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68
68
근 반 시진 동안이나 허리 한 번 펴지 않고 매설을 거듭했다.
“좀 쉬었다 해요.”
“그럴까?”
“저기 햇볕 드는 곳이 있네요. 저기 가서 좀 쉬어요.”
다담선자는 십여 보쯤 떨어진 곳에 외로이 서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외로워서일까? 그늘이 없기 때문일까. 햇볕은 나무 주변을 따스하게 보듬어 안았다.
소립파와 다담선자는 나무 아래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들은 전신을 노출시켰다. 누가 검이라도 찔러오면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다.
그래도 공격해 오는 사람은 없었다.
소립파 곁에는 묵직한 행낭이 놓여 있고, 경험에 따르면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요물이었다. 더욱이 행낭 정도의 수폭이라면 뇌옥 일대는 평지가 되고도 남는다.
소립파와 다담선자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정하게 앉아서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웠다.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을까.
깔깔, 낄낄 웃는 소리가 수많은 죽음이 피었다 진 곳임을 잊게 해주었다. 그러던 한순간, 소립파와 다담선자의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땅속으로 푹 꺼진 듯.
쒜에에엑……!
다담선자는 혼신의 힘을 다해 신법을 전개했다.
“몽환은 난이하고 빠르지만 장거리를 가는 데는 적합지 않아. 다른 신법이 있어야겠어.”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소립파는 바람결에 흩날리는 다담선자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한참 동안 안 씻었어요. 냄새가 심하죠?”
“아니, 향기로워.”
“피이! 이제는 거짓말도 할 줄 알고.”
“내가 왜 거짓말을 해. 정말이야. 아주 냄새가 좋아.”
소립파는 다담선자의 등에 업힌 채 머리칼 냄새를 맡았다.
다담선자는 소립파를 업고도 신형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속도도 시종일관 같았다. 한줄기 유성이 흐르는 것처럼 쾌속하기 이를 데 없는 신법이다.
“절혼마녀…… 언제까지 저렇게 내버려 둘 거예요?”
“내 여자가 아냐.”
“그럼 누구 여자예요?”
“좋은 짝이 나타나겠지.”
“혹시…….”
“혹시 뭐?”
“낙화향 창기라서…….”
소립파는 피식 웃었다.
“뇌옥에서 벗어나기 전에…… 알았죠? 뇌옥을 벗어나게 되면 한동안 시간이 없을 거예요. 그러다 보면 너무 지쳐요. 주지 않는 눈길을 기다리는 심정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겪어본 것처럼 말하는군.”
“겪어봤거든요. 마야의 사랑을 얻기가 쉬웠어야죠.”
“사실은…… 나도 무섭다.”
다담선자는 멈칫했다. 하나 신형을 늦추지는 않았다.
소립파의 입에서 무섭다는 말이 나오다니, 정말 뜻밖이다.
여인과 관계된 일이라서 그럴까? 천하의 마야도 여인과의 관계는 대범하지 못한 것인가.
“풋! 그렇게 무서워요? 하기는…… 언니 정도 되는 사람을 옆에 두면 꼼짝 못하죠. 바람이라도 피워봐요. 온몸이 손톱 자국으로 도배될 거예요.”
“나는 마상(魔相)이야.”
“네?”
“사람을 해치는 무서운 존재. 후후! 그게 내 관상이야.”
다담선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소립파의 얼굴은 영준하다. 마야라고 불리기 때문에 마도와 연관해서 생각되는 것이지, 선입견 없이 보면 잘생긴 청년이다.
“절혼마녀는 귀상(鬼相)이지.”
“네에?”
“그녀의 요염함은 인간의 것을 벗어나. 그녀의 미색, 걸음걸이, 얼굴 표정…… 완벽한 요화야. 섭혼술을 익히지 않았어도 그녀 자체가 섭혼술 덩어리야. 절혼마녀가 작심하고 유혹하면 누구라도 넘어갈 거야.”
“마야는 넘어가지 않았잖아요.”
“환희마소가 있으니까. 환희마소는 섭혼술의 극치. 물이 아래에서 위로 흐르지 못하는 것처럼 섭혼술도 하위의 것이 상위의 것을 침범치는 못해.”
“호호호! 그건 요상(妖相)이라고 해야 하지 않나요?”
“아니. 그런 얼굴은 귀신에 씌인 것 같다고 해서 귀상이라고 해.”
“그래서 무섭단 말이에요?”
“마상과 귀상이 만나면 마귀상이 되는 거야.”
다담선자는 언뜻 소립파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진담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가볍고, 한 여자의 일생이 걸린 문제인데 농담을 할 사람도 아니고.
“마귀상이 되면 악마가 된다는 거예요? 둘 다?”
농담 반 진담 반이다.
“바보구나.”
“네?”
“마와 귀가 만나니 마귀. 최고의 궁합이 되는 거야.”
“예에!”
이번에는 진정으로 놀랐다. 달리는 발걸음이 휘청거릴 정도로 놀랐다. 아주 잠깐이라도 걸음을 멈추고 진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아니다. 지금까지 소립파는 농담을 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진담을 말해왔다.
다담선자는 신형을 멈추지 않고 내처 달렸다.
“놀랐구나.”
“놀랐죠.”
“세상에는 어중간한 것이 좋을 때도 많아. 인간의 궁합도 그래. 아주 나쁜 것도 사단을 일으키지만 지극히 좋은 것도 사단을 일으켜. 어떤 식으로든 인생이 변하게 되어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 그래서 그런 궁합들은 만나지 않는 게 좋아.”
다담선자는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마야의 여자 문제에 대해서는 언제나 대범했다.
가슴 한편에 절대 지워지지 않을 여자로 자신의 영상이 새겨져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도 흔들릴 수 있는 궁합이란다.
얼마나 좋기에, 얼마나 딱 맞는 상대이기에.
“그런 말은 처음 들었어요. 궁합이라니. 저와는 어때요?”
“후후! 다담…… 네가 요상(妖相)이야. 한없이 빨려들지만 서로를 해치지는 않아. 반대로 지극히 위해주는 궁합이지.”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죠?”
“다담 얼굴을 처음 보면 한없이 깨끗해. 너무 깨끗해서 손댈 수 없는 여자로 보여.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뜨거운 숨결이 느껴져. 안에, 가슴 안에 활활 타오르는 욕구를 감추고 있어. 겉이 요염하다고 요상이 아니야. 그런 건 천한 음상(淫相)이야. 진정한 요상은 꼭 다담이야.”
“귀상과 견줄 수 있나요?”
마야는 다담선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넌 내 여자야. 영원히.”
‘됐어요, 그 말이면.’
불안감이 일거에 해소되었다.
“좌로.”
다담선자는 담장을 끼고 왼쪽으로 돌았다.
“피햇!”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곧장 땅을 박차고 솟구쳐 올라 지붕 위로 올라섰다.
담장을 따라 무인 두 명이 무슨 말인가를 주고받으며 걸어갔다.
“좀 빨리 말해줄 수 없어요?”
“쯧! 실망인걸. 그 정도는 벌써 감지했어야지.”
“전 지금 숨이 턱에까지 차 있다고요!”
“하하! 알았어. 미안. 다음부터는 일찍 말해줄게.”
다담선자는 소립파를 고쳐 업으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참! 일령은 무슨 상이에요?”
“귀상(貴相).”
서슴없이 나온 대답이다.
“네에? 정말요? 전 금 동생이 귀상인 줄 알았는데……. 금 동생이야말로 정말 예쁘고 정갈하잖아요.”
소립파는 대답하지 않았다.
금연화는 명상(明相)이다. 깨끗하고 맑으며, 예의와 절도가 있는 상이다. 마상에 귀상이 천생연분이듯 명상에도 천생연분이 있다. 청상(淸相)이다. 사내의 얼굴이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맑으면 일단 청상에 근접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청상과 명상이 어울리면 만인이 부러워하는 원앙이 탄생한다.
이 세상 최고의 부부다.
혈귀대주…… 그는 청상이 아니었다. 관상만으로 놓고 볼 때 혈귀대주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수상(手相)이 관상(觀相)만 못하고, 관상이 심상(心相)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인간의 외양이 마음 한가닥만 못하다는 말이다.
관상 이야기가 나온 것은 절혼마녀 때문이며, 나빠 보이는 것은 피하자는 심산에서 한 말일 뿐, 이런 말에 절대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저기야. 사층 전각 보이지? 일단 저기까지 가.”
소립파는 오십여 장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큰 전각을 가리켰다.
다담선자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마야가 가리킨 전각을 향해서 최선을 다해 신형을 날렸다.
지상 사층, 지하 삼층.
어마어마한 규모의 전각이다. 하나 이곳이 남도문 본문(本門)이며, 지상 지하 칠층 규모의 거대한 전각이 죽은 사람까지도 다시 끌어내 고문한다는 형옥대라면 놀라움이 한결 가시리라.
‘여길 어떻게 들어가죠?’
다담선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생각만 했다.
“그냥 걸어 들어가. 천천히.”
역시 머릿속에 전해져 오는 말이 있다. 그녀 자신이 생각해 낸 것처럼, 꿈속에서 마야를 만난 것처럼 아련히 들려온다. 하지만 분명히 자신의 생각에 맞장구치는 말, 마야가 영파로 전해주는 말이다.
‘그냥 걸어 들어가라고요?’
“그래, 그리고…… 가능하면 날 보지 마. 만나는 자는 마혈을 제압하고. 별로 힘은 안 들 거야.”
‘알았어요.’
마야를 믿는다. 그가 한 말이니 지옥 구덩이라도 뛰어들어 간다.
“그렇게 믿어주니 고마워.”
다담선자는 생각을 바꿨다.
‘오늘 밤엔 이 남자를 몇 시간이나 끌어안고 뒹굴지?’
“뭐!”
‘그러니 남의 머릿속 좀 그만 들여다봐요!’
많은 사람을 만났다. 전부 사내이며, 웃음이라고는 한 번도 지어본 적이 없는 것처럼 경직된 얼굴들이다.
그런 사내들이 웃었다.
‘이게?’
“마혈!”
다담선자는 급히 마혈을 찍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웃는다. 처음에는 놀란 표정이더니 이내 은은한 웃음으로 바뀐다. 마치 즐거운 꿈을 꾸듯…… 황홀해하면서 마혈을 활짝 열어준다.
‘환희마소죠?’
“오른쪽으로.”
지하 이층으로 내려왔을 때, 소립파가 방향을 틀었다.
“오랜만이야.”
다담선자는 친근한 벗에게 하듯 다정히 속삭이며 추명반을 집어 들었다.
찰칵! 찰칵!
양 손목에 채워지는 촉감이 남달리 정겹다.
다른 병기들은 대장간에서 만들 수 있다. 하나 추명반만은 하나 만드는 데 꼬박 십여 년이란 세월이 걸릴뿐더러, 광철(光鐵)이라는 특이한 백철(白鐵)을 구하기도 하늘에 별 따기다.
병기를 되찾는 방법밖에 없었다.
다행히 남도문에서는 추명반을 분해하지 않았다.
하기는 여인의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백철이 수십, 수백 가닥 정교하게 연결되어 있으니 웬만한 장인은 분해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웬만? 아니다. 이 세상에서 한두 명 정도만이 간신히 손댈 수 있을 정도다.
“다른 것도 가져가요?”
“가져가야지.”
소립파는 마도의 혈염도를 집어 들었다.
추명반이 천하에 하나뿐인 병기라면 혈염도도 마찬가지다. 피를 머금을수록 울음을 토해내는 병기란 흔치 않다. 더군다나 마도의 마음까지 집어삼킨 마병이니 반드시 가져다 줘야 한다.
수검의 검에, 혈유의 독수전과 묵검, 절혼마녀의 삭사, 철탑거추의 망치까지 전부 챙겼다.
병기고(兵器庫)에는 색다른 병기도 많았다.
소립파는 그 속에서 길이 일 척 정도 되는 짧은 장검과 길이는 삼 척 정도 되나 폭이 청강장검보다 절반가량 두터운 장검을 챙겼다.
“챙길 만한 거예요?”
“이건 소혼검(消魂劍)이라고 부르지. 북해산 한철(寒鐵)로 만들어서 검신이 무척 차. 아주 명검이야.”
“그건요?”
“굉멸검(宏滅劍)이라고…… 불길에 천 번 이상 단련한 검이지.”
“소혼검과 굉멸검. 금 동생 주려고 그러죠?”
“어울릴 것 같아서. 자하쌍구검은 모양은 예쁘지만 백형검법을 펼치기에는 부족해. 자하쌍구검을 잘못 해석했으니 병기도 잘못 제작할 수밖에.”
“자하부주가 들으면 통곡하겠군요.”
“언젠가는 듣게 될 거야. 그건 그렇고…….”
소립파는 절혼마녀의 병기도 물색했다.
절혼마녀에게는 삭사라는 독문병기가 있지만 아무래도 사루의 검학을 펼치기에는 부족했다.
“이건 어때요?”
다담선자가 연검 한 자루를 들어올렸다.
폭이 채찍만큼이나 좁다. 낭창거림도 버들가지 같아서 삭사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손에 붙일 수 있는 병기다.
“좋은 걸 골랐군.”
“일령 동생 것은 안 골라요?”
“고르지 마.”
“왜요?”
“염화옥수는 병기가 필요없어. 그것보다 지금 일령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병기 없이도 자유자재로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야. 검을 사용하던 여자라서 당분간은 힘들 거야.”
볼일은 끝났다.
다담선자는 돌아가기 위해 소립파를 업었다. 그때,
“후후후! 안하무인이군. 남의 집 안방을 이렇게 휘저어놔도 되는 건가?”
낭랑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들어섰다.
다담선자는 긴장했다.
북검문 무인들을 많이 만났고, 남도문 무인들과도 부딪쳐 봤지만 지금까지 만난 자들 가운데서 가장 강한 자다.
기도를 잠시 훑어봤을 뿐이지만 사방천마에 비해서 절대 뒤지지 않아 보인다. 비록 궁왕 같은 절대적인 패기는 엿보이지 않지만 나이를 감안하면 훗날 크게 될 사람이다.
그때, 다담선자의 등에 업힌 소립파가 조용히 말했다.
“다담, 저자가 바로 외장 삼첨 중에 하나라는 형옥대의 대주야. 이 전각 주인이기도 하고. 기껏해야 서른 중반인데 패기가 넘실거리고 있으니, 기연을 만났거나…….”
“만났거나?”
형옥대주가 흥미로운지 되물었다.
“남도문주의 진전을 이었겠지.”
“후후후! 듣던 대로군. 과연 뛰어나. 야광 총수가 빌빌거린 이유를 알겠어. 좋아! 일견에 날 알아보는 자는 네가 처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깨끗이 죽여주지.”
스르릉……!
형옥대주는 남도문 문도들이 사용하는 청평도를 꺼냈다.
“대주, 그냥 물러서 주면 안 되겠나?”
“후후후! 네가 내 입장이라면 그러겠니?”
형옥대주의 전신에서 살기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아깝군. 광기에 가까운 자신감이나…… 인내도 있고, 사리분별도 명확한데…….”
“그래서 네놈을 죽이려는 거지, 마야.”
형옥대주는 청평도를 가슴 앞까지 끌어올린 후 비스듬히 뉘였다.
타타타닥……!
병기고 밖에서는 급박하게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상당히 많은 숫자다. 마혈을 제압당한 자들까지 혈을 풀고 움직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