳐도 뚫지 못할 거라는데 목을 걸지.”
“이 뇌옥에 대해서 더 들을 게 있나?”
“난 지금이라도 자넬 죽일 수 있네.”
“죽이면 되겠군.”
답평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긴 침묵이었다. 잠시 눈을 감은 줄 알았는데 일다경이 지나도 눈을 뜨지 않았다. 간혹 미간을 찌푸리기도 하고, 볼을 씰룩거리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서 심한 갈등을 겪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반각이라는 시간이 흘렀을 즈음, 그는 뜬눈으로 밤을 밝힌 사람처럼 힘든 모습으로 눈을 떴다.
“아쉽군. 이렇게 결론이 나서.”
생각은 깊었지만 행동은 단호했다. 그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정말로 마야에게는 일별도 던지지 않은 채 등을 돌려 뇌옥을 걸어나갔다.
사방천마도 일어섰다.
그들은 행동을 달리했다. 제일 먼저 남방천마가 신형을 날려 금연화와 일령을 한 손에 한 명씩 낚아챘다.
“흐흐흐! 드디어 네년들이 손에 들어왔구나, 크크크!”
키 작은 사내, 쾌검 중에 쾌검이라는 수검을 허수아비처럼 찍어버린 서방천마는 절혼마녀에게 다가섰다.
“죽을래, 나갈래?”
‘죽겠다고 하면 정말 죽일 거야.’
서방천마에게는 두 번의 기회란 없다. 음성을 들었을 뿐인데 솜털이 곤두선다.
“나가죠.”
“좋아. 따라와.”
절혼마녀는 마야를 힐끔 쳐다봤다.
소립파와 다담선자는 전혀 동요가 없다. 한순간이지만 정말 버림받았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능욕의 구렁은 다담선자도 피해가지 못했다.
서방천마가 칼날이고, 남방천마가 난폭자라면 북방천마는 얼음이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희로애락은 물론이고 미세한 감정의 흐름도 나타내지 않았다.
안으로 움푹 꺼진 듯한 동그랗고 작은 눈만이 샛별처럼 반짝이고 있어서 쳐다보기만 해도 숨이 막힌다.
그의 눈길이 다담선자에게 고정되었다.
“절 원하는 것 같네요.”
“가지 않으면 베겠지?”
“네.”
“어떻게 할래? 베일래, 갈래?”
“어떻게 할까요?”
“못된 습관이야. 칼자루를 나한테 넘기는 버릇.”
“여자니까요. 그건 권리예요.”
“앉아 있어.”
“베이지 않을까요?”
“팔순 넘은 노인네들이 회춘했으니 제일 먼저 성욕부터 점검해 보고 싶겠지. 저들이 여자를 밝히는 것은 남도문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다는 반증이야. 쯧! 세월은 다 어디로 먹었는지……. 아무래도 이쯤에서 말려야겠어.”
슷! 촤아악……!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싶었다. 그러면서 허공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환상도 보였다.
모든 게 실체였다. 소립파는 가슴이 한 일 자로 베여 피를 철철 흘려냈다.
“저놈 저거 저럴 줄 알았어. 마령음인지 뭔지 하는 이상한 것만 빼면 주둥이만 산 놈이라니까.”
남방천마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웃음을 토해냈다.
뇌옥 밖으로 걸어나가던 몇 사람이 검풍을 듣고 되돌아봤다.
답평은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다담선자가 옷소매를 찢어 상체를 메우고, 부지런히 손을 놀려 혈을 짚었다.
그 표정이 무척 침착해 보인다. 피를 철철 흘리고 있건만 손에 난 생채기를 치료하는 것처럼 흔들림이 없다.
소립파는 일그러지는 입가를 미소로 바꾸며 힘들게 말했다.
“답평, 야광 총수라는 사람이 신중하지 못하군. 너무 성급하게 판단을 내려. 어떤 면에서는 과감한 결단력으로 비치기도 하겠지만…… 만사무불통지 도숭부를 넘어서려면 아직 멀었어.”
“무슨 소린가?”
답평이 뇌옥 문을 나서려다 말고 뒤돌아보며 말했다.
“우린 궁왕 강창도를 죽이고자 왔어. 그건 알고 있을 테고. 그렇다면 궁왕도 우리가 잡힌 것을 알아야 되는 것 아닌가? 후후후! 만약 궁왕이 알았어도 이런 대접을 할까?”
“그게 무슨 소리지?”
답평은 볼을 씰룩거렸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다가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감지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