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63
63
일행들은 비로소 마야의 단독 행동 뒤에 숨어 있는 치밀한 계산을 알았다. 궁왕이 목적이 아니라 쌍마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들 눈앞에 닥친 문제만 쫓아다닐 때, 마야는 혼자만의 싸움을 이끌어 왔다.
역시 마야다. 그런 일이 있었기에 이런 고초를 자초했겠지. 그러면 그렇지. 마야가 움직일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명심 또 명심했어야 하는데. 그랬다면 서툰 오해나 실망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텐데.
“쌍마, 난 남도문이라고 생각했어. 남도문에는 북척표라는 조직이 있어서 마인들에게 숨 쉴 공간을 제공하는데, 북검문에는 아무것도 없거든.”
“후후후! 그래서 우리가 남도문의 주구다?”
“아니. 남도문이라면 이처럼 잔인하게 짓이겨 놓지는 않았겠지. 우린 사지가 꽁꽁 묶인 처지였고, 무공을 펼칠 수 없는 입장도 아니고……. 누가 왜 혈귀대주를 지켜봤는지 대답해 줬으면 좋겠어.”
고루양마와 음마는 눈을 내리깔고 청평도를 만지작거렸다.
그들은 심력을 같이한다. 서로의 생각을 느낌으로 전달할 수 있고, 받아들인다. 같은 형제이면서 동성이면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서로를 사랑한다.
그들은 두 가지 번민에 시달렸다.
하나는 지금 당장 일어나서 뛰쳐나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손에 들고 있는 청평도로 목을 긋는 것이다.
“쌍마, 너희에게도 의리란 게 있었냐?”
수검이 차디차게 말했다.
“우리끼리는 못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군.”
마도는 침울했다.
바깥세상을 자유롭게 활보하지 못하는 심정을 아는가. 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어도 벌레처럼 움츠러들어야 하는 분노를 아는가.
마인들은 안다. 너무 잘 알기에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 주고 보듬어준다. 겉으로는 이를 갈며 으르렁거려도 상대의 아픔에 눈물 한 방울 떨굴 줄은 안다.
마야의 속임수는 실망으로 그쳤지만 고루쌍마의 속임수는 마음을 찢어놓았다.
“휴우!”
고루음마가 청평도를 놓고 벽에 등을 기대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모두 다.”
고루양마는 여전히 청평도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모두 다?”
“모두 다. 모두 닷!”
고루양마의 눈가에 붉은 핏줄이 성겼다. 음성도 호통에 가까웠다. 억울함을 꾹 눌러 참고 쥐어짜듯 말하는 음성이었다.
소립파는 선 자세 그대로 벽에 등을 댔다. 그리고 말없이 고루쌍마를 응시했다.
시간이 흘러간다. 어둠이 어둠을 먹어 더욱 깊은 밤으로 이끌어간다. 그 속에서 고통을 아는 자들의 신음 소리가 묵묵히 어우러진다.
“모두 다 노출됐어. 북검문에.”
“…….”
“우리가 걸려든 건 순전히 재수가 없어서야. 우리가 아니었으면 이 중에 어떤 놈이 걸렸을지 모르지. 일단 노출이 되면…… 알다시피 사로잡힌다는 건 꿈도 못 꿔. 죽는 것밖에 없지.”
고루쌍마를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마인들의 운명이 그러한 것이기에 새삼 놀라는 사람도 없었다. 누구나 그런 경우를 당할 수 있지만 목숨을 구걸하기보다는 의연히 죽는 편을 택하는데……. 그러지 못한 쌍마가 안쓰러울 뿐이다.
“빌어먹을! 죽으려고 했는데…… 그래! 육능자야! 우린 육능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혈귀대가 몰살당한 뒤에 육능자가 찾아왔지. 그가 그러더군. 혈귀대주가 죽었으니 마야가 애통해할 것이라고. 가서 소식이나 전해주라고.”
“뭐라!”
마야는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육능자, 북검문 삼뇌 중에 한 명으로 칠성군 중 오공자를 후원하고 있다고 알려진 지낭(智囊).
그가 혈귀대주의 죽음을 말하며 자신을 거론했단 말인가.
“마야를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모두 다 알고 있다고 하더군. 마야가 어디를 다니는지, 무엇을 하는지, 마야와 어울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마도도 말하고, 수검도 말하고, 혈유도…….”
“후후후!”
웃음이 새어 나온다.
드러내 놓고 다니지는 못하지만 숨어 지내는 것만큼은 완벽하다 싶었는데 북검문의 이목을 속이지 못했던 것인가.
아니다. 북검문은 속였다. 북검문, 남도문…… 전 중원이 마인들의 동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하면 육능자는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고루양마가 청평도를 들어 허벅지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더니 비웃는 표정으로 말하더군. 그게 뭐 그리 놀라운 사실이냐고. 남도문 만사무불통지도 알고 있을 거라더군. 양쪽 머리가 알고 있으니 전 중원이 아는 것 아니냐고.”
‘간자!’
소립파는 억장이 무너졌다.
공식적으로 북검문과 남도문, 아니, 북무림과 남무림은 마인들의 동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최소한 두 사람은 낱낱이 파악하고 있다.
육능자와 만사무불통지.
이런 일은 한 가지 경우에만 가능하다. 육능자 같은 사람이 개인적으로 운용하는 간자가 자신의 영향력 안에 침투해 있는 것이다.
누군가?
시마? 그럴 수 있다. 마도가 될 수도 있고, 수검도 가능하다.
빌어먹게도 모든 사람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아야 한다.
소립파는 생각을 숨겼다.
서로를 의심하는 것처럼 피곤한 일도 없다. 그것은 영원히 덮을 수 없는 깊은 도랑이다. 단결은 와해될 것이고, 결국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없게 되리라.
그럴 수는 없다. 육능자든 만사무불통지든…… 그들의 간자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지라도 형제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후후후! 그렇군. 금적금노…… 위험하다 싶었는데, 영역을 너무 넓혔어. 기루나 주루처럼 감시하기 편한 곳도 없을 것이고. 금적금노와 연관된 사람은 모두 노출됐군.”
소립파는 애꿎은 금적금노에게 화살을 돌렸다.
어차피 금적금노와는 인연이 끝났다. 자신들은 모두 무림공적이 되었다. 이런 처지로는 금적금노를 만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그를 도와주는 것이다.
고루양마는 일행들을 일일이 쳐다보았다.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맞추며 얼굴을 세세하게 뜯어보았다.
“처음에는 소식만 전해주려고 했지. 육능자에게 노출되었다는 것도 말해주고. 한데 달려가는 중에 생각이 바뀌더군.”
고루양마의 눈에 화염이 타올랐다.
“우린 희망을 봤어. 이번 기회에 마야가 움직여 준다면…… 혈귀대의 복수에 그치지 말고 우리들을 이끌어준다면…….”
격동했다. 음성이 덜덜 떨려 나온다.
뼈마디밖에 남지 않은 얼굴에서 두 눈만 활활 타오르는 모습이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우린 개구멍을 찾을 필요가 없는 거야. 당당히 무림에 나설 수 있지. 크크크! 북무림이나 남무림을 상대로 검을 들 수 있는 자가 세상천지에 마야 외에 또 누가 있어? 거기에다가 뜻을 같이하는 놈들도 늘어날 것이고… 그러다 보면 혹시 알아? 남도문, 북검문과 비등한 세력이 될지? 그러면 우린 밝은 하늘을 떳떳이 이고 사는 거야. 그래서 숨겼어. 육능자와 연관된 사실을. 말하면… 말하면… 육능자부터 죽이려 들 것이고, 대가리 몇 놈 죽이고 잠적할 거 아냐!”
“이거 미친놈 아냐? 천하를 향해서 검을 들란 말이야?”
시마는 어찌나 흥분했는지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소립파는 고루양마의 말속에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아냈다.
육능자, 그는 자신을 알고 자신과 가까운 마인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언장은마는 모르고 있었다. 언장은마가 혈귀대주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알았다면 고루쌍마를 이용할 필요도 없었다.
그랬던 것인가. 혈귀대주의 죽음 뒤에는 육능자가 있었던 것인가.
‘나와 혈귀대주의 관계를 알고 있다…….’
정도인으로서는 결단코 맺어서는 안 되는 인간관계, 마도인을 벗으로 둔 혈귀대주를 죽음으로 징치한 것인가.
‘육능자…… 나에 대해서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겉만 알고 있군. 겉모습밖에 모르는 사람을 그대의 싸움에 끌어들인 것은 오만인가, 경솔함인가.’
“아직도 우리가 간자라고 생각된다면…… 차라리 죽여라. 손을 쓰기도 귀찮으면 말만 해라. 죽어줄 테니.”
고루쌍마는 목숨에 미련이 없어 보였다.
사람들은 소립파를 쳐다봤다. 그러나 소립파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어서 그들의 눈길을 의식하지 못했다.
“자식들…… 진작 말했으면 잡히는 일도 없었을 것 아냐? 아닌가? 마야가 정말 혼절했었나? 그럼 잡히는 거고. 허! 이거야 나도 헷갈려서. 어쨌든 자식들아, 숨길 걸 숨겨야지. 그리고 뭐? 우리들의 세상? 꿈도 야무지다니까.”
시마가 능글거리며 고루양마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헉!”
고문을 당해서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입은 곳인데, 하필이면 그곳을 찌르다니!
고루양마는 방금 전까지 비장했던 것도 잊어버리고 옆구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내질렀다.
2
일단의 무리가 지극히 은밀하게 움직이며 산을 기어 올라갔다.
사방천마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한가하게 그들을 지켜봤다.
“흥! 불나방이 따로 없군. 답평이란 자가 이 정도에 불과하다면, 우리도 생각을 달리 해야 되는 거 아냐?”
싸늘하지만 애교가 뚝뚝 묻어나는 음성, 동방천마였다.
“호랑이는 한 산에 두 마리가 살 수 없다고 하지. 강자들이란 그래. 그런 생각들이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주었고. 만 산에 만 마리의 호랑이가 있다고 한들 설산 백곰의 위용은 당할 수 없지. 하지만 말이야. 늑대 무리가 떼 지어서 영역 다툼을 할 때는 설산 백곰이라도 몸을 움츠려야 해. 자칫하면 뼈도 못 추려.”
지금까지 거의 말을 하지 않던 북방천마였다.
“그러나저러나 주공께서 언제 내려오신다는 소식 없었어? 이거 원, 남의 똥이나 닦아주고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입 조심해라.”
“썩을 놈, 말 한마디 했다고 눈깔 부라리기는.”
“아냐, 그건 북방천마 말이 맞아. 남방천마, 넌 입 조심 좀 해야 돼. 언젠가 그 입 때문에 곤혹 좀 치를 거야.”
서방천마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피 맛을 아는 자들, 살을 저밀 때 은은히 저려 울리는 손끝 감촉을 즐기는 자들.
싸우고 싶다. 산을 기어올라 가는 저들 틈에 끼어서 마음껏 칼춤을 추어보고 싶다.
“파청공(破聽功)으로 마령음을 막을 수 있을까?”
문득 북방천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주공 말씀인데 안 믿겠다는 거야?”
동방천마가 곱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를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파청공 대 마령음, 파청공 대 적멸주.
소리를 듣지 않으면 된다. 마야가 아무리 인간 같지 않은 능력을 지녔다고 해도 목구멍을 통해서 나오는 소리를 듣지 않는 데야 어찌할 방도가 있겠는가.
염려스러운 점은 마령음이나 적멸주가 청각만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진기와 마음을 건드릴 수 있다는 점이다.
과연 듣지 않은 상태에서도 건드릴 수 있을까?
기다려 보면 안다. 가만히 지켜보면 안다.
화아악! 꽈앙!
멀쩡한 땅을 디뎠는데 먼지가 풀썩 피어올랐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환한 섬광이 눈을 멀게 하고, 천둥보다 더 큰 굉음이 고막을 찢어놓았다.
앞서서 산을 올라가던 일단의 무리는 그렇게 산산조각 났다.
“화약이다! 모두 발밑을 조심하도록!”
말을 한 자는 께름칙한 돌멩이를 피하기 위해 나무를 짚었다. 순간,
턱! 푸욱!
나무에 둥그런 입이 열리더니 철궁대가 사용하던 철시가 툭 튀어나와 관자놀이를 꿰뚫었다.
“조장님이 당하셨다! 내가 인솔…… 헉! 아아아악!”
발이 땅속으로 푹 꺼질 때 앗차! 싶었으리라.
날카로운 쇳조각이 신발을 뚫고 들어올 때는 발 하나를 잃었구나 싶었을 테고. 철편 조각들이 살아 있는 뱀처럼 사방으로 비산하면서 온몸을 헤집을 때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처절한 비명 소리가 모두의 눈과 귀를 끌어당겼다.
죽음을 많이 보아온 사람들이다. 하나 수천 명에게 난자질당하는 것처럼 전신에 구멍이 숭숭 뚫려서 터진 꽈리가 되어 죽어가는 모습은 단연코 처음이다.
“한 길로만 가라. 앞사람이 디뎠던 자리만 밟아라!”
허사였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철전, 발밑에서 솟구치는 폭편(爆片), 그리고 비명을 내지를 사이도 없이 저승으로 이끌어가는 폭발.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땅에, 나무에, 풀에, 바위에…… 세상에 붉은 피 비가 내렸다.
부상자는 없다. 철편 쪼가리가 되었든 철시가 되었든 화약을 터뜨렸든, 공격을 받은 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짓이겨져 죽어갔다.
가장 무서운 것은 화약이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기에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살얼음판을 딛는 기분이다.
가장 끔찍한 것은 철편 쪼가리다. 땅에서 솟구친 철편은 그나마 낫다. 사람을 관통하여 핏물을 흠뻑 들이마신 철편은 땅에 떨어진 후에도 요기를 뿜어낸다.
몸에 닿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파고들 것 같다.
실제로 폭발이 있을 때마다 철편은 다시 튕겨 오르고, 육신을 찢어놓는다.
“이거야 원…… 헉! 끄으윽!”
산을 오르던 자들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발걸음을 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다.
자신만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이 움직이는 것도 질책의 눈초리로 쳐다봤다.
화약이나 철편은 혼자만 죽는 게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까지 한꺼번에 지옥으로 끌고 간다.
움직이지 마라. 절대 움직이지 마라.
“저, 저, 저, 저건 또 뭐야! 뭐가 저래?”
남방천마는 눈을 부릅뜬 것도 모자랐다. 그는 자신이 잘못 보지 않았나 싶어서 높은 나뭇가지에 올라서서 쳐다보기까지 했다.
놀라기는 다른 사방천마도 마찬가지다.
“마야…… 그 새끼…… 점점 재미있어지는데. 저게 도대체 뭐지? 누구 들어본 거라도 있어? 머릿속들 뒤져봐. 밟기만 해도 뻥! 터지는 게 뭐야!”
북방천마는 중원에 나온 이후 가장 많은 말을 했다.
“화약 종류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