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81
81
소립파는 대답없이 창밖만 쳐다봤다.
두 여인은 상의를 벗기고, 하의를 벗기고…… 땀에 흠뻑 젖어 물기가 줄줄 흐르는 속곳까지 벗겨낸 후 마른 헝겊으로 전신을 샅샅이 닦았다.
젖은 옷은 한쪽 구석에, 새 옷은 마야의 몸에.
소립파는 온몸을 두 여인에게 맡긴 채 창밖 풍경에 넋을 놓았다.
“보기 힘들었을 텐데…….”
한참 만에 나온 말이다.
“수…… 고했어요.”
다담선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수만 마디 말 중에서 참으로 어렵게 한마디를 골라냈다.
남만을 향해 길을 떠난 지 사흘째 되는 날부터 소립파는 잠이 부쩍 늘었다.
취침 시간은 상당이 늦었다. 자시의 자리바꿈을 겪고, 고통에 찌든 몸을 잠시 달래준 후에야 잠을 잘 수 있었으니 거의 축시에 이르러서야 잠을 청하게 된다.
평소의 그는 거의 두 시진 정도밖에 자지 않는다.
이제는 다섯 시진이 넘는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무렵이 되어서야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그러고도 잠이 충분하지 않다는 듯 벌떡 일어서지를 못한다.
일어나서는 건포(乾脯)로 가볍게 요기를 한다. 그런 후, 잠시 몇 호흡을 기다리면 어김없이 오시의 저주가 시작된다.
잠들기 전에 한 번 겪고, 잠에서 깨어난 직후에 또 한 번 겪고.
하루의 시작과 끝에 진기의 자리바꿈이 존재한다.
“혼혈을 짚으면 어때요?”
절혼마녀가 안타까워서 한마디 던져 놓고는 자신이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마야의 경우는 단순히 혈도 몇 군데가 뒤틀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양지가 음지가 되고, 음지가 양지되는 대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깟 혈도 한두 군데 짚는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음양이기가 뒤바뀌는 순간, 그의 몸은 혈도가 없게 된다.
혈도란 꽃이다. 너무 예민해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한데 광풍폭우가 몰아쳐서 황소가 날아가고 집이 부서지는 마당에 꽃인들 무사할 수 있는가.
전쟁이 터져서 수백만 대군이 휩쓸고 지나간다.
성벽이든 전각이든 거치적거리는 것은 모조리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엄청난 힘이다.
혼혈을 짚겠다는 생각은 죽창 들고 서서 대문 하나만 지키면 도성을 지켜낸다는 발상과 다르지 않다.
다른 방도가 없다. 두 손 놓고 멀거니 지켜보는 도리밖에 없다.
음양이기의 자리바꿈은 순간적으로 이뤄질 터이다. 한데 마야는 왜 이각 동안이나 고통을 받을까?
전혀 다른 기운이 자리를 잡고, 경맥이라는 줄기를 만들고, 혈도가 제자리를 잡기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제야 마야는 인간이 되어 움직일 수 있다. 그때에야 비로소 피와 살과 뼈로 이루어진 외형에 생기(生氣)가 보태져 시신과 다름없는 처지에서 풀려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다니.’
두 여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고작해야 하루에 두 번, 자시와 오시에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을 마른 옷으로 갈아입히는 것이 전부였다.
엿새째 되는 날, 세 여인과 시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사단을 겪었다.
마야의 상세가 갑작스럽게 악화되었다.
갑자기 병자라도 된 듯 몰골이 중병을 오래 앓은 사람보다 더욱 초췌했다. 눈은 퀭하니 들어가고, 눈가에 검은 그늘이 덮였으며, 피부도 푸석푸석 말라갔다. 또한 도저히 정상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많은 땀을 흘렸다.
이제 갓 봄을 지나는 날씨이니 덥지는 않다. 오히려 춥다고 할 수 있다. 고통을 받는 시간도 아니다. 유시(酉時)로 접어들 무렵이라서 소립파에게는 가장 편안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비 오듯 땀을 흘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오늘은 오시의 저주를 끝내자마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다담선자와 절혼마녀는 번갈아가며 마른 헝겊으로 땀을 닦아냈다.
“안 되겠어요. 오늘은 객잔을 잡아서…….”
다담선자는 차분해지려고 애썼다.
하오문주는 마야가 백 일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백 일 안에 특단의 조처를 취하지 못하면 죽을 것이라고.
마야의 나빠진 몸 상태는 죽음의 그림자가 한 겹 덧씌워진 것 같아서 가슴이 찢어졌다.
마야는 늘 그렇듯 입술만 살짝 비트는 웃음을 지어 보인 후 말했다.
“무게가 삼만 근 정도 되는 쇠마차가 있는데…… 강을 건너야 돼. 강은 초겨울이라서 살얼음이 깔려 있고. 살얼음을 깨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을까?”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말해봐. 살얼음을 깨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겠어?”
“…….”
“내 몸 안에는 쇠마차같이 강건한 기운이 넘쳐 나. 반면에 몸뚱이는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쇠마차의 무게는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고 있어. 쇠마차가 살얼음판을 건너지 못하듯 내 몸도…….”
“계속 그런 말 할래요!”
“너무 연연하지 말라는 뜻에서 한 말이야. 시마에게 말해. 여기서 이십여 리 정도 가면 암산(巖山)이 나와.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바위산이라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거기로 가라고 해.”
“제발 오늘만은 객잔에서…….”
“거기, 제법 편한 곳이야.”
두 여인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이십여 리라면 금방 갈 거예요.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아요.”
다담선자는 절혼마녀가 마른 헝겊을 가지고 다가앉자 자리를 비켜줬다.
소립파는 하오문주와 헤어진 후부터 매일 산에서 잠을 청했다.
산의 형태는 각기 달랐다. 아름드리나무들이 시원하게 뻗어 있는 산에서도 지냈고, 키 작은 잡목에 가시덩굴이 가득한 산에서도 잠을 자보았다.
이번에는 바위산이다.
드문드문 풀도 있고 나무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이 크고 작은 바위들이다.
“여기 어때? 이슬은 피할 것 같은데.”
“조금 더.”
“이놈들, 힘들어 뒈져.”
시마가 말에 채찍을 휘두르며 말했다.
“조금 더 가.”
소립파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바깥을 쳐다보았다.
“어디 찾는 곳이라도 있어? 언제 와본 곳이야?”
“저기…… 저기로 돌아가면 꽤 아늑한 곳이 나와. 저기로 가.”
소립파가 어둠이 짙게 깔린 곳을 가리켰다.
타타탁! 타닥!
모닥불이 힘차게 타 들어간다.
소립파가 안내한 곳은 천험의 요새였다.
유선형으로 휘어진 길이라서 머물기는 편해도 들어오기는 힘들다. 누군가가 들어선다면 이쪽에서는 볼 수 있지만 상대는 보지 못하는 곳이다.
머물 장소도 넓고 아늑했다.
큰 바위들이 좌우를 가리고 있으며, 위에서 굴러 떨어진 바위가 지붕을 대신했다. 천연 석실이다. 말 두 필과 마차를 들여놓고도 신법을 수련할 수 있을 만한 공간이 나오니 한꺼번에 십여 명이 머물러도 부족함이 없는 곳이다.
“이런 말하면 뭣하지만…… 남만에 가본 적은 있어?”
시마가 마른 나뭇가지를 꺾어 모닥불에 던져 넣으며 물었다.
세 여인도 소립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안내한 곳은 항상 안전했다.
공격하기는 지극히 어렵고, 방어하기는 쉬운 곳.
다담선자의 추명반과 시마의 녹혈마공이 어우러지면 능히 일당백으로 겨룰 수 있는 곳을 용케도 골라냈다.
참나무 숲도, 잡목 숲도…… 이번에는 바위산까지.
“몇 군데 알고 있을 뿐이야.”
‘가본 적 있어!’
시마와 세 여인은 같은 생각을 했다.
소립파는 거짓말을 지독히도 못한다. 그의 거짓말을 눈치 채지 못한다면 천하에서 가장 우둔한 사람이다.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편이 조금이라도 숨기는 길이라는 걸 말해줄까, 말까?
“남만까지는 꽤 먼 길인데…… 남은 날짜에 갈 수 있겠어?”
일반적인 여행이라면 충분하다.
시마가 염려하는 것은 길이 지체되는 것이다.
당장 지금만 해도 그리 편한 상황은 아니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할 무렵부터 뒤를 쫓는 무리가 생겼다.
그들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쫓아오고 있다.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고 멀리 떨어지지도 않고. 어떻게 보면 움직임을 지켜보는 감시자 정도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나같이 무시하지 못할 고수들이다. 쫓아온다는 느낌만 있지 형체를 잡을 수 없으니 더욱 조심해야 한다.
소립파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마에게서 눈길을 거둬 절혼마녀를 쳐다봤다.
“앉으나 서나,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무공 수련을 게을리 하면 무인이 아니지. 절혼, 십이성에 이른 귀적무를 보고 싶은데.”
“귀적무를? 지금 여기서요?”
“내게 보일 필요는 없고…… 온 길을 되돌아서 이십 장 정도 가면 상대할 만한 자들이 있어.”
“뭐, 뭐요! 어, 언제 거기까지!”
절혼마녀는 깜짝 놀랐다. 그녀뿐이 아니다. 모두들 너무 놀라서 말을 잃었다.
일단의 무리가 뒤쫓고 있다는 사실은 눈치 채고 있었지만 거리가 이십여 장 정도밖에 벌어지지 않았다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정도의 거리라면 급습을 가하고자 한다면 당장이라도 가능하지 않은가.
“잡을 생각은 마. 잡으려다가는 오히려 당해. 살짝 건드리기만 해. 누군지, 무공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기본적인 것만 파악해 봐.”
“그런 일이라면 큰언니보다 제가 나아요. 제가 할게요.”
일령이 대뜸 나섰다.
은밀함, 그림자, 은신술…… 이런 종류의 비기를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은 단연 일령이다. 상대가 누군지 알아보려고 한다면 당연히 일령이 맡아야 한다.
모두의 생각이 같았다. 그러나 소립파만 달랐다.
“후후! 정말 습관이란 무섭군.”
소립파는 묘한 눈길로 일령과 절혼마녀를 번갈아 봤다.
“서, 설마…… 큰언니가 저보다…….”
일령은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깜짝 놀란 얼굴로 절혼마녀를 쳐다봤다.
“절혼의 귀적무가 극성에 이르면 말 그대로 귀신이 돼. 보면 알겠지. 절혼, 자시에 시작해. 오고 가는 데 일각, 건드리고 빠져나오는 데 일각. 모두 이각 줄게. 이각이면 나도 볼일을 마쳤을 테니까.”
“그 볼일…… 절대로 나보다 늦게 마치면 안 돼요.”
절혼마녀는 손을 내밀어 마야의 손을 꼭 잡았다.
절혼마녀는 한 번 도약에 일 장씩 쑥쑥 미끄러져 나갔다.
스으으……!
미꾸라지가 기름으로 범벅이 된 곳을 기어갈 때처럼 움직이기는 하는데 소리가, 기척이 들리지 않는다.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귀신의 발걸음, 귀신의 춤이라는 귀적무는 일반적인 은신술처럼 숨는다는 기분으로 펼치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내 몸에 자연을 담고, 자연의 품에 육신을 떠맡기는 극상승의 절기다.
이십여 장을 나아가는 데는 촌각도 걸리지 않았다.
마야는 오고 가는 데 일각이란 시간을 주었지만 절혼마녀에게는 한잠 자고 가도 될 만큼 긴 시간이다.
사랑하는 님이 말하기에 잠자코 들었을 뿐이다. 다른 사람이 그런 식으로 말했다면 코웃음을 쳤을 게다.
오는 데 이십 장, 가는 데 이십 장, 겨우 사십여 장을 움직이는 데 일각이나 소모하다니 말이 되는가. 그 정도 거리라면 신법을 펼칠 필요도 없이 내처 달리기만 해도 오가는 데 일각이면 충분하다.
스스스스스……!
절혼마녀는 귀적무를 극상승으로 펼치며 나아갔다. 그러나!
‘아!’
거의 이십여 장 정도 왔을 거라고 생각될 즈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바로 옆에 있는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휴우!’
안전하게 숨었다고 생각되자 가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니다! 숨을 내쉬어서는 안 된다. 꾹 눌러 참아야 한다. 적은 코앞에 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끈적끈적한 기운이 피부에 달라붙는다.
마야가 왜 일각이란 시간을 주었는지 이제야 알았다.
너무도 무서운 자들이 뒤따라왔다. 그들은 그녀의 주변에 있으며, 한가닥 숨결만 흘려내도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놓을 자들이다.
천멸도 살수들!
그렇게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들이 아니라면 또 누가 있어서 이토록 은밀한 은신술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자들이니 느낌만 있을 뿐 형체를 잡을 수 없었지.
‘아!’
불현듯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마야가 농담처럼 흘린 말…… 습관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고 했나?
그렇다. 은신술에서는 극에 이른 자들인데 그들이 자신을 발견해 내지 못했다.
덕분에 아직 살아 있다.
귀적무는 천멸도 살수들조차 상대할 수 있을 만큼 지고무쌍한 신법이다. 일령의 은신술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지금에 와서는 귀적무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마차 지붕으로 올라갈 사람은 일령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날 보낸 이유…… 일령이라면 혈전을 피할 수 없었어.’
믿고 보냈으니 기대에 충족시켜 줘야겠지.
절혼마녀는 다시 귀적무를 펼쳐 살수들이 숨어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곳으로 쏘아갔다.
파아앗!
검기가 일제히 일어났다. 하나,
파파팟! 파앗! 쏴아아아……!
살수들이 짓이겨 놓은 것은 애꿎은 바위다.
그들은 절혼마녀가 들어오는 것은 감지해 냈지만 형체는 잡아내지 못했다.
‘이것으로 무승부.’
절혼마녀는 확실하게 자신감을 얻었다.
그녀는 느낌으로만 확인했을 뿐, 살수들의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그들이 숨어 있는 곳은 더더욱 알아채지 못했다. 그런 점은 저들도 마찬가지다. 서로 헛손질만 했다.
절혼마녀도 놀랐지만 저들의 놀라움도 상당할 것이다.
‘승부는 지금부터…….’
스스스스……!
귀신이 춤을 추며 바위산을 누볐다.
제3장 도천공(到天空) ― 하늘에 닿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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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혼마녀는 마야가 준 이각이라는 시간을 다 쓰고도 일각을 더 소모한 다음에야 돌아왔다.
먼저 찾는 자가 승리하는 숨바꼭질.
숨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끼리의 꼬리잡기.
서로 상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지한다. 하나 형체는 찾아낼 수 없다. 서로가 초범(超凡)에 이르는 은신술을 구사하니 가히 천적(天敵)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은신술이 있다. 도구를 사용하는 것에서부터 심법을 바탕으로 하는 것까지 종류를 나열하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란다. 하나 은신술이라고 다 똑같은 은신술은 아니다. 평생을 수련해도 삼류를 벗어나지 못하는 조잡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개중에 몇몇은 초절정무공과도 견줄 수 있을 만큼 심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