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9
9
주고받는 눈길 속에 무언의 말들이 오고 갔다.
“자하부의 금지옥엽이 단신으로 여행길에 나섰다면 누구도 믿지 않아. 자하부와 인연을 끊었다고 해도 시녀 정도는 데리고 나섰어야지. 나오라고 해. 길을 나서면 배고픈 설움만큼 큰 설움도 없으니까.”
수묘인이 자그마한 돌멩이를 들어서 돌이 되어버린 흙더미를 후려치며 말했다.
퍽! 퍽퍽……!
바짝 구워진 흙더미는 몇 번 내려치지 않아서 와르르 무너졌다.
“부엉이 고기인데 역겹게 생각하지 말고 먹어. 장을 찍어 먹으면 그럭저럭 한 끼는 때울 수 있을 거야.”
절혼마녀와 금연화는 다시 눈길을 주고받았다.
‘부엉이 고기! 사냥!’
‘돌팔매질! 아니면 비수!’
암행(暗行)을 할 경우, 흔적을 지우는 것은 기본에 속한다.
수묘인은 일부러 표식이라도 남겨놓는 듯 곳곳에 쓰레기를 버렸다.
부엉이 살점이 묻은 흙더미도 부순 자리에 그대로 놓아두었고, 모닥불을 피운 흔적도 고스란히 남겼다. 누구나 한눈에 식별할 수 있는 지난밤의 잠자리도 일절 손대지 않았다.
“흔적을 지워. 천비대를 염두에 두고 말끔히 정리해.”
혼잣말처럼 나직한 음성이다. 그러나 반응은 신속히 전해져 왔다.
쉬익! 쉭쉭……!
사방에서 바람 소리가 일어난다 싶었는데 어느새 여덟 명의 야조가 날아와 금연화 곁에 섰다.
그녀들 중 한 명이 나타난 야조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우선 묻어야 할 것과 가져갈 것을 분류해. 놓치는 것이 있어서는 절대 안 돼.”
야조들은 전문적으로 수련을 받은 무인답게 신속히 움직였다.
자하령은 공령문의 절기를 이어받았다. 추적에도 능통할 뿐 아니라 은신에도 귀재들이다. 천비대가 신의 추적술을 지녔다지만 공령문의 은신도 녹록치 않다.
잠자리는 다시 흙으로 덮어야 하고, 그 위에 오래된 낙엽을 깔아야 한다. 모닥불을 피우고 남은 잔재는 보자기에 싸서 가져가고, 그러고도 남은 잔재는 멀리서 날라온 바위로 덮어놓는다. 사람들의 발자국도 깨끗이 지운다.
모든 것이 끝나도 수레바퀴 자국은 남는다.
염려할 것 없다. 수레가 워낙 천천히 움직이니 지금까지처럼 움직이고 난 후에 지우면 된다.
야조들은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을 치밀하게 조사했다. 그때 수묘인이 짐들을 수레에 단단히 동여매며 말했다.
“놔둬도 괜찮아. 찾아올 사람도 없으니까.”
“…….”
듣는 사람은 없다. 자하령은 수묘인의 말을 무시하고 각기 맡은 일을 하기에 여념없다.
“천비대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들인가? 그래 봤자 그 사람들도 인간인데 말이야.”
지나가는 바람처럼 흘리는 말. 틀린 말이다. 천비대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추적에 관한 한은.
“아니,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야. 천비대가 추적해서 잡아내지 못한 사람이 없었어. 추적의 달인들이지. 그들이 나서면 한 달 전에 사라진 사람도 찾아낸다지?”
절혼마녀가 생글거리며 말했다.
“호오!”
수묘인은 감탄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터뜨렸다. 그렇다고 행동을 달리 하는 것은 아니다. 천비대가 추적의 달인들이라지만 자신은 뒤쫓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단단히 배어 있다.
금연화는 기가 막혔다.
‘휴우! 정말 언젠가는 크게 당할 사람이야. 무인을 우습게 여기고 있으니. 이게 과연 잘하는 짓인지…….’
문득 회의가 치밀었다.
북검 무인들을 만나지 않고 권수를 건널 수 있다는 말에 덜컥 길 안내를 맡겼지만 잘 가고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객잔에서 권수까지는 반나절 거리밖에 안 된다.
수묘인은 하루종일 산속을 헤맸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밤을 새웠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가야 강을 건널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제는 천비대까지 무시하며 흔적을 치우지 않아도 된단다.
믿고 따라야 하는 건지, 지금이라도 애초 생각대로 부딪치며 뚫고 나가는 것이 나은지 분간이 서지 않는다.
수묘인은 놀리는 건지, 약 오르는 소리만 골라서 했다.
“천비대가 그토록 가공할 존재들이라면 이까짓 허튼 장난쯤은 금방 알아볼 텐데. 정말 흔적을 깨끗이 지울 자신이 있기는 한 건가?”
맞는 말이다. 흔적이란 것은 남기기는 쉬워도 지울 수는 없다. 감출 수는 있지만 흔적이 생기기 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을 수는 없다. 그런 점에 착안하여 감춰진 흔적을 찾아내는 것이 추적술이다.
손대서 붙잡지 못한 사람이 없다는 천비대라면 반각도 못 돼서 흔적을 찾아낸다.
반각. 흔적을 지우는 작업은 반각을 벌고자 벌이는 일이다.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질 경우, 반각이라는 여유는 삶과 죽음을 갈라놓을 수 있는 긴 시간이니까.
“공연한 짓은 않는 게 좋아. 여기 머물렀으면 어떻고 머물지 않았으면 어떤가.”
그 말은 틀리다. 추적을 하는 데는 시간 계산을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이곳에서 머물렀다는 흔적을 찾아내면 하루 전에 온 것이 되고, 아침녘에 떠났다는 사실을 알려주게 된다.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된다.
그것도 알아내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바퀴 자국을 유심히 살펴보면 깔려 죽은 벌레도 있을 수 있고, 물기 묻은 흙도 발견되며, 산에서는 낙엽이 필연적으로 깔리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시간을 알려주는 요소다.
“완벽하게 지울 자신이 없다면 그냥 놔둬. 무인이라면서 사냥도 안 해봤군. 이런 노숙은 엽사(獵師)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인데.”
“엽사들은 산에서 수레도 사용하나 보지?”
수묘인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 밤쯤에 큰 비가 내릴 거다. 여긴 땅이 물러서 웬만한 자국쯤은 그대로 씻겨 내려가지. 믿어도 좋아.”
‘이제는 날씨까지…… 천문지리에 달통했다는 거야, 뭐야.’
금연화는 수묘인의 말을 무시했다. 자하령도 무시했다. 그녀들은 수묘인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부지런히 흔적을 지워 나갔다.
절혼마녀는 흔적을 지우고 은신하려는 삼령(三靈)을 붙들었다.
“저 사람이 부엉이 잡는 모습, 봤어?”
개미 기어가는 소리보다 작은 음성이었다.
삼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로?”
“화살요.”
“화…… 살?”
“수레에 활과 화살이 있어요.”
“수준은?”
“수준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게…… 거리가 겨우 삼 장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시위를 놓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잡을 수 있는 거리다. 더욱이 부엉이는 큰 새라서 맞추기 쉽다.
무인인지 아닌지 알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헛다리만 짚고 만 셈이다.
‘재미있는 사람이야.’
산속을 꼬박 반나절 동안이나 헤맸다.
가도 가도 끝없는 나무들뿐이라서 길을 잘못 들지 않았나 의심이 치밀기도 했다.
해가 중천에 떠 있고 배가 고파올 무렵, 금연화와 절혼마녀는 바람결에 묻어나는 물기를 감지했다.
‘권수!’
갑자기 신경이 팽팽하게 곤두선다.
수묘인이 권수 어디쯤에서 어떤 식으로 강을 건널지는 모르지만, 권수 나루터에 진을 치고 있는 무인들이 북검문 무인이 틀림없다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다른 곳에서 강을 건널 것이라는 생각쯤은 충분히 하고 있을 테니까.
“여기가 어디쯤이지?”
수묘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일다경(一茶頃)이라는 짧은 시간, 아니, 무척 길게 느껴지는 시간 동안 묵묵히 수레를 몰았다.
이윽고 금연화의 눈에 넓디넓은 강줄기가 환히 드러났다.
수묘인은 그제야 입을 뗐다.
“아까는 말해줘도 모를 것 같아서…… 강 건너에 있는 산이 무슨 산일 것 같나?”
금연화는 눈을 크게 뜨고 강줄기를 살폈다. 그러나 자신들이 어디쯤에 와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권수라면 환히 안다 싶었는데. 할 수 없이 수묘인이 말한 강 건너 큰 산을 쳐다봤다.
‘너무 멀어. 권수 부근에 있는 산이니 아는 산일 텐데 도무지 모르겠어. 겨우 산봉만 보이니…… 앗! 그, 그럼 여기가!’
문득 산 지명 하나가 떠오른다.
원래부터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산이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 날부터인가 남무림과 북무림, 양대 무림의 성산(聖山)이 되었다. 범인들의 출입은 철저히 통제하며, 무인들의 출입 또한 북검문의 승인을 받아야만 등산을 할 수 있는 산.
장산, 일명 내방산이다.
북무림이 남무림을 꺾은 최초의 혈전장이니 긍지의 상징이다. 남무림으로서는 단 한 명도 물러서지 않고 결사를 단행했으니 의기의 표본이다.
“장산…… 갈수록 태산이네. 하필이면 경계가 가장 삼엄한 곳으로 끌고 왔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장산에는 평소에도 무인들이 기백 명씩 득실거리는데 잘난 척하면서 끌고 온 곳이 고작…….”
금연화가 소름이 오싹 돋는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수묘인은 살점이 베어날 것 같은 독기에도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나 같은 놈도 병법이라는 것을 아는데, 나보다도 귀동냥이 못하군. 경계란 빈 곳을 막는 것이 제일 원칙이니 원래부터 충실한 곳은 오히려 신경이 덜 쓰이지. 원래부터 강한 곳이니 누가 오랴 싶은 방심도 생기고.”
수묘인은 수레에서 내려 길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비상시국에는 강한 곳일수록 경계는 다른 곳보다 훨씬 허술해지는 법이야. 경계해야 할 대상이 강적이라면 상황이 다르겠지만 우리같이 숨어 다니기 급급한 상대는 신경 쓰지도 않아. 한마디로 이곳 경계는 권수를 통틀어 제일 허술해.”
‘이자…… 수묘인이 아냐!’
절혼마녀와 금연화는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수묘인은 준비를 철저히 해왔다. 마치 비정상적으로 강을 건널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만반의 준비가 갖춰져 있다.
수묘인은 납작하게 접힌 돼지 오줌보를 꺼내 바람을 넣은 후 꽁꽁 묶기 시작했다.
“너무 준비가 철저해. 재미있는 사람이야. 아무래도 내가 생각을 잘못했나 봐. 어떤 목적을 갖고 일부러 접촉해 온 자. 그렇게밖에 생각이 안 들어.”
절혼마녀가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제가 뭐, 중요한 인물도 아니고. 일부러 제게 접근할 이유가 없어요. 북검문, 남도문 어느 쪽에서도 전 필요없는 존재잖아요.”
“그게 의문이야. 일부러 접근했다면 목적이 있을 텐데, 우리에게서는 얻을 게 전혀 없거든.”
“기우일 거예요.”
“그러길 바라야겠지. 모처럼 마음에 드는 사내를 만났는데 내 손으로 죽인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파.”
그녀들의 눈길은 수묘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좇았다.
수레 밑에 공기가 가득 든 돼지 오줌보가 수십 개나 매달렸다. 그런 후에도 수묘인은 계속 돼지 오줌보를 묶어댔다.
이윽고 돼지 오줌보가 삼십여 개쯤 널려 있어서 발 디딜 곳이 없을 즈음, 수묘인이 말했다.
“헤엄칠 생각은 말고 물에 몸을 맡겨. 흘러가는 대로 떠내려가라고. 그러다 수레가 방향을 잡으면 그때나 헤엄치고. 이걸 허리춤에 매달아놓아. 별 힘 들이지 않아도 뜰 거야. 세 개 정도 매달면 충분하겠지.”
하릴없이 꼬박 반나절을 기다렸다.
여인들은 점심도 저녁도 건포(乾脯)로 대충 때우고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푹 쉬었다.
수묘인은 잠을 자두라고 했지만 지난밤에 푹 잔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수묘인과 노인은 잠을 잤다. 건포도 먹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고 잠귀신이 들린 사람들처럼 깊은 잠에 빠졌다.
그들에게서는 무인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경계심을 단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다. 고주망태로 술에 취했어도 한줄기 경계심만은 놓지 않는 것이 무인인데, 젊고 늙은 수묘인들은 목을 베어가도 모를 만큼 깊이 잠들었다.
절혼마녀는 삭사를 꺼내 일부러 소리를 내봤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살기를 진하게 일으켜 감각이 곤두서게 만들었다.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끝내 공격을 가했다. 삭사가 목젖에 닿았고, 일 푼만 힘을 주어도 피보라가 솟구칠 판이다.
역시 반응은 똑같다.
초절정고수라면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숨길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반응하는 것까지는 숨기지 못하는 법이고, 마음이 움직이면 기류(氣流)가 변한다.
절혼마녀와 금연화는 기류의 변화를 감지해 봤다.
변함이 없다. 공격을 하기 전이나 한 후나 똑같은 흐름이다.
금연화는 생각했다.
‘기우였어. 무공을 모르는 사람들이야.’
절혼마녀도 생각했다.
‘이 노인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고수…… 이 사람은…… 무공을 모르거나, 안다면…… 역시 감당하기 벅차겠지.’
수묘인은 해가 서녘으로 넘어가고도 반 시진이나 지난 다음에야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쯧! 잠들 자두라니까. 밤새 물속에 있을 텐데…… 이제 가지.”
거침없는 행동이 시작되었다.
제4장 몰상도(沒想到) ― 뜻밖에
1
사위가 캄캄해졌다. 산에서 맞이한 어둠은 더욱 짙어서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렵다.
수레는 미끄러지듯 산을 내려가 조용히 물속에 잠겼다.
기이한 것은 비루먹은 말의 행동이다. 감각이 마비된 것처럼, 아니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물가에 이르러서도 일 점의 망설임 없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한두 번 강을 건너본 솜씨가 아냐.’
산을 잘 타는 것은 시신을 날랐기 때문이라고 해도, 망설임없이 강을 건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물어보지는 않았다. 수묘인은 합당한 대답을 내놓을 테고, 믿을 수밖에 없는 말일 게다.
돼지 오줌보로 밑을 가득 채운 수레는 기적처럼 둥실 떠올랐다.
비루먹은 말…… 역시 강을 많이 건너다녔다.
말은 다리가 닿지 않을 만큼 들어갔을 때 헤엄칠 생각을 하지 않고 물길에 몸을 맡겼다. 배 밑에 매달아놓은 돼지 오줌보를 단단히 믿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아니, 행동이라기보다는 오랜 반복 끝에 몸에 배어버린 습성이다.
스윽! 스으윽……!
자하령들이 파문 한 점 일으키지 않고 물속으로 들어섰다.
“길은 알고 가는 거야?”
절혼마녀가 주위를 쓸어보며 말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방향을 잡을 수 있는 지형지물이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칠흑 같은 어둠과 은비늘처럼 반짝거리는 드넓은 강물뿐. 강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라도 일직선으로 강을 건너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싶다.
“당신 이름은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