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98
98
마야를 따르는 사람들, 그들이라고 모를까.
어찌어찌 그들과 부딪친 후 두 번째로 받은 명은 더욱 얄궂다.
상대는 단 열한 명, 역시 천멸도에서 동고동락했던 안량빈과 십겁룡이다.
지랄 맞게도 그들 손에 많은 형제들이 명을 달리했다.
확실히 백인수는 십겁룡에 비하면 한 수 뒤졌던 것을…….
이제 간신히 살아남은 자는 아홉 명밖에 안 되는데 또다시 마야와 도주를 치란다.
마야만 상대하기도 벅차다. 도주를 따르는 황전륜과 팔십일전혼도 강하다. 아니, 뭐니 뭐니 해도 천멸도에서 제일 강한 자인 종청호와 십팔밀막검이 버티고 있는 한 승산은 없다.
무엇보다 어떻게 도주에게 검을 들이민단 말인가.
그렇다고 물러설 곳도 없다. 팔린 문파의 명을 거역한다면 차후 어느 문파가 살수들을 사 갈 것인가.
후퇴는 천멸도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는다.
“결국은 죽을 자리를 찾으라는 거군.”
“…….”
살아남은 백인수는 침묵했다.
그 정도는 이미 예상하고 있다. 죽음도 각오했다.
“서둘지 말자. 의미없는 죽음을 맞기보다는 조금이라도 의미있는 자리를 찾자.”
“그게 되겠습니까?”
“난들 아나. 뒤따르면서 기회를 찾아봐야지.”
“그럼 급습은?”
“서둘지 말라니까. 후후후! 이놈들아, 솔직히 말해봐. 팔십일전혼은 고사하고 십팔밀막검이 있어. 너희 두어 명쯤은 상대할 수 있는 밀막검 숫자가 두 배가 넘어. 자신있어?”
“…….”
“가자.”
주림은 힘없이 말했다.
2
무풍곡 싸움 이후로 마야는 침묵을 지키는 시간이 많아졌다.
다담선자, 절혼마녀, 일령, 시마.
이제는 어느 한 사람 초절정고수 아닌 사람이 없다.
실제로 절혼마녀나 일령을 아는 사람들이 변모한 그녀들을 본다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절혼마녀는 강했다. 하나 남도문, 북검문을 휘저을 수 있는 고수는 아니었다.
일령은 어떤가. 자부문의 호법, 문주의 호법도 아니고 문주의 딸이 개인적으로 양성한 호법에 불과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어떤가. 누가 그녀의 몸에 검을 댈 수 있을까.
이들의 쳐놓은 방어막은 철벽을 웃돈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천멸도주와 천멸도 살수들이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한 한 개 문파의 존망을 걸지 않고서는 쉽게 달려들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때부터 소립파는 말을 잃고 안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아플 때는 정신을 차릴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지만, 멀쩡히 눈을 뜨고 있을 때도 멍하니 마차 밖을 쳐다보며 하루를 소일하기가 일상사였다.
“요즘 도주가 매일 언니 방에 들러요. 들러서 백포도 갈고, 말도 나누고 그러는 모양이에요. 참 웃겨요. 도주가 그럴 때가 있다니. 언니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
“과일 좀 깎아줘요? 지나오는 길에 사과나무가 있기에 땄는데 아주 맛있어요.”
“…….”
“휴우!”
대부분의 이야기는 다담선자의 일방적인 말로 시작되었다가 혼자서 끝맺곤 했다.
소립파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짐작조차 못한다.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고통받는 시간이 점점 길어져서 이제는 거의 하루에 네 시진씩 앓아대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마차를 빨리 몰 수 있다면…… 남만에 빨리 도착해야 하는데…….
상황은 그마저 여의치 못하게 한다.
누가 소문을 퍼뜨렸는지 모르지만 마야가 남만으로 가고 있다는 소문은 남무림 전역에 퍼지고 말았다.
마야가 누구인가. 마도의 하늘이지 않은가. 마도인이 감히 공공연하게 남무림 땅을 활보한단 말인가. 그걸 용납하는 사람들은 또 무엔가.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마야는 이미 남무림 무인들의 공적이었다.
장강을 건너면서 벌인 혈전, 그리고 남도문과의 싸움.
남무림에서 제일 먼저 죽여야 할 공적을 꼽으라면 단연 첫손가락에 꼽힐 사람이 마야였다.
사람들은 손에 손에 병기를 들고 모여들었다.
어제 십여 명이 모였다면, 오늘은 백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들은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했다. 그들도 무인인 이상 마차 주위에 흐르는 살기를 감지하지 못할 턱이 없다. 혹여 그 정도도 감지하지 못하고 날뛰는 자들은 벌써부터 감지하고 있는 자가 넌지시 알려주어 망동을 삼가케 했다.
마야가 가는 길은 언제 혈로(血路)로 변할지 모른다.
일다경 후가 될지, 반 시진 후일지, 오늘 밤일지…….
사람들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하면, 그리하여 피를 흘리고 사람이 죽어나가 군중심리를 자극하게 되면, 참으로 고단한 싸움을 치러야 할 게다.
그런 상황임에도 마차를 에워싼 여인들은 태연했다.
시마는 오래전부터 마차 위에 누워 잠을 청했다.
낮이고 밤이고…… 마치 조상 중에 잠 못 자고 죽은 귀신이라도 있는 양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자고 또 잤다.
“정신 좀 차려요. 차라리 술을 마시던가. 너무 잠만 자니까 보기 이상하잖아요.”
“흐흐흐! 계집아, 아낄 건 아낄 수 있을 때 아끼는 거야. 너 같이 살이 피둥피둥 올랐을 때는 모르지만, 나처럼 살가죽이 등에 달라붙은 후에는 많이 쉬는 게 남는 거야.”
여인들은 시마의 말뜻은 단번에 알아챘다.
시마는 진기와 체력을 비축하고 있다. 한 올의 진기도, 한가닥의 체력도 헛되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단단히 자물쇠를 채우고 있다.
그렇게 아껴둔 진기와 체력은 싸움이 벌어졌을 때 톡톡히 한몫하리라.
그 일이 있은 후부터는 시마가 아무리 오래 잠을 자더라도 깨우지 않았다.
따스한 햇볕이 사지를 노곤하게 만드는 오후, 마야를 태운 마차는 폭풍의 핵이 되어 천천히 남으로 이동했다.
그가 다가온 것은 마침 식량이 떨어져 미방(米坊: 쌀집)과 육포(肉鋪: 푸줏간)를 찾을 때였다.
허름한 몰골에 등짐을 진 그는 거리낌없이 천멸도 살수들의 숲으로 걸어 들어왔다.
슛!
짧은 쇳소리와 함께 땅에서 솟구친 검날이 정확히 그의 배에 대어졌다.
“아아, 이러지 마시오. 난 장사치요. 도움이 됐으면 됐지 해는 끼치지 않을 테니 검일랑 치우시오.”
일견하기에 그는 무인이었다. 그것도 무공이 상당한 경지에 이른 고수였다.
팔십일전혼이 그를 통과시키겠는가.
슛!
쇳소리가 한 번 더 울리며, 나무속에서 튀어나온 검이 그의 관자놀이를 겨냥했다.
말은 필요없었다. 여러 말 들을 필요 없으니 그만 물러나라는 위협이다. 허락없이 한 발짝이라도 떼어놓으면 죽음을 각오하라는 경고다.
“허! 이러지 말래도. 어이! 이보쇼! 우리 거래 좀 합시다!”
그는 멀리서 뭇 군웅들이 지켜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야가 타고 있는 마차를 향해 소리쳤다.
웬일일까? 말도 잊고, 표정 변화도 잊은 소립파가 그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는 휘적휘적 걸어 소립파 앞으로 걸어왔다.
“아,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의 너스레가 시작될 무렵,
“흑조편복, 내게 팔 건 양식이오?”
순간, 짜릿한 긴장이 머리끝에서 시작하여 발끝까지 관통했다.
흑조편복이라니!
모든 사람이 알고 있듯이 그와 평생을 단짝으로 지내오던 적안 사태는 죽고 없다. 그리고 살수계의 전설로 불리는 자는 눈앞에 서 있다.
그의 목적이 마야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하는 것이라면 훌륭히 성공했다.
천멸도 살수들이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신속히 다가서려고 할 때, 흑조편복은 차분하며 여유있는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사람들 눈총을 맞아가면서 양식을 구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고…… 그래서 내가 양식을 구해주기로 했소.”
그는 소립파의 승낙도 받지 않고 등에 진 등짐을 내려놨다.
“몇 명이나 있는지 몰라서 눈에 보이는 숫자만 챙겨왔소. 몇 명인지 말해주면…….”
“흥! 그 말을 믿으란 말예요? 적안 사태는 내 손에 죽었어요. 복수를 할 생각이면 내게 해요.”
일령이 등짐을 낚아채며 흑조편복을 노려보았다.
“아니, 아니. 잘못 알았다니까. 난 지금 복수하려고 온 게 아니라 양식을 팔려고 온 장사치라니까. 거, 사람 똑같은 말 몇 번씩 하게 만드네. 이보게, 마야. 자네도 내 말을 안 믿나?”
“예순다섯 명분.”
“응?”
“예순다섯 명이오. 양식은 어떻게 조달할 생각이오?”
“뭔 사람이 그렇게 많아. 지금 여기에 예순다섯 명이나 있단 말이야? 이구, 놀라라. 좋아, 이렇게 하지. 오늘은 저녁만 먹으면 되니까 예순다섯 명분만 챙겨오고…… 내일 이틀치를 가져오지. 모레부터는 매일 하루치씩 가져오고. 여분은 하루치만 있으면 되잖아? 양식이란 게 싱싱한 걸 먹어야 하거든.”
“셈은 어떻게 받을 생각이오?”
“날 세 번만 살려주면 돼.”
소립파는 웃으면서 흑조편복을 쳐다봤다. 흑조편복은 담담했다.
“돈을 많이 모은 모양이오? 예순다섯 명분을 매일 조달하려면 꽤 큰 돈이 들 텐데.”
“살아오면서 적잖이 죽였으니까, 모일 만큼 모였겠지. 어떻게 하겠나? 거래가 성사된 건가?”
“좋소.”
거래는 성사되었다.
흑조편복은 만인이 보는 앞에서 공식적으로 널 죽일 테니 실패하더라도 어쩌지는 말라는 확답을 받은 것이다. 세 번에 한해서.
“세상에! 이렇게 말이 안 되는 일도 있네.”
일령이 휘적휘적 돌아가는 흑조편복을 쳐다보며 혀를 찼다.
그녀는 길을 가로막고 앉아 있었다.
관도 한복판에 돗자리를 깔고, 바둑판을 놓은 채 혼자서 바둑을 두어나갔다.
슛! 슈웃! 슈웃!
검들이 짓쳐 와 목에 닿았어도 그녀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계집, 비켜라!”
백포 속에서 착 가라앉은 살음이 흘러나왔다.
여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흰 돌을 바둑판에 올려놓은 후, 왼손으로 검은 돌을 만지작거렸다.
“계집!”
“조용히 해. 귀 안 먹었어. 마야가 보고 싶어서 찾아온 사람이야. 나오라고 해.”
여인의 표정이 너무 편안해서 천멸도 살수는 살기를 거두고 말았다.
마야와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이토록 태연할 수 있을까.
여인은 차분했다. 눈이 크고 입술이 도톰했으며, 코가 반듯했다. 이마는 시원하고 맑았으며, 피부는 백옥처럼 영롱했다.
빼어난 미인이다.
천멸도 살수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뭇거릴 때, 소립파가 마차 문을 열고 내려섰다.
저벅! 저벅……!
소립파가 걸어오고 있어도 정작 그를 청한 여인은 바둑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소립파가 돗자리 위로 올라와 바둑판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도 여인은 시종일관 바둑판만 쳐다봤다.
“어떤 것 같애?”
“쯧! 너무 편파적이지 않나. 백은 훨훨 나는데 흑은 고립무원(孤立無援). 거의 끝났군.”
“그렇게 생각해?”
“아닌가? 수담(手談)은 잘 몰라서.”
“호호호! 재미있는 농담이네. 팔귀당천지관을 뚫은 사람이 수담을 모른다면 누가 믿어.”
그들의 대화는 너무 자연스러웠다.
오랜 세월 동안 얼굴을 맞댄 사이에서나 나눌 수 있는 친근함이 물씬 풍겨 나왔다.
“난 어쩐 일로?”
“보고 싶어서. 어떤 사람인지.”
“보고 난 느낌은?”
“도와줄까?”
“후후후! 사양하지. 난 맘 편한 게 좋아. 예쁘다고 가시 있는 장미를 함부로 꺾었다간 한 번은 꼭 찔리거든.”
“호호호! 의외로 겁쟁이네?”
“북검문에도 인재가 있었군. 그것도 여인. 칠성군(七星君)에 삼뇌를 조롱하는 여인이 있으니, 육신녀 서군봉(徐軍峰)이라. 그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남도문 깊숙이 들어와 남도문의 주적과 마주 앉아 있는 것은 자신감의 발로인가, 철이 없는 건가.”
“쉿! 소리가 너무 크잖아.”
“하하하! 의외로 겁쟁이군.”
적지 한가운데 대담하게 앉아 있는 여인 육신녀 서군봉, 그녀와 마야의 첫 만남이었다.
육신녀는 시선을 바둑판으로 옮기며 낭랑한 음성으로 조곤조곤 말했다.
“오면서 들은 건데…… 내일쯤 상조문(喪弔門)이 가세할 것 같아. 사람들이 그러더라고. 상조문이 도착하면 마야, 저놈을 때려죽이자고. 상조문은 혈귀대와 악명을 나란히 하는 문파야. 이런 말이 있었지 혈귀대가 지나간 자리에는 풀 한 포기 남지 않고, 상조문이 지나간 자리는 시신 썩는 냄새만 풍긴다.”
“상조문.”
“싸울 거야?”
“…….”
“내 생각인데 피하는 게 좋아. 천멸도가 있으니 상조문도 어렵지 않겠지만, 그들을 치면 남무림 전체가 개미굴처럼 들끓어. 보아하니 몸도 좋지 않을 것 같은데, 우선 남만으로 가는 데 온 힘을 집중해야지.”
“그만 가보는 게 좋을 것 같군. 시선을 충분히 끌었어.”
“나도 그럴 생각이야. 반가웠지?”
“…….”
“어멋! 내가 너무 뻔뻔했나? 반갑지 않았다면 섭섭하고. 나는 반가웠거든. 이만 갈게. 나중에 또 보자고.”
육신녀는 조신하게 일어나 관도 옆에 매여 있던 말에 올라탔다.
“내 말 허투루 듣지 말고. 상조문은 피하고 봐. 끼럇!”
육신녀…… 정말 엉뚱한 손님이었다.
제10장 간열료(趕熱鬧) ― 구경하러 가다
1
상조문(喪弔門)은 인간의 죽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나타난다.
무공을 배웠든 배우지 않았든 장의(葬儀)에 관계된 일로 밥을 먹고사는 사람들은 모두 상조문에 입문을 해놓은 터다.
상조문은 절대적인 영향력으로 그들을 통제하고 관리한다.
장의업을 하는 사람들은 상조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생살여탈권까지 맡겨놓은 상태가 되어버렸다.
장의사들은 상가에서 일어난 일을 상조문에 보고한다.
무림의 일이든 아니든 취사선택(取捨選擇)은 상조문이 할 일, 그들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하나 빠짐없이 전달한다.
상조문은 전달되어 온 정보를 바탕으로 편안하고 강성해지는 것은 모두 취했다.
재물도, 인재도, 괜찮은 무공이 창안되었다는 소리가 들리면 그것까지도.
상조문은 점점 강해져 갔다.
또 하나, 사람들의 뇌리에 단단히 박혀 있는 건 상조문의 눈 밖에 나면 살도 뼈도 가루가 되어 구더기 밥이 된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