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73
73
“이게 바로 공성계(空城計)지.”
“말도 안 돼요. 억지로 갖다 붙이지 마세요.”
“후후! 억지가 아냐. 이렇게 불을 때고 있으면 혹시 유인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오지 않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러나저러나 주위가 너무 조용하니 기분 나쁘군요.”
“조용한 게 아니지. 지금쯤……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은 추혼단주일 거야.”
“그럴까요?”
“우리 위치는 벌써 잡혔어. 그런데도 쳐오지 않는 것은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려는 조심성 때문인데. 천비대가 실패했다는 소문도 들었을 테고.”
“알면서도 잡으러 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지금 오면 잡을 수 있는데, 너무 신중한 게 탈이지.”
“혹시…… 그런 점까지 염두에 두고 이리로 온 건 아니죠?”
그냥 입에서 나오기에 해본 소리다. 그러나 막상 말을 해놓고 보니 정말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급히 다시 말했다.
“하오문에서 추혼단주에 대한 정보를 줬죠? 무공, 성격, 가족들, 성장 과정…… 그렇죠?”
소립파는 피식 웃었다.
맞다! 어쩐지! 도주를 하려면 산 밑으로 가는 게 정상인데 오히려 산 위로 거슬러 오르는 게 이상하다 싶었다.
그의 이런 행동은 답평의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답평이 죽기 전에는 사로잡혀서 뇌옥에 갇힐 만큼 여유가 있었는데, 그가 죽고 나자 최악의 상황을 설정하고 움직인다.
마야는 남도문이 돌아가는 상황을 환히 꿰고 있는 게 틀림없다.
금연화는 비로소 마음을 턱 풀었다. 불빛을 보고 남도문 무인들이 쫓아오면 어쩌나 적지 않게 마음을 졸였는데.
“사자암 쪽으로는 제삼무신가 무인들이 둘러쌌을 거야. 철궁대가 양쪽 산을 점하고 있으니 밑은 제삼무신가 사람들 차지지. 후후후! 추혼단은 우릴 구벽사에서 잡을 계획이야.”
“구벽사가 여기서 먼가요?”
“조금만 가면 돼. 내일 날이 밝은 다음에 출발하면, 보자…… 한 시진 정도면 당도하겠군.”
모닥불이 활활 타올랐다.
산속의 밤은 다른 곳보다 유독 추운 법인데, 따뜻한 불기 덕분인지 전혀 춥지 않다.
금연화는 살며시 몸을 눕혔다.
오늘 하루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어떤 일은 아직까지 가슴을 진탕시킨다.
피곤했다. 긴장감 때문에 피곤한 줄도 몰랐는데,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풀어지니 잠이 쏟아진다.
그녀는 그대로 잠들었다.
짹짹! 째째잭! 짹!
금연화는 산새들이 재잘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산새들은 낮과 밤의 경계에서 우짖는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빨리 낮을 맞이하는 축생이리라. 밤에는 잠을 자기 때문에 조용하지만 날이 밝아오면 어김없이 재잘거린다.
길게 기지개를 켜는 그녀의 눈에 아직도 앉아 있는 마야가 보였다.
“밤새도록 한잠도 안 잔 거예요?”
소립파는 여느 때와 달라 보였다. 원래가 할 말이 없으면 말문을 닫는 사람이지만 오늘은 무뚝뚝한 차원을 넘어서 상당히 우울해 보였다.
돌파구를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인가.
모닥불은 꺼져 있다. 온기 한 점 없이 싸늘한 것이 오래전에 꺼진 것 같다.
“뭐로 요기를 하죠? 아침은 들어야 할 텐데…….”
소립파는 일절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이렇게 깊이…….’
일어나서 몸을 움직여 추위에 얼어붙은 근육을 풀었다.
그런데도, 눈앞에서 부산을 떨고 있는데도 소립파는 앉은 자세 그대로 꼼짝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눈동자마저 꿈쩍이지 않는다.
금연화는 불현듯 이상한 예감이 들어 바짝 다가섰다.
“안 일어나요?”
“…….”
산 자의 모습이 아니다.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 뭐라고 할까? 산속에서 얼어 죽은 사람 같다고나 할까?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금연화는 다급히 앉으며 손가락을 코에 대봤다.
숨이 없다. 어깨를 짚어보니 나무토막처럼 뻣뻣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아무리 밤새 안녕이라고, 어젯밤까지 멀쩡했던 사람이 밤사이에 죽기라도 했단 말인가.
완맥(腕脈)을 짚어보니 맥박이 뛰지 않는다.
정말 죽었나? 아니다. 눈동자가 돌아가지 않았다. 혀도 말려 들어가지 않았다. 숨이 없고 맥이 뛰지 않지만 살아 있기는 한 것 같다.
마야가 어떤 상태인지 확실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다.
금연화는 마야의 명문혈(命門穴)에 손바닥을 대고 조금씩조금씩 진기를 주입했다.
아! 안 된다. 이토록 경맥이 굳어 있는 사람은 처음이다. 마치 돌덩이에 진기를 주입하는 것과 같다.
‘경맥이 굳어간다더니…….’
다담선자 같으면 당장 알몸이 되어 부딪쳐 갔으리라.
그 방법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는 몰라도 지금까지 그래왔으니 유일한 방법이지 않은가.
절혼마녀라도 있다면. 그녀도 마야의 여인이 되었으니 망설임없이 행할 텐데.
그렇다고 이렇게 앉아 있을 수도 없지 않은가.
마야를 옆으로 뉘였다.
소립파는 돌덩이가 되어 누웠다. 앉았던 모습 그대로, 팔은 팔짱을 낀 상태이며, 무릎은 굽힌 채로…… 나무토막이 되어 풀썩 넘어갔다.
살아 있는 사람인지 의심스럽다.
금연화는 양손에 진기를 주입하여 힘껏 전신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추궁과혈(推宮過穴)이 통할지 통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를 더 심한 상태로 몰아넣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일다경, 이다경…….
그토록 시끄럽던 산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디선가 울고 있을 터이지만 그녀의 귀는 어떤 소리도 담지 못했다. 만약 누군가가 암습을 가해온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도 할 수 없다. 추궁과혈에 온 신경을 집중시켜야 한다.
팔짱은 풀어지지 않았다. 무릎도 풀리지 않았다. 체온은 여전히 얼음처럼 찼고, 혈색은 푸르뎅뎅하게 변해갔다.
아침때보다 훨씬 악화된 것이다.
금연화의 이마에 구슬 같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진기를 너무 쏟아 부어 진기 운행이 순조롭지 않다. 그래도 한다.
영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태가 어떤지 아는 것도 아니고, 누구한테 도움을 청할 수도 없다. 진기 주입이라도 된다면 어떻게 해보련만 그마저도 꽉 막혔다.
한 가지는 안다. 이대로 놔두면 죽고 만다는 것.
주무르고 또 주무르고, 혈이란 혈은 모조리 문지르고…….
탁! 탁탁! 스윽! 슥! 부욱……!
혈을 다루는 방법이 각기 다르니 각 혈을 지날 때마다 흘러나오는 소리도 다르다.
건강한 사람도 한 번만 시술을 받고 나면 전신에 두들겨 맞은 것처럼 멍이 든다는 강술법(强術法)을 사용했다.
마야는 고집이 참 센 사내다. 그만큼 정성을 쏟았으면 기침이라도 한 번 해주련만 돌덩이 상태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금연화는 한 시진이라는 긴 시간이 흘러서야 손을 멈췄다.
틀린 것인가. 도저히 방도가 없는 것인가. 마야는 특이한 능력을 많이 가진 사람인데 이럴 때 쓰는 재주는 없는 것일까.
마야는 여자가 없어도 경맥이 굳어지는 현상을 억제할 수 있다.
위장은 상할지언정 화우를 복용하면 몸속에서 뜨거운 불길이 지펴진다.
마야는 수시로 화우를 복용했다.
밤이 되면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다담선자나 절혼마녀와 잠을 청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거센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제 밤만 해도 마야는 절혼마녀와 격렬한 정사를 벌였다. 아침에는 화우를 복용했고…….
이렇게 느닷없이 경맥이 굳어져서 쓰러질 상황이 아닌 것이다.
한참 동안 딱딱하게 굳어 있는 마야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혹시 하는 심정에서 그의 품을 뒤졌다.
혹여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기재해 놓은 게 있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현 상태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게 있었으면…….
품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은잠사 한 타래와 자그마한 목갑이 전부였다.
은잠사는 한쪽으로 치워놓고 목갑을 손바닥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단환(丹丸), 영물(靈物)…… 상당한 기대를 갖고 열었건만 안에서 나온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금침(金針)이었다.
‘고작 침…… 아니, 아냐! 왜 침을 가지고 다니지? 이건 본인 스스로 시술을 했다는 뜻이야. 이런 현상이 전에도 있었어. 전에는 이렇게 되기 전에 시술을 했지만 이번에는 기회를 놓친 거야.’
금침을 손에 쥐면 뭐 하나. 시술 방법을 모르니 그림의 떡이지 않은가. 이와 비슷한 상태라도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금연화는 깊은 한숨과 함께 목갑 뚜껑을 다시 닫았다. 그 순간,
“엇!”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토해냈다.
목갑 뚜껑을 닫기 전에 무엇인가 그림을 본 것 같다. 얼핏 스쳐 보았지만 경혈도(經穴圖)였던 것 같다.
그녀는 다시 급하게 뚜껑을 열었다.
보인다! 거기에 머리카락보다도 가느다란 선이, 세침같이 가느다란 것으로 새겨놓은 경혈도가 있다.
처음에 보지 못한 것은 음각된 경혈도에 아무런 색도 입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심없는 사람은 목갑이 오래되어 지저분해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금연화는 목갑 뚜껑에 새겨진 경혈 순서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그림에는 경맥이란 것이 없다. 혈도만 존재할 뿐, 순서가 없다. 시작과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
‘후우! 할 수 없지. 이거라도 해보는 수밖에.’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지켜보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나.
금연화는 목갑에 그려진 혈도를 찾아 금침을 꽂기 시작했다.
‘척중혈(脊中穴)에 오 푼 깊이로…….’
제10장 입함정(入陷阱) ― 함정에 빠지다
1
금연화는 목갑에 적힌 대로 정성스럽게 침을 놓아갔다.
그러다 문득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자신이 놓은 침과 목갑을 번갈아 살펴봤다.
마야의 몸에 꽂힌 침은 예순여덟 개. 그녀의 손에 들린 금침은 열세 개. 모두 여든한 개다.
그 부분은 이상이 없다.
한 개를 꽂든, 두 개를 꽂든 이상이 있으면 시술을 하는 것이며, 몇 대를 맞아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가만…… 뭔가 이상한데…… 뭐지?”
그냥 시술하기에는 께름칙하다.
이미 일흔 개 가까이 시술했는데 이제 와서 이상한 게 있으면 어쩔 거냐고 하겠지만, 그래도 느낌이 다르니 원인을 찾아야 하지 않겠나.
“엇!”
금연화는 깜짝 놀랐다.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놀라움이 커서 얼굴마저 하얗게 질려 버렸다.
목갑대로라면 지금 그녀가 들고 있는 금침은 임맥(任脈) 관원혈(關元穴)에 놓아야 한다. 깊이는 세 치로 되어 있다.
여기에 잘못이 있다.
세 치? 아니다. 틀렸다. 관원혈에 침을 놓을 때는 두 치로 놔야 한다. 의원은 아니지만 무인 역시 혈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깊이 있게 의술을 배웠다.
이 정도는 상식이다.
전부 이런 식이다.
화개혈(華蓋穴)에는 이미 침을 놓아버렸다. 깊이는 삼 푼이어야 한다. 한데 목갑에는 두 푼으로 되어 있고, 무의식적으로 두 푼으로 놓았다.
정상적인 시술이 아니다.
어떤 혈은 정상보다 깊었고, 어떤 혈은 얕았다.
물론 그렇게 놓을 수도 있다. 하나 침을 어느 깊이로 찔러야 하는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연구해 왔다. 그리고 지금에서는 확실하게 정립되었다.
침을 찔러 넣어서 혈이 가장 잘 자극되는 깊이.
목갑은 상식을 벗어나고 있으니 침에 무지한 자가 그렸거나 아니면 침술이 정립되기 전에 그려 넣은 것일 게다.
‘어떻게 하지?’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남은 것을 정상적으로 놓는다 해도 이미 놓아버린 예순여덟 개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휴우! 오늘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이렇게 간단한 것도 이제야 찾아내고. 도대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네.’
금연화는 금침을 들어 관원혈에 찔러 넣었다.
깊이는 세 치였다. 목갑에서 나온 침이니 목갑 뚜껑에 그려져 있는 것처럼 놓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여든한 개의 침을 다 찔러 넣고도 반각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이제는 더 이상 손써볼 것도 없다.
죽음을 그만 받아들이자는 마음이 들 즈음 소립파의 몸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툭! 투툭……!
금침들이 하나, 둘 밀려 나오더니 툭툭 땅에 떨어졌다.
이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자물쇠처럼 단단하게 채워졌던 팔짱이 풀렸다. 두 팔이 힘없이 땅에 떨어져 축 늘어졌다.
앉은 모습으로 굳었던 두 다리도 풀렸다.
“사, 살았어!”
금연화는 한편으로는 기뻤고,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그토록 염원할 때는 외면하더니 포기할 무렵이 되니까 정상으로 돌아온단 말인가.
코에 손을 대보니 바람이 느껴진다. 완맥을 잡아 맥을 관찰해 보니 정상적으로 뛴다.
마야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감쪽같이 나은 것이다.
‘어쨌든 됐어. 나았으니까.’
어찌나 애를 졸였는지…… 전신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나른했다.
생각할수록 희한한 사람이다. 사람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가 살아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경맥이 굳어간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심할 줄은 알지 못했다.
그가 뇌옥에서 한 말이 떠오른다.
사지만 자유롭게 놀려도 좋겠다고 했다. 평생 동안 무공을 배우는 목적이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고작 아픈 데 없이 살다가 죽기 위해서라고.
이제는 그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불쌍한 사람이야.’
소립파는 정신이 들자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 길게 기지개를 켰다.
우둑! 우두둑……!
움직일 때마다 관절에서 소리가 울린다.
“놀랐겠군.”
역시 태연한 말투였다. 한쪽에 모셔져 있는 목갑과 금침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뜨거운 태양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제 봄이 시작, 태양의 열기는 뜨겁다기보다는 따스한 편이다.
“항상 그래요?”
그는 머리를 한 바퀴 돌려 목을 풀었다.
우둑! 우두두둑!
목뼈가 부러지지나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