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bee, Maybee Not RAW novel - Chapter 10
9. 다시, 길목에서
벌써 일주일째다.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사무실에 들러 아침 인사만 하고 밖에서 기다리겠다던 남자는 퇴근하기 위해 내려온 한 회장을 발견하고 로비에서 일어섰다. 대기시킨 차 앞까지 따라와서 문을 여는 남자를 한 회장은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그만 돌아가시지요.”
남자는 편히 들어가시라는 인사만 깍듯하게 하면서 차 문을 닫았다.
일주일 전 불쑥 찾아와서 재희를 찾던 남자는 재희가 다니던 회사의 사장이라 그랬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재희가 몸을 숨겨 버린 모양이었다.
꽤 괜찮아 보이는데…….
한 회장은 지난여름 찾아와서 며칠 머무르다가 떠난 딸을 떠올렸다. 무슨 일 있냐는 물음에 ‘아버지 옆에서 좀 쉬고 싶어서요.’ 재희는 짤막한 답을 하고 조용히 웃었다. 뉴욕으로 자리를 옮긴다는 말에 현석과 파혼 이후 여러 가지로 심란했으려니 추측했지 다른 남자 생각은 전혀 못 한 터였다. 어떤 이유든 재희가 잔뜩 지쳐 숨어 버릴 정도라면, 그러니까 재희 엄마가 자신에게 그랬듯 비슷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람이 참으로 간사하여 딸 문제가 되면 전혀 다른 입장에 서게 되나 보다 싶었다.
재희의 연락처를 간곡하게 묻는데 딱 잘라 거절하고 포기할 만큼 매몰차게 대했지만 젊은 남자는 끄떡도 안 했다. 아침 출근 시간 전부터 회사에 와서 들어오는 길에 인사하고, 퇴근 시간 무렵에 다시 찾아오는지 로비에서 기다리다가 인사를 하고 갔다. 무척 성가셨다. 퇴근 시간이 늦게 되거나 이르게 되면 괜스레 시간을 맞추게 되고, 아침 출근할 때면 오늘쯤은 포기하고 가 버렸나, 혹시 그랬다면 포기시킨 것이 잘한 일인가 계속 신경이 쓰였다.
다음 날, 출근하면서 회장은 비어 있는 소파를 보고 그 친구가 포기했나 보군, 생각했다. 마치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얼마든지 버틸 것처럼 굴더니……. 회장은 씁쓸한 기분으로 자리에 앉았다.
항상 가슴 한구석에 박힌 못처럼 재희 생각만으로도 속이 아렸다.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의 시간들을 그는 다 놓쳐 버렸다. 평생 못 잊었던 재희 엄마에 대한 것보다 어린 재희를 버렸던 일만은 돌리고 싶었다. 멀다는 이유로, 재희 엄마가 끔찍할 정도로 거부 반응을 보였다는 이유로, 사랑을 잃고 가정을 파탄 냈다는 자책 때문에 손쉽게 접는 쪽을 택했다. 재희가 조금 더 크면, 이해할 나이가 되면 만나자 미뤘던 일이 잘못이라는 건 열여섯 먹은 재희를 본 날 알았다.
‘이제 아버지가 필요한 나이는 지났어요. 지금 가정도 있으신데, 그 아이, 동생인가요. 동생에게 잘해 주세요.’
재희 엄마와 꼭 닮은 모습으로 자란 재희가 말했다. 뉴욕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 사장이라는 사람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있을까.
괘씸하긴 했지만 못 이기는 척 연락처를 쥐여 줄걸 그랬다, 슬쩍 후회되려는데 노크 소리가 났다. 비서 뒤에 들어서는 사람은 지난 일주일과는 다르게 다소 흐트러진 인상이었다. 자세히 보니 양복에 구김이 가고 머리칼이 흘러내려 있었다.
“늦었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다가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오는 길에 사고가 좀 있었습니다.”
“사고?”
“타고 있던 택시가 앞차를 들이받는 바람에 뒤에 오던 차도 추돌하고…….”
회장은 벌떡 일어섰다.
“괜찮은가?”
“약간 불편한 정도입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병원으로 가 봐야지요.”
급히 비서를 부르는데 남자가 말렸다.
“들렀다 왔습니다. 통역이 서툴러 제대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며칠 찜질만 잘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일어서서 이만 가 보겠다는 인사를 하는 남자를 붙잡았다. 비서를 시켜 병원에 데려가서 꼼꼼히 살펴보라 하고 남자를 향해 말했다.
“몸이 괜찮으면 저녁 식사나 같이 합시다.”
회장은 몇 번이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는 남자에게 다소 심통스럽게 답했다. 아직 마음을 결정한 건 아니라고.
*
뉴욕 케네디공항에 도착하여 택시를 탔을 때, 이미 짧은 겨울 해는 떨어진 지 한참이었다. 캄캄해지는 거리를 바라보다가 준우는 재희의 집과 학교 중에서 목적지를 잠시 망설였다. 이 시간이면 어디에 있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벌써 수십 번은 마음속으로 걸었던 전화번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통화는 포기했다. 재희가 꼭꼭 다시 숨어 버릴지도 몰랐다. 절대로 안 보겠다는 말을 듣더라도 얼굴을 한 번만 보고 싶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다시 묻는 기사에게 학교를 말했다. 일단 학교에 들러 첫 학기에 필수로 들어야 하는 과목 스케줄이 있는지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이제 재희를 찾아서 뭘 하려나. 시간도 꽤 지난 것 같은데.’
재희의 아버지는 환갑을 넘은 나이라기엔 무척이나 건장했다. 여릿한 재희의 외모와는 정반대로 단단하고 장대해서 놀랐던 첫 이미지와 같이 결코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저녁 식사를 같이 하고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술잔을 주고받은 후에야, 재희 아버지가 탄식같이 물었다. 이제 와 찾아서 뭘 하겠냐고. 계절이 지나고 사랑이 지나 버렸을지도 모르는 지금, 찾아서 무엇을 하겠느냐고. 준우는 단번에 답하지 못했다. 취기도 상당히 올라 있었던 까닭에 그럴싸한 포장도 떠오르지 않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 와 뭘 하겠다고 찾는지. 그저 혼자 두고 싶지가 않습니다. 아직 혼자라면, 외로워한다면 말입니다.’
무력한 답변이었는데 재희의 아버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걔한테 잘못한 게 많아서……, 걔가 늘 외로운데. 걔 엄마도 그리 빨리 세상을 떠나고 말이야. 우리 재희가 어릴 때 얼마나 예뻤는지 아시는가? 인형 같았어. 공주님 인형.’
재희 아버지가 지갑을 주섬주섬 열었다. 신분증과 또 다른 카드 사이에 깊숙이 꽂아 두었던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인형같이 예쁘고 조그만 재희가 사진 속 그녀를 꼭 닮은 인형을 안고 아빠 무릎에 달랑 안겨 있었다. 옆에서 조용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은 지금의 재희랑 많이 닮아 있었다.
‘잘 웃는 아이였는데……. 참 예뻤어.’
‘정말 그러네요.’
재희의 아버지는 미안하다, 실례한다 말하면서 붉어지는 눈시울을 손수건으로 눌렀다.
재희는 낮에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이브닝 클래스를 듣는다고 했다. 재희의 아버지는 재희가 하는 일이 정확하게 뭔지 다 이해하지 못해서 어렵지만, 뉴욕대에서 예술 금융 쪽 수업을 듣고 거기 교수님이 추천한 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갑자기 혼자 뉴욕에 간다기에 못 미더워 여러 차례 물으니 재희는 뉴욕에 도착해서 새로 구한 집에 들어갈 때까지 열흘 정도 교수님 댁에 있을 거라며 이름과 연락처도 주었다 했다. 케이시 교수, 재희를 찾기 어려우면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필수 과목으로 재희를 만나 보겠다는 계획은 생각만큼 단순하지가 않았다. 뉴욕대 예술 금융학과 오피스에서 확인했지만 같은 시간대에 있는 두세 개 클래스 중 재희가 무엇을 듣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름으로 찾아 줄 수 있느냐고 사정했지만 그건 곤란하다는 답만 돌아왔다.
집 앞에 가서 몇 시간 더 기다리면 되겠지만, 준우는 도저히 더 이상은 참고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이 건물 안에 있다는데, 미치게 그리운 그 사람이 있다는데 물러서기가 싫었다. 막막한 심정이 되어 한국에서 왔다고, 급히 만날 일이 있다고 한 번 더 사정해 보는데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걸었다.
[재희 찾으세요?] [네.]쇼트커트 헤어를 한 정장 차림의 중년 백인 여성이 호의를 담은 미소를 보였다.
[저는 케이시라고 해요. 재희는 내 학생이에요.] [아, 케이시 교수님, 말씀은 들었습니다.]준우가 반갑게 인사하자 교수도 비슷한 인사를 했다.
[나도 이야기 들었어요. 재희 약혼자? 얼마 전에 다시 만났다는 약혼자죠?]준우는 잠시 뭐라 답을 해야 하는지 난감했다. 어색한 미소를 짓는데 케이시 교수가 딱 잘라 거절하던 스태프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활짝 웃어 보이는 케이시 교수에게 인사를 하고 준우는 오피스를 빠져나갔다.
계단을 천천히 올라 3층까지 갔다. 얼마 전에 다시 만났다는 약혼자. 재희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준우는 찾을 이유가 없어졌다. 얼굴 한 번만 보고 가자, 웃는 얼굴 한 번이면 족하겠다. 준우는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더하며 3102호 강의실 앞에 섰다. 창을 흘끗거리는데 강의를 마무리하려는 듯 정리하는 교수의 모습만 설핏 보였다. 교수가 문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준우는 떨어져 섰다. 열린 문 사이로 학생들이 한두 명 나오기 시작했다.
대형 강의실에 반 이상 차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안쪽 두 번째 열,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재희가 느리게 자리를 정리했다. 사람들이 거의 다 빠져나간 후, 재희는 일어섰다. 옆에 있는 사람과 뭐라 이야기 나누면서 문 쪽으로 걸어오는 동안 재희가 웃었다. 하하 웃다가 입을 가리는데 약지에 낀 반짝거리는 반지가 선명했다. 준우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돌아섰다.
‘재희야, 혼자가 아니구나. 외롭지 않구나. 그래, 그렇게 웃을 수 있으면 됐어.’
재희가 발견하기 전, 준우는 계단으로 내려가는 코너를 틀었다.
재희는 강의실을 천천히 나섰다. 조금 일찍 강의가 끝난 까닭에 다음 강의까지는 15분쯤 여유가 있었다. 히터 때문에 강의실이 상당히 건조했다. 생수라도 하나 뽑아서 들어갈까 망설이는데 핸드폰 벨이 울렸다. 케이시 교수였다.
[네, 교수님.] [― 재희, 거기서 보냈다는 자료 찾았어. 방금 오피스 가서 확인하니까 실수로 다른 교수에게 갔다가 온 모양이야.] [제가 받아서 직접 가져다 드릴걸 그랬어요. 급하신 거 같아서 바로 부치라고 했더니 오히려 더 늦어졌네요.] [― 아니야, 내일까지 있으면 되는 거라. 아, 만났어?] [네?]케이시 교수는 조금 들뜬 톤으로 빠르게 말했다.
[― 누구 찾아왔던데. 오피스에서 강의실 묻는 거 보고 가르쳐 줬는데, 아직 못 봤어?] [아직.]재희는 급히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순식간에 숨이 차오르고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아무도 없었다. 아니, 오가는 많은 사람들 중에 찾는 이는 없었다. 전화를 끊고 멍청하게 서서 생각했다. 케이시 교수는 누구라고만 말했지 서준우라 말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 말 한마디에 이렇게나 정신을 못 차릴까. 핸드폰에 달랑달랑 매달린 노란 넥타이를 하고 있는 테디베어를 쳐다보았다.
찾을 수 없게 만들어 놓고, 기다리는 거였니, 한재희?
바짓단 아래로 뾰족하게 나온 갈색 구두코도 회색 바닥도 뿌옇게 흐려졌다. 금세 바보처럼 눈물이 차올랐나 보다. 결코 오지 않을 서준우를 기다리는 멍청한 재희. 누군가 찾아왔다는 말은 질긴 그물이 되어 저 멀리, 깊이 던져두었던 기억 하나를 건져 올렸다.
재희는 가방끈을 움켜쥐었다. 가죽 끈이 꼭 그네에 달려 있던 차갑고 울퉁불퉁한 체인 같다. 재희는 조심조심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여섯 살 재희는 몰랐던 포기를 서른이 된 재희는 알고 있다. 기대와 희망이라는 달콤한 포장을 한 채, 캄캄하고 막막한 절망 속으로 떠밀어 넣는 문 앞에서 돌아설 줄을 안다.
고개를 들지 않고 배어 나온 눈물을 억지로 삼키려는데 거짓말처럼, 마치 결코 실재하지 않는 공주나 왕자 따위가 나오는 동화 속 이야기처럼 검은 구두가 갈색 구두코 앞에 다가섰다.
장식 없이 매끈한 검은색 구두. 깊고 짙은 애프터 셰이브 향.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재희는 토하듯이 숨을 내쉬었다.
“재희야.”
재희는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팔을 들어 목을 끌어안았다.
“왜 이제 왔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부터 하면서 얼굴을 파묻었다. 준우는 꽉 끌어안고서 ‘미안, 늦어서 미안.’ 하고 가만가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꼭 붙어서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재희는 믿어지지 않아 준우를 자꾸만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준우가 미소 지었지만, 심장이 터질 것같이 좋은 재희와 달리 그는 가라앉아 있었다.
“왜 그러세요?”
재희는 1층 문 앞에 도착해서 물었다.
“응?”
“왜 나처럼 맘껏 좋아하지 않는 건가 불안해요.”
준우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늦게 찾아서.”
“그래도 지금 만났잖아요. 혹시 만나면 안 되는 사정이라도 있는 거예요?”
준우가 자신을 살피는 재희가 어이없다는 듯 그녀의 왼손을 잡아 올렸다.
“여기 있는 거 아냐?”
재희는 ‘아, 이거요.’ 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약혼자랑 다시 만난다던데.”
준우의 물음을 무시하고 재희는 약지에 낀 반지를 빙글 돌렸다.
“문제가 된다면 빼면 되죠.”
가방을 열어 파우치 속에 반지를 넣고 재희는 맨손을 들어 보였다.
재희는 물을 따르면서 카우치에 앉아 있는 준우를 다시 쳐다보았다. 여전히 제 공간에 있는 준우를 믿을 수가 없었다. 물컵을 내밀고 그가 물을 단숨에 마시는 것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빈 컵을 받아 구석 바닥에 내려놓고 손을 들어 물이 묻은 입가를 만지고 뺨을 감쌌다.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은데 지금은 아무것도 안 묻고 싶어요. 당신도 아무것도 따지지 마요.”
“응.”
준우는 선선하게 대답했다. 재희는 옆자리에 앉아 한 팔을 준우 목에 두르고 다른 손으로 뺨을 쓰다듬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어요.”
“그런가? 잘 모르겠는데.”
준우가 손을 잡아 내리더니 희미하게 남은 반지 자국을 지우려는 듯이 왼손 약지를 엄지로 문질렀다.
“왜 안 기다려 줬어?”
뭐라 답해야 하나 싶어 쳐다보자 준우는 힘없이 웃더니 덧붙였다.
“따지는 건 아니야.”
재희는 준우의 손을 덮어 쥐었다.
“그런 반지……, 아니에요. 아빠가 주신 거예요. 엄마한테 줬던 반지, 헤어지면서 돌려받은 반지요. 깨진 사랑이라 주기 그렇다고 망설이셨는데 받아 왔어요. 두 분을 조금 이해할 것 같아서. 아빠를 용서 못 하고, 또 잊지도 못하고 평생을 살다 간 엄마도, 엄마를 사랑하면서도 다시 못 찾았던 아빠도 다 사랑이니까.”
“그럼 약혼자는 무슨 말이야?”
준우가 손을 붙잡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아니야? 다시 만나는 거 아니었어?”
재희는 피식 웃었다.
“회사 일이 여러 사람을 만나는 거라 학교에서도 가끔 그렇고, 반지 하나면 편하던데요. 교수님이 궁금해하셔서 즐거워하시는 그 추측이 맞다고 한 게 전부예요.”
준우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내내, 와서도 나 놀리느라 재밌었겠어.”
“별로, 반응이 시원찮아서요.”
재희는 준우의 손을 피해 발딱 일어섰다가 다시 잡혔다. 뿌리치려고 하다가 오히려 달랑 한쪽 다리 위로 안기고 말았다. 준우가 허리에 팔을 둘러 꼼짝 못하게 잡았다. 옆구리에 그의 가슴과 배가 밀착되자 따스한 체온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등을 두른 팔은 마치 튼튼한 울타리 같았다. 재희는 그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나 무거운데. 내려갈래요.”
“안 무거워.”
재희는 팔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감쌌고, 준우는 자유로운 손을 들어 재희 머리칼만 넘겨 주었다. 재희는 고개를 숙여 준우의 이마와 콧날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눈이 마주치자 준우가 뺨을 쓰다듬으면서 웃었다. 비스듬히 얼굴을 기울여 준우 입술을 스쳤다. 준우는 다시 미소만 지었다.
“이상해.”
재희는 중얼거리면서 준우의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
“재희야.”
“네.”
“나는 네가 왜 찾아왔냐고 화를 낼 줄 알았어.”
“……화를 내야 하나요?”
“나, 되게 몹쓸 사람이더라고. 네가 가고 나서 깨달았어.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잘못했다고 빌었어. 한 번만 더 보게 해 주면 뭐든 하겠다고.”
재희는 치솟는 감정을 삼키고 시선을 비켰다.
“아니다, 괜찮다, 그렇게 받아 주지 않아도 돼. 그럴 필요 없어.”
“사장님이야말로 그러지 마세요. 내가 얼마나 못되게 굴고 여기로 왔는데……. 저한테 많이, 과분하도록 잘해 주셨어요.”
생긋 웃어 보이는데 준우가 시선을 맞췄다. 묵직하면서 동시에 날카로운 시선에 속이 훤히 꿰뚫리는 기분이었다.
“네가 가지고 싶은 거, 절실하게 원하는 거, 다 모르는 척했는데 뭘 잘해 줘. 죽일 놈이지.”
재희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절실하게 원하는 거, 가지고 싶은 거, 그런 게 뭔지 들키는 자체가 고역이고 두려웠다.
“그런 거 없다니까요.”
일어서서 한 발짝 떨어지는데 준우가 허리를 잡았다. 뒤에서 끌어안고서 잠시 말이 없었다. 배 앞으로 매듭처럼 묶인 손을 풀려는데 준우가 속삭이듯 말했다.
“잘못했어.”
“그러지 마세요.”
“잘못했어.”
“그런 말 싫어요.”
“내가 잘못했어.”
“그런 거 없다니까.”
“재희야, 내가 잘못했어.”
“그러지 마!”
재희는 준우 팔을 두드리면서 소리 질렀다. 준우가 팔을 풀고 재희를 돌려세웠다.
“나 원하는 거 없어요. 가지고 싶은 거도 없어. 그러지 마요.”
재희는 주먹으로 준우 가슴을 때리면서 울먹였다.
“잘못했어, 재희야.”
“진짜 미워!”
눈물이 주르륵 재희 뺨을 타고 흘렀다. 준우는 주먹을 쥔 재희의 손을 잡았다.
“나 쳐다봐.”
겨우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았다. 준우가 흐트러진 머리와 얼룩진 뺨을 쓰다듬었다.
“세상에. 이렇게 예쁘고 착한데, 내가 왜 널 괴롭혔지?”
재희는 도리질 쳤다.
“그렇지 않아요. 잘해 줬어. 내내 정말 잘해 주셨어요. 내가 못나서 그래요. 내가 말도 안 되게 욕심이 많아서, 그래서 사장님 괴롭혔어요.”
“무슨 욕심을 내고 싶은데. 뭐가 말도 안 되는 건데.”
재희는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나는요,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잘 모르겠어요. 당신한테는 정말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준우는 말없이 재희를 끌어안았다. 편안하게 등을 두드려 주면서 울음이 그치기만 기다리는 듯했다. 재희는 겨우겨우 입을 다물어 높아지는 소리를 죽였다.
“몰라도 돼. 내가 알아서 할게.”
“뭘, 어떻게……, 알아서.”
다시 눈물이 터지는데 준우가 몸을 뗐다.
“그만 울어. 엉망이야.”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아 주고 콧물도 닦아 주면서 준우가 웃었다.
“세수도 시켜 줄까?”
재희는 고개를 들고 준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뭘 해 줄 수 있는데요?”
“한재희가 해 달라는 거 다. 좋은 사장님 하라면 그렇게 하고, 큰오빠 하라면 오빠 하고 애인 하라면 애인하고……. 아빠가 필요하다면 아빠도 해 주고…….”
재희는 다시 울음으로 떨리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뭘 해 주고 싶어요? 준우 씨가 하고 싶은 건 뭐예요?”
“한재희의 가장 가까운 가족.”
재희는 숨을 몰아쉬었다.
“결혼해 줄래?”
준우가 바지 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뚜껑을 열고 재희를 바라보았다.
“남편이 되게 해 줘.”
입술을 꾹 깨물어 울음을 참는데 준우가 왼손을 잡았다. 반지가 약지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다가 재희는 다시 울었다. 쉬, 그만 그만, 품에 꼭 안으면서 준우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입을 단단히 다물어도 울음이 그치지 않아 재희는 한참을 품속에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준우가 가만가만 등을 두드려 주다가 귓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재희야, 그런데 대답 기다리느라 심장이 타들어 가겠어. 이제 그만 울고 답해 주면 안 될까.”
재희는 울다 말고 웃음을 터뜨렸다.
“……남편이, 되어 주세요.”
준우가 눈물을 닦아 주고 뺨을 감싸더니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사랑해.”
재희는 눈을 감고 그의 말을 따라 했다.
“사랑해.”
Epilogue-가족 (Family, the collective noun)
뉴욕의 겨울은 매섭다. 택시 문을 연 순간부터 체감온도는 10도쯤 뚝 떨어졌다. 준우는 흘러내리는 재희의 목도리를 다시 감아 코끝까지 올렸다. 작은 얼굴이 반 넘게 가려져 눈만 보인다. 재희는 눈이 참 예쁘다.
“답답해요.”
목도리를 끌어내리려는 재희 손을 붙잡았다.
“잠시만, 감기 걸려.”
“그러는 사람도 안 했으면서.”
기어이 목도리를 턱 아래까지 내려 얼굴을 다 드러내고야 만다. 사슴처럼 순한 눈을 하고서 고집은 황소다. 고집뿐인가, 지독하기도 하지. 다정하게 웃으면서 ‘잘 다녀오세요.’ 하고선 야무지게 숨어 버린 여자다. 다시 찾기까지 지난 반년 동안, 준우는 몸속의 피가 다 말라 버리는 것만 같았다. 한두 해 겪은 사람도 아닌데 그 미소에 속은 놈이 등신이지.
돌이켜 보면 관계의 역학에서 준우는 처음부터 권좌를 잃었다. 관계를 정의하고 유지하고 지켜 왔던 것은 여덟 해 전이나 지금이나 이 여자인데, 잠시 주제를 모르고 여자에게 고삐를 채운다 착각했었다. 하지만 그 잠시 동안에도 고삐를 잡은 채로 끌려다니는 쪽은 준우였다.
택시에서 짐을 내리고 택시비와 팁을 계산하는 잠시 동안에도 에일 듯한 겨울바람에 재희는 뺨과 콧등이 벌써 발갛다. 이 추위에 두고 가야 하는데, 준우는 맘이 더 아프다. 목도리를 다시 올려 코를 가렸다.
“아아, 답답하다니까요.”
재희는 목도리를 휙 내리고는 고개를 털어 내듯 저었다. 준우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으세요?”
“좀 속은 기분이라.”
“네?”
“착하고 순하고 다정하고 …….”
“제가요?”
재희가 눈을 치켜뜨고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뭐 가끔은, 그런 이미지였거든.”
“가끔? 어머 사장님한테는 가끔보다는 자주 착했는데요?”
“착한 건 모르겠고, 가만 보면 엄청나게 말도 안 듣는데 어디가 예뻐서…….”
재희가 답 대신 목도리를 눈 아래까지 바짝 올렸다. 모자도 푹 덮어쓰더니 눈만 내고는 생글거린다. 됐어요? 준우는 한 손으로는 여행 가방 손잡이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재희 어깨를 끌어안았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 재희는 아이처럼 계속 묻는다. 나 이제 착해요? 응. 순하고? 응. 다정하고? 원래도 다정하긴 해. 재희가 까르륵 웃었다. 나 못됐고 독하고 그래도 다정은 하구나, 다행이어라.
“빨리 들어가자.”
준우는 걸음을 재촉하였다. 항공사 창구마다 늘어선 줄이 길다. 몸에 꼭 끼는 청색 제복을 입은 체구가 큰 남자가 관광객들에게 지나치게 큰 목소리로 러기지 인스펙션(luggage Inspection, 수화물검사)을 위한 지시를 하고 있다. 공항에 도착했다는 실감이 난다. 곧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도 또렷하게 인식된다.
날렵한 디자인의 대형 TV 앞에 늘어선 대기석에 둘은 나란히 앉았다. 한국 기업 브랜드 로고가 하단 정중앙에 박힌 TV는 뉴스 채널이 고정되어 있지만 준우는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다.
“……가기 싫다.”
재희가 달래듯 손을 잡았다.
“회사도 귀찮아.”
재희가 잡은 손으로 하나하나 깍지를 끼더니 제 얼굴 쪽으로 끌어당겨서는 손끝에 입을 맞추었다.
“휭하니 가 버려도 삐치지 않을게요. 맘에 없는 소린 그만해요.”
준우는 가만히 손을 빼어 내고 시선을 피했다.
“……진심이야. 일은 질리도록 했어. 돈도 벌 만큼 벌었고.”
“이것 보세요, 서준우 사장님.”
재희가 자기 얼굴을 보라는 듯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눈이 마주치니 생긋 웃는다.
“사장님은 일할 때가 제일 멋있어요.”
“실망이네. 얼마나 별 볼 일 없으면.”
재희는 진지한 표정을 만들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정말 최고예요. 너무 보고 싶어서 눈을 감으면, 나는……, 당신 일하는 모습이 제일 많이 떠올랐어요. 보고서를 리뷰하고,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멋지게 협상하고……. 당신은 누구든 사인하게 만들잖아요…….”
재희가 손을 들어 뺨을 쓰다듬었다.
“우리 만날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요. 이 남자가 나를 좋아하는구나, 나를 원하는구나 믿기가 두려울 만큼 당신은 멋져요.”
준우는 재희 손을 잡았다. 손가락에는 어머니의 반지 대신 준우의 반지가 끼워져 있다. 재희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고마워요.”
“응?”
“청혼해 줘서.”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무슨 말이야?”
“당신이 뉴욕으로 온 그날부터 내내 생각했어요. 나를 미친 듯이 찾았다는 당신을, 찾으면 무엇이든 해 줄 거라고 매일매일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는 당신을 상상했어요. 내가 원하는 그 무엇이든 되어 주겠다는 청혼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리고 또 얼마나 그 청혼이 당신한테는 부담일지……, 생각했어요.”
준우는 재희의 손을 움켜쥐었다. 재희가 시선을 맞추고 미소 지었다.
“맘이 바뀌었어? 나를 거절하고 싶은 거야?”
“거절이라니요.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재희가 반지 낀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거 절대 돌려주는 일도 없어요.”
“그럼 무슨 소리야.”
“말했잖아요. 충분하다고.”
“재희야!”
“떠났을 때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어요. 수백 가지 이유로 비겁하게 도망치는 나를 정당화시킬 수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이유와 논리로 무장했든, 결국엔 사랑에 빠진 사람이 행하는 패착이었을 뿐이더라구요. 나는 당신이 간절하고, 당신에겐 내가 그 정도가 아니구나. 흔한 배신감과 불안감이었네요.”
배신, 불안……. 재희가 발음하는 두 단어가 주는 공포감은 새로운 무게로 가슴을 짓눌렀다. 준우는 입을 다물고 재희를 쳐다보았다.
“두려워하는 거 알아요. 비난할 생각 없어요. 세상이 다 몰라도 나는 이제 알아요. 서준우가 한재희를 사랑하는구나, 그 두려움을 다시 안고 갈 만큼 간절히 원했구나.”
“……너를, 잃고 살 수가 없어, 재희야.”
“나는 잘살아요.”
“알아.”
준우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래서 봐줄게요. 내가 원래 사장님 늘 봐줬잖아요.”
“응?”
“나는 여기에서 그대로, 당신은 서울에서 그대로. 우리 태평양을 건너는 연애를 해 봐요. 아무 조건 없이. 나는 보고 싶어도 휙 날아가고 그런 거 못 해요. 사장이 아니라서. 당신은 사장…….”
말을 하다 말고 준우를 쳐다보면서 재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미안해요. 그런 표정 처음 보는 것 같아. 서준우도 상황 판단이 안 되어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구나.”
재희가 목을 끌어안고는 뺨에 입을 맞추었다.
“보내기 싫어. 진짜…….”
귓바퀴에 입을 붙이고는 속삭였다. ‘나는, 정말로 보내기가……, 힘들어요.’ 차분하게 끊어 말하지만, 묻어오는 숨결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나 보러 올 거죠?”
“응.”
“전화도 할 거죠?”
“매일매일. 셀 수도 없이.”
재희가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는 웃었다.
“매일 ‘재희야.’ 하고 불러 줄 거죠?”
“응.”
“그럼 연애하는 거 맞네요.”
“나한테……, 기다리라고 말하는 건가?”
“네.”
“얼마나…….”
얼마나…….
준우는 절망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재희는 바싹 타들어 가는 준우를 지그시 바라보고 귓바퀴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답은, 당신에게 있어요.
나를 믿지 못하는 거냐고 따져 묻거나 당장이라도 네 아파트로 이사를 들어와 버리겠다는 어깃장을 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눈물을 애써 감추고 입술을 깨무는 재희를 보면서 준우는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매일 전화하고, 매일 사랑을 속삭이고, 낮과 밤 상관없이 전화기를 붙들고, 다만 몇 시간을 보겠다고 뉴욕행 비행기에 오르고…….
어느 뜨거운 여름 날, 준우는 재희 아파트에 들어섰다.
“어머, 연락도 없이?”
재희는 진공청소기 플러그를 빼고는 이마에 솟은 땀을 손등으로 눌렀다.
“그제 통화할 때도 온단 말 없었잖아요.”
“어제 전화 받으면 말하려고 했지. 열 통도 넘게 했어.”
“미안해요. 설마 그래서 온 거예요? 나 삐쳤나 해서? 이것 봐요, 먼저 전화 끊은 사람은 당신이었어요.”
준우는 말없이 서류 가방에서 봉투 한 장을 꺼내어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재희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준우 씨?”
“더 이상 토 달지 마. 너를 말로 당할 수가 없어. 일본에 계신 아버지께도 연락드렸어. 케이시 교수님께도 말했고.”
준우는 손목시계를 확인하였다.
“준비해. 저녁 5시 비행기야. 여섯 시간 남았어. 결혼식까지는 열흘 남았군.”
“지금 제정신이에요?”
“아니.”
준우가 하아, 짧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좀 돌아 버린 것 같아.”
“그래도 이건, 설마 정말 이에요?”
“지난번 통화 때 말했어.”
“농담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냥 화가 나서 해 본 말이겠거니.”
“너는, 졸업하고도 여기 계속 있는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야?”
“일이 있으니까.”
“한국엔 일이 없어? 난 뉴욕에 오면 일거리를 못 구하겠어? 대체 뭐 하자는 거야!”
화를 내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소리가 높아졌다. 재희는 준우를 가만히 보더니 냉장고로 다가가 얼음물을 만들어 내밀었다.
“좀 앉기나 해요.”
준우는 단숨에 잔을 비우고는 털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재희가 바싹 붙어 앉더니 준우의 팔을 들어 제 어깨에 두르고는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화 많이 났어요?”
준우는 재희 어깨만 쓰다듬었다.
“미안해요. 화나게 하려던 거 아니었어요. 갑자기 일을 그만둘 상황이…….”
준우는 후우, 긴 숨을 쉬었다.
“너한테 손들었어. 평생 손들고 살 테니까 이제 그만하라고.”
“왜 그런 말을 해요…….”
“속지 않아. 순한 척하지 마. 무릎 꿇게 만들어 놓고서.”
재희가 푸훗 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돼요. 누가 무릎을 꿇어. 당당하고 뻔뻔하기만 하시네요. 느닷없이 날아와서, 내 이름 박힌 청첩장 내밀고는……. 대체 무슨 작정…….”
“재희야.”
준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네?”
“잠시만…….”
“네.”
재희는 눈을 감고서 몸을 꼭 붙였다. 그대로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깨를 감싸 안은 채로 준우는 가만가만 재희 뺨을 쓰다듬었다.
“가자.”
“…….”
“이제 그만 가자.”
“…….”
“떨어져 있는 거 너무 힘들다.”
“……네.”
재희의 답을 듣고서야 준우도 눈을 감고 그녀의 정수리에 얼굴을 묻었다. 피곤하죠? 재희가 속삭이듯 묻는다. 괜찮아. 비행기 안에서 충분히 쉬었어…….
*
다시는 서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식장에 섰다. 준우는 왼쪽 가슴에 코르사주가 달린 턱시도를 입고 서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하루 세 번의 예식 시간이 정해져 있는 이 호텔에서 결혼을 하는 커플은 오늘만 해도 아홉이다. 결혼식과 결혼 생활은 대부분 성인 남녀가 경험하고 있거나 경험을 할 것이라 믿는 사회적 통과의례이다. 그런 까닭에 ‘결혼’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는 일체적이고 동일하며 누구든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준우는 결혼에 부여된 다소 권위적이며 억압적인 일체성이 개별적 특이성을 넘어설 수 없다고 믿었다. 실은 결혼이라는 것이, 판에 찍듯 같은 모양새로 진행되는 오늘의 아홉 커플마저도 수십만 개의 다른 조합으로 엮인 특이성의 결합인 것을 조금 더 빨리 깨달았어야 했다.
처음 재희가 사라졌을 때는 그가 제대로 할 수 없는 일이라 믿었던 결혼을 재희를 위해서 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의지와 노력으로 해낼 수 있다 다짐하였다. 재희가 한 발 물러서서 조건 없이 연애를 하자고 제안한 이후 준우는 그녀를 붙잡고 싶다는 욕심이나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원칙적인 이유가 아닌 새로운 틀에서 그들의 결혼을 생각하였다.
어느 새벽, 가벼운 목감기를 앓던 준우는 핸드폰을 붙들고 깜박 잠이 들었다. 재희의 전화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소슬한 기운에 잠을 깨어 보니 핸드폰을 여전히 움켜쥐고 있었다. 팔을 뻗어 스탠드를 끄고 잔기침을 밭으며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당겨 덮고는 몸을 웅크렸다. 캄캄한 침실에서 핸드폰에 저장된 재희 사진만 부윰한 빛을 내고 있었다. 준우는 충동적으로 번호를 눌렀다.
― 미안해요, 고객 미팅 중이에요.
뉴욕과 서울은 연애하기에 고약한 시차다. 더군다나 낮에는 일을 하고 저녁에 수업을 듣는 여자와는.
“미안. 방해가 되었네.”
― 제가 조금 이따 전화할게요.
끊어진 핸드폰을 쥐고서 준우는 다시 재희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액정 속 그녀의 뺨에 손가락을 조심스레 대어 보았다. 눈을 감고 눈을 뜨고 다시 눈을 감고, 잔기침으로 가슴을 들썩이면서 준우는 그날 잠들지 못했다.
‘조금 이따’ 전화한다던 재희는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연락을 주었다.
― 수업 마치고 이제 집에 들어왔어요.
“응.”
준우는 뜨거운 물에 우려낸 민트티를 삼키며 답했다. 목으로 여전히 화끈거리는 열감이 느껴진다. 약이라도 사 먹어야 하나.
― 수업 전에 전화 드릴까 했는데 잠 깨울까 봐 못 했어요.
“하지 그랬어.”
― 기다렸어요?
“응.”
― 괜히 참았네요.
답하면서 재희가 기침을 두어 번 뱉었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다.
“감기 걸렸어?”
― 조금요. 음……, 실은 조금보다는 더 많이.
“심한 거야?”
― 기침 조금, 편도선 조금, 코도 맹맹. 뭐, 그 정도.
“열은?”
― 아마도 조금?
“병원 가 봐야 하지 않아?”
― 아뇨, 병원 갈 정도는 아니에요. 조금 쉬면 돼요. 저 지금부터 침대 이불 속이에요. 이불 뒤집어쓰고 일찍 잠들려고요.
뉴욕의 많은 스튜디오 건물이 그러하듯, 재희의 집도 오래되고 자그마하였다. 한겨울엔 난방을 올려도 창틈과 벽으로 한기가 스몄다. 봄이라 해도 저녁이 되면 쌀쌀한 날씨였다. 뉴욕은 평년보다 더 추운 날씨라는데 냉기 도는 방에서 이불을 덮어쓰고 침대에 누웠을 재희가 가슴에 탁 맺혔다.
“아픈데……, 혼자 둬서 미안해.”
― 괜찮아요. 감기가 뭐라고.
먼 곳에서 혼자 외롭게 앓는 네가 싫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 아아, 따끈한 국 한 그릇만 먹으면 좋겠어요.
“무슨 국?”
― 파 송송 썰어 넣은 콩나물국. 감기가 뚝 떨어진대요. 아니면 쇠고기 넣고 무 푹 고아 낸 국.
“둘 다 해 줄게. 주말까지만 참아 봐.”
― 정말요? 여기 와서 만들어 줄 거예요?
“응.”
― 그렇게 선선히 해 준다고 할 줄 알았으면 좀 더 거창한 요릴 말할걸 그랬어요. 신선로 같은 거.
“그래도 좋고. 신선로는 배워서 해 볼게.”
재희가 기침 끝에 후후 웃었다.
― 요즘 너무 다정한 거 아니에요? 뭐든 다 해 준다네. 요술램프 지니도 아니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니는 사양이야.”
― 왜요? 이제부터 뭐든 다 해 주는 건 안 하려고요? 혹시 내가……, 너무 투정부려요?
“아니.”
― 그럼요?
“지니는 배가 너무 나왔어. 싫어.”
재희가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 그럼 도깨비방망이?
“그래, 그게 더 낫다.”
― 있죠, 준우 씨.
“응.”
― 나……, 아까 전화 끊고서 되게 그리웠어요. 가슴 뒤편까지 쿡쿡 아리도록.
고객 미팅 중이에요, 사무적이고 간략한 답이 떠오른다. 그 답에 얼마나 목이 매캐해지고 등이 시렸는지도…….
“매정하게 끊을 땐 언제고.”
― 클라이언트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요.
“알아.”
한재희는 정확한 사람이었지. 언제나.
― 했던 말 또 하고 또 묻고 다시 묻고, 엉뚱한 이야기 계속하고……. 상대하고 나니 진이 쭉 빠졌어요. 배도 고프고 목도 아프고 춥고. 그때부터 목소리 한 번만 들으면 좋겠다 싶은데, 시간을 보니 당신 잠들었겠더라고요. 출근할 사람 깨울 수가 없어서, 휴대폰 들고서……, 내내 망설였어요. 샌드위치로 저녁을 때우면서도, 커피를 마시면서도, 학교에 가는 동안 계속, 수업 시간 직전까지. 몇 번이나 번호를 눌렀는지 몰라요. 통화 버튼을 누르고 모르는 척 깨워 버릴까 싶은 충동을 꾹꾹 눌러 참는데……. 어휴, 눈물 날 뻔했어요. 아니요, 정말 눈물이 났어요. 당신에 대해서 참는 건 이골이 났다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요.
준우는 감기 기운 때문만이 아닌, 뻐근한 통증이 느껴지는 목에 침을 삼키면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재희야.”
― 네.
“잠 깨워도 되고 방해해도 되고 귀찮게 해도 돼. 뭘 해도 괜찮아.”
― 그런 소리 마요. 나는 당신 질리고 지치게 만들고 싶지 않거든요. 나, 기대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거예요. 내가……, 결핍이 좀 있다는 거 아시죠?
‘내가……, 결핍이 좀 있다는 거 아시죠?’
준우는 그 말이 머릿속에 박히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준우가 이불을 끌어안고 그리움으로 밤을 지새웠던 그날, 같이 감기를 앓으며 따뜻한 국 한 그릇이나 목소리 한 번이 간절했다는 그녀가 내뱉은 ‘결핍’이라는 단어로 인해 결혼에 대한 감정 반응이 임계질량을 완벽하게 넘어서는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임계질량(critical mass)에 도달한 우라늄이 핵분열을 지속하듯, 결혼에 대한 준우의 일관되고 지속적인 연쇄반응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준우는 단 한 번도 감정적 결핍이라는 단어를 자신과 연관 짓지 못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많다 싶은 가족 수에 커다란 보더콜리 두 마리까지 북적거리던 집에서 자랐다. 자식에겐 관대하고 자신들에게도 까다롭지 않았으며 사람을 좋아하는 부모님 덕분에 아버지와 어머니 친구분들, 형 친구들까지 집 안은 늘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손님을 초대하는 이유는 언제나 충분하였다. 가족 하나하나 생일이나 축하할 일 외에도 부침개 반죽이 너무 많이 되어서, 싱싱한 해물을 떨이로 사 와서, 고추장돼지불고기가 기가 막히게 맛있게 되어서, 시원한 맥주가 냉장고에 가득 차 있어서, 김밥을 말다 보니 50줄이 훌쩍 넘어서……. 나이 차이 나는 막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준우는 가족은 물론 그 모든 사람들에게 지극한 애정과 지나친 관심을 받았다.
“우린 너무 집단적이야. 패밀리(family)는 집합명사(collective noun)이기도 하지만, 개인 구성원을 각자 지칭하는 복수형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더 많아. 언어에서도 보듯이, 가족은 집단을 이루지만 구성원을 존중하는 형태라고. 가족이란 집단의 이름으로 프라이버시를 침해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난 몹시 싫어.”
준우가 열한 살이 되었을 때 형들에게 한 말이었다. 준우는 가족에 대한 정의를 검토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지만 형들의 반응은 예상보다 더 무자비하였다.
“쟤 뭐라고 하냐? 야야, 막내. 한국말로 다시!”
TV를 시청하느라 소파에 반쯤 드러누워 있던 두 형은 배를 잡고 킬킬 웃어 댔다. 사춘기의 절정을 달리고 있던 작은형이 다소 거칠게 답하였다.
“집단의 이름 뭐? 놀고 있네. 닥치고, 너나 해라, 개인주의.”
“형, 개인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야. 최소한의 사적 보호를 말하는 거라고.”
“어이, 우리 천재 막냇동생. 개인주의 정의 찾아봐. 맞을걸? 암튼 너는 책을 너무 많이 읽었어. 내 책은 읽지 말라니까. 요즘 꽂힌 건 사회학(sociology)이야?”
큰형이 뺨을 꼬집으면서 빙글빙글 약을 올렸다.
애정과 관심, 번잡함을 지겨워했지만 홀로 된 생활을 하면서도 준우는 가족의 울타리에서 정서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작 한 달에 두어 번 연락을 주고받으면서도 늘 그대로라 믿는 까닭은 성장기에 몸속 깊이 새겨진 집합명사인 ‘가족’ 때문이었다.
지난 새벽 준우가 느꼈던 막막한 그리움과 상실감을 닮은 밤과 낮을 재희는 어린 시절부터 얼마나 많이 겪어 왔을지 제대로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눈물이 날 만큼 목소리 한 번 듣고 싶었는데 끝내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는 그녀는 얼마나 그리움을 참는 일에 익숙한 것일까. 이골이 날 만큼 참아야 할 대상은 재희에게 아버지 한 사람으로 족하다. 앓아누운 재희에게 따뜻한 국물 한 그릇을 먹게 하고 싶듯이, 그녀의 해묵은 결핍을 온전하게 채워 주고 싶었다. 준우가 결핍을 채울 수 있다면, 재희 역시 그의 결함을 보듬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결핍을 채우고, 결함을 보듬고…….
여전히 결혼 앞에서 머뭇거리는 재희에게 청첩장을 내밀던 날, 준우는 말하였다.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 몇 번이나 말을 끊어 쉬었다 다시 하였다.
“……충분히 생각했어. 결심과 결단이나 욕망과 불안이 아니야. 의지나 노력도 아니고. 나는 그냥 너랑 같이 가족이 되어 살고 싶어. 아플 때도 같이, 좋을 때도 같이. 같이 먹고 자고 일어나고. 너랑 남들 하는 것 다 해 보고 싶어. 아이도 키우고, 부모도 되고……. 그래, 강아지도 키우고. 잘할 수 있어. 잘할게. 평생 잘할게.”
‘평생,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잘할게…….’
“신랑님, 지금 입장하셔야 합니다.”
누군가의 지시에 정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입장을 하였는지 모르겠다. 준우는 주례석 앞에 서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흰 드레스를 입고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재희가 걸어 들어오고 있다. 서준우와 가족을 이룰 여자, 준우의 아내, 한재희다.
준우 앞에 와서 재희가 아버지의 손을 놓고 준우 옆으로 붙어 선다. 아버지가 준우에게 악수를 청하며 눈물을 흘리고 만다. 재희도 눈이 발갛다. 손을 힘주어 쥐자 재희가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짓는다. 지구에서 하나의 새로운 가족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Epilogue-준우, 재희, 그리고 아기
까만 통유리창, 유리로 만든 벽이라고 해도 좋을 넓은 창에 붙어 섰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자동차 불빛, 멀리 보이는 회색 능선, 흐리게 반짝이는 빌딩 숲……. 유리벽에 비치는 여자가 입고 있는 밝은 오렌지 빛깔이 도심의 새벽과 잘 어우러진다 싶다. 너무 서늘하고 매끈하기만 하면 좀 서글프니까.
“재희야.”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오렌지색 긴 원피스가 찰랑 물결을 만들었다.
“조심, 조심해야지.”
행여 균형을 잃었을까 급히 다가와서 어깨를 감싸는 남자를 향해 웃었다.
“또 왜 나왔어요. 잠 안 깨우려고 조용조용 움직였는데.”
“깨우라니까. 혼자 일어서는 것도 힘들어하잖아.”
어깨부터 팔까지 다정하게 쓰다듬는 손을 잡았다.
“지금 잘 주무셔야죠. 곧 아이 태어나면 이제 밤이고 새벽이고 앙앙 울 텐데요.”
“나야 뭐. 너는……, 계속 그래? 병원에 다시 물어보자. 이렇게 못 자면 어떡해.”
안타까워하는 눈을 보다가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며칠 지나면 좀 나아질 거래요. 어제보다는 숨이 약간 덜 차는 것 같은데, 그래도 누워 있으면 답답해서 그래요.”
준우는 며칠이라고 한 게 벌써 며칠은 지났다며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입가의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넘겨 주고 뺨을 쓸어내리고 그리고 동그랗게 부푼 배에 손을 올리면서 속삭였다.
“착하지, 우리 아기. 이제 엄마 조금만 더 힘들게 하고……, 금방 만나자.”
착한 아기가 맞는 거 같다. 언제나처럼 톡톡 손발을 힘차게 움직여 아빠한테 대답했다. 준우가 웃자 아기도 더 크게 움직였다.
준우의 가슴에 등을 기댄 채로 거실 소파에 길게 앉았다.
“무겁지 않아요?”
“아니.”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고 팔을 쓸어 주면서 준우가 말했다.
“눈 감고 좀 자도록 해 봐.”
“네.”
목덜미에 뺨을 붙이면서 답했다. 준우의 품은 포근하고 안온하고 든든하고 편안했다. 눈을 감고 잠이 들면 연노랑, 연분홍, 연두색과 하늘색 꿈을 꿀 것만 같다.
서준우, 이 남자를 알게 된 지 10년이 넘었다. 인터뷰 장소였던 회의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던 키가 큰 남자. 가슴 깊은 곳까지 들킬 것만 같은 시선과 크고 따뜻한 손을 가진 남자. 그날부터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늘 등을 기대고 있었다.
준우가 팔을 둘러 배 위에 올린 손에 손을 겹쳤다. 그날처럼 따뜻하고 묵직한…….
“준우 씨.”
“응?”
“그냥 불러 봤어요.”
“응.”
“나……, 불러 줘요.”
준우가 웃나 보다. 등으로 떨림이 전해진다.
“재희야.”
“네.”
“재희야.”
“……네.”
아기가 웃나 보다. 뱃속이 간질거린다. 따스하고 부드럽고…….
재희는 깜박 잠에 빠졌다.
빛이 가득한 방이었다. 재희의 소망대로 준우를 꼭 닮은 아이가 통통통 뛰어왔다.
Epilogue -은행잎
토요일 점심 약속을 위해 서두르던 중이었다. 요즘 들어 집에서 미적거리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준우는 상대가 분명히 흥미를 느낄 만한 프린트물 몇 장을 확인한 후, 봉투에 넣으려다가 짧게 신음하며 놓쳐 버렸다. 오른쪽 다섯 번째 손가락 아랫부분 손바닥이 1센티미터쯤 찢어졌다. 마찰열 때문이었는지 종이가 빠르게 스치며 만든 상처에서 희미하게 살갗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배어 나오는 핏방울을 대충 티슈로 누르는데 ‘왜 그러세요?’ 하고 열린 문 밖에서 재희 목소리가 들렸다.
“별거 아냐.”
아직 피가 배어 나오는 중이라 묻히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준우는 바닥에 흩어진 종이들을 집어 들었다.
“어머, 어디 다치셨어요?”
다가선 재희가 피 묻은 티슈 조각을 들고 준우를 빠르게 살폈다.
“아, 손. 종이에 벴어.”
괜찮다고 하는데도 재희는 ‘어디, 어디요.’ 하며 양손을 잡아 상처를 확인하더니 기어이 연고를 가져왔다.
“내가 할게.”
“가만, 가만있어 봐요.”
재희가 손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꽉 쥐고는 고개를 숙이고 검지로 연고를 살살 펴 발랐다. 빨간 실선처럼 벌어진 상처 부위로 화끈 열이 오른다.
“종이에 베인 상처는 꽤 아프던데. 피가 아직도 나요.”
재희가 무척 속상하다는 투로 눈썹을 모으면서 일회용 밴드 껍질을 찢었다. 준우는 그녀가 하는 대로 한 손을 맡긴 채로 다른 손으로 기울어진 머리를 쓰다듬었다.
“재희야.”
“네?”
“밴드는 좀 그렇지 않을까.”
“그래요?”
“응, 엄살쟁이라고 할 거 같은데?”
‘보기에 좀 안 좋을까요?’라고 동의하면서도 재희는 밴드의 접착 면에 붙어 있는 하얀 보호 필름을 벗겨 냈다. 밴드를 손바닥에 꾹꾹 눌러 붙이면서 ‘그럼 좀 이따 떼어 내세요.’ 그랬다. 준우는 그러겠다고 선선히 대답했다.
현관 앞에 서서 양복 깃을 매만져 주면서 재희가 우물쩍 말을 흐렸다.
“손에 상처 만들지 마요. 내가 좋아하는데…….”
“응?”
“…….”
쳐다보자니 마치 처음 사랑 고백이나 하는 것처럼 재희는 얼굴을 붉혔다.
“당신 손……, 좋아한다구요.”
“그랬어? 어디 보자. 글쎄, 별로 특별한 구석이 없는데.”
준우는 밴드가 붙어 있는 손을 펴서 앞뒤로 뒤집어 보였다. 재희가 그가 하는 양이 우스운 듯 손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물론 생긴 건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죠.”
“그럼 뭔가 특별히 맘에 들게 움직이나 봐.”
부쩍 더워진 날씨 탓에 재희는 어깨가 훤히 드러나고 가슴 선이 깊이 파인 면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장난기를 담은 검지로 귓불을 스치고 목덜미를 따라 움직였다. 소름이 소소하게 돋아나는 어깨를 간질이며 민트색 레이스 끈을 슬쩍 미끄러뜨리자 가슴이 아찔하게 드러났다. 재희가 팔목을 움켜쥐며 벌어졌던 입술을 꼭 다물었다가 떼어 내면서 말했다.
“놀리지……, 마세요.”
“뭐가.”
“가세요. 안 늦었어요?”
또박또박 힘주어 발음하자 정말로 놀리고 싶어졌다.
“아, 이건 맘에 안 들었다고. 그럼 어떻게 해 드리죠?”
허리를 감아 바짝 몸을 붙이자 재희는 고개를 비틀었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감촉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손밖에 없었다. 긴 양복 차림이 거슬렸다. 준우는 맨가슴에 그녀가 닿는 느낌을 가장 좋아했다. 어젯밤에도 오늘 새벽에도 그랬듯이, 닿을 듯 말 듯 스치던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귓등으로 솜털이 일어서는 기분이었다.
“……정말 가세요. 늦겠어요.”
재희가 어깨끈을 추슬러 올리면서 떨어졌다. 시선을 피하느라 외로 튼 가느다란 목과 쇄골 아랫부분까지 옅게 물들어 있었다. 정말로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양복 단추를 채우는데 재희가 손을 잡았다. 손등 부분을 감싸 쥐고는 엄지로 손바닥을 천천히 문지르면서 말했다.
“그런 거 아니고……, 그냥 예전부터 손이 좋았어요. 손잡아 주면 느낌이 좋아서요.”
“예전부터? 왜?”
물어보자 재희는 언젠가 다른 질문에 답했던 것과 같은 답을 했다.
“처음부터요. 처음 인터뷰할 때부터 그랬어요.”
“인터뷰할 때라니, 손을 잡았어? 우리가?”
“악수……했잖아요.”
면접 때마다 인사로 악수를 했으니 그날도 그랬을 것이다. 베이지색 헤어밴드를 하고 잔뜩 긴장하여 움츠려 있던 어린 재희가 떠오른다.
“이런, 앙큼한 지원자였군.”
“네?”
“면접 때 악수하는데 다른 생각을 하다니. 감쪽같이 몰랐어.”
“아니, 그런 건 아니었어요.”
재희는 볼이 발개져서 정색을 했다. 뭔가 설명을 하려는데 다 듣자면 정말 늦을 것 같았다.
“나 간다. 저녁에 마저 들어.”
준우는 손을 들어 보이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 거 아니고……, 그냥 예전부터 손이 좋았어요.’
약속 장소를 향해 운전하는 동안 재희가 무안한 표정으로 덧붙이던 설명을 떠올렸다.
손을 좋아했었나……?
붙여 둔 밴드를 문지르며 피식 혼자 웃다가 문득 오래전 기억을 선명하게 떠올렸다. 은행나무 가로수 아래였다. 가지 사이로 햇빛이 어른어른 비쳐 들어 고개를 기울인 재희의 정수리와 이마에 빛 그림자를 만들었다. 햇빛에 반짝이던 머리칼과 이마께 보송보송한 잔머리가 떠오른다. 후후, 입을 동그랗게 모아 바람을 불어 내던 모습도. 준우는 핸드폰 단축키를 눌렀다.
― 여보세요?
“물어볼 게 있는데.”
― 네.
“그때도 그래서 굳이 약까지 사서 손에 난 상처 치료해 준 거야?”
― 네? 언제 말씀이세요? 제가 그런 적이 있었나요?
“그랬는데? 국밥 먹고 나오면서 약국 들러서. 길거리에서 말야.”
그날 약국이 있는 길가 가로수 아래였다. 난감한 기분으로 손을 맡기고 고개를 들었는데 어색한 시선 끝에 팔랑거리는 노란 은행잎이 잡혔다. 은행잎을 떨어뜨린 나뭇가지 사이로 가을 하늘이 얼마나 시리게 파랬는지까지 준우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국밥이야 가끔 같이 먹지 않았어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답이었다.
“그날 아침에 네가 보고서 들고 와서…….”
― 잠시만요, 재원이 깼나 봐요.
기억을 되살리고 싶어서 서둘러 덧붙이던 설명은 더 하지 못했다.
― 응, 그랬어? 으응, 쉬……. 엄마 왔네.
나지막하게 어르는 소리가 들린 후, 재희가 다시 물었다.
― 언제였다구요?
준우는 웃으면서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러니까 결국 엉큼한 욕심을 품었던 건 역시나 준우 쪽이었다.
그래도 말이지, 어떻게 전혀 기억을 못 하냐, 그렇게 예쁘게 웃어 주고는 말이다.
*
“사장님, 저……, 사장님?”
준우는 억지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흐릿하게 재희가 보였다.
“아, 미안해요.”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의자 등받이에 기댄 몸을 일으켰다. 관자놀이 부근에서부터 시작된 찌릿한 통증이 머리를 관통했다. 이마를 주먹으로 문지르면서 가져온 프린트물을 넘기기 시작했다. 서너 페이지쯤 훑어보다가 내용이 도저히 눈에 들어오지 않아 덮어 버렸다.
“잠시 후에 볼게.”
기다리고 서 있던 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요일인데 말야. 빨리 마치고 들어가서 쉬라고 해야 하는데……. 미안해.”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나 그럼 30분만.”
준우는 의자 등받이에 다시 깊이 몸을 기댔다.
“사장님.”
“응?”
“괜찮으세요?”
두통 때문에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자니 재희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근심스런 표정이었다.
“안 괜찮을 일이 있나.”
“어제 술 드셨어요?”
어제가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오늘 새벽, 아니, 아침까지였나. 준우는 제가 비우거나 혹은 박살을 내 버린 양주병들이 줄줄이 나뒹굴던 거실을 떠올렸다. 깨어진 술병의 예리한 유리 파편이 머리에 꽂히는 것만 같다. 누구에게도, 제 자신에게조차 보이기 싫은 비참한 꼬락서니가 숨길 틈도 없이 밝은 해 아래 환히 드러났었다. 이번이 2년 동안 세 번째였다. 지연이 떠난 후 물건을 박살내 버린 것이. 그리고 마지막이 될 것이다.
“많이 드셨나 봐요.”
“응.”
“아직도 냄새 많이 나요.”
재희가 손으로 코를 막았다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떼어 냈다.
“저 나갈게요. 주무세요.”
돌아서려다가 말고 다시 말했다.
“저는 늦어도 괜찮아요. 오늘 할 일도 없어요.”
정말 오늘 하루 종일이라도 기다려 줄 듯이 그녀가 연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준우는 문을 나서는 재희를 충동적으로 불렀다.
“재희야.”
“네?”
“밥 먹으러 갈까.”
그녀가 또 웃었다.
“제가 국밥 사 드릴게요.”
나란히 걸어가면서 재희가 무슨 말인가를 종알종알했다. 두통은 가라앉기는 했지만 여전히 머리를 꼭 죄는 틀에 끼워 넣은 것 같았다. 통증 때문에 그녀가 하는 말은 반쯤은 흘려들었다. 하지만 의무를 방기하는 귀 대신, 눈은 그녀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속 많이 안 좋으세요?”
헤어밴드 아래로 잔머리가 보송보송 나 있었다. 하얀 뺨과 귀가 이어지는 부분에도 그랬다.
“술은 왜 그렇게 많이 드셨어요?”
요즘 일이 많아 힘이 드는지 얼굴이 더 갸름해졌다. 턱과 목으로 이어지는 선이 부드러운 동시에 날렵하고 상큼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진심으로 걱정하는 진지한 눈빛이다. 가만히 쳐다보자니 시선을 피하면서 화제를 돌렸다.
“M소프트가 장외에서 가장 주목받는 주식 중의 하나라고 기사화되었던데요. 보셨어요?”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카디건을 여미느라 손 하나를 봉긋하게 솟은 가슴 아래에 두고 있었다.
재희가 몇 살이더라. 같이 일한 지가 4년? 그러니까 이제 20대 중반이 된 건가.
여전히 여린 목선이나 팔목, 반짝거리는 맑은 눈은 소녀만 같다. 하긴 처음부터 소녀라 불릴 나이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재희 몇 살이지?”
네? 묻듯이 눈을 크게 뜨더니 답했다.
“스물다섯. 한국 나이로는 스물여섯이요.”
“아직 한참 어리네. 아니, 한창 좋은 나이인가?”
재희가 하하 웃었다.
국밥집에 들어가서 주문을 하고 말을 이어서 했다.
“사장님, 가끔 세대가 다른 사람처럼 말하는 거 아세요? 안 그래도 말이에요…….”
며칠 전에 동네 슈퍼 아주머니가 나이를 묻더니 보기보다 많다고 하면서도 그랬다 했다.
“아유, 한창 좋은 나이네. 아가씨, 좋은 나이일 때 시집가지 말고 연애해.”
아주머니 목소리를 흉내 내는지 느리고 굵게 말하는 재희를 보면서 툭 장난처럼 내뱉었다.
“그래서 연애하고 싶어? 좋은 남자 소개시켜 줄까?”
“저 남자 친구 있어요. 제가 말씀 안 드렸나요?”
단박에 나온 답이었다. 재희는 국밥을 떠먹으면서 마치 ‘저 집이 분당이에요. 모르셨어요?’ 같은 정보를 전하듯이 말했다. 준우가 숟가락질을 멈추고 쳐다보자 조금 무안한 표정이었다.
“그때, 사장님 보셨잖아요. 인사도 했어요.”
“누구? 혹시 장…….”
“네.”
“친구라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냥 그렇게 됐어요.”
재희가 수줍게 웃었다. 발그레해진 뺨을 쳐다보는 동안 재희는 또렷한 목소리로 남자 친구에 대해 설명했다. 지난여름부터 그러기로 했다고. 말끝에 어떤 거 같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좋은 녀석을 만나고 있구나.’ 하는 준우의 동의와 인정을 구하는 느낌이었다. 마치 준우의 의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듯이 재희는 진지하게 답을 기다렸다.
“잘생겼던데. 집안도 좋고. 재희 남자 친구 멋지네.”
“그런 건…….”
재희가 말꼬리를 흘렸다. 숟가락으로 좀 식은 국물을 휘휘 젓는 걸 보면서 다시 물었다.
“그 친구가 잘해 줘?”
“네.”
“많이 좋아해 주고?”
“……네.”
“잘됐네. 좋은 나이인데 좋은 남자랑 연애해야지.”
“사장님, 또……, 그러세요, 열 살도 훨씬 넘게 많은 사람처럼.”
어깨를 으쓱하면서 가볍게 하는 대꾸였지만 준우는 재희 얼굴에 스치던 만족감을 읽을 수 있었다. 테이블에 흘린 국물을 훔치고 싶은지 두리번거리는 걸 보고 준우는 냅킨을 뽑아 재희에게 내밀었다.
“고맙……, 어머, 손 왜 이래요?”
재희가 냅킨을 건네받다가 말고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양주병 파편에 약간 찢어진 상처였다. 아침에 샤워할 때 꽤 쓰라렸는데 다시 피가 엉겨 붙고 나서는 괜찮다 싶었다.
“별거 아냐.”
준우는 시선을 피하며 숟가락질을 했다.
“별거 아닌 게 아닌데요.”
알코올 솜으로 굳은 핏자국을 닦아 내면서 재희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준우는 입을 다물고 재희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아프죠?”
아래로 숙인 얼굴로 쏟아져 내려오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재희는 후후, 입을 동그랗게 만들어 바람을 불었다. 좁고 반듯한 이마와 단정하게 아래로 향한 속눈썹이 예뻤다. 후후, 다정한 바람을 내는 입술도. 준우는 손을 급히 빼어 냈다.
“이제 됐어.”
“연고도 발라야 해요.”
“내가 할게.”
연고를 바를 생각은 없었지만 재희에게서 약봉지를 채려는데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안 바르실 거 다 알아요.”
손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내밀고는 어서요, 재촉하듯이 아래위로 작게 흔들었다. 상처 난 손을 올리자 꼭 잡고는 연고를 조심스레 발랐다. 화끈거리는 건 상처 부위만이 아니었다. 아주 잠시였지만 그녀가 맞닿은 부분에 미세한 파동이 일렁이고 손등부터 뜨겁게 달아올랐다. 난감한 기분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은행잎이 보였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다가 재희의 어깨로 내려앉은 은행잎 한 장을 조심스레 떼어 냈다. 은행잎을 쥔 손끝이 갈색 머리칼을 스쳤다. 밴드를 붙이려다가 뭔가 하고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 재희에게 노랗게 물든 잎을 건넸다.
“예쁘게 물들었네요.”
준우가 먼저 걷기 시작했다. 따라오면서 재희가 속삭이듯 말했다.
“연고 내일도 바르셔야 돼요. 귀찮아도 꼭이요.”
재희 남자 친구가 정말 잘해 줘? 왜 불쑥 그 질문이 다시 하고 싶었나 모르겠다.
“이미 생긴 상처는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흉터는, 만들지 마세요.”
안타깝게 살피는 눈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
*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준우는 재희가 붙여 준 밴드를 만지작거렸다. 손등까지 올라와서 쉽게 눈에 띄었다.
‘손에 상처 만들지 마요. 내가 좋아하는데…….’
‘당신 손……, 좋아한다구요.’
재희는 사랑 고백을 하듯 볼을 물들이며 말했다. 슬며시 미소를 짓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재희, 두 글자가 액정에 떠올랐다.
“응.”
― 은행잎이요.
“응?”
준우는 예약 좌석으로 안내받았다. 잠시 재희가 말이 없었다.
“은행잎?”
― 책 속에 눌러 뒀던 거 찾았어요. 아직 부서지지 않고 잘 있어요.
준우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람을 향해 눈인사를 했다. 손에는 아직 밴드가 붙어 있다.
『메이비, 메이비 낫』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