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86
86
북검문에는 안량빈이 갔다.
‘염추가 한 팔을 내놨어.’
안량빈이 살아 돌아올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글쎄다. 아마도 시신조차 찾지 못하는 상황이 될 공산이 높다. 북검문이 살수를 샀다면 떳떳하지 못한 일에 쓰기 위함일 테고, 그런 일치고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자는 없으니까.
주림 쪽은 사정이 더 나쁘다.
안량빈조차 살아오기 힘든 길, 주림이 어찌 살아올까.
‘천멸도 식솔들 중 절반을 사지로 내몰았으니 마음이 찢어지겠어.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곳이 없고, 울고 싶어도 울 곳이 없을 테고. 염추…… 너도 참 기가 막힌 인생…….’
백포여인, 유염추가 두 눈에 독기를 피워내며 말했다.
“북검문에 누굴 보냈냐고? 안량빈을 보냈어. 흥! 이미 짐작하고 있으면서 묻는 꼴이라니. 순진한 척 그만 해. 네년이 내숭을 떨 때마다 악취가 풍겨.”
‘역시…….’
상잔은 벌써 일어났다. 한솥밥을 먹던 안량빈과 주림이 서로의 가슴에 검을 들이댔다. 주림이 마야에게 검을 들이댔던 것처럼, 마야가 천멸도 살수들을 냉정하게 처리한 것처럼 북검문과 남도문의 이름으로 마주 선 천멸도 살수들은 서로 죽이고 죽었다.
“안량빈과 주림을 서로 바꿔서 보냈다면…… 마야도 무척 힘들었을 거야. 그렇지?”
다담선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훗! 이런 일을 벌이려고 무공을 손봐달라고 했던 거야?”
“완성된 무공으로 싸우다 죽으면 한결 덜 억울하잖아.”
“남도문에는 욕심나는 명약이 있어. 청령단. 주림과 백인수는 청령단 때문에 팔려간 것 같은데, 아냐?”
“맞아. 청령단 열 알. 엄지손가락만 한 단환 열 개. 그게 백 명의 목숨 값이야.”
그녀의 눈에서 뿜어지는 독기,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기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삼키기 위한 위장술이다.
“청령단은 천멸도의 희망이니까 이해해. 하지만 북검문은…… 북검문에도 청령단과 버금가는 게 있어?”
“황정초(黃精草). 안량빈하고 십겁룡을 줬으니까 싸게 얻은 건 아냐. 황정초 하나만 가지고 따진다면 되레 비싸게 산 거지. 청령단이 없었다면 결코 주지 않았을 거야. 주림도 마찬가지야. 청령단이 아무리 귀해도 황정초가 없었으면…… 황정초와 청령단이 동시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천멸도가 나서는 일은 없었어.”
“음……!”
다담선자는 가는 신음을 흘렸다.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지만 황정초라는 말에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청령단은 천형을 억제할 수 있다. 황정초도 같은 효능을 지녔다. 하나 청령단과 황정초를 함께 사용하면 억제하는 정도가 아니라 치료까지도 가능하다.
곪고 썩은 곳에 새살이 돋는다는 말이 마냥 허망한 말만은 아닌 것이다.
청령단과 황정초라면 천멸도 살수들 중 절반이 죽는다 해도 억울할 게 없다. 나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입에 칼을 물고 꼬꾸라질 사람들이다.
그러다 문득 어떤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쳐 갔다.
‘마야!’
2
마야는 인간이 가질 수 없는 능력을 소유했다.
멀쩡한 사람도 몽상 속으로 몰아넣는 환희마소,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극고음과 극저음을 활용한 마령음, 사물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다는 만공심안…….
이러한 능력들이 총체적으로 모여서 그에게 ‘일견후즉파’라는 별칭을 안겨주었다.
길게는 수백 년, 짧게는 수십 년 동안 전통과 긍지를 가지고 이어져 온 무공 초수가 가볍게 스쳐 지나는 눈썰미에 읽혀 버리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일절(一絶)이라고 지칭되는 무공들조차도 그의 눈에 읽히면 여지없이 파해법이 드러나고 만다.
파해법이 드러난 무공은 이미 무공이 아니다. 그런 무공을 사용하는 것은 적에게 죽여 달라는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삼류 무공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무공도 마야의 손길을 거친 다음에는 뛰어난 절기로 둔갑한다.
천멸도의 무공이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마도, 수검, 시마 등등 많은 마인들도 마야의 도움을 받았다.
마야는 참으로 뛰어난 능력을 지닌 기인이다.
하면 마야의 능력이 무공에만 국한된 것일까? 아니다. 그의 능력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다.
그가 능력을 보인 곳이 무림이기 때문에 무공만 생각했다. 만약 다른 세상에서 다른 능력을 보였다면 마야는 마야가 아닌 다른 호칭으로 불렸을 게다.
마야의 능력은 어디가 끝일까?
마야는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분명한 것은 마야를 아는 사람들 모두가 그를 정확히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단편(斷片), 빙산의 일각, 지엽(枝葉)…….’
다담선자는 문득 마야가 낯선 타인처럼 느껴졌다.
그를 가장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생각해 보니 안개처럼 희뿌옇게 가려져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서운하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이런 경우는 다반사이니 마야와 함께 있으려면 가능한 모든 상황에 익숙해져야 한다. 당혹스러운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태연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그를 전부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천멸도주는 가진 것의 육 할을 버리며 두 가지 영약을 구했다.
확실히 천령단과 황정초라면 천형이라는 나병을 치유할 수 있다. 하나 천령단과 황정초를 어떻게 배합시킬 것이냐는 문제에 이르면 머뭇거리게 된다.
더욱 큰 문제는 북검문과 남도문에서 얻은 얼마 되지 않은 영약으로 몇 명이나 고칠 수 있느냐는 거다.
한두 명만 고치고 말 것이라면 죽은 사람들이 너무 덧없지 않은가.
천멸도주 유염추에게는 두 가지 영약을 씨앗으로 만들어서 많은 열매를 거둬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 또 이 세상에서 유염추의 뜻을 이뤄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옛 정인, 마야다.
유염추는 마야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다.
상잔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얻고자 하는 그들의 희망.
마야의 상태가 상상외로 심각하지 않았다면 찾아온 목적을 벌써 꺼냈을 게다.
지금도 늦지는 않았다. 천령단과 황정초에 대해서 입만 벙긋거려도 마야는 온 심력을 기울여 방도를 찾아줄 게다.
유염추는 그럴 수 없었다. 하루에 두 번씩 지옥을 오가는 사람에게 따뜻한 말은 고사하고 잠시 숨 돌리는 시간마저 빼앗을 수는 없었던 거다.
그럼 그녀는 왜 마야를 찾아왔나?
마야가 아프니까. 이번이 아니면 영원히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아픈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천멸도의 숙원을 풀기 위해서는 옛 정인이라는 인정조차 이용하겠다는 독한 마음으로.
그렇다. 유염추는 결코 상잔을 원하지 않는다. 마야가 옛 정인이기는 해도 그를 구하기 위해서 천형에 시달리는 동족을 핏더미 속에 던질 생각은 아니었다.
결국은 유염추가 졌다.
옛 정분을 이용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자신까지 얽어졌다.
이야기를 그렇게 끝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마야가 저주의 자오법신을 풀기 위해 남만으로 가야 하듯이, 유염추도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마야의 도움을 받지 않을 생각이라면 다른 행동을 취할 수 있겠지만.
다담선자는 유염추의 마음을 알고 그녀가 원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휴우! 천령단과 황정초. 귀한 걸 얻었네.”
그녀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주림만 쩔쩔매는 게 아냐. 안량빈도 똥오줌 못 가리고 있어. 황정초까지 내줘가며 시키는 일이니 오죽하겠어. 제 코가 석 자지. 덕분에 우린 천형에서 벗어날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게 되었지만.”
“…….”
다담선자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어떤 말도 이들의 아픔 앞에서는 사치처럼 여겨졌다.
그녀는 한참 만에야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을 꺼냈다.
“청령단과 황정초를 둘 다 얻은 것은 천운이야. 섣불리 손대지 마. 두 가지 영약을 완벽하게 요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절대 사용하지 마. 이게 아마 천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거야.”
‘마야…… 살아야 할 이유가 더 생겼네요. 당신만 쳐다보는 사람들이 늘었으니 반드시 살아야 해요, 반드시.’
다담선자나 천멸도주나 어둠만큼이나 안색이 어두웠다.
사람들이 많이 변했다. 며칠 전만 해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절혼마녀와 일령은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다담선자의 옷소매를 잡아끌었을 게다.
천멸도와 마야, 천멸도주 유염추라는 여자…….
당장 풀지 않으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일 텐데, 두 여인은 관심없다는 듯 담담하다.
일령은 천막 근처에 누워 별을 쳐다보고 있다. 절혼마녀는 물을 끓여 건포를 불리고 있다.
천멸도 도주가 와 있건만 평상시나 다름없다.
‘마야의 여자가 다됐어.’
다담선자는 남몰래 빙긋 웃었다.
남자든 여자든 마야 곁에 머물려면 혼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움직일 줄 알아야 한다. 때에 따라서는 사지에 빠진 일행을 내버려 두고 혼자 탈출할 줄도 알아야 한다.
반드시 옳은 판단일 수는 없다.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 하나 무서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결정 내려야 한다. 오늘 두 개의 실수를 저질렀다면 내일은 한 개만 저지르면 된다.
다담선자는 절혼마녀 옆에 앉으며 일령에게도 들리게끔 조금 큰 음성으로 말했다.
“천멸도주예요. 천멸도주가 여자라서 놀랐죠?”
“음성이 천막 밖으로도 새어 나오니까…… 듣고 알았어.”
“몇 번 본 적이 있어요.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라요. 처음 봤을 때부터 백포를 감고 있어서. 어때 보여요?”
“대가 센 여자야. 나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마야를 휘둘렀겠어.”
“풋! 맞아요. 마야와의 잠자리까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하는 여자죠.”
“큰언니는 운이 좋은 거예요. 천멸도주가 나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둘째 언니 대신에 마야 곁에 있을 여자는 저 여자일 테고…… 그럼 언니는 마야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거예요. 풋!”
일령이 말 끝머리에 웃음을 흘렸다.
“분명한 건 우리가 은혜를 입었다는 거야. 우릴 죽일 수 있었는데 살려줬으니까.”
“알을 깨고 나오게 해준 거죠.”
다담선자는 절혼마녀와 일령을 다시 한 번 평가했다.
어느 정도 마야에게 맞췄다고 생각했는데, 기대보다 훨씬 앞서 있다.
최소한 몇 마디 질문쯤은 해올 줄 알았다. 마야는 이들을 알고 있을 텐데 절혼마녀에게 염탐을 시킨 이유는 무엇인지. 어려움이 있을 줄 알면서 일령은 왜 내보냈는지.
두 여인은 벌써 답을 얻고 있지 않은가.
다담선자는 편안한 마음으로 다른 이야기를 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요. 동생도 똑똑히 들어둬. 천멸도주는 암암리 뒤따를 수도 있었지만 모습을 드러냈어. 폭풍이 다가왔기 때문이야.”
이것은 다담선자의 판단이었다.
그녀는 천멸도주가 마야를 찾아온 이유에 주목했다.
암암리 뒤따르면서 아프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마지막으로 냉정해지자는 심산으로 나섰을 게다.
왜?
천멸도주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만큼 절박한 위기가 다가오기 때문이다. 지금이 아니면 마야에게 말을 건넬 수조차 없다고 생각할 만큼 큰 폭풍이다.
천멸도주는 어쩔 수 없이 마야를 호위해야 할 입장이다. 혹여 급습해 오는 무리가 있다면 마야와 상의할 필요도 없이 그녀 선에서 해치우고 말았을 게다.
이번에는 그렇게 평범하지 않다.
공격해 오는 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천멸도주 혼자서는, 아니, 그녀가 이끌고 온 천멸도 살수들 전부가 전력을 기울여도 상대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선 게다.
남도문으로 보낸 주림과 백인수 정도라면 천멸도주의 선에서 끝냈을 것이다.
철궁대도 아니다. 철궁대는 천멸도 살수들을 어찌할 수 없다.
백인수와 철궁대를 능가하는 무력이라면?
무신가에서 직접 나섰다. 억세게 운이 나쁘면 사방천마도 가세했을 것이다.
싸움이 읽힌다.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싸움이 그려진다.
제일 먼저 공격해 오는 자는 주림이 이끄는 천멸도 살수들일 게다.
그들은 많이 쇄잔해 있지만 아직도 강력한 무력을 지녔다. 또한 몰살당한다고 해도 남도문 입장에서는 전혀 아깝지 않은 소모품이다.
당연히 제일 먼저 사용한다.
그들을 맞이할 자는 천멸도주.
남도문은, 주림과 백인수는 자신들을 맞이하는 사람이 천멸도주임을 알고 까무러치게 놀라겠지만 그렇다고 변하는 것은 없다.
한때는 도주와 수하의 몸, 그러나 적이 되어 전장에서 만났으니 사력을 다해 싸워야 한다. 혈육상잔인 줄 알지만 어느 한쪽이 몰살될 때까지 죽이고 죽여야 한다. 그것이 살수들의 삶인 것을.
난전 중에 철궁대와 무신가가 치고 들어올 것이며, 틈이 벌어지는 즉시 사방천마가 검은 숨결을 토해낸다.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힘들기는 하지만 방법이 없지는 않다. 어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진 절혼마녀와 일령이 있고, 방원 삼 장을 죽음의 밭으로 만드는 시마의 녹혈마공이 있으니 쉽게 무너지지는 않는다.
한데 상황은 이보다 더 어렵다.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있었다면 천멸도주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을 게다. 그녀가 마야를 보아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라면 절망을 느꼈다는 건데…….
궁왕이 직접 나섰나? 그럴 가능성이 높다. 절대무신이 아니고는 천멸도주에게서 전의를 빼앗지 못한다.
마야가 제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 마령음이든, 만공심안이든 무엇이든 펼쳐서 도와주어야 한다. 또 하나, 마야가 저주의 자오법신에 걸렸다는 사실이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남도문에 이런 사실까지 퍼지게 되면 그야말로 절망이다.
이런 생각들이 사실일 수도 있고 기우일 수도 있다. 아니, 사실이라고 확신한다. 바짝 곤두서는 솜털이, 전신을 짜릿하게 저리는 전율이 위험을 감지하고 있으니까.
다담선자는 속이 타 들어갔지만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동생, 동생은 어자석에서 떠나면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어자석을 지켜. 그럴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