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76
76
마야 4
동득불행(疼得不行) ― 견딜 수 없이 아프다
제1장 선통사(先通死) ― 죽음을 예감하다
1
소립파는 좀처럼 웃지 않았다. 배꼽을 움켜잡고 깔깔거릴 농담에도 마지못해 피식 웃는 게 고작이었다.
경직된 얼굴, 무거운 침묵.
그에게 심각한 고민이 있다는 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거야 원, 답답해서……. 돼지 멱따는 소리라도 듣는 게 낫지 빗줄기 잔뜩 머금은 먹구름은 차마 못 보겠네.”
“일이 터지긴 터질 것 같지?”
“이런…… 싸가지 없는 자식하고는.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어디서 어른한테 반말 짓거리야.”
“응? 늙은 망태기가 뭘 잘못 먹었나, 왜 안 하던 트집을 잡고 그래? 내가 한두 번 반말 짓거리했어? 정말 한판 해보려고?”
시마와 혈유는 아침부터 티격태격했다.
마도는 혈염도로 자신의 허벅지를 갈라 피를 먹였다.
고루쌍마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무엇인가 정담을 속삭였고, 철탑거추는 근심걱정이라고는 티끌만치도 없는 사람처럼 큰대자로 드러누워 코를 골았다.
마야처럼 웃음을 잃은 사람이 또 있다.
수검이다. 그는 식사를 할 때와 마야가 이야기할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검과 함께 살았다.
철컥! 촤아악! 척!
검을 뽑아 베거나 찌르고, 다시 검집에 집어넣고.
너무 빨라서 육안으로는 식별되지 않는다. 고도의 느낌으로 잡아내야만 하는 검초가 쉴 새 없이 전개된다.
언제 봐도 수검의 사흡검법은 지독히 빠르다.
하나, 지금은 그 누구도 빠르다는 생각을 갖지 못했다. 마도가 아니면 수검을 잡을 사람이 없을 거라던 생각도 지워 버렸다.
수검은 너무 싱겁게 당했다. 서방천마는 그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마도가 상대했으면 어땠을까? 마찬가지 결과가 나왔을 게다.
객관적으로 마도가 수검보다 한 수 위라고는 하지만, 그들의 차이라는 건 종이 한 장에 불과하다. 때문에 비무든 결전이든 검을 맞댈 때면 두 사람 모두 잔뜩 긴장한다. 허점을 먼저 드러내는 쪽이 당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서방천마와는 차이를 말할 수 없다. 하늘과 땅처럼 엄청나게 벌어진 격차는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게다.
수검을 어린아이 데리고 놀듯이 간단하게 무너뜨린 서방천마.
쓰러진 수검을 향해 경멸하듯 보내던 잔소(殘笑).
수검은 그때의 치욕을 잊지 못한다. 반드시 서방천마를 다시 만날 것이며, 사흡검법이 지상 최대의 쾌검이라는 점을 인식시킬 것이라고 다짐한다.
수검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그의 얼굴을 보기만 하면 누군가에게 적의를 불태우고 있다는 사실쯤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수검의 전신에서는 지독한 살기가 배어 나왔다.
수검의 눈빛, 수검의 손, 수검의 검……
그의 몸에는 피 대신 분노가 흐르고 있으며, 골수에는 원한이 채워져 있다.
모두들 불안해하면서도 태평하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한가하고 평화롭다.
“정기신(精氣神)의 완벽한 조화를 추구하는 것은 무인의 본능이나 굳이 애써서 추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니, 비워지면 채워지고 채워지면 넘치는 그릇처럼 자연의 힘으로 채워지게 하는 것이 능사…….”
금연화는 일령과 절혼마녀에게 마야에게서 얻은 심득을 전수해 주는 중이었다.
사박, 사박……!
다담선자는 옷자락이 끌리는 소리를 숨기지 않고 걸어갔다.
대체로 무공을 논할 때나 심득을 전수할 때는 사소한 잡음마저도 삼가는 것이 도리다.
금연화는 신경이 쓰이는 듯 말문을 닫고 다담선자를 쳐다봤다.
일령과 절혼마녀도 가볍게 인상을 찡그렸다.
누군가에게서 그가 터득한 심득을 전수받는다는 것은 기연을 얻는 것과 진배없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 평생을 살아가면서도 손꼽을 정도로 몇 번 되지 않는다.
사박, 사박……!
다담선자는 여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왔다.
“언니…….”
“왜?”
마야의 심부름인가? 그가 부른 걸까?
절혼마녀는 다담선자가 부르기 무섭게 대답했다.
“어제 언니가 잤어요?”
“응?”
절혼마녀는 잠시 무슨 말인가 싶었다. 자신이 잘못 듣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마야가 잠자리를 같이하는 일은 암묵적으로 이루어졌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상의할 성질도 아니고, 그런 일을 입 밖으로 꺼낸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지 않은가.
한데 그와의 잠자리를 물어오다니. 이 자리에는 자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금연화와 일령도 있고, 더욱이 깊고 오묘한 무리를 경청하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
그러나 다담선자의 말뜻은 명확했고, 절혼마녀도 알아들었다.
절혼마녀는 아미를 찡그리며 대답했다.
“아니. 난…… 동생이 잔 줄 알았는데…….”
다담선자는 절혼마녀의 마음 같은 것을 헤아릴 생각조차 하지 않고 무심히 말했다.
“아뇨. 저도 자지 않았어요.”
“그럼……?”
“아무도 자지 않은 거예요.”
남자가 여자와 하루 정도 같이 자지 않았다고 문제될 것은 없다. 이 세상 어떤 남녀도 그런 문제로 신경을 곤두세우지는 않는다. 하나 마야는 신경을 써야 한다.
“화, 화우는!”
절혼마녀가 급히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조급함이 묻어났다. 오의 전수를 방해했다는 불쾌감이나 잠자리를 거론한 데서 오는 민망함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온 거예요. 화우도 줄지 않았어요. 아니, 손도 대지 않았어요. 이게 무슨 일인지.”
마야는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다담선자도 그의 곁에는 날마다 여자가 있어야 한다는 정도만 안다. 여자가 없을 경우에는 차선책으로 위장이 뒤집히는 고통을 감내하고 화우를 복용해야 한다는 정도밖에 모른다.
음기를 접해 양기를 자극하는 것.
원인을 알아야 해결책이 나오는데 돌출되는 현상 몇 가지만 알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소립파에게 해결책이 없는 게다. 있다면 진작 말해주었을 게다. 해결책이 없기에 침묵하는 게다. 이미 발버둥 칠 만큼 발버둥 쳐봤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게다.
이제는 여자조차 품지 않았고, 화우도 복용하지 않았단다.
그런 방도마저 한계에 부딪친 것인가. 음기를 접해 양기를 북돋는다는 미봉책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른 것인가.
“저기…… 급박한 일들이 많아서 말할 기회가 없었는데요.”
금연화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때 있었던 일, 마야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일, 지금 생각해도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는 기막힌 일을.
말을 나누는 사람은 여인 네 명이다. 하나 듣는 귀는 수없이 많다. 허름한 농가에 있는 사람들은 무공을 수련하고 있거나, 잠을 자고 있거나, 농을 주고받으면서도 네 여인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그중 시마의 눈가에 암울함이 스쳐 갔다.
‘석신(石身)…… 빌어먹을! 그렇군. 그래서 마야의 안색이 그토록 어두웠군. 힘든 싸움 때문이려니 생각했는데…… 빌어먹을!’
가슴이 답답하다. 어디 술이 없을까? 누구 얄밉게 구는 놈이 없나? 한 대 쥐어 패면 속이 좀 풀리려나.
혈염도에 자신의 피를 먹이던 마도가 눈치 빠르게 시마의 표정 변화를 보았다.
시마가 마도의 눈길을 의식하고 눈을 찔끔 감아버렸다.
마도의 눈길은 집요했다. 눈길만 쏘아오는 게 아니라 도기(刀氣)까지 뿜어져 왔다. 당장 눈을 뜨지 않으면 혈염도에 피를 먹이고 말겠다는 잔인한 살기가 묻어왔다.
“빌어먹을! 이놈이나 저놈이나 왜 이 지랄들이야!”
시마는 번쩍 눈을 뜨고 마도를 노려봤다.
마도는 고갯짓으로 농가 밖을 가리키고는 먼저 걸어나갔다.
농가의 주인은 자식 복이 없었다.
평생 자식을 소원하였으나 삼신할미의 저주를 받았는지 태기가 없었다. 그러다 늘그막에, 일흔이 넘긴 나이에 죽어서 메말라 버린 고목에 꽃이 피었다.
태어난 아이는 남아(男兒).
노부부의 자식 사랑은 끔찍했지만 세월은 어쩔 수 없는지 아이가 채 열 돌도 되기 전에 눈을 감고야 말았다.
노부부가 죽은 후에도 아이는 무럭무럭 성장했다.
노부부에게는 말 한마디에 목숨을 바칠 검귀(劍鬼)들이 마흔 명이나 있었다.
세상은 그들을 모른다. 하나 그들은 세상을 안다.
마흔 명의 검귀들은 노부부가 남긴 혈육을 지극정성으로 키웠을 뿐만 아니라, 그를 보필할 마흔 명의 검귀를 따로 양성했다.
그들 중 가장 강한 네 명이 건곤사괴다. 나머지 서른여섯 명이 삼십육고질이다.
아이는 장성하여 일세를 풍미했고, 그로부터 한참 세월이 흐른 지금은 북망산천을 코앞에 둔 노인이 되었다.
그가 지금의 하오문주다.
그가 태어난 집은 드넓은 벌판 한복판에 세워져 있다.
한생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집은 그가 태어났을 적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한 게 없다. 넓은 벌판에는 논도 밭도 들어서지 않았으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집 한 채만이 모진 풍상을 겪어내고 있다.
농가, 농가에는 하오문의 영욕과 한이 짙게 배어 있다.
하오문은 분명히 천대받는 문파이다.
그들이 무림에 속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불쾌하게 생각하는 인물도 상당수다. 하나 현 하오문주의 생가이며, 역대 하오문주들의 손때가 묻은 집 한 칸조차 유지하지 못하게 할 만큼 야박하지는 않다.
그렇게…… 절반쯤은 동정 삼아 베풀어준 아량 덕분에, 절반은 그들이 지닌 정보를 수시로 제공해 준 덕분에 농가는 유지되고 있다.
농가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다. 방이 서너 개쯤 되고, 부엌이 있고, 짚단도 높이 쌓여 있다. 한쪽 구석에는 장작이, 그리고 그 옆에는 닭장이 보인다.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농가다.
농가의 진면목은 맨 윗방, 골방이라고도 불리며 온갖 잡동사니를 쌓아두는 윗방에 들어섰을 때 드러난다. 볏가마니를 들어올리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나고, 그 순간부터 이곳은 농가가 아닌 하오문의 영고단(永古壇)으로 돌변한다.
대대로 하오문을 이끌어봤던 하오문주들의 영신(靈身)이 이곳에 있다. 그들은 천약관(千藥棺)에 담겨 생전의 모습을 유지한 채 수십, 수백 년의 세월을 지탱해 왔다.
영고단은 한여름에도 얼음이 언다는 곳이다. 선조들의 유체가 썩지 않는 것은 천약관에 담긴 천약의 효험도 크지만, 워낙 추워서 육신을 썩게 만드는 균이 침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오문주와 소립파는 유등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영고단은 하오문 사조들의 유체가 모셔져 있는 곳이니만큼 마야가 앉아 있다는 사실은 하오문주에 버금가는 예우를 해준 것이 된다.
소립파는 뜨거운 차를 마셨다.
“이놈아, 이제 제발 나 좀 놔주면 안 되겠냐?”
하오문주는 부아가 치미는지 뜨거운 차를 단숨에 벌컥 들이켰다. 그리고는 목구멍이 데였는지 금방 켁켁거렸다.
“배고픈 호랑이가 토끼를 물었는데 그냥 놓아줘? 말도 말 같아야 들어주지.”
소립파는 뜨거운 차를 한 모금씩 천천히 마셨다.
“좋아! 말해봐! 또 뭐를 어떻게 해줘야 하는 건데! 그깟 십비지공 하나 가지고 너무 우려먹는 것 아냐!”
“그깟이라…….”
“이런! 빌어먹을! 쳇! 썩을! 그래, 취소다! 대단하고 대단하신 십비지공이다!”
“아무도 모르게 마차 한 대.”
“…….”
하오문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차 한 대 구해주는 것은 일이라고 할 수도 없다. ‘아무도 모르게’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 말이 지닌 뜻은 더욱 중요하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빌어먹을 새끼! 혼자 뒈질 생각이야!”
“도움이 안 되니까.”
하오문주는 침묵했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을 벙긋거렸지만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계집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요 근래 계집들과 통 자지 않았다고? 화우도 복용하지 않고?”
“후후!”
“거의 뒈져 간다는 소리지?”
“십비지공은 영아 때부터 수련시켜야 돼. 다른 무공을 접한 사람은 절대 배울 수 없고. 앞으로 이십 년. 이십 년만 숨어 살아. 그럼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초절정고수들이 등장하게 될 거야.”
“누가 십비지공 묻고 있어? 지금 십비지공 말하는 게 아니잖아. 그까짓 십비지공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고.”
“또 그까짓.”
“그까짓 거지 뭐 별거야!”
이번에는 소립파가 침묵했다.
둘 사이의 대화는 그렇게 이어졌다 끊어지고, 끊어졌다가는 다시 이어졌다.
“다담까지 버릴 생각이라면 정말 안 좋은 건데……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석신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죽는 거야?”
“석신을 당했다는 말만 듣고 내가 이렇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는군.”
“그럼…… 정말…… 저, 저주의 자오법신(子午法身)!”
소립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오법신만이 석신을 풀 수 있지.”
“어, 어떤 놈이 자오법신을! 누가 그 저주의 대법을 알고…… 설마, 그 계집이!”
“놈이 사랑하던 여자야. 계집이라는 말은 삼가해.”
“…….”
또 침묵.
“내가 떠나면 사냥을 당할 거야. 내가 돌아올 가능성은 일 할도 안 돼. 그 정도는 알 테고. 그래도 미련한 위인들이 포기하지 않을 테니 적당히 알아서 포기시켜 주고. 우선은 살아남는 데 최선을 다해줘.”
“빌어먹을! 발등에 불 떨어진 놈이 누군데 누가 누굴 걱정해.”
“후후! 잘 알면서…… 하오문이 손을 놓으면 저들은 사흘도 버티지 못해.”
“놈들이 하오문인들 가만 내버려 둘 것 같아? 눈에 띄는 대로 아작 내겠지. 빌어먹을 놈! 이렇게 손 뗄 바에는 아예 시작이나 하지 말지. 이쪽저쪽 잔뜩 들쑤셔 놓기만 하고……. 언제 떠날 거야?”
“오늘 저녁.”
“빚쟁이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급해! 내일 아침에나 떠나. 그전에는 힘들어. 저놈들 눈치가 오죽 귀신같아야 말이지.”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