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94
94
가장 간단한 것 하나는 찾았다.
전력을 기울여도 모자랄 기관진식을 저들 여덟 명은 여유를 가지고 유유자적 즐겼다.
저들이 산발적으로 사용한 암기들.
밀밀겁은 그만큼 허점이 생겼다.
일시에 몰아쳐야 할 암기를 미리 사용했으니, 일시에 몰아칠 경우 반드시 빈 공간이 생기리라.
“찾아.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찾아! 한두 명도 아니고 열여덟 명이나 찾아낸 구멍이야. 그들은 이렇게 어설픈 작자들이 펼친 기관이 아니라 달인들이 펼친 기관에서 구멍을 찾아냈어. 빨리 찾아!”
천멸도주가 버럭 일갈을 내질렀다.
2
거미는 장님이다. 눈이 퇴화해 버려 보지 못한다. 대신에 다리의 감각은 고도로 발달되어 있다.
감각이 발달된 다리, 이것이면 거미가 살아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먹이가 거미줄에 걸리면 거미줄은 진동을 일으키고, 진동은 줄을 타고 거미에게 전달된다.
먹이가 걸렸다는 것을 안 후에도 거미는 서둘지 않는다.
도주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으니 천천히 다가와 옭아매기만 하면 끝이다.
밀삭이 바로 그런 용도로 만들어졌다.
하고 많은 밧줄들 중에서도 지옥지주의 거미줄을 가공하여 만든 것은 다른 밧줄로는 밀삭의 탄력성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파리가 거미줄을 살짝만 건드려도 거미줄 전체가 출렁이듯, 밀삭 역시 조금의 변화만 있어도 뚜렷한 진동을 일으킬 것이다.
‘총 열세 겹.’
기가 막힐 노릇이다.
여덟 사내는 발밑에 밀삭으로 짠 그물을 열세 개나 깔아놓았다.
그물 간의 간격은 한 뼘 정도 되고, 아래 그물의 진동을 전해받기 위해서 중간 중간 상하가 연결되어 있다.
그물코는 손가락 마디 정도로 큰 편이지만 그물이 열세 겹이나 되니 활이나 창으로도 뚫을 수 없다. 하물며 추명반으로는 뚫지 못한 게 당연하다.
그물이 눈에 보이지 않았던 이유도 찾아냈다.
그물은 단색으로 짜인 것이 아니라 여러 색깔이 혼합되어 있다.
그런데 색의 배합이 참으로 절묘해서 하늘과 어울리면 푸른빛이 되고, 땅과 어울리면 황색이 된다.
단순히 색의 배합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원인은 밀삭에 투입된 많은 약재들과 유계의 특별한 제조 방법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절혼마녀는 잠시 망설였다.
밀삭은 속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겉보기에는 물러 보인다. 날카로운 예병(銳兵), 자신이 소지하고 있는 천사검과 같은 병기로 진기를 주입하여 내려치면 힘없이 끊어질 것 같다.
밀삭만 끊어버린다면 여기서 모든 상황은 종료되는데……
물론 소립파의 고언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밀삭은 물로도 녹이지 못하고, 불로 태우지도 못하며, 보검으로도 자를 수 없다고 했지.
소립파의 말을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으면서도 잠시나마 망설인 것은 밀삭이 너무도 만만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안 돼, 안 돼! 아! 이거…… 추명반으로도 자르지 못한 것이야.’
다담선자가 추명반으로 시험해 보지 않았던들, 어쩌면 소립파의 고언을 망각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절혼마녀는 손바닥을 밀삭 가까이에 댔다.
살이 닿도록 만지지는 않았다. 아주 가까이…… 밀삭이 만져질 듯하면서도 만져지지 않는 거리까지 접근시킨 후, 밀삭이 전해오는 소리를 들었다.
사물에는 모두 고유의 소리가 있다.
밀삭은 어떤 소리를 내는가?
무척 끈끈하다. 살이 닿으면 붙잡히기 십상이다. 닿은 부분을 떼어내고 움직이려면 그물 전체가 출렁일 만큼 힘을 줘야 한다.
저들은 허공에 뜬 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첫 번째 초열지옥을 만들 때 한 번 움직였고, 밀밀겁을 쓰면서 두 번째 움직였다.
움직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팔괘진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들 역시 행동에 제약을 받고 있다.
밀삭이 두 번째 소리를 전해왔다.
‘질기다. 쇠심줄은 저리 가라야. 이런 걸 자르려고 했으니.’
자르지도 못하고, 닿지도 못한다는 건 확실해졌다.
결론은 단 한 번 도약하여 심장에 검을 틀어박아야 한다는 것이다.
‘거리가 이십여 장. 한 번 도약…… 불가능해.’
현 무림에서 가장 빠른 자는 섬전잔영(閃電殘影)이다.
그는 귀적무를 죽였고, 절혼마녀는 귀적무의 전인이 되었으니 일면식도 없는 자이지만 복수의 대상이 되었다.
현 무림에서 가장 빠른 자를 죽일 능력이 있나?
귀적무를 수련했다면 능력 또한 구비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자신이 현 무림에서 가장 빠르다고 할 수 있다.
정말 가장 빠를까? 다담선자는 마도 사상 제일 빨랐던 십족신마(十足神魔)의 독문신법인 천와류(天渦流)의 맥을 이었다. 다담선자를 따돌릴 자신이 있나?
절혼마녀는 아무 자신도 없었다.
자신의 신법으로 몇 번이나 도약해야 이십여 장 거리를 나아갈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땅에서라면 거리를 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만 밀삭 위에서는 도무지 모르겠다.
그럼 밀삭이 전해온 세 번째 소리는 한 번의 도약으로 저들을 죽일 수 없다는 소리인가?
‘희망적인 소리를 들어야 되는데…….’
밀삭은 침묵했다.
우르릉! 우르르릉……!
무풍곡에서 기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적마다 매미처럼 절곡에 매달려 있는 그녀의 신형 역시 마구 흔들렸다.
‘지금! 지금 공격이 시작될 거야. 어떻게든…….’
무지한 결단이라도 내려야만 했다.
우르르릉! 우르르르릉……!
사방에서 들리는 굉음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땅이 뒤흔들려 지진과 흡사할 때도 두려웠지만, 그래도 그때는 나은 편이다. 고막이 터져 나갈 듯이 휘몰아치는 굉음 소리를 듣다 보니 암기가 쏟아지기 전에 귀청부터 찢어져 죽을 지경이다.
사방을 휘젓고 다니던 팔십일전혼은 한 명, 두 명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비정상!’
어느 한 명이 생각한 게 아니다. 처음에는 한 명이 생각했을지 몰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현재 상황은 갓난아기가 봐도 비정상이었다.
공격이 끝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나야 만천화우를 능가하는 밀밀겁이 터져 나올지 모른다.
산발적인 암기 공격을 가해올 때와는 너무 다르지 않나.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먼젓번의 공격이 유효하다. 그때는 팔십일전혼을 절반 가까이나 죽였는데, 지금은 위협만 줄 뿐이지 아무런 위해를 주지 못한다.
공격이 있기는 한 것일까?
“이런! 바보같이!”
다담선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손을 들어 이마를 탁 때렸다.
“뭐야?”
“뭐 알아낸 것 있냐?”
천멸도주와 시마가 거의 동시에 물어왔다.
“사천당문의 만천화우는 사람이 펼치는 거예요. 그러니 마음먹는 순간이 공격의 순간이죠. 하지만 밀밀겁은 기관이 펼치는 거예요. 함정처럼 미리 숨겨놓은 곳에서 쏘아내기만 하면 좋을 텐데, 그럴 수가 없는 게…… 웬만한 무인이라면 예기(銳氣) 정도는 쉽게 읽어내요. 우리가 걸어온 길에 암기가 설치되어 있다면 알지 못했을까요? 팔십일전혼은 절곡에 설치된 암기를 알아냈고, 파해하여 가며 저들을 죽이려고 했어요. 바로 이거예요. 천하제일무인을 함정 안으로 끌어들이려면 적어도 두 군데, 들어오는 길과 나가는 길은 비워둬야 해요. 어느 쪽에서 올지 모르니까요.”
“그렇군! 이 미련퉁이!”
시마가 뭔가를 깨달은 듯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오고 가는 길목이 비어 있으면 절곡에 설치된 암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들어서게 되어 있다.
실례로 팔십일전혼이 증명해 보였지 않나. 그들은 천하제일무인도 아니면서 절곡을 헤쳐 나갔다.
하물며 천하제일무인의 수준에 이른다면 말할 것도 없다.
자산만만하게 들어서도록 유도한 다음에 입구와 출구를 막아야 한다. 그것도 사람이 막아서는 게 아니라 기관으로 막아야 한다.
여기서 공격의 시간 차가 발생한다.
그 점을 상대가 인식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수를 써놓은 것이 산발적인 암기 공세다.
여덟 사내가 덜떨어져서 공격을 집중시키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원래부터 예정된 수순이었다. 치밀하게 계산된 방책 중에 하나였다.
투박한 무공을 수련한 저들이기에 그런 생각도 했다. 정심한 무공을 수련한 자가 기관진식을 조종했다면 절대로 여유를 가졌다 거니 방심했다 거니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통무공이 아니라 살인무공을 수련한 자들을 앞에 내세운 것부터가 팔귀당천지관의 모계(謀計)다.
지금이라도 움직여야 한다. 출구와 퇴로가 완전히 막히기 전에 빠져나가야 한다.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을까?
물론 이약도와 진식의 대가들은 이런 점까지 고려했을 게다.
참으로 곤란한 기관진식이다.
믿을 것에서는 믿지 말아야 하고, 믿지 말아야 할 것은 믿어야 한다. 어느 것 하나 실(實) 아닌 것이 없고, 모두 실이라고 믿자니 허(虛)투성이다.
“지금이라도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야 해요.”
다담선자가 확신했지만 그 말 또한 따르기 곤란하다.
빠른 속도로 나아갈 것까지 고려되어 있을 텐데, 차라리 이 자리에서 인벽에 둘러싸이는 것이 한 명이라도 살 수 있는 길이지 않을까?
어쨌든 이번에 내린 선택은 정말로 삶과 죽음을 좌우하리라.
인벽을 풀고 가장 빠른 속도로 빠져나갈 것인가, 인벽에 둘러싸여 있을 것인가.
천멸도주는 지금까지 살아온 중에 가장 자신없는 명을 내렸다.
“십팔밀막이 앞을 뚫고 팔십일전혼이 뒤를 맡아. 그쪽은 여전히 이주회첨진?”
“절혼과 일령이 없으니 일주회첨진이 되겠지. 암기에는 이주회첨진이든 일주회첨진이든 무용지물이니까 상관없어.”
망설일 틈이 없었다.
태산같이 커서 좀처럼 움직이기 힘들 것 같던 종청호, 하나 어느새 십여 장 앞을 쏘아져 가는 중이었다.
파앗! 파앗!
절벽에서 떼어낸 작은 돌덩이 두 개가 새총으로 쏘아진 것처럼 빠르게 쏘아졌다. 그와 동시에 절혼마녀의 신형도 둥실 떠올라 돌멩이의 뒤를 쫓았다.
타앗!
첫 번째 돌멩이를 밟고 재도약했다.
진기가 실린 돌멩이는 그녀에게 단단한 받침대가 되어주었고, 소명을 마친 후에는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하나, 둘!’
딱 둘을 셀 여유밖에 없다. 그 후에는 돌멩이가 밀삭에 부딪쳐 진동을 일으킨다.
“웬…… 컥!”
고개를 돌리던 사내는 소리없이 미끄러진 검날에 목뼈를 내놨다.
파앗! 푸왁!
살이 베어지는 소리와 핏줄기가 쏟아지는 소리는 죽은 다음에나 흘러나왔다.
‘셋, 넷!’
조금 더 강한 진기를 싣고 쏘아낸 돌멩이는 두 번째 도약을 이끌어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사루의 무학 일초를 쏟아낼 기회까지 얹어주었다.
슈각!
천사검은 누군지도 모르는 자의 골반을 파고들어 가 창자를 베어내고 심장까지 가른 후, 쑥 빠져나왔다.
여기까지가 한계다.
비교적 쉽게 두 명을 죽였다. 살인무공을 수련한 자들이라 힘들어야 마땅한데 썩은 짚단을 베는 것보다 쉬웠다. 밀삭이 그들의 몸을 붙들어준 덕분이다.
이제는 그녀도 발을 디뎌야 한다.
기습의 효(效), 자유의 득(得)은 사라지고 남은 여섯 사내와 동등한 조건이 된 것이다.
“놀랍군.”
“여자? 이거 대단한 여자 아닌가!”
여섯 사내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절혼마녀를 쳐다봤다.
눈앞에서 동료 두 명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갔는 데도 동요하는 빛이 일절 없었다.
‘기회!’
생각해 둔 것이 있다. 밀삭이 발을 붙잡는다면 잡혀주자. 밀삭이 발은 붙잡을지언정 몸까지 잡지는 못하잖는가.
발을 밀삭에 맡기고 몸을 뒤로 눕혔다. 드러누워 버리듯 바짝 엎드렸다. 연후, 양 발바닥을 축으로 팽이 돌듯이 핑그르 돌며 천사검을 쓸어냈다.
“이크! 암코양이군!”
“흐흐흐! 사나워야 품어보는 맛이 나지. 여기서 그 짓을 하면 이게 뭐지? 허공에서 하니까…… 흐흐흐! 영락없이 운우지락(雲雨之樂)이군. 야, 이 계집…… 이크!”
사내들은 분분히 피했다. 능숙하게 피했다. 밀삭이 너무 끈끈해서 진흙 수렁에 빠진 것보다 운신하기가 불편한데, 이들은 쉽게쉽게 발을 떼어냈다.
절혼마녀는 그제야 셈하지 않은 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 중요한 것 하나를 셈에 넣지 않았다.
사내들이 사전에 밀삭 위에서 움직이는 법을 연습했다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때는, 절혼마녀 자신은 영락없이 거미줄에 걸린 나방 신세나 다름없다.
사사삭……!
누군가가 뒤에서 덮쳐들었다. 분명히 뒤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다음에 내려섰는데 어느새 뒤로 돌아간 누군가가 사납게 달려들었다.
얼핏 보니 얼굴이 검상투성이다. 살기 위해서 이승과 저승 사이를 서너 번은 넘나든 사내다.
‘침착! 절대 침착! 귀신의 움직임이 귀적무…….’
파앗! 쓰으윽!
피한다고 피했는데 등 어림이 인두에 닿은 듯 화끈거렸다.
슈욱!
아래쪽에서 달려드는 검도 있다.
앞으로 꼬꾸라지듯이 밀삭에 바짝 엎드리며 달려드는 자.
이건 또 뭔가! 장난이라도 하자는 건가! 아니면 염체도 모르는가!
사내가 노리는 부위는 하복부, 하복부 중에서도 비소(秘所)였다. 비소를 두 쪽으로 갈라 버리겠다는 듯 다리에서 배 쪽으로 쳐올리는 검초다.
절혼마녀는 뒤로 물러서고자 했다.
하나 그녀가 채 발을 떼어내기도 전에 무릎에서부터 허벅지 안쪽이 쩍 갈라지며 핏물이 흘러나왔다.
이들은 장난이 아니다. 비소건 어디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곳이면 무조건 검을 틀어박는 자들이다.
‘이대로는 내가 당해!’
밀삭에 대해서 많은 소리를 들었는 데도 역시 밀삭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에게는 상대가 안 된다.
푸욱! 푹!
이번에는 왼쪽, 오른쪽 옆구리가 터졌다.
죽이려면 죽일 수 있었던 검이다. 상반신과 하반신을 분리시킬 수도 있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손을 약간 비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