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cine Digger Gutter Slime RAW novel - Chapter 49
49. 외출.
기억이 썩어 떨어져 간다.
처음에는 자그마한 파편이었다.
없어져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사소한 기억이었다.
하지만 붕괴는 확실히 시작됐다.
말에서 약속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떨어진 약속을 무심코 짓밟았고.
말은 점점 무게를 잃었다.
사람들이 떠나갔다.
입을 닫았다.
몸에서 경험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손은 가야 할 길을 잃었다.
눈은 구분하는 방법을 잊었다.
흰색 캔버스를 보면 심장이 떨렸다.
문을 닫았다.
시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중년의 기억과 함께 성공과 영광이 사라졌다.
청년의 기억과 함께 사랑과 열정이 사라졌다.
소년의 기억과 함께 목표와 염원이 사라졌다.
눈을 감았다.
전부 떨어져 나가고 어린애처럼 고집만 부리는 노인만이 남았다.
젊은 시절에 그가 남긴 성과를 칭송하는 사람만 있을 뿐.
말년의 그는 잊혀 사라질 운명이었다.
눈이 번쩍 뜨이는 맛이 몸을 관통하지 않았다면.
“제임스. 나를 알아보겠어?”
“종이와 물감을.”
“제임스.”
“제발.”
“마지막까지 그림 생각뿐이냐. 그러라고 먹인 것은 아니었는데. 그래. 그게 제임스 너겠지.”
남자는 제임스를 화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네가 여기에 오자고 할 것 같아서 청소해뒀다.”
의자에 앉은 제임스의 앞에 남자가 이젤과 캔버스를 준비했다.
제임스는 연필을 캔버스에 댔다.
하지만 연필은 덜덜 떨릴 뿐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그는 초조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청소에 사용한 뒤 방치됐는데도 순수한 흰색을 유지한 수건이 눈에 들어왔다.
흔들리는 발걸음으로 다가가 집어 들자 떨리던 손이 멈췄다.
“이거야.”
그는 이젤을 최대한 뒤로 젖히고 캔버스 위에 수건을 올려놨다.
연필로 그었으나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았다.
“이걸 사용해. 로 부족할 때 보여주면 네가 반응할까 가져온 건데 이렇게 쓰게 되네.”
제임스는 남자로부터 그것을 빼앗듯이 낚아챘다.
그는 본능적으로 사용법을 알아채고 팔레트 위에 온갖 물감을 부었다.
“지금까지 고마웠어.”
매우 듣기 어려운 제임스의 감사 인사에 남자는 이별을 직감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네 친구여서 영광이었다.”
남자가 떠나간 뒤 제임스는 수건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떨어진 기억, 경험, 추억을 마지막 심지와 함께 전부 불태웠다.
가슴 속에 단 하나의 작은 파편만이 남았을 때.
그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완성된 한 장의 그림.
그 위로 어느 장면이 겹쳤다.
가장 깊숙한 곳에 귀중히 보관해 자신도 잊고 있었지만.
기억이 썩어 떨어져도 지금까지 무사했던 계기이자 근원.
잼과 소스로 냅킨 위에 그린.
처음으로 자신의 세상을 겉에 드러냈던 그날의 그림이.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위대한 별이 지다. 제임스 시어도어 별세.]***
와그작. 와그작.
꿀꺽.
무언가를 씹어먹었다.
을 만들며 기계적으로 씹다 보니까 정확히 무엇을 먹었는지 잘 모르겠다.
어차피 레벨을 올리려고 먹는 거니까.
맛을 즐기지 못했어도 먹을 거야 많으니까 상관없다.
그래도 부족해질지도 모르니까.
추가로 주문해두자.
따르릉.
“네, 네. 연금슬라임입니다.”
-박태양 상담사입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금방 본론으로 들어갔다.
-방화복 의뢰가 또 들어왔습니다.
“또 미국인가요?”
-이번에는 일본입니다.
일본인가.
“대가는요?”
-B 클래스 아티팩트를 주겠다고 합니다.
소재가 아니라 아티팩트?
군침이 흐른다.
아차. 군침을 흘리면 안 되지.
B 클래스라잖아.
“A 클래스가 아니라 B 클래스인가요. 너무 날로 먹으려는 거 아닌가요?”
특수방화복과 공기호흡기 가격을 생각하면 개당 500만 원은 받아야 하는 물건이다.
일본 소방관이 정확히 몇 명인지는 몰라도 10만은 넘지 않아? B 클래스 아티팩트를 5,000억에 팔아먹겠다는 거냐? 5,000억이면 항공기도 살 수 있다고.
-1,000벌만 시범 도입을 하겠다고 합니다.
아,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50억인가. 조금 애매한데.
“아티팩트 정보를 보내주세요.”
연금약인가. 연금약이어도 아티팩트라고 불릴 수 있다.
재현이 안 되면 아티팩트니까.
그나저나 들어본 적이 없는 물건이네. 아, 정력에 좋다고? 하루에 10번? 누가 일본 아니랄까 봐.
필요 없어~.
쓸모가 없다고 쓸모가.
그래도 A 클래스 아티팩트 먹고 스킬이 진화한 걸 생각하면 그렇게 나쁘지 않을지도?
일단은 B 클래스잖아?
“받겠다고 전해주세요. 물건도 바로 보낼게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일본에도 진출하나요?”
-협의하고 있습니다.
“저는 괜찮다고 생각해요.”
시장이 넓어지는 건 좋다.
물량이 부족하면 더 만들면 되니까.
곧 레벨 30이다. 분명히 생산량을 부쩍 늘릴 수 있는 스킬이 나오겠지.
B 클래스 아티팩트를 먹으면 30레벨이 되지 않을까?
부족할까?
만약을 대비해 신제품을 만들어서 팔자.
돈을 벌자. 돈을 벌어.
내가 원하는 것을 얼마든지 살 수 있도록 돈을 벌자.
사자. 사자.
먹을 것을 사자.
무한히 무한히 반복하자.
“오늘은 무엇을 팔아볼까요! 오늘의 제품은 바로 이것! !”
이번 제품은 조금 비싸다고?
“식사를 만들 때도, 밥을 먹을 때도, 물을 마실 때도. 언제나 나오는 설거짓거리. 귀찮다고 미루면 두 배가 되고 세 배가 되고. 사용할 그릇이 없어서 새로운 그릇을 꺼내두면 점점 식기를 둘 자리가 없어지고. 설거지할 때나 정리할 때 번거롭고. 그렇다고 일회용품을 사용하기에는 가격 부담도 만만치 않고 환경 문제도 걱정이 되죠.
그런 당신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 찌꺼기 제거, 항균, 탈취는 기본. 프라이팬에 눌어붙은 탄 자국에 냄비의 녹까지 제거합니다.
넣었다 빼면 끝!
이렇게 뛰어난 이 단돈 98,000원. 시중의 그 어떤 식기세척기보다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며 세제값과 수도비조차 들지 않으며 음식물 쓰레기조차 없애주는 을 단돈 98,000원에 판매합니다!”
어머니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이것으로는 부족하지.
“젖병 소독. 중요한 일이죠. 면역력이 약한 아이는 언제나 병에 걸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펄펄 끓는 물에 끓이는데 혹시나 환경호르몬이 나오지는 않을까 걱정되고. 그렇다고 잠깐만 끓이면 세균이 남을까 걱정되고. 유리 젖병은 무겁고 깨질 위험이 있어서 못 쓰겠고. 이런 고민을 하는 어머니들께 바로 이 을 추천합니다.
에 젖병을 쑥 넣다가 빼면 깔끔! 아이는 행복. 엄마는 편안.
아이를 위한 98,000원.
당신은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환경에 신경 쓰는 사람들도 끌어들이고.
“음식물 처리기? 음식물 쓰레기봉투? 그런 게 왜 필요합니까? 고작 98,000원짜리 하나면 충분한데.”
을 출시하면 다른 식기세척기들은 판매가 안 될 거다.
성능에서 가격까지 압도적이니까!
식기세척기만 파는 회사는 전부 망하겠지.
죄다 망하면 내 독점 시장!
그때 가격을 10배로 올리는 거다.
돈이 와글와글 굴러오겠네.
“라하하하하!”
아니야. 부족해.
더 많이 만들어야지.
더 많이 팔아야지.
홍보. 그래 홍보하자.
나 지금 왜 홈쇼핑 시늉을 하고 있지?
내 채널에서 광고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뭐였더라? 잘 기억이 안 나네.
뭐, 찝찝하면 남의 채널에서 홍보하면 되지.
나보고 합방하자는 사람 많잖아.
그 사람들 채널에 가서 마구마구 홍보하는 거지.
누가 좋을까. 뷰티라임은 내가 하자고 하면 방송 시간 내내 홈쇼핑처럼 행동해도 받아들이겠지?
폴라걸도 몇 개 준다고 하면 광고를 받아들일 테고.
구독자 4천만 찍은 찰스 아저씨랑도 할 수 있을지도?
누가 제일 좋을까.
뭐 하러 골라. 전부랑 하면 되지.
홍보는 많이 할수록 좋은데!
또 누구랑 합방할까나.
합방 신청을 해온 사람들을 보자.
SLimelove의 이름값에 올라타려는 사람은 걸러야지.
또 을 제대로 홍보한 경험은 있어야 한다.
아니면 내가 홍보하려고 할 때 까다롭게 굴 것 같으니까.
[위대한 별이 지다. 제임스 시어도어 별세.]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죽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왜 연관검색어로 뜨는데.
아, 위에 으로 그림을 그렸구나.
그 그림을 완성하자 죽었어?
스토리가 좋잖아. 가격이 엄청나게 뛰겠네.
무슨 그림을 그렸나 볼까.
“············.”
똑.
아래를 내려보니 이 한 마리 굴러다닌다.
이상하네.
같은 걸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무심코 만들어버린 한 마리를 치우고 만들어둔 을 전부 먹어 치웠다.
제임스 시어도어의 .
기억해두자.
오랜만에 일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집에나 갈까.
고양이 귀 헤드셋.
형광 무지개 우주 후드.
십이지신 금박 바지.
워커 부츠.
테러리스트 복장을 하고 출발!
“응?”
이 현란한 옷을 보고도 시선이 오래 머물지 않는다.
예전에는 사진을 찍고 난리였는데.
뭔가 다들 심드렁하다.
어? 나와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도플갱어냐!
어? 또 있어? 세 번째? 나 죽는 거야?
네 번째? 세상에는 같은 얼굴이 셋밖에 없는 거 아니었어?
발걸음을 돌려서 지하철에 올랐다.
젊은이들의 거리에 도착.
“으악.”
왜 패션 테러리스트들이 돌아다니는데.
왜 이 패션이 유행하는 건데.
다들 패션 감각이 망가졌나?
전염병인가?
검색해 봤다.
추석 때 방영한 예능에 나온 신인. 내 복장 따라 해놓고서는 패션 감각 없는 척한 그 인간. 엄청나게 떴구나. 몰랐네.
그 신인이 뜨면서 이 패션 또한 함께 떴다.
어느새 11월. 온몸을 감싸도 그리 덥지 않은 계절이 됐다.
날씨가 선선해지면서 이렇게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부쩍 늘어났다.
다들 익숙해져서 지금은 힐끗 보고 끝나는 수준이 됐다.
더는 패션 테러리스트가 아니게 됐다.
패션피플이 돼버렸다.
누구도 내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연금슬라임도 SLimelove도 아니니까.
그저 유행 따라 옷을 입은 행인 1에 불과하니까.
여기서 옷을 벗고 본 모습을 드러내면?
괴물이 나타났다고 소란이 일어나겠지.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토벌부대와 숨이 막히는 혈전을 벌이게 될 거다.
SLimelove의 모습을 드러내면?
여러분~! 모두의 아이돌 SLimelove가 이곳에 있어요! 이렇게 크게 소리치면 이 거리 전체의 관심을 나 하나에 집중할 수 있을 거다.
짝.
옆에 사람이 깜짝 놀랐다.
실례. 조금 정신을 차리려고요.
나는 관종이 아니다.
나는 관종이 아니다.
오랜만의 외출이라서 그런가? 정신이 맛이 가는 것 같다.
역시 바깥 공기는 해롭다.
방구석이 최고야.
애초에 여기서 관심을 끌어서 무슨 의미가 있는데? 판매량에 유의미한 변화도 없을 텐데.
본가에 갔다.
아무도 없네.
동생이야 학교에 있을 테고 아빠는 일하고 계실 때니까.
엄마는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하긴. 연락도 없이 그냥 왔으니까.
스마트폰을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원래는 주방에 을 설치하고, 화장실에는 을 채워놓고, 동생 방에 색을 위장한 을 두고 가려고 했는데.
왠지 시간이 아까워졌다.
빨리 집에 돌아가 일이나 하자.
레벨 올려야지.
***
꿀꺽.
[분해 스킬의 레벨이 31로 올랐습니다.] [흡수 스킬의 레벨이 31로 올랐습니다.] [분석 스킬의 레벨이 30으로 올랐습니다.]끝?
일본의 기업들이 소방대원들을 위해 모은 기금으로 구한 B 클래스 아티팩트라고 들었는데.
효과가 시원치 않네. 스킬은 진화하지 않았고 [특성 : 슬라임☆]의 레벨도 오르지 않았다.
역시 A 클래스 아티팩트가 아니면 극적인 효과는 없나.
그래도 [특성 : 슬라임☆]의 레벨 30까지 앞으로 조금.
아마 내일 오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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