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95
95
“흐흐흐! 예쁘다는 계집들 참 많이 봤는데, 너처럼 요염한 계집은 처음이다. 이거야 원, 쳐다보기만 해도 아랫도리가……. 허허! 아직도 발광이야?”
사내는 능글맞게 웃으며 힘없이 후려친 천사검을 피해냈다.
사내들 역시 밀삭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이 아무리 익숙해져 있다지만 끈끈함 자체를 어쩔 수 있는 건 아니다.
땅에서 세 걸음 움직일 수 있다면 밀삭에서는 두 걸음을 움직일 수 있는 정도고, 반면에 절혼마녀는 한 걸음밖에 움직이지 못한다는 차이를 안고 있다.
두 걸음과 한 걸음, 싸움에 임해서는 결정적인 패인이다.
“우선 검부터 떨궈놔야겠군. 부엌칼을 든 계집은 예쁘지만 검이니 뭐니 하는 것을 든 계집은 아주 밥맛이야. 계집아, 고마운 줄이나 알아. 네년이나 되니까 지금까지 놀아주고 있는 거야. 다른 년 같았으면 벌써 배창시를 꺼내놓고 말았지.”
말을 잇는 사내의 눈이 욕정으로 달궈졌다.
여섯 사내들, 그들은 절혼마녀에게 살수를 쓰지 않았다. 사로잡아서 성욕의 노리개로 쓰고 말겠다는 욕심이 가득했다.
방금 전에 동료 두 명을 죽인 여인인데, 죽음을 안다는 사람들이, 살인무공을 수련하여 비정함 그 자체라는 사람들이 욕정에 눈이 벌게져 날뛰었다.
‘휴우! 됐어.’
절혼마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숨 몇 번 들이쉬고 내쉴 정도의 시간은 벌었다.
위기의 순간, 처음 소립파의 품에 안길 때의 일이 떠오른 것은 우연일까 기적일까.
소립파가 뭐라고 했나. 자기는 마상(魔相)이고, 그녀는 귀상(鬼相)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또 그녀의 요염함은 인간의 것을 벗어나 완벽한 요화의 경지에 이르렀다고도 했다. 미색, 걸음걸이…… 섭혼술을 익히지 않았어도 그녀 자체가 섭혼술덩어리라고 했다.
요조숙녀가 들으면 마음 상할 말이지만 그녀는 즐겁기만 했다.
사내의 검이 비소를 갈라올 때, 그리고 망설임없이 허벅지를 베어낼 때, 이 사내들은 인간의 감정이 말살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촌각이라도 지체했다가는 결정적인 일검을 맞을 것이라는 사실도 함께 알았다.
그녀는 살짝 웃었다. 싸움 중이지만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비 맞은 참새가 오돌오돌 떨고 있는 모습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절대적인 무력(武力) 앞에 삶을 포기한 모습일 수도 있다. 낙화향의 창기들이 손님을 부르는 웃음일 수도 있다.
웃음은 사내들이 보기에 따라서, 사내들의 마음이 시키는 바에 따라서 달리 비쳐질 게다.
모두에게 똑같이 비쳐지는 점이 한 가지 있다면, 천금을 주고라도 한 번쯤은 꼭 안아보고 싶은 요화의 모습이 보인다는 거다.
그 후부터 사내들의 검은 빗나가고 있다.
‘귀신의 움직임, 귀신의 움직임…….’
천멸도 살수들의 도움으로 귀적무를 십이성 깨우쳤다.
무음(無音), 무형(無形), 무취(無臭), 무기(無氣), 무감(無感)의 오무(五無)를 초범의 경지까지 끌어올렸다.
하나 이는 지상에서의 일이다.
허공에서, 양발이 끈끈하게 달라붙어 있는 상태에서는 오무가 산산이 깨져 버린다.
‘귀적무는 귀신의 움직임. 있는 듯 없는 듯 소리없이 움직이고…….’
자칫 선유비조신법을 쫓아갈 수도 있다. 천와류가 끼어들 공산도 높다. 둘 다 절정 신법이며, 익히 알고 있는 신법들인지라 언제든지 자리바꿈할 여지는 있다.
그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귀적무를 더 높은 경지로 이끌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접목시켜도 좋다.
한데 그러고 싶지 않다.
왠지 모르지만 진정한 귀적무의 오의를 깨닫고 있지 못한 느낌이다.
절벽을 타고 올라올 때만 해도, 이들과 부딪치기 전만 해도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졌었다. 그러나 이렇게 두 발이 묶이고 보니 과연 무엇이 귀적무인지 자신에게 묻고 싶다.
“흐흐흐! 계집아, 숨넘어가게 하지 말고 검을 놓지 그래.”
절혼마녀는 말한 사내를 힐끔 쳐다본 후, 천사검을 놓아버렸다.
척!
천사검은 밀삭에 달라붙어 출렁거렸다.
사내는 여섯, 여자는 하나.
사내들은 여인을 쉽게 차지하지 못한다. 사내들 사이에 서열이 정해져 있다면 모르겠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면 누가 먼저 안을 것인지 내부 조율부터 끝내야 한다.
‘귀신의 움직임…… 귀적무…… 귀신…….’
도대체 귀신을 본 적이 있어야 귀신의 움직임을 읽어내지.
맞다! 지금까지 귀신의 움직임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모두 머릿속에서 그려낸 상상에 불과하다. 실체인 육신을 가지고 허상의 움직임을 좇고 있었으니 제대로 된 움직임이 나올 수 있겠는가.
귀적무를 펼치려면 귀신을 봐야 한다.
귀신은 육신이 없다. 영혼만 흘러다니기에 유유하고 자유로운 거다.
“흐흐! 말귀를 알아먹는 계집이군. 거기 편히 앉아서 상처나 치료하고 있어.”
사내는 친절하게도 발밑에 금창약까지 던져 주었다.
무인이 검을 던졌다는 것은 싸움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또 이는 목숨을 맡긴다는 뜻이다. 사내들이 원하는 대로 되었다.
만지기만 하면 착 달라붙을 것 같은 살결, 또렷한 이목구비, 호수처럼 맑은 눈, 육감적인 몸.
요부와 미부의 조건을 두루 갖춘 미녀가 손아귀에 들어왔다.
사내들의 얼굴에 만족한 미소가 배였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질투도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었다.
절혼마녀는 양손을 들어 양 옆구리를 짚었다.
피가 너무 많이 새어 나와서 어떻게든 지혈을 시켜야 한다. 비록 손목을 비틀어 상처만 입힌 것이라고 해도 애초에는 몸통을 가를 작정으로 베어오던 검이다.
살기가 깃들었던 검에 베이면 의외로 상처가 깊다.
우선 혈을 눌러 혈맥을 막았다.
지혈시킬 곳은 또 있다. 허벅지, 그리고 등.
순간, 절혼마녀의 봉목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허벅지에서 솟구친 피와 합쳐서 발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피는 밀삭을 물들였고, 피로 물든 밀삭은 붉게 번들거렸다.
밀삭이 어떤 색으로 변하든 신경 쓸 건 없다. 그녀가 신경 쓰는 것은 신발 밑으로 흘러든 피다. 피가 신발과 밀삭 사이를 가르고 들어가 미끄러움을 만들어낸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오히려 더욱 끈끈해질 터이지만 지금 당장은 매끄럽다.
“귀신의 움직임! 기름 위의 움직임! 물 위의 움직임!”
그녀의 음성은 여섯 사내들의 귓전에도 쟁쟁하게 들렸다.
“가만히 앉아 있어! 신경 쓰이게 하지 말…… 커억!”
사내의 목구멍에 검지가 깊게 틀어박혔다.
절혼마녀는 일부러 검을 잡지 않았다.
사내들은 마음껏 병기를 휘둘러야 한다. 살인무공을 배웠다고? 잔임함이 극치를 달린다고? 미안하지만 사내들은 귀적무가 천하제일의 신법임을 증명해 주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퍼엉!
머리를 쪼개오는 검은 강렬하지만 동작이 너무 크다. 그래서야 귀신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있나.
절혼마녀는 상대의 등 뒤로 돌아가 등짝을 가격했다.
얼굴이 상처투성이인 사내, 자신의 등에 일검을 새겨놓은 자.
등의 고통이 어찌나 심한지 사내의 양어깨는 절로 뒤로 당겨졌다.
따악! 따아악!
이어진 수도(手刀)가 사내의 목 뒤를 가격하여 목뼈를 분지르고, 또 한 번의 가격은 척추를 강타했다.
스르륵……!
절대 밟아서는 안 된다. 미끄러지듯 움직여야 한다. 신발과 신발에 닿는 면과의 마찰을 최소화시키는 데 귀적무의 요체가 있다.
몸을 가볍게 하는 것도 한 방편이다. 신발에 기름을 바르는 것도 옳다. 근본적으로는 하허상실(下虛上實)의 화두(話頭)를 부둥켜안고 운공해야 한다.
퍼억!
“끄윽!”
사내가 양물을 끌어안으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비소를 쳐오던 자, 허벅지에 일검을 매긴 자.
그녀는 여섯 사내를 가볍게 눕힌 후에도 잠시 동안 밀삭 위를 거닐었다.
바람처럼 표홀하게, 깃털처럼 가볍게.
잠시 후, 천사검을 챙겨 든 그녀는 죽어 있는 여덟 사내를 보며 중얼거렸다.
“고마워.”
제8장 의중인(意中人) ― 마음속의 연인
1
“저, 저런! 저런!”
적안 사태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본인들은 길들여졌다는 걸 알지 모르지만 공들이고 또 공들여서 키워놓은 살인무공의 달인들. 그런 놈들이 계집 한 명에게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버렸으니 무슨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단 말인가.
놈들이 죽은 것은 그렇다고 치자.
죽으려면 팔귀당천지관 중 네다섯 개 정도는 펼친 다음에야 죽을 것이지 뒷감당을 누가 하라고 입질만 해놓고 뒈져 버리냔 말이다.
와중에 밀밀겁이 가동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도 놈들이 밥값은 게워내느라고 그랬는지 밀밀겁은 가동시킨 다음에 죽어버렸다.
밀삭 위에 서 있는 계집 하나, 그리고 중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계집 하나.
계집 둘을 제외하고는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빌어먹을! 이럴 때 쓰려고 팔귀당천지관을 찾아놓은 게 아닌데.’
적안 사태는 아쉬운 눈길로 무풍곡을 쓸어보았다.
세인들은 모르고 있지만 무풍곡은 적안 사태와 흑조편복으로 하여금 무림에 발을 딛게 만든 근원지였다.
어릴 적, 꿈 많던 소년 소녀였을 적에 소년과 소녀는 비적 떼를 피해 무풍곡으로 스며들었다. 새로운 금광을 찾아 대이주를 하던 이십여 가구가 떼죽음을 당하고 난 다음이었다.
소년과 소녀는 비적들을 피해 너구리굴로 숨었고, 요행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한데 그곳은 너구리굴이 아니었다. 숨을 때만 해도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뾰족한 창이 엉덩이를 찔러 바지가 온통 피투성이였다.
창의 무덤.
또 있다. 화살들의 무덤도 있고, 표창들의 무덤도 있었으며, 수리검의 무덤도 찾아냈다.
무풍곡은 땅을 파는 곳마다 온갖 병기들로 가득했다.
소년과 소녀는 병기를 내다 팔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점 나이가 들어갔고, 병기를 만지다 보니 무공이라는 것도 배우게 되었고, 온갖 병기들을 만지작거리다가 사람까지 죽였다.
무풍곡이 이약도와 관계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 후인 중년을 넘길 때였다.
캐도 캐도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병기들. 아니, 암기들.
무풍곡을 샅샅이 조사하는 것은 당연했다. 전쟁에 사용하고도 남을 분량의 병기를 찾아낸 후에는 차라리 기가 막혔다.
이곳은 천하의 기진인 팔귀당천지관과 연관있는 곳이다.
아쉽다면 여덟 가지 기관이 완전히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겨우 두세 가지 기관만 매설되어 있다는 거다.
이곳이 정말 이약도와 관계있는 곳이라면 팔귀당천지관이 완성된 다음이 아니라 그 이전에 시험 삼아 설치해 본 곳이 아닐까 싶다.
두 사람은 그것조차도 완벽하게 복원하지 못했다.
유계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겨우겨우 복원한 것이 초열지옥과 밀밀겁, 그리고 구충수(九衝水)의 일부다.
적안 사태와 흑조편복은 이것만으로도 못 죽일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자부했다.
무풍곡으로 유인하여 죽일 사람은 적어도 무신이라 일컫는 일곱 무신들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해 왔다.
한데 무신도 아닌 마야를 죽이란다. 마야는 그래도 괜찮다. 그나마 그는 마도의 상징이니 죽일 값어치가 충분하다.
마야는 마도의 하늘.
그는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최고봉에 올라 있는 존재다. 그의 무공이 어떻든 연배가 어떻든 마야라는 호칭을 듣고 있으니 마도 최고의 인물이다.
최고의 인물을 죽인 자는 최고가 된다.
마도 최강의 인물로 지칭받지는 못할지라도 살수계의 지존으로 군림할 수는 있다.
이는 웬만한 문파의 문주나 방주를 죽이는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어쩌면 구파일방의 장문인을 죽이는 것과 버금가는 효과를 불러올지도 모른다.
문주나 장문인을 죽이면 바로 이어서 후계자가 장문인이 되겠지만, 마야의 경우에는 마야가 죽고 나면 이후 마야의 호칭을 들을 존재는 전무하다.
마도의 하늘이 사라지는 것이다.
마도의 하늘을 죽인 자, 이 얼마나 짜릿하고 통쾌한 말인가.
모두 다 틀렸다. 여덟 살인귀를 밀삭 위에 얹혀놓으면 저깟 놈들쯤은 쉽게 요리하리라 싶었는데, 되레 죽고 말았으니.
‘시기가 안 좋아. 일단은 물러났다가…….’
마야 곁에 있는 여인들이 실로 범상치 않다.
적안 사태를 제일 먼저 놀라게 한 여자는 너무 앳돼 보여서 주목도 하지 않던 여자다.
일령이라고 했던가?
그녀가 보여준 신법 한 수는 그야말로 눈이 번쩍 뜨일 만큼 고절한 것이었다.
공령문의 선유비조신법 같은데 공령문주가 직접 펼친다고 해도 그 정도는 아닐 것 같고…….
두 번째로 놀란 건 마야를 부축한 여인.
다담선자라고 했나? 그녀가 던진 병기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던가 말이다.
만약 그게 자신에게 날아왔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세 번째 여자는 하도 조용히 있어서 있는지 없는지조차 몰랐다.
그런 여자가 언제 절벽을 타고 올라갔으며, 처자식도 잔인하게 죽인다는 살인귀들을 그토록 가볍게 죽여 버렸으니.
천멸도 살수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과 부딪치면 죽음뿐이다.
적안 사태는 뒤로 슬금슬금 물러섰다. 그러나 몇 걸음 물러서지도 않은 상태에서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등 뒤…… 돌아볼 수가 없다. 뒤에 누가 있기는 한데 누군지 모르겠다. 이토록 지척까지 다가와 있는 데도 까마득히 몰랐다면 상대의 무공은 어느 정도인가.
누구냐, 너는?
적안 사태는 슬그머니 손을 끌어올려 가슴에 댔다. 만일 급습을 가해온다면 즉각 반응하고자 한 조처다.
“언제 돌아설 거예요? 사람이 있는 걸 알고 있으면서.”
등 뒤에서 들린 음성은 뜻밖에도 해맑았다.
적안 사태는 화급히 돌아섰다. 그리고 보았다. 여자라기보다는 앳된 소녀에 가까운 동안의 여자를.
“너, 너는 그…….”
“일령이라고 해요.”
“이…… 일령!”
“살인무공을 수련한 자들이 죽었어요. 그들이 살인무공을 배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 그 많은 사람들을 가둬놓고 서로 죽이게 만든 게 당신이죠? 그런 짓은 마야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니 용서 못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