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93
93
확실히 여덟 사내에게는 그만한 여유가 있었다.
초열지옥의 엄청난 화력을 지켜본 다음인지라 자신감은 더욱 배가되었다.
건괘(乾卦)에 위치한 자가 초열지옥을 주관했다면, 밀밀겁은 곤괘(坤卦)에 위치한 자가 주관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일을 벌이는지 알지 못했다.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것이라고는 인간들 중에서 팔귀당천지관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믿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날고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자신들 같은 족속은 단칼에 베어낼 작자들이 수두룩한 곳이 무림인데 장난감 같은 몇몇 물건으로 누구든 죽일 수 있다고?
한데 정녕 장난감 같기만 하던 향낭은 엄청난 폭발력을 보이며 절곡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 속에서 죽지 않고 도주한 것이 용하다.
쥐새끼들도 아니고, 어쩌면 그렇게 불길이 약한 곳만 골라서 헤집어 달아나는지.
그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엄청난 힘을 지녔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같아서는 천하의 그 누구라도 죽일 자신이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들은 어떤 병기에도 위해를 받지 않는 위치에 있으며, 몸뚱이를 허공에 받쳐 주고 있는 밧줄은 강철같이 튼튼하다.
거리낄 것이 없었다.
팔귀당천지관이라는 것이 무풍곡에 한정된 게 아니라면…… 향낭 하나를 버릴 때마다 집이 몇십 채씩, 아니, 몇백 채씩 날아가는 돈 잡아먹는 귀신만 아니라면…….
그랬다면 천하도 오시할 수 있었을 텐데.
아무튼 좋다. 천하는 오시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무풍곡에서만은 천하제일이다.
그들은 천천히 밧줄을 잡아당겨 자신이 위치해야 할 곳을 찾아갔다.
곤괘가 팔괘진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위치뿐만이 아니라 층차까지 바꿔야 한다.
이번에 펼칠 두 번째 귀신은 암기폭풍.
첫 번째 화마의 경우에는 팔각의 위치만 정확히 짚어내면 그만이지만, 두 번째의 경우는 한 사람이 무려 이십여 개의 밧줄을 잡아당겨야 한다. 또한 서로가 한 몸에 연결된 손발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만 최고의 효과를 볼 수 있다.
설렁설렁하더라도 빠져나갈 길은 없어 보이지만.
“큭큭! 자, 이번에는 고슴도치를 만들어볼까? 이거 재미있구먼. 저놈들 무림고수란 놈들 맞지? 큭큭큭! 너무 싱거워, 너무. 종이호랑이도 이보다는 낫지 않겠나.”
“서둘게 무에야. 천천히 즐기자고.”
사내 한 명이 손에 쥐고 있던 보이지 않는 밧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피류륭……!
나비의 날갯짓 소리인가, 겨울바람이 대숲을 스쳐 지나는 소리인가.
아주 미약하게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은 불더미를 뚫고 뛰쳐나왔다.
‘막으면 안 돼!’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다담선자가 추명반을 던진 결과는 공중 폭발이었다.
결과적으로 삶의 활로를 뚫어주는 행동이 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죽음에 이를 정도로 위험했었다.
이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암기가 동시에 달려들지 않고 하나만 날아오는 것은 어떤 행동을 이끌어내려는 의도된 공격이 아닐까? 저것이 밀밀겁을 일으키는 시발(始發)이지 않을까?
퍼뜩 머릿속을 스쳐 가는 생각들이었다.
이런 생각은 팔십일전혼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슈욱!
백포인 한 명이 망설임없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가 떠오른 공간은 암기가 날아오는 길목.
쑤각! 파아앗! 퍼억!
살이 갈라지는 파육음, 그리고 빨갛게 피어나는 피보라.
날아온 암기는 크기가 어른 머리만 한 윤거(輪鋸)였다. 그래서 백포인의 죽음은 더욱 참혹했다.
백포인은 양손을 들어 암기를 잡으려고 했다. 하나 윤거는 날카로운 톱니로 사정없이 두 팔을 절단해 버렸다.
그제야 암기가 윤거임을 알아챈 백포인은 팔뚝마저 디밀어 윤거의 속도를 줄인 다음, 몸통으로 완전히 비행을 중지시켰다.
쿵!
그의 시신은 땅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숨은 이미 끊어졌다.
팔을 두 번이나 자르고도 복부마저 갈가리 썰어버린 윤거가 붉은 핏물 사이에서 요염한 귀광을 뿜어낼 뿐이다.
윤거에는 아무런 장치도 되어 있지 않은 듯했다.
그렇다면…… 희롱당했다. 이번 공격은 병기로 막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죽는 이는 없었으리라.
“개잡년!”
황전륜이 이를 부드득 갈며 허공에 떠 있는 여덟 사내를 노려보았다.
“좋아! 해봐, 자식들아!”
황전륜은 눈빛에 독기를 심어 쏘아냈다.
호랑이는 맹수지왕(猛獸之王)이지만 새는 잡지 못한다. 아무리 사나워도 하늘을 나는 재주가 없는 한 참새조차 잡을 수 없다.
그러나 간혹 잡기도 한다.
새라도 날개가 다쳐 떨어지거나, 날개만 믿고 자칫 방심하다가는 여지없이 잡히고 만다.
그때까지는 가슴에 참을 인(忍) 자를 새기며 꾹 눌러 참아야 한다.
‘너희 새끼들, 떨어질 날이 있을 거야. 반드시. 그때 보자고.’
피우웅! 파파파파팟……!
땅에서 불쑥 솟구쳐 올라 하늘로 올라가던 둥근 물체가 허공 십여 장 높이에서 폭발하듯 터졌다. 그리고 바늘보다도 더 가느다란 우모침(牛毛針)이 소나기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파락! 파라락……!
살수들의 대응은 신속했다.
그들에게 우모침 정도는 위협거리도 되지 못했다.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몸에 두른 백포를 풀어냈고, 곧바로 머리 위를 향해 휘휘 휘저었다.
팔십여 명이 일제히 백포를 꺼내 휘두르는 모습은 일대 장관이었다.
백포가 하늘을 완전히 가려서 물샐틈없이 쏟아져 내리던 우모침을 말끔히 걷어냈다. 아니, 걷어내는 중이었다. 그런데,
슈욱! 슈우우욱……!
동서남북, 네 군데서 먼지와 같은 원구 물체가 솟구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터지는 높이가 달랐다. 먼저는 십 장 높이였지만 이번에는 겨우 허리 부근까지밖에 솟구치지 않았는데 벼락같이 터져 버렸다.
파앗! 파파파팍……!
둥근 물체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역시 우모침이다.
빠르기는 강궁보다도 빠르고, 쇠털 같아서 막기도 힘들다. 또한 파르스름한 윤기가 번쩍이는 것으로 보아서 독까지 발라져 있다.
가장 지독한 것은 무차별 살상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우모침이 산지사방으로 비산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쓰러진 천멸도 살수는 딱 네 명뿐이었다.
둥근 물체가 폭발을 일으키려는 순간,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살수가 몸을 날려 안아버린 것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폭발 위치나 시기를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오로지 죽음의 순간을 직감하는 살수들의 본능에 따라서 움직였고, 예측이 맞은 것뿐이다.
“두 명씩 짝을 지어라! 한 명은 하늘을 도맡고, 한 명은 땅을 주시한다. 맡은 구역은 목숨으로 지켜!”
황전륜이 카랑카랑하게 외쳤다.
“저놈들, 대단한 놈들인데?”
여덟 사내 중 한 명이 감탄을 숨기지 않고 토해냈다.
“철저하게 죽음의 무공을 수련한 놈들이야. 저놈들…… 뛰어난 살수들이라더니 정말 그랬어. 피깨나 흘리고 다녔겠어.”
“흐흐흐! 죽음의 무공이라……. 우리와는 질이 다른 무공이군. 깔끔하게 정리된 무공을 수련하셨다, 이거지? 흐흐흐!”
먹이를 노리는 잔혹한 눈빛이 번뜩였다.
너무도 깔끔하고 매끄러운 움직임을 보자 사람을 죽여가며 막무가내로 배운 칼질과 비교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 것이다.
살수들의 움직임을 미루어보건대 병기를 들었다면 당적할 사람이 없을 만큼 빠르고 매서웠을 게다. 살수를 전개하면 여지없이 목숨을 걷어갔을 게고.
저런 자들에게는 인정을 기대할 수 없다.
자신들도 마찬가지다. 실전적인 면에서는 가장 뛰어난 살법을 지녔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빌어먹게도 투박한 칼질이라는 자비감(自卑感) 또한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여덟 사내 중 자리를 벗어나 살수들 앞에 내려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 죽음을 알기 때문이다.
적과 적으로 마주 섰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죽이는 것이 능사다. 체면이나 자존심 같은 쓸모없는 것들을 챙기다가는 도리어 당하기 십상이라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기회를 잡았으면 쳐야 한다.
확실하게 친 다음에 영원히 잠들었음을 확인까지 해야 한다.
적에게 베푼 자비는 반드시 독검이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한 사람들이다.
누가 강한지 한 번쯤 겨뤄보고 싶은 살수들, 하지만 감탄은 감탄이고 죽이는 것과는 별개다.
“보아하니 여기서 끝날 것 같지 않아?”
“빨리 끝내자고. 나머지는 아껴둬야지. 적안, 그 늙은 여우를 잡는 데 하나 정도는 더 써야 할 거고……. 크크크! 그러고도 다섯 개는 남네. 한동안은 무적으로 군림하겠는데? 비록 무풍곡을 벗어나진 못하지만 말이야.”
그들은 각기 다른 생각을 했다.
적안 사태마저 잡은 후에는…… 후후후! 하늘에 내려준 엄청난 기연을 냄새나는 놈들과 공유할 필요가 있을까?
놀리기라도 하듯 산발적으로 쏟아 붓던 암기 세례가 뚝 멈췄다. 대신 사방에서 굉음이 들리며 땅이 뒤흔들렸다.
지진인가?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흔들리고 있으니 지진이 틀림없다.
‘이것이 진정한 밀밀겁.’
절망적인 상황이 코앞에 닥쳐왔다.
그동안 부지런히 움직여서 절곡을 벗어났어야 했지만, 산발적인 암기 세례를 막느라 몇십 보 움직이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그런데도 팔십일전혼들 중 서른 명 가까이가 육신을 눕혔다. 기민한 판단과 신속한 행동으로 희생을 최대한으로 줄였는 데도 죽음은 절반에 육박한다.
천멸도 살수들이 이토록 맥없이 죽어간 적이 있었던가!
마도의 초고수들이라는 마도나 수검조차도 일초지적으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또 실제로 살법을 사용한 결과, 일초지적에 불과했다.
그들은 검이 몸을 베고 지나가는 데도 병기를 뽑을 생각조차 못했다.
지금은? 무풍곡에 횟가루를 뿌려놓아서 은신술을 펼치며 움직이는 게 용이치 않지만 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절벽을 기어오를 수 있다.
문제는 밀삭이다. 절벽을 기어오른다고 해도 저들을 베기 위해서는 밀삭 위를 걷거나 기어야 한다.
저들도 바보가 아닐진대 눈치 채지 못할까.
저들은 가장 안전한 곳에 있다. 허공이지만 추명반 같은 신병도 어쩌지 못하는 곳에 있다.
그야말로 천멸도 살수들에게는 가장 얄미운 곳에 있는 것이다.
황전륜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마음 같아서는 천 갈래 만 갈래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지만 냉정하게 현실을 살폈을 때 저들은 자신의 몫이 아니다.
아쉽지만 저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조용히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황전륜은 고개를 돌려 천멸도주를 쳐다봤다.
천멸도주의 시선은 그를 향하지 않았다. 다담선자와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여념이 없었다.
‘도주, 안녕히. 청령단과 황정초로 꼭…… 이놈의 나병을…… 이놈의 저주만은 꼭 풀어주시기를.’
무풍곡 전체가 살아 있는 괴물이 되었다. 얼마 전까지는 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태워먹더니, 이제는 쇠꼬챙이로 찔러 죽이려고 한다.
절곡 전체가 뒤흔들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괴물.
이러한 공격에는 어떤 방어도 무용지물이다. 부딪칠 수도 없고, 옥쇄도 어린아이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천멸도주의 판단이 옳았다. 저쪽이 진정한 밀밀겁을 펼친다면, 이쪽도 제대로 된 인벽을 쌓아야 한다.
“회신(回身)!”
짤막한 음성, 하나 팔십일전혼은 모두 들었다.
경계심으로 똘똘 뭉쳐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던 그들의 표정에 비로소 웃음이 담겼다.
그들은 긴장을 풀고 돌아섰다. 웃는 사람도 생겼고, 옆 동료에게 말을 거는 사람도 있었다. 옆에서 찔러오는 창이 있다면 그대로 관통당할 만큼 무방비 상태였다.
우루루루룽……!
절곡이 붕괴되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여겨졌다. 아니다. 이 소리는 절곡이 붕괴되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암기 세례를 쏟아 붓기 위해 기관이 돌아가는 소리다.
그래도 팔십일전혼은 웃었다.
“철옹(鐵甕)!”
두 번째 명령, 팔십일전혼은 몸을 바짝 밀착시키며 팔과 팔을 엮었다.
이제 천멸도주의 마지막 행동만 남았다.
살 사람들…… 그들은 바짝 모여 최소한의 형태로 몸을 숙여야 한다. 그 위로 팔십일전혼이 육신을 덮으면 그럭저럭 인벽이 완성된다.
만약, 만약…… 암기 중에 궁왕 강창도가 쏘아낸 것 같은 강궁이 있다면…… 그래서 몸을 관통해 버린다면…… 어쩔 수 있겠는가. 죽어야 할 운명이라면 죽어야겠지.
천멸도주 대신 다담선자가 말했다.
“밀밀겁에 구멍이 뚫렸어요.”
팔귀당천지관은 천하제일무인을 목표로 한다.
한 치의 여유도 없이 잘 짜인 수레바퀴처럼 아귀가 맞아 돌아가는 진식이다.
천하제일무인을 상대로 여유를 갖는다? 어불성설이다. 말도 안 된다. 목적을 이루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도 부족함이 있는데 어찌 여유를 가지겠나.
폭발적으로 몰아치고 또 몰아쳐서 최후의 여덟 번째 귀신에서야 목숨을 빼앗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정된 것이 팔귀당천지관이다.
첫 번째 혹은 두 번째에서 목숨을 앗을 수 있다면 막대한 은자를 소비해 가며 여덟 가지나 되는 관문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만일에 만일을 대비한다고 해도 두세 개만 추가하면 충분할 게다.
평생을 기관진식 연구에 바친 사람들은 최소한 여덟 개의 관문은 있어야 천하제일무인을 잡을 수 있다고 봤다. 그러고도 절반의 성공밖에 거두지 못했다.
위력이 너무 엄청나서 도저히 뚫고 나갈 길이 없어 보이는데 무슨 수가 있단 말인가?
있다. 있으니까 과거 십팔천이 죽지 않고 빠져나간 것이다.
초열지옥만 해도 그렇다. 여지없이 불에 타 죽을 것 같았는데 너무 간단히 빠져나왔다.
간단히…….
그렇다. 모든 일이 그렇다. 아는 사람은 쉽고 간단한데, 모르는 사람은 어렵고 힘들다.
지금은 알고 모르는 것이 삶과 죽음을 가른다는 차이가 있을 뿐, 이곳에도 세상 이치는 통용되고 있다.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 어려운 것을 간단한 것으로 바꿀 때 살 길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