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90
90
천멸도만큼이나 남무림 최고의 살수로 인정받고 있는 사람들이 적이 되어서 눈앞에 섰다.
무림은 도산검림(刀山劍林), 칼을 밟고 사는 인생이니 언제 누가 앞을 가로막아도 이상할 것은 없다. 단지 선자불래(善者不來)요, 내자불선(來者不善)이라. 무엇인가 한 가지라도 필승의 자신을 가졌기에 앞을 가로막았을 것이라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보통 사람도 그러한데, 하물며 적안 사태는 죽음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구십구 개를 준비했어도 한 개를 놓친다면 자신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안다.
적안 사태 같은 사람이 목숨을 거두고자 나타났을 때는 십 중 십의 자신감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한다.
무풍곡은 이런 곳인가! 죽음의 땅인가!
하기는…… 무풍곡에 깔린 기관진법이 이약도의 팔귀당천지관이 맞다면, 그리고 팔귀당천지관이 소문처럼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 천하제일무인을 죽일 수 있는 진법이라면 충분히 자신을 가질 만하다.
적안 사태를 너무 얕본 말인가?
적안 사태의 무공과 살인무공을 익힌 여덟 사내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천멸도 살수들만 없다면. 천멸도 살수들이 따라붙지 않았을 때 저들과 마주쳤다면…….
적안 사태는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 마야조차도 감탄했다는 흑조편복은 어디 있는가.
그마저 나타난다면……
그렇다고 이쪽이 약하다는 말은 아니다. 가장 염려스러웠던 일령마저도 선유비조신법을 극성으로 깨우쳐 버렸으니 이쪽이야말로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볼 수 있다.
팔귀당천지관의 실체를 보지 못했으니 생각 자체가 추측에 불과하지만, 현 상황만으로도 이쪽이나 저쪽이나 승부를 가늠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다담선자가 양쪽의 무공 수위를 저울질하고 있을 때,
“난 마야다. 앞을 막아서는 자는 모두 죽어.”
거두절미, 소립파가 대뜸 던진 말이었다.
다담선자는 깜짝 놀랐다.
그녀만큼이나 소립파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천멸도주도 퍼뜩 고개를 돌려 소립파를 쳐다봤다. 절혼마녀도, 일령도, 시마도……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눈길을 집중시켰다.
그가 한 말 때문이 아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진득한 피 냄새가 묻어났기 때문이다.
정말로 앞을 막아서는 사람은 모두 죽여 버릴 것 같은 잔혹한 마기(魔氣)라니!
음성으로 인간의 오욕칠정을 자극하여 공포를 안겨주는 죽음의 저주, 적멸주다. 소립파가 적멸주를 마성(魔性)이라고 느껴질 만큼 강하게 뿜어내고 있다. 숱한 밤 동안 그와 살을 맞대고 살아온 다담선자조차도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그렇다. 소립파는 음성뿐만이 아니라 표정까지도 변했다.
안색이 쇳덩이처럼 차디찼다.
아니, 안색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코도 입도 보이지 않는다. 소립파의 얼굴은 오직 눈밖에 없는 것 같다.
싸움꾼 같은 투사의 눈이 아니다. 늑대의 잿빛 눈도 아니다. 독사의 차디찬 눈빛도 아니다.
시체의 눈, 눈동자가 퀭하니 안으로 파인 것처럼 보여 어두움만 흘러나온다.
사기(死氣)가 가득한 눈은 말한다.
―죽음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고통스럽지도 않다. 아주 잠깐이면 끝날 거야. 아무 걱정하지 말고 죽음을 맞이하라.
환희마소와는 다르게 적멸주를 심은 눈빛은 공포를 안겨준다. 죽음을 맞이하기 싫어진다. 오직 죽음에서 도망가고픈 느낌만 들게 한다.
순간, 적안 사태의 안색도 새하얗게 변했다. 반면에 검었던 눈동자는 붉은 적색으로 물들었다.
하얀 얼굴에 새빨간 눈.
자애심이 많아 보이던 비구니는 순식간에 혈귀로 변했다.
적안 사태라는 외호가 없더라도 사태의 얼굴을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적안 사태’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확연한 얼굴 변화다.
“크크크! 팔귀당천지관을 알아보는 계집이 있어서 쉽게 죽여주려고 했더니……. 크크크!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감히 내 앞에서 마야 운운하다니. 좋다. 어디 마야의 솜씨가 어떤지 한 번 보자꾸나.”
적안 사태도 먹이를 앞에 둔 늑대처럼 잔혹하게 웃었다.
지옥 나찰과 포근한 할머니의 인상을 동시에 지닌 특이한 사람이다.
“딱 한 마디만. 물러서겠나, 죽겠나.”
소립파의 음성은 무미건조했다. 억양의 고저마저 담겨 있지 않았다.
“크크크크……!”
적안 사태는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듯 괴소를 터뜨렸다. 동시에 하늘을 향해 두 팔을 쭉 뻗어 올렸다. 순간,
쉬이익! 쒜에엑……!
지금까지 한껏 여유를 부리던 여덟 사내가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본인들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형의 밧줄에 묶여 강제로 들려진 듯한 움직임.
그들은 허공에 떠오른 후에도 억지로 끌려가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며 여덟 방위를 점해갔다.
제6장 타상타(打相打) ― 싸움을 하다
1
여덟 사내의 자리가 정해졌다.
팔방(八方)을 점한 것은 확실한데, 높고 낮음의 층차가 있으니 팔괘(八卦) 쪽으로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공격 준비는 차곡차곡 이루어졌다.
그들은 품속에서 장난감이 아닐까 싶을 만큼 아주 작은 소궁을 꺼내 들었다.
장난감은 아니다. 살을 꺼내 재우는 모습이 사뭇 신중하다. 깨지기 쉬운 그릇을 만지는 듯, 갓난아기를 어루만지는 듯 소궁을 만지는 모습에는 긴장이 잔뜩 배여 있다.
“음……!”
절혼마녀는 귀를 기울여서 자세히 듣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 만큼 나직한 신음을 토해냈다.
여덟 사내가 보여준 광경은 확실히 놀랍다.
견문이 적지 않은 다담선자도 처음 보는 놀라운 광경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람이 허공에 떠 있을 수 있다니!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하늘에 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어떻게 하늘 한가운데에 둥실둥실 떠서 세상을 굽어볼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모습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
한 가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점도 보인다.
여덟 사내의 움직임,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주목해야 한다.
여덟 사내는 본신의 능력으로 하늘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밧줄에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몸통이 따로 묶여서 이리저리 잡아끄는 데로 끌려 다닌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러면 밧줄이 보여야 하고, 밧줄을 잡아당기는 사람 또한 보여야 한다.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횟가루를 뿌려놓은 절벽에는 개미 한 마리 기어다니지 않는다. 땅에도 하늘에도 사람은커녕 새 한 마리 구경할 수 없다.
밧줄도 보이지 않는다.
여덟 사내는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아니, 날개 달린 새처럼 허공에 떠서 내려오질 않고 있는데 그들 주위에는 텅 빈 허공뿐이다.
제일 먼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은 은사(隱絲)였다.
정밀하게 제작한 은사라면 인간의 이목 정도는 쉽게 속일 수 있다.
실제로 사천당문(四川唐門)에서 만든 무형은사(無形隱絲)는 투망을 만들어 내던져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소립파만 하더라도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은잠사(銀蠶絲)를 가지고 있다.
바로 그것이다! 은사! 은사 외에는 현재 이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게 없다.
“이게 무슨 기괴한……!”
일령이 놀라서 경악성을 터뜨릴 때, 절혼마녀는 천사검을 뽑아 들고 소립파의 오른쪽으로 다가섰다.
“아!”
일령이 절혼마녀의 움직임을 보고서야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황급히 신형을 날려 소립파의 앞을 막았다.
어자석에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몸을 튕겨내어 말 머리를 밟고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킨 후 소립파의 앞으로 나서기까지, 일령이 보여준 일련의 움직임은 찬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다.
빨라서가 아니다. 무림에 그 정도로 빠른 사람은 모래알처럼 많다. 신법이 표홀해서도 아니다. 깔끔한 면에서는 무척 인상적이었지만 일류라 칭하는 고수들이라면 그 정도 움직임은 보여줄 수 있다.
일령이 뛰어난 점은 가벼움에 있다.
바람이 없었으니 망정이지 작은 바람이라도 불었다면 여지없이 휩쓸려 날려갔을 것 같은 가벼움. 너무 힘이 없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까움과 불안감을 자아내게 만드는 가벼움.
선유비조신법이 궁극을 향해 치닫고 있는 증거다.
선유비조신법을 모르는 사람은, 일령이 무슨 신법을 수련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또 궁극의 무도(武道)를 깨우치지 못한 검자(劍者)들은 찬탄 대신 비웃음을 흘려낼지도 모를 일이다. 저런 것도 신법이냐고 비웃으며. 그렇게 가벼워서야 어디 힘이나 쓰겠냐면서.
적안 사태는 붉은 광채를 더욱 짙게 뿌려냈다.
“크크크! 마야…… 계집 후리는 재주도 일견후즉파인가? 척 보면 어떻게 후릴지 감이 오나 보지? 뛰어난 계집들을 곁에 두었어. 계집들이 어쩌면 저렇게 야무질꼬. 크크크! 하나같이 쓸 만해. 이거야 원…… 웬만한 작자들을 귀싸대기 때릴 계집들이잖아. 크크크! 좋아. 꼬마 계집아, 네년이 방금 펼친 신법이 뭐냐? 얼핏 보면 공령문 늙은이의 선유비조신법 같은데 공령 늙은이가 펼쳐도 그 정도는 아닐 것 같고…….”
적안 사태의 음성에는 여유가 넘쳤다.
적안 사태는 마야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소립파의 몸 상태는 누가 봐도 기름이 다한 등잔불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두 다리가 풀려서 쓰러지기 직전이라는 정도는 삼척동자도 안다.
두 팔 역시 힘을 잃고 축 늘어져 있으며, 정신도 수습하기 힘든 듯 고개를 떨궜다가 쳐들기를 반복하고 있다.
다담선자가 부축하지 않았다면 벌써 땅바닥에 드러누웠을 게다.
엎친 데 덮쳤다고 해야 하나?
예측하지 못한 게 있다.
오시(午時), 저주의 자오법신!
적안 사태와 팔귀당천지관만도 벅찬데 소립파는 또 하나의 적인 저주의 자오법신과 싸워야 하지 않는가.
지금 시간은 사시(巳時)밖에 되지 않았다. 한데도 소립파가 정신을 놓을 듯 휘청거리는 것은 체내의 음양전도(陰陽傳導)가 무척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음양전도가 횟수를 거듭할수록 고통이 가중되는 시간은 길어지고 그가 누릴 수 있는 편안한 시간은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소립파가 보여준 적멸주는 소름 끼쳤다.
앞을 가로막으면 죽는다는 말을 했을 때, 적안 사태는 정말로 자신이 피떡이 되어 쓰러져 있는 환상을 보았다.
흑과 백밖에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검은 피를 콸콸 쏟아내며 죽어가는 모습이라니. 그러면서 속삭였다. 죽음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고. 죽음의 순간은 금방이며, 아무런 고통도 없을 것이라고.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금방이라도 신법을 떨쳐 도주하고픈 충동마저 들었다. 마야의 앞을 막아선 이유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무적의 절진인 팔귀당천지관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도 순간적이나마 잊어버렸다.
적안 사태가 급히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곧 자신이 겪었던 공포와 환상이 마야의 말 몇 마디에 기인했음을 깨달았다.
적안 사태는 급히 대갈을 내지르며 공격 채비를 갖췄다.
마야와 말을 섞어서는 곤란하다. 그와 말을 나누면 나눌수록 기이한 사술이 몸을 얽어맬 것이다.
그랬다. 그래서 급히 손을 쳐들어 팔귀당천지관을 발동시켰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가는 소문으로만 듣던 마야의 기괴한 능력에 휘말려 당하고 만다는 절박함이 온 정신을 지배했었다.
그런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흐느적거리는 소립파의 모습을 보라. 그를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하늘을 무너뜨리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펼치지 못하면 어린아이의 손장난만도 못한 것,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처지에 남을 위협할 여력이 있을까?
적안 사태 같은 고수에게 허장성세는 통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볼 줄 알고, 판단할 줄 알기에 무림을 공포로 몰아넣는 살수가 될 수 있었다.
적안 사태는 판단했다.
‘자시와 오시만 되면 극한의 고통을 겪는 특이한 주화입마(走火入魔)에 걸렸다더니만, 사시밖에 안 됐는데 이 지경이면…… 이자는 신경 쓸 것 없겠어. 호호! 싱겁게 끝나기만 했다가는 흑조편복, 이 늙은이를 가만두지 않겠어. 팔귀당천지관을 겨우 이런 젖비린내 나는 어린것들에게 쓰게 하다니!’
“…….”
일령은 적안 사태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다른 때 같으면 공령문의 비기를 높이 평가해 주었으니 뿌듯한 마음에서라도 몇 마디 대꾸해 주었겠지만 지금은 온 정신을 하나로 모아도 모자랄 판이다.
싸움이 벌어진다. 허공에 떠 있는 여덟 사내가 무슨 공격을 펼칠지 모르지만 이제 곧 끔찍한 공격이 시작된다.
맞서 싸워야 하나?
아니다. 첫 번째 임무는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소립파를 보호하는 것이다.
이주회첨진.
절혼마녀는 이주회첨진의 묘리에 따라 다담선자를 주축으로 한쪽 날개가 되기 위해 오른쪽에 섰다.
소립파가 마차를 벗어났으니 변형된 이주회첨진이다.
소립파를 보호하고, 여력이 남으면 적을 죽인다.
일령은 자기 자리를 찾은 후, 머릿속으로 움직여야 할 동선을 그리기에 여념없었다.
소립파는 창자루다. 일령은 창끝이다. 다른 병기도 있다. 도(刀)다. 도의 손잡이는 다담선자이며, 도신(刀身)은 절혼마녀다.
소립파와 다담선자는 이신일체(二身一體). 몸은 둘이나 창자루와 도의 손잡이는 하나로 연결될 것이며, 창과 도는 주인의 뜻대로 움직일 것이다.
한데 문제가 있다.
소립파가 움직이지 못한다. 기상천외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육장을 부딪쳐야 하는 싸움에서는 가장 약한 존재다.
그런 점을 보충하기 위해서 시마가 존재한다. 바로 상주(上柱)다.
마차에서는 지붕 위에서 소립파의 역할을 대신했지만, 땅에서 그는 소립파의 왼쪽에 섰다.
그러고 보니 재미있다.
소립파는 몸, 다담선자와 시마는 왼팔과 오른팔, 그리고 절혼마녀와 일령은 병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