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91
91
배치 형태로만 판단하면 무림 십대검진으로 사납기 이를 데 없다는 삼수양격진(三手兩擊陣)과도 흡사해 보인다.
삼수양격진이냐, 이주회첨진이냐.
이는 병기가 된 사람들이, 좌우 양팔이 어떤 동선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이약도와 살아서 돌아온 여섯 사내는 팔귀당천지관을 완성했다. 이약도가 소원한 대로 무공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천하제일무인을 죽일 수 있는 천하의 절진을 만들어낸 것이다.
일령의 귓전에 소곤거리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일령은 급히 뒤돌아보았으나…… 소립파는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눈꺼풀은 아예 감겼으며, 전신에서는 끊임없이 경련이 일었다.
그러나 주저앉는 소립파를 침착한 모습으로 부축해 주고 있는 다담선자의 눈빛은 맑게 빛났다.
‘역시 환청이 아냐. 언니도 들었어.’
소립파의 육신은 최악을 향해 치닫고 있지만, 그의 정신은 아직도 굳건히 곧추선 채 무너지지 않고 있다.
―이약도와 여섯 사내, 육진사(六陣士)는 섬서(陝西) 장순(長淳) 사함곡(沙陷谷)에 진을 설치했다. 이론으로 그칠 절진인지 실전에 사용할 수 있는 절진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지. 진을 설치한 후, 그야말로 당대 제일 무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유인해 끌어들였다. 소림(少林) 허양(虛洋) 대사(大師), 청성(靑城) 노석(蘆石) 진인(眞人)…….
귓전에 들리는 속삭임은 까마득히 잊었던 비사(秘事)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일명 ‘십팔천붕(十八天崩)’이라고 일컬어지는 천하제일 열여덟 고수의 실종 사건.
그들은 각기 한 가지 병기에 능통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병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없었고, 사문도 달랐지만 한 가지 병기에서만큼은 하늘이라고 지칭받았다.
단언컨대 중원에 십팔반 병기가 유래된 이래로 그들만큼 절정에 이른 고수들도 없을 것이다.
그들이 거의 같은 시기에 사라졌다.
소림 장경각주(藏經閣主)보다 파천곤(破天棍)으로 더 널리 알려진 허양 대사, 청성파(靑城派)의 절광검법(絶光劍法)을 검봉(劍峰) 제일좌에 올려놓은 노석 진인 등등…….
그들이 모두 팔귀당천지관에 당했단 말인가!
그렇다. 아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십팔천붕. 열여덟 번에 걸친 실험. 팔귀당천지관은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아니, 열여덟 번 모두 성공했다. 죽음에 이르도록 치명적인 부상을 입혔으니 성공한 것이요, 이약도가 원하는 대로 절진 안에서 죽이지 못하고 도주하게 만들었으니 실패한 것이다.
귓전에 울리는 속삭임은 달콤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의 음성이기에 더욱 달디달았다.
그러나 돌변한 상황은 마냥 달콤함에 취해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적안 사태가 급히 손을 들어올렸다. 보나마나 공격 신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가 넘쳤는데 왜 이토록 다급해진 것일까?
생각할 필요도 없다.
적안 사태는 뛰어난 살수다. 또 살업(殺業)이 천직인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눈치가 빠르다. 여인들의 얼굴에 스친 미미한 변화를 감지해 내지 못할 그녀가 아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손에 쥔 승기를 놓치고 싶은 사람은 없으리라. 설혹 대세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여유를 즐길 것인가, 잡은 승기를 더욱 단단히 조일 것인가.
물어볼 필요가 있는가.
전장을 여덟 사내에게 맡긴 적안 사태는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스르륵 미끄러지며 뒤로 물러섰다.
잠시 후, 적안 사태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절곡 저 너머에 굽이진 곳에 있는지, 아니면 몸을 숨길 수 있는 큰 바위라도 있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땅속으로 꺼져 들어갔는지…… 물러서는 것까지는 보았는데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팔귀당천지관은 모두 여덟 관문으로 이루어지며…… 첫 번째 관문은 초열지옥(焦熱地獄), 온 세상을 불길에 휘감아 살아 있는 생명은 모조리 말살시킨다. 이를 펼치기 위해서는 화약 삼백 근, 초탄(草炭) 열두 수레, 송유(松油) 서른 말…….
일령은 급히 여덟 사내를 쳐다보았다.
사내들은 소궁을 한껏 당겨 금방이라도 쏘아낼 태세였다.
절혼마녀는 사람을 베고도 남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절곡 주변을 훑어보았다.
사물은 보기 나름인가. 평범하기만 했던 회색빛 절벽과 땅이 온통 흉험한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다담선자는 약간의 움직임을 보였다.
그녀가 손을 들어올린다 싶은 순간,
쒜에엑!
형체는 없는데 소리가 일었다. 땅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화살 한 자루가 허공을 향해 치솟는 듯, 아래에서 일어나 위로 이어지는 파공음이다. 한데,
툭! 투툭! 투투툭! 툭!
바위도 으스러뜨리고 고래 가죽도 찢어발기는 천병이 답답한 소리와 어울리더니 힘을 잃고 뚝 떨어져 내렸다.
“음……!”
다담선자는 가는 신음을 토해냈다.
추명반. 눈에 보이지 않으며, 피를 뿜어내고 난 다음에야 파공음을 듣는다는 죽음의 병기.
추명반이 그녀의 손을 벗어난 이래 목표를 가격하지 못하고 떨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대체로 살수들이란 목표에 대해서 세세히 파악한 후에야 움직인다. 저들이 전문적인 살수가 아니더라도 그 정도 파악하는 것은 기본에 속한다.
다담선자, 절혼마녀, 일령, 그리고 시마.
천멸도주에 대해서는 모를 수도 있지만 다른 네 사람에 대해서는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알고 있으리라. 그렇다면 추명반에 대해서도 대비책을 강구해 놓았을 게고, 결과가 이것이다.
추명반을 나아가지 못하게 만든 건 무엇일까? 출렁이는 물체다.
여덟 사내를 허공에 띄워놓은 물체인 것 같은데…… 절곡을 가득 덮은 그물?
실제인지 착시를 이용한 것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뭉쳐 놓은 솜처럼 추명반의 쾌속함을 단숨에 제어하는 효능이 있다.
“크크크……!”
여덟 사내 중에 누군가가 괴이한 웃음을 토해냈다.
그것이 신호다.
그들이 들고 있던 소궁에서 아주 작은 무엇인가가 쏘아져 나왔다.
화살은 아니다. 화살처럼 날카로운 것이 아니라 솜처럼 둔탁한 것이다. 방향도 일행을 직접 겨냥하지 않았다. 여덟 사내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마치 팔괘(八卦)의 자리에 무엇인가를 박아 넣는 형국……
‘초열지옥! 저건 도화선!’
사내들이 무엇을 쏘아냈는지 모른다. 하지만 땅에 닿게 해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든다.
“막앗!”
다담선자는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또 하나의 추명반을 쏘아냈다.
쒜엑! 패에엥! 파앗!
그녀가 단 두 마디를 끝냈을 때, 추명반은 사내들이 쏘아낸 물체 중에 하나를 격중시켰다. 순간,
퍼억! 화아악……!
탁한 소리와 함께 허공 가득히 뿌연 가루가 터져 나왔다.
아니다! 가루를 본 것은 실로 잠깐, 하얀 섬광이 번쩍 피어나면서 온 세상을 까맣게 만들어 버렸다.
꽝! 꽈앙! 꽈아앙……!
연이은 폭음이 아련히 들려왔다.
바로 머리 위에서 터지는 폭음이라는 걸 모를 리 없지만 귀머거리처럼 귀가 먹먹해서 잘 들리지 않았다.
뿐만이 아니다. 눈까지 보이지 않는다.
백색 섬광은 세상에서 가장 밝은 빛이었나? 섬광을 보는 순간 눈이 멀어버리는 저주의 빛이었나?
보이는 것이라고는 까만 어둠뿐이다.
감각도 마비되었다. 여덟 사내가 머리 위에 있다는 것을 알지만 살기를 느끼지 못하겠다. 적안 사태가 지척에 있다는 것도 아는데 존재 여부조차 감지되지 않는다.
‘이것이 초열지옥?’
천하제일거상이 온 재산을 쏟아 부어 만들고자 했던 천하제일진.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
다담선자의 판단이 잘못된 것인가? 저들은 의도적으로 다담선자의 공격을 이끌어낸 것인가? 공격의 시발은 저들이 아니라 다담선자의 손에서 시작된 것인가?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할 무렵,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온몸을 단숨에 녹여 버릴 듯 맹렬하게 다가오는 열기다.
‘피할 길이 없어!’
마음은 다급한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움직이고 싶은데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생각이 나지 않으면 본능으로라도 움직여야 하는데 갈 곳이 없다. 동서남북, 하늘, 땅…… 그 어디로도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죽은 거 아니면 아무 말이라도 해봐!”
누군가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처음에는 누가 말하는지 몰랐다. 말이 끝날 무렵에야 겨우 천멸도주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아챘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땅에서 시작되어 좁혀오는 불길은 피할 길이 없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덩이는 사방이 피할 곳이다. 이주회첨진을 유지한 채 신속히 이동한다. 천멸도주! 급히 뒤쫓지 않으면 몰살당하고 말 것…….
소립파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심중은 몇몇 사람의 마음에 단단히 틀어박혔다. 입을 열어 말로 하는 것보다 백배는 또렷하게 들린 음성이다.
“빨리 움직이기나 해!”
천멸도주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사방에서 옥죄어오는 뜨거운 열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뜨거워진다.
―십 보 앞으로!
파앗! 파아앗!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세 여인과 두 사내는 한 몸이나 된 듯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천멸도주도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의 살수들, 보이지는 않지만 무수한 그림자들이 뒤따르고 있다는 점은 확실히 느껴졌다.
―두 호흡만 멈췄다가! 좌로 삼 보! 지금!
어디를 어떻게 가고 있는 것일까? 알 수도 없고 보지도 못하고 들을 수도 없지만 움직이는 사람들은 일말의 의심도 갖지 않았다.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마야이지 않은가.
한 가지 염려되는 점은 마야의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다는 점이다. 다담선자가 단단히 챙기고 있지만 저주의 자오법신이 발동이라도 하는 날에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맹렬히 칠 보!
소립파의 심음(心音)이 기우를 불식시키라고 하겠다는 듯 또렷하게 들려왔다.
2
―숨 좀 돌리지.
누구나 가볍게 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 순간 이처럼 반가운 말이 또 있을 수 있겠는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말일 게다. 그런데,
“천상유성성(天上有星星: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고), 합자재천공오상(비둘기가 하늘을 날고 있네).”
느닷없이 소립파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위태로운 음성이었다. 피죽 한 그릇 제대로 얻어먹지 못해 안으로 안으로만 파고들어 가는 음성이니 굳이 노래라고 할 것도 없었다.
‘이래서 심음으로 말을 해왔던 것……. 그런데 왜 갑자기 노래를? 혹시 마령음?’
그렇다. 소립파는 마령음을 전개하고 있었다. 목표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한다. 기를 북돋는 소리인지, 아니면 저하시키는 소리인지…… 어떤 목적으로 부르는 노래인지 알 수가 없다.
의문은 촌각도 지나지 않아서 풀렸다.
처량하다 못해 청승맞아 보이는 노랫가락이 고막을 뚫고 들어온다.
바로 그때다. 쇠뭉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눈에서 불이 번쩍 일어나며 세상이 노랗게 변했다.
아주 잠깐, 찰나 동안은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소립파의 노랫소리를 듣고 있었다는 것도, 급박한 공세에 휘말려 있다는 점도 까맣게 잊었다.
하지만 의식은 곧바로 돌아왔고, 다시 돌아온 의식은 올바른 눈과 귀를 되찾아주었다.
보인다! 들린다!
절곡 전체가 불길에 휩싸여 활활 타오르고 있다. 절곡에 가득 뿌려졌던 횟가루는 기름 역할을 대신해서 불길을 북돋고 있다.
여덟 사내는 여전히 허공에 떠 있다.
그들은 불길에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 듯 지긋이 아래를 지켜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아! 아직 불길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화마의 중심에서는 벗어났지만 이미 절곡을 가득 덮고 있는 불길은 금방이라도 달려들듯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다.
“흘흘(吃吃: 웃음소리) 소개불정(笑個不停: 웃음을 멈추지 못한다).”
소립파는 의미도 알 수 없는 노랫가락을 쥐어짜듯 뱉어냈다.
“됐어요. 이제 모두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어요.”
다담선자가 아픈 아기를 다독거리듯 다정스레 말하자 그때서야 마령음이 잦아들었다.
마령음을 끝낸 그의 모습은 산송장이나 진배없었다.
서 있을 힘이 없어서 다담선자에게 전신을 의지하고 축 늘어져 있으며, 연신 혀를 내밀어 입술을 훔친다. 몹시 목이 타는 모양이다. 양기가 임맥(任脈)을 장악하고 있을 때는 갈증이 더욱 치솟던데, 지금이 그런 것 같다.
“피해는?”
천멸도주가 허공에 말했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하나 그녀는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만 해도 천만다행이야. 각별히 조심하도록 해. 이 불길의 정체는 뭐야?”
혼자만의 독백은 아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분명히 말하고 있고, 대답 소리도 듣는다.
소립파에게 하는 말인가?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게 하면서 그녀에게만 말을 걸 수 있는 인물이 또 있다. 천멸도 살수들의 밀어(密語)는 천지자연의 독특한 소리를 응용하기에 오직 의미를 아는 사람만이 들을 수 있다.
딱! 톡톡! 뚜욱……!
과연,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아주 작은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으음! 녹린섬광산(綠燐閃光散)……!”
천멸도주가 신음을 흘려내고 말았다.
“노, 녹린섬광산!”
시마도 적잖이 놀란 모양이다. 이주회첨진의 중심에서 흔들림없이 서 있던 그가 미미하게 전율했다.
“방금 녹린섬광산이라고 했어?”
다담선자가 샛노랗게 질린 얼굴빛으로 천멸도주를 쳐다보며 물었다.
비로소 소립파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땅에서 일어나는 불길을 피할 수 없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길은 사방이 피할 곳이라고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