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83
83
소립파의 몸은 자오법신이 이루어지는 순간 혈맥 자체가 사라져 버리니 폐혈시키기도 용이치 않다.
너무 답답해서 해본 소리다.
‘이런 이야기는 백날 해도 소용없어.’
“노래 불러줄까요?”
“다담이 노래도 할 줄 알아?”
소립파가 모처럼 반색했다.
“왜 이래요? 한때는 선몽의 루주였다고요. 시서가무(詩書歌舞)를 모른대서야 루주라고 할 수 있나요? 가만있자, 뭐가 좋을까……. 그래! 몽행가(夢幸歌)가 좋겠어요.”
“몽행가? 너무 유치하지 않아?”
절혼마녀도 오랜만에 근심걱정없는 얼굴로 돌아가서 활짝 웃었다.
“어멋! 몽행가가 어때서요? 방심(芳心)이 흔들릴 때야말로 세상이 온통 장밋빛으로 보이는 법이에요.”
“호호호! 그래, 그럼 동생이 선창해. 내가 뒤를 받아줄게.”
“그럴래요? 그래요. 흠!”
다담선자는 일부러 목청을 가다듬었다.
소립파의 핏기 잃은 얼굴에 화색이 돌아왔다. 창밖만 쳐다보던 눈길도 다담선자에게 돌려졌다.
“니다대년기료(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니시시아적년령(알아맞혀 보세요).”
“열셋[十三]? 열넷[十四]?”
“부지(不知: 몰라요), 부지(不知: 몰라요).”
“가시검야발기소래(可是瞼也發起燒來: 그런데 얼굴이 붉어졌네)?”
“아아! 아종어애상료타(我終於愛上了他: 나는 마침내 그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아천롱(我天聾: 나는 귀머거리) 아지아(我地啞: 나는 벙어리예요).”
다담선자와 절혼마녀는 열네 살 꼬마 여자 아이가 사랑을 알게 된다는 몽행가를 불렀다.
노랫가락이 맑고 달콤하다.
다담선자의 음성은 맑고 잔잔하며 애교스럽다. 반면에 절혼마녀의 노래는 사내의 혼을 치마폭에 휘감으려는 듯 거칠다. 하나 사나움 속에 강렬한 유혹이 담겨 있으니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두 여인의 성량(聲量)은 정반대다. 그런데도 노랫가락은 절묘하게 어울린다. 두 여인 모두 음률에 대한 조예가 뛰어나기 때문에 상대의 성량과 어울리며 부족한 점을 메워줄 줄 안다.
“후후후!”
소립파는 노래를 음미하며 옅은 웃음을 지었다.
무척 아름다운 노래, 하나 애타는 마음이 절절히 묻어나기에 편하게만 들을 수 없는 노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두 명이나 애간장 녹는 마음은 하나다.
일령은 마차 밖으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다담선자와 절혼마녀의 마음을 엿볼 때마다 마야를 넘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주체하지 못하겠는데 어찌하랴.
몽행가는 철부지 꼬마 아이의 사랑 타령이지만 꼭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때,
“일령.”
누군가가 아득히 먼 곳에서 부른다. 꿈결에서처럼 몽롱한 음성이다.
‘누구?’
일령은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위에는 사람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 사람들이 득실거려도 ‘일령’이라는 별호를 부를 자는 없다.
착각이었나? 환청인가?
“일령, 노래를 세 곡 정도 들을 참이다.”
소리가 또 들려왔다.
‘마야!’
절대 착각이 아니다. 일령은 얼른 고개를 돌려 마차를 쳐다봤다. 그녀가 앉은 곳에서는 딱딱한 나무밖에 보이지 않지만 마야가 있는 곳을 쳐다보아야만 했다.
“대략 일각 정도 걸리겠지.”
마야가 영파로 말을 건네오고 있다.
일령은 대화를 나누듯이 생각으로 답했다.
‘노래 세 곡이면…… 그럴 거예요.’
“뒤따르는 자들이 훨씬 가까이 다가왔어. 사방 어느 쪽으로든 십여 장만 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고삐를 놓고 마차에서 내리도록. 내 생각이 맞는지 직접 확인해 줘. 노래 세 곡이 끝나기 전에.”
일령은 무엇에 이끌린 듯 고삐를 놓았다.
‘그럴게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요, 시키시기만 하면.’
쉬익!
그녀의 신형은 바람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어, 어! 야! 이 계집애야! 너 지금 어딜 가는 거야!”
뒤에서 시마가 버럭 고함을 내질렀지만 그녀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2
일령은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눈에 띄는 것은 회색 바위들뿐, 사람이라고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들의 장기는 은신술이다. 은신술이 너무 뛰어나서 형체 없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숨어 있을 때는 물론이고, 공격을 가해올 때도 드러나지 않는다.
신경을 팽팽하게 곤두세웠다.
‘감각으로 잡을 수 있는 자들이 아냐.’
안 된다는 걸 알면서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슈웃!
느낌이 전해져 왔다. 누군가, 무엇인가가 옆구리를 향해 쇄도한다.
진기를 끌어올렸다. 여타의 무공은 진기를 모으면 응축되고 풀면 이완되는 법인데, 선유비조신법은 정반대다. 진기를 모으자 전신 근육이 솜처럼 풀어진다.
‘보아야 해! 어디를 어떻게 공격해 오는지!’
볼 틈이 없다. 눈으로는 물론이고 느낌으로도 찾아낼 수 없다. 하나 본능은 위험한 상황이라고 말한다. 지금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타앙!
엄지발가락에 있는 은백혈(隱白穴)에 진기를 응축시킨 다음 폭발시키듯 강력하게 터뜨렸다.
슈우웃!
그녀의 신형은 바람에 날리는 깃털처럼 너울너울 떠다녔다.
금연화, 절혼마녀와 함께 삼인비무를 펼칠 때도 그녀를 안전하게 지켜주던 신법이다. 자하쌍구검의 오묘함도, 귀적무의 기기묘묘함도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채지 못했다.
싸아악……!
예리한 쇠붙이에 옷자락이 잘려져 나갔다.
마치 육신이 잘린 느낌이다. 전신에 소름이 오싹 돋는다.
‘날 잡아냈어!’
위험하다! 아직까지도 적을 찾아내지 못했는데 적은 자신을 환히 꿰뚫고 있다. 어디로 움직이는지, 어떻게 공격해야 유효한지 빤히 들여다본다.
‘시간이 흐를수록 살 가망은 낮아져.’
일령은 급히 마차를 쳐다봤다.
두 마리 말이 이끄는 마차는 십 장 밖에서 천천히 걷고 있으며, 안에서는 아름다운 노랫가락이 흘러나온다. 시마가 일어서서 무슨 일인가 하고 쳐다보는 모습도 보인다.
십 장이란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달려가기로 마음먹으면 단숨에 달려갈 수 있는 거리다.
‘마야 말대로야. 적이 십 장 거리로 좁혀왔어. 확인할 건 확인했으니 이제 몸을 빼기만 하면 돼.’
그것은 일령의 엄청난 착각이었다. 촌각도 되지 않아서 일령은 몸을 빼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타악! 탁! 타탁!
은백혈에서 연신 진기가 터졌다.
잔뜩 응축된 진기가 폭발을 일으키며 깃털처럼 가벼워진 그녀의 육신을 허공에 띄워 올렸다.
검기(劍氣)가 되었든 예기(銳氣)가 되었든, 어떤 기운이든 살갗을 향해 쏘아져 오는 기운은 무조건 신경을 자극한다. 곤충의 날갯짓에 거미줄이 흔들리는 것처럼.
그녀의 전신에는 거미줄과 같은 무형의 막이 둘러쳐져 있다. 낯선 기운이 무형의 막을 건드리는 순간, 반사적으로 은백혈에 모인 진기가 터진다.
선유비조신법은 신법의 영활함을 추구하지 않는다. 무형의 막을 촘촘히 짜놓아 극도로 예민하게 만드는 것이 제일 목적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기운에 반응토록 만드는 특이한 운공법이다.
그런데 그게 통하지 않았다.
싸아악! 파앗! 쓰으윽……!
종아리에 일검, 배에 일검, 등에 일검.
순식간에 다가온 검기는 반사 신경이 움직이기도 전에 몸을 긋고 지나갔다.
살은 베이지 않았다. 정확하게 옷자락만 잘라냈다.
그런 점이 더욱 일령을 두렵게 한다. 죽이려고 작정하면 당장이라도 목을 쳐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들린다. 뭔가? 배부른 고양이가 쥐를 희롱하는 것인가?
일령은 다시 한 번 마차를 쳐다봤다.
시마는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의 눈길이 자신에게 머물러 있으니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았을 텐데 아무것도 보지 못한 양 술만 들이킨다.
뿐만이 아니다. 창밖을 쳐다보는 마야는…… 아! 그의 눈길은…… 그가 쳐다보고 있는 곳은……
‘날 쳐다보고 있어. 날 지켜보고 있어!’
일령은 지금 당장 죽는다고 해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마도, 마야도 지켜보기만 할 뿐 도와주지 않는다.
자신과 마차 사이는 십여 장, 순간이면 움직일 수 있는 짧은 거리지만 이승과 저승을 갈라놓을 수 있는 먼 거리이기도 하다.
일령은 진기를 멈췄다.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선유비조신법을 중지해 버렸다.
아니다. 본의가 아니다. 마음은 마지막 한 올의 힘까지 모두 보태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포박이라도 당한 듯이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구멍 뚫린 공에서 공기가 빠져나가듯이 진기가 급속하게 새어 나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경우를 당하고 만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령은 심히 당황했다.
적들에게 포위당해 있는데 진기없는, 무형의 막이 없는 선유비조신법이라니!
마음이 급해져서 급히 바닥난 진기를 북돋으려고 했지만, 어찌어찌해서 간신히 진기가 모아진다 싶으면 어느새 구멍 뚫린 곳으로 새어 나가 버렸다.
‘마야!’
마야가 아직도 쳐다보고 있다.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녀만 쳐다본다.
‘아!’
무엇인가 느껴지는 게 있다.
절혼마녀가 살수들의 늪을 무사히 헤쳐 나왔을 때 부러워서 몇 마디 한 적이 있는데, 마야가 그런 부분까지 신경 쓰고 있었던 듯싶다.
모두들 초절정고수인데 자신만…….
마야는 자신에게도 기회를 주고 있다. 절혼마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무공의 진위(眞威)를 깨닫게 해주려는 거다.
갑자기 진기가 사라진 것도 마야가 한 행동이다.
소리를 지르지 않았으니 마령음은 전개하지 않았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진기를 흩뜨려 놓은 것인가.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데, 혹시? 눈빛만으로 진기를 흩뜨린다는 말은 금시초문인데…… 마야에게 만공심안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설마 이 정도까지 가능한 것일까?
어쨌든 이번 난국만큼은 자신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한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아무도. 내가 해내야 돼!’
절혼마녀가 해냈다면 자신도 해낸다.
마야는 절혼마녀가 떠날 때도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았다. 그녀도 자신처럼 불쑥 살수들 가운데에 떨어졌을 테고, 심히 당황했으리라.
그래도 그녀는 해냈다.
귀적무를 완벽하게 몸에 붙여서 금연화와 함께 비무를 벌일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선유비조신법으로 귀적무를 당해낼 수 있을까?
전에는 자신있었다. 하나 어제저녁부터는 달라졌다. 절혼마녀가 펼치는 귀적무를 본 순간, 자신은 이미 한 수 아래로 처졌음을 깨달았다.
다담선자나 절혼마녀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점이 있어서 마야의 눈길을 잡아당겨도 모자랄 판인데, 점점 뒤처지고 있으니 마음이 울적할 수밖에 없다.
절혼마녀는 꼭 지금과 같은 상황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해낸 것이다.
‘해낼 수 있으니까 사자 우리 속에 던진 거야. 마야, 믿어요.’
진기를 전신 경맥에 고루 퍼뜨린 다음, 세맥(細脈) 속에 숨겼다. 돌아다니는 진기가 단 한 점조차도 없도록 완벽하게 숨겼다. 진기가 사라진 것은 마야의 뜻, 마야가 진기를 끌어올리지 말라고 하니 하지 않는다.
은백혈에 깃들어 있던 진기도 깊숙이 숨겼다.
검에 맞을 준비는 끝났다.
전력을 다해도 모자랄 판에 전신 기력을 풀어버렸으니 공격을 감당할 길이 없다.
‘검기를 느끼지 않으면 움직임 자체가 광대 짓이야. 움직이기 전에 검기를 느껴야 해.’
말은 쉽다. 하나 무형의 막까지 거둔 마당에 아무런 기척도 없는 검기를 어떻게 느낀단 말인가.
슈웃! 파아앗! 파악!
일검이 목을 스쳐 갔다. 일검은 앞가슴을 베어냈고, 다른 일검은 등줄기를 쭉 그어 내렸다.
일령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녀는 자신이 꼭 장님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장님이 보보마다 위험이 도사린 밀림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독지네나 독사 같은 것이 금방이라도 툭 튀어나와 깨물어댈 것 같다. 표범 같은 맹수가 득달같이 달려드는 느낌도 감지한다. 들이쉬는 공기도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듯하다.
다행히도 살수들은 아직 살검을 전개하지 않고 있다.
목덜미에는 나뭇가지에 긁힌 듯한 자국밖에 남지 않았다. 앞가슴이 활짝 열려서 가슴 가리개가 환히 드러났다. 등을 가른 검은 더욱 치욕스럽다. 바람이 직접 살갗에 와 닿는 것을 보니 상의가 반으로 갈라져서 살결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 같다.
살기를 품은 검이었다면 머리 잃은 몸뚱이가 피를 뿜어내며 나뒹굴었을 게다.
‘언제까지 당하고 있을 수는 없어. 이들은 분명 적이야. 살려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돼.’
슈우웃! 쒜에엑! 쒜엑!
이번 공격은 조금 날카롭다. 팔과 다리에서 거의 동시에 통증이 치민다. 마치 면도(緬刀)로 살갗만 살짝 저며낸 것 같다.
통증은 참을 수 있다.
다그닥! 다그닥……!
마차가 점점 멀어져 간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시마는 분명히 보았다. 자신이 괜히 이리 뛰고 저리 뛰겠는가. 적과 어울리고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만한 상황이지 않은가.
그는 모른 척하고 멀어져 간다. 하나 견딜 수 있다.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조소를 던져도 감내할 수 있다.
마야가 멀어져 간다. 창문을 통해서 자신을 봤을 텐데, 자신이 뒤에 처져 있는데…… 기다려 줄 생각도 하지 않는다.
‘마야…….’
그와 멀어지면 안 되는데.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가슴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은데. 다른 여인의 사내여도, 넘볼 처지가 아니어도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데.
‘빨리 이겨내고 가야 해. 따라가야 해.’
파앗! 피윳! 파아앗!
살수들은 일령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뽀얀 살결을 붉은 피로 물들였다.
‘으음!’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이번 공격은 살을 그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깊이 베고 지나갔다. 지금까지 받은 공격들은 옷만 새 것으로 갈아입으면 그만이었지만, 방금 전에 받은 공격은 금창약을 발라야 할 정도로 깊은 상처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