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79
79
“전에 제가 한 말 기억해요?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칠 자신이 있거든 마야에게 안기라고 한 말요.”
절혼마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 그때예요. 저도 마야도 언니에게 요구하고 있었어요. 목숨을 달라고. 벌써 수십 번 말했는데 너무 늦게 알아듣는군요. 언니는 너무 둔해요.”
“그랬어? 미안해.”
절혼마녀는 비로소 편해졌다.
‘이런 여자를 만난 건 행운이지. 이런 여자와 함께한 남자를 위해 죽는 것도 행복이고. 그랬어. 다담이 일어설 때, 나도 일어섰어야 했어. 죽어줄게. 기꺼이.’
절혼마녀는 다담선자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제2장 내적인(來的人) ― 오는 사람
1
졸졸졸……!
투명한 개울물이 활기차게 바위를 넘고 굽이를 돌아 흘러갔다.
“얼음에 뒤덮여 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봄이군.”
여인은 섬섬옥수를 개울에 담그더니 맑은 물을 떠올렸다.
물은 곧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물은 손으로 잡을 수 없어. 그렇지?”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여인도 대답을 기대했던 건 아닌 것 같다. 그녀는 물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즐기는 듯 몇 번이고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여자가 있다고?”
“세 명입니다.”
이번에는 즉각 반응이 왔다.
“네 명이 아니고 세 명?”
“금연화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금연화가? 의외인데? 떨어져 나가려면 일령이 떨어져 나가야지 왜 금연화가 떨어져?”
“…….”
“좌우지간 재미있는 사람들이라니까. 하도 상식을 뒤집는 바람에 어느 게 정상이고 어느 게 비정상인지 분간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그 여자들, 예뻐?”
“셋 다 각기 다른 미(美). 어느 한 여자를 고르라면 몇날 며칠을 고민해야 할 것으로.”
“예쁘단 말 한 번 길게 하네. 놀라운 일이야. 자하일봉이야 원래 소문난 미모이니 그렇다 쳐도…… 일령이 그렇게 예뻤나? 한낱 그림자 따위가? 닳고 닳은 낙화향 창기가, 뱃놈들 비린내를 뒤집어쓴 선루주가 자하일봉과 견줘?”
“낙화향 창기라고는 하지만 절혼마녀는 원래 요녀로 소문난…….”
“묻지 않았는데?”
“…….”
말이 뚝 멈췄다.
졸졸졸……!
다시 개울물 소리가 들린다. 인간의 말 때문에 잠시 숨죽였던 자연의 소리가 경쾌한 가락을 띠고 흘러간다.
물 흐르는 소리는 때로 훌륭한 노랫가락이 된다. 자장가가 되기도 하고, 마음을 안정시켜 주기도 하며, 새소리 바람 소리와 섞여서 환상적인 화음을 일궈내기도 한다.
얼마 동안이나 물의 노래를 듣고 있었을까?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서녘 하늘을 물들이고 있으니 근 반나절 동안은 한자리에 머물렀다. 그때,
쉬익! 쉬이익!
사방에서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분분히 일어났다.
물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면 다른 소리가 섞여드는지 몰랐을 만큼 아주 극미한 소리다.
“남도문이 아예 뿌리를 뽑으려는 것 같습니다.”
새로이 나타난 자 중에 한 명이 가쁜 숨도 고르지 않은 채 말했다.
“자세히.”
“넷! 죽은 답평 자리를 꿰차고 앉은 자는 구환자(九還子)라는 인물입니다.”
“구환자. 말은 많이 들었어. 광동성의 정기를 한 몸에 받았다던가 하는 자, 아냐?”
“맞습니다. 그 구환자가 야광 총수가 되어서 추격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추혼단이 선발이 되어서 무서운 속도로 거리를 좁히고 있습니다.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일 듯.”
“네 판단까지는 바라지 않아.”
“죄송. 철궁대는 좌측, 제삼무신가 궁수들은 우측을 맡아서 멀리 휘돌며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도망(桃網)이군.”
“…….”
한 번 질책을 받은 자는 자신의 판단을 말하지 않았다.
복숭아처럼 외곽이 둥글게 말아 오르다가 꼭지가 맞닿는 순간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도망.
도망을 펼침에 있어서 지극히 주의해야 할 점은 은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망은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반면 펼치기가 어려워서 포위망이 형성되기 전에 눈치 채면 십중팔구 놓치게 된다. 또한 도망을 형성하는 중에는 대응 방법도 마땅치 않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안고 있다.
그래서 적의 시선을 차단하는 작업을 병행하게 된다.
추혼단의 추격이 그것이다. 그들은 무섭게 추격하는 척하면서 교묘하게 도망 안으로 몰아넣는 역할을 맡았다. 잡을 듯하면 놓아주고, 조금 멀어졌다 싶으면 따라붙고.
그렇다고 추혼단의 추적을 간과해서는 그대로 끝장난다.
추혼단만으로 십 할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서면 그들은 하시라도 포위망을 포기하고 살격으로 전환한다. 허가 실로 변화하여 목을 조여오는 순간이다.
“보고할 게 그것뿐이야?”
“총동원 인원은…….”
여인은 더 듣기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제이무신가. 그들이 어디 있는지 말하지 않았잖아.”
“그들은…….”
“왜?”
“제이무신가 무인들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제일무신가는?”
“그들 역시.”
“호호호!”
여인은 맑게 웃었다. 옥구슬이 찰랑거리는 듯 영롱한 웃음소리다.
“사방천마와 천멸도의 문둥이들은 마야를 쫓고 있을 테고?”
“그렇습니다!”
“차도살인이군. 마야의 능력을 굉장히 높이 봤어.”
여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야는 북검문을 희롱한 자다. 마야 때문에 천랑대, 천비대에 이어 칠성군까지 한자리에 모였는 데도 놈을 잡지 못했다. 놈이 간교해서 잡지 못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당시, 추격에서 북검문의 머리는 삼뇌로 일컬어지는 만박선생이었다.
놓칠 만한 이유가 천 가지라도 입을 열 수 없게 만든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여인은 한참 동안 생각을 거듭한 끝에 입을 열었다.
“받아 적어. 첫째, 남도문주는 차도살인계를 펼쳤다. 마야를 쫓는 자는 사방천마와 천멸도 살수들이나…… 결과는 반대로 나올 것이다. 마야의 손을 빌려서 사방천마와 천멸도 살수들을 몰살시킨다면 유계가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관건은 마야가 사방천마를 죽일 수 있느냐는 것인데, 이 부분은 확인이 필요하다.”
여인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유계와 마야의 싸움…… 누가 봐도 계란과 바위의 싸움이다. 마야가 기이한 능력을 지녔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초마인들이라고는 하지만 유계와 비교하면 터럭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남도문주는 무엇을 노리고 결과가 뻔한 싸움을 일으킨 것일까?
‘마야가 사방천마를 죽인 후에…… 마야를 북무림으로 몰아내면? 유계는 마야를 쫓아 북무림으로 갈 수밖에. 또 하나의 차도살인! 북무림은 필연적으로 유계와 부딪친다! 남도문이 충돌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들 테니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또 있다.
현재 일을 주도하는 자가 남도문주가 아니라 만사무불통지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어쩌면 마야가 사방천마를 죽이는 순간이 남북무림을 산산이 조각내었다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조립하는 대변혁의 발단일지도 모른다.
‘어디서부터 관계를 짚어갈까.’
대답은 이미 나와 있다.
벌써 벌어진 일이 있다. 추혼단, 철궁대, 제삼무신가와 마야의 수족들은 어떤 식으로든 싸우게 되어 있다. 그 결과를 지켜보면 된다. 마야의 수족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지켜보면 일을 주도하는 자가 누군지 파악할 수 있다.
마인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모조리 죽인다?
그렇다면 남도문주다. 수족을 잃은 마야는 그의 생활 터전인 북무림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유계에 쫓기는 몸이 되어 있겠지만.
포위망이 뚫린다? 그리고 마야의 수족들이 기사회생한다?
이는 만사무불통지의 생각이다. 포위망을 뚫는 정도가 아니라 남도문 무인들에게 어느 정도 타격을 줄 수 있다면 더욱 좋다.
상황이 그렇게까지 악화된다면 꿈쩍 않고 있는 제일무신가, 제이무신가도 어쩔 수 없이 출동해야 한다. 미꾸라지가 날뛰는 모습을 더 이상은 지켜볼 수 없을 테니까.
그러면…… 남도문은 텅텅 비게 된다.
만사무불통지만의 무대가 마련된 것이다.
무공이 신의 경지에 이른 남도문주를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그것은 모른다. 하나 만사무불통지는 계획이 서 있을 게다. 그가 역천지계(逆天之計)를 꾸미고 있다면.
물론 지금은 모든 게 가정이다. 손톱 밑에 가시 하나 박힌 것을 가지고 하늘이라도 무너진 듯이 침소봉대(針小棒大)하는지도 모른다. 빈틈이 없던 남무림이기에 허점이 보이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허황된 생각을 이끌어냈는지도 모른다.
쫓고 쫓기다 보면 몰살당할 수도 있고 빠져나갈 수도 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너무 과한 해석을 붙인 것은 아닐까?
‘지켜보면 알겠지.’
원래는 마야 한 명에게만 초점을 맞췄으나, 답평의 죽음이 생각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 세상에 이유없는 죽음은 절대로 없고, 야광 총수 같은 사람이 죽을 때는 태풍을 뒤에 남겨놓는 법이다.
여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둘째, 마인들의 추살 여부가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는 마야가 장강을 건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난 계속 마야를 지켜볼 것임.”
“전서를 보낼까요?”
“보내. 남무림 목서(木鼠)를 최대한 활용해서 지극히 은밀하게.”
여인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천기수사의 외동딸이며, 북검문의 후계자이기도 한 육신녀였다.
그녀가 아무도 모르게 장강을 건너 남무림으로 들어섰다.
이런 사실을 남무림이 알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금 남무림을 발칵 뒤집어놓고 있는 마야 사건은 단번에 뒷전으로 밀려나고, 모든 이목이 그녀에게 집중될 것이다.
적은 남무림뿐만이 아니다. 칠성군도 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가 암투를 벌이고 있으니. 만약 육신녀를 제거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번 기회를 놓칠까? 육신녀의 행방을 남무림에 슬쩍 흘리기만 해도 살아남을 가능성은 전무한데 말이다.
무엇보다 피바람을 일으키고야 뚫을 수 있는 장강 경계망을 아무도 모르게 유유히 건넌 것만도 기절초풍할 노릇이다.
“마야는?”
“남으로 가고 있습니다.”
“남으로? 확실해?”
“네.”
여인은 개울물을 떠서 한 모금 삼켰다.
큰 것을 생각해 봤으니 이제 작은 것도 생각해 봐야 한다.
‘마야는 자기 사람을 절대 버리지 않는 사람이야. 그런데 일행을 남도문 먹이로 던져 놓고 자신만 빠져나가고 있는 게 아무래도 이상해. 무슨 일이 있어. 틀림없이.’
“마야에게 무슨 일이 생겼어. 수족들과 흩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 알아봐. 그가 가는 곳, 최종 목적지가 어딘지도 알아보고. 하오문에 침입해 있는 목서를 이용해야 할 거야.”
“넷! 그럼 저흰…….”
“소식을 알아내는 대로 쫓아와. 들키면 죽음뿐이니 매사 조심하고. 마야가 있는 곳에 내가 있을 테니 찾기는 쉬울 거야.”
“존명!”
사내 몇 명이 바람처럼 사라져 갔다.
북무림 사람들은 지자라고 하면 삼뇌를 일컫는다. 하나 그들과 버금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은 간과한다.
육신녀가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다.
천기수사의 머리를 이어받았으니 태어날 적부터 천재였고, 자라면서 섭렵한 수많은 학문은 그녀를 찬란히 빛나는 혜성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런 상태로 성장을 지속했다면 육신녀라는 별호 대신에 만박선생과 필적할 만한 별호를 얻었을 게다.
육신녀는 북검문주의 문하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일이 육신녀를 잊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뛰어난 무공만 주목할 뿐, 그녀의 머리는 그저 천기수사의 딸이니 천재일 것이라는 정도로 지나쳐 버렸다.
육신녀는 가끔 세상이 권태로웠다.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보자면 속이 환히 드러나 보이는데 본인들은 열심히 감추고 있으니 얼마나 역겨운가.
있는 재주를 숨기는 것도 병이 된다.
남무림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자신이 행동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도 주목할 사람이 없다. 목서라는 인간들이 천비대에 전갈을 보내겠지만…… 어림도 없다. 천비대의 손에 들어가는 전서에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쏙 빠져 있을 게다.
‘이제 마음껏 즐기기만 하면 되는 건가.’
그녀도 일어섰다.
“가장 가까운 객잔으로 가자. 목욕할 수 있는 곳으로.”
***
구환자는 바보가 아니다.
그는 답평의 금제에서는 풀려났지만 더욱 크고 강한 금제에 걸렸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답평의 금제는 눈에 보이는 것이었으니 대응책을 세울 수 있다. 하나 꽁꽁 숨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금제는 어떤 형식으로 돌출될지 모르기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금제는 분명히 있다. 하기에 절대로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
‘미련한 사람…….’
답평은 미련했다. 그는 너무 눈에 띄게 발판을 넓히려고 했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죽어지내도 모자랄 판이었는데.
답평의 금제를 피할 수 없어서 당한 게 아니다. 작은 금제를 당해줌으로써 큰 금제를 벗어날 수 있기에 당해준 거다. 도산검림(刀山劍林)에 몸을 담근 사람에게 그만한 안전책도 없지 않은가.
구환자는 자신이 야광 총수가 된 것도 마뜩치 않았다.
답평은 십인회의를 열 때마다 회의 첫머리에 자신을 등장시켰다.
그에게 제일 먼저 질문을 던지는 버릇이 있었는데……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항시 위험하다, 좋지 않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것이 이런 결과로 나왔다.
‘야광 총수라니.’
말도 안 된다. 분수에 넘치는 감투를 썼다.
만사무불통지를 넘어서지 못하는 한 야광 총수라는 자리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아니다. 그 정도라면 그냥 무시당하면 그만이지만 이건 까딱 잘못하면 구족이 몰살당한다.
답평이 그랬다. 공식적으로 그는 암살당한 것으로 처리되었고, 죽은 사람도 혼자뿐이다. 하나 아무도 모르게,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수많은 죽음이 있었다는 것쯤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답평의 혈족은 뿌리째 뽑혔다.
구환자는 답평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