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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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레종 에뜨랑제 2
노부인은 겁이 덜컥났다. 스튜어디스에게 좌석 이동을 요청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무쌍을 들여다 보던 노부인의 찌푸린 얼굴이 펴졌다.
“잘 생겼네.”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이다. 티하나 없이 맑은 얼굴에 안타깝게도 뺨에 흉터가 있다. 갑자기 악몽을 꾸는 젊은 동양인이 안스러워졌다. 노부인은 손수건으로 젊은이의 이마에 밴 땀을 살며시 닦아주었다.
****
싸락눈 내리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함박눈은 소리 없이 쌓이지만 싸락눈은 사그락대는 소리가 난다. 이럴 때는 비정상적으로 좋아진 청각이 거추장스럽다.
때 묻은 이불의 먼지 냄새가 풀썩 코를 쑤셨다. 벽에 눌어붙은 빈대가 찍 갈겨놓은 피 냄새가 비릿하니 풍겼다. 지나치게 예민해진 후각도 거추장스럽다.
외풍이 심한 방이지만 방바닥만은 절절 끓었다. 잠자기 전에 참나무 장작을 잔뜩 밀어 넣어 놓았었다.
‘이제 지게를 지고 월송산을 오를 일도 없고, 누렁이 쇠죽도 마지막이구나.’
무쌍은 따듯한 온기를 아쉬워하며 일어났다. 누렁이 여물을 가마솥에 안쳤다. 장작이 활활 타오르자 대문을 나섰다. 휭하니 월송산을 뛰어 올랐다. 산을 내려와서 뜨거워진 몸을 샛강에 몸을 풍덩 던졌다. 싸락눈이 함박눈으로 변했다. 자욱이 쏟아지는 눈뭉치가 강물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강물에 몸을 씻는 인간이라니, 누군가 보았으면 귀신이 나타났다고 소문을 낼 것이다. 실제로 귀신이 나타나는 낙동강이기도 하고 말이다.
무쌍은 오랫동안 꼼꼼히 씻었다. 큰집에서 덕지덕지 쌓인 눈물, 한숨, 고통, 모멸, 울분을 뱀이 허물 벗듯 털어 내고 싶었다.
누렁이 여물을 구유에 퍼 담아 주는 순간 콧날이 시큰해졌다. 구유에 머리를 처박은 누렁이 볼 따귀를 쓰다듬었다.
“잘 있어라. 누렁아. 내가 없으마 누가 니를 아껴 주겠노.”
작별 인사를 나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짐승 한 마리가 고작이다.
쌀을 씻어 화덕에 올리고, 토란을 손질해서 국을 끓였다. 하동 아지메가 보내 준 김치와 콩자반이 반찬의 전부다. 아침을 차려 먹고, 새로 산 책가방에 짐을 챙겼다. 책 몇 권과 연필, 노트가 전부다. 벽에 걸린 남루한 옷은 포기했다.
집을 나서던 무쌍은 대문간에서 장씨와 마주쳤다. 아니 장씨가 대문을 지켜 서 있었다. 늘 그렇듯 쭉 찢어진 눈에서 시퍼런 빛이 쏟아져 나왔다. 무쌍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키워 준 은혜도 모르는 살모사 같은 새끼, 나가서 빌어 처먹어라.”
역시 가시 돋친 말이 우르르 쏟아졌다. 할 말이 산처럼 쌓였지만 떠나는 마당에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 입히고 먹이지 않았으니 키워 준 은혜랄 게 없지요. 저기 헛간 같은 방에 남겨진 이불과 옷가지, 그릇도 내가 장만한 거요. 지금 내가 걸친 옷도, 손에 든 가방도 내 돈으로 산거요. 지난 오년 동안 당신이 내게 일원 한 푼 준적 없었어요. 당신이 나를 낳지 않았고, 내가 피해를 준적도 없으니 살모사 새끼도 아니지요. 빌어먹을 새끼는 맞심더. 뼉다구 뽀사지도록 일하고 빌어먹다 갑니다.”
무쌍은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말을 시원스럽게 쏟아 냈다. 백모에게 당신이라 했으니 패륜이라면 패륜이다. 어머니의 실종에 한 손을 쓴 여자, 자신을 시궁창에 처박으려고 날마다 악을 쓰는 여자에게 당신이란 호칭도 과하다.
“속 깊은 니 애비가 이 꼴을 보마 잘 한다 칼끼다.”
“그라요. 바로 그 속 깊은 아부지 땜에 내가 나가는 거요. 아부지가 5년 동안 아들 꼴을 보느라 저승에서 편치 못했을 끼구마.”
“이 이 빌어 처먹을 새끼! 엠병이 들어 디져라.”
“빌어먹든 엠병이 들든 당신이 걱정 할 일이 아니요.”
시퍼런 장씨의 눈이 뒷등에 꽂혔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5년 동안 감금됐던 이프섬 탈출이다.
밤새 내린 눈이 종아리가 묻히도록 쌓였다. 짐이라곤 책가방 한 개가 전부다. 퍼붓던 눈송이가 다시 싸락눈으로 변했다. 무쌍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
우르르-
무쌍은 약한 진동을 느꼈다. 리어카에 조개탄을 싣고 막 출발하던 발길이 딱 멈췄다. 서늘한 느낌이 몸을 쫙 훑고 지나갔다. 막 뒤쪽의 버럭 더미를 돌아보려는 순간 굉음이 울렸다.
꽈다당- 수십 미터 허공에서 쏟아져 내리는 검은 물결은 지극히 비현실적이었다. 쏟아져 내린 버럭이 순식간에 작업장을 덮쳤다.
선탄중인 작업반 세 사람이 순식간에 검은 물결에 먹혔다. 뒤쪽에서 엄청난 공기 파동이 밀려들었다. 무쌍은 극심한 공포에 휩싸였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지만 자신의 몸도 느리게 움직였다.
“으아아!”
무쌍은 운반 리어카를 팽개치고 죽어라 함바 방향으로 달렸다. 뒤쪽에서 굉음에 섞여 비명 소리가 들렸다. 끄떡없다던 조장의 비명도 들렸다.
개체가 극한의 위험을 인지하자 신체의 각 기관이 최대의 방어 기전을 발동했다. 혈액 흐름이 서너 배로 빨라지며 신체 말단부 근육에 다량의 산소를 펌프질 했다. 질주하는 말 근육에 비길 만큼 강력한 근육이 대지를 박찼다.
안타깝게도 중력가속도는 인간의 근육보다 강력했다. 무지막지한 무게가 몸을 짓눌렀다. 끔찍한 고통이 신체 곳곳을 치달렸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씨바 조또, 엄마를 찾아야 한단 말이야!”
비통한 외침이 굉음에 묻혔다.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하중이 배가 되었다. 신체 곳곳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밀려들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의식이 까무룩 멀어져 갔다. 어둠이 밀려들었다.
“헛!”
놀라 깨어난 무쌍은 다시 눈을 감았다. 석탄 더미에 매몰될 때 마지막 의식에 남은 기억은 어머니였다. 죽음의 공포보다 어머니가 더 간절했다.
*
혜영의 집은 2층 적산 가옥이다. 히라니와형 평지 정원의 중심은 연못이다. 손바닥 크기의 연못을 중심으로 관목과 교목을 오밀조밀하게 배치해서 심산유곡 분위기를 낸다.
밤새 흐느적거리던 늦가을 비가 새벽녘에 멈추었다. 쨍한 햇볕과 소슬한 바람이 젖은 정원을 순식간에 말렸다. 갑작스런 돌풍이 정원에 쌓인 낙엽을 말아 올렸다.
자욱이 떠오른 낙엽이 2층격자 창으로 우수수 날아들었다. 창가에 서 있던 남자가 창을 닫았다. 유리창에 붙은 갈색 단풍잎 한 장이 천천히 미끄러져 내렸다. 남자의 시선이 낙엽을 따라갔다. 허무와 고통만이 가득한 눈빛이다.
“떠나야지. 사랑하는 여자의 댓돌은 못될망정 신발 속 돌멩이가 될 수야 없지.”
한숨 같은 독백에 무거운 회한이 얹혔다. 창문옆 고풍스런 테이블 위에 턴테이블이 놓여 있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LP재킷 한 장을 빼 들었다. 세서리오 에볼라의 노래와 경음악이 실린 재킷이다. 혜영은 에볼라를 좋아했고, 자신은 베사메무초를 즐겨 들었다.
무쌍은 LP판을 휙 집어던졌다. LP판 구멍이 턴테이블 돌기에 정확히 꽂혔다. 동춘 곡마단의 곡예사도 힘든 묘기다. 카트리지 암이 스르르 움직여 바늘이 첫 번째 트랙에 얹혔다.
깨 땡고 미에도 아 빠르데르뗴(당신을 잃을까 두려워요)
뻬르데르뗴 데스뿌에스(앞으로도 두려워요)
끼에로 페네르떼 무이 세르까(아주 가까이 당신을 갖고 싶어요)
애절한 가사가 에볼라의 풍성한 목소리에 실려 가슴을 두드렸다.
“아아, 혜영!”
부지불식간에 부르지 않으리라 했던 그 이름이 입술 틈을 비집고 새나왔다. 비진도 허름한 민박집에서 보낸 마지막 밤이 가슴을 축축이 적셨다.
문창호로 투사되는 달빛에 하얀 나신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넋을 잃고 빛나는 여체를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험하게 시달렸기에 씻을 생각도 못하고 잠들어 버렸을까!
사랑스럽다. 땀 젖은 머리카락 몇 오라기가 이마에 붙었다. 그 조차도 사랑스럽다. 무쌍은 도둑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나갔다. 처마 밑에 놓인 물 확을 번쩍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동솥 아궁이에 깔비로 불을 살리고 물을 몇 바가지 퍼 넣었다.
피피- 물이 끓어올랐다. 놋대야에 뜨거운 물을 퍼 담아 방안에 들어왔다. 수건을 적셔서 광란의 흔적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죽은 듯 잠든 혜영은 가는 코까지 골았다.
짠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처럼 깊게 잠들었을까. 사지를 닦아내고, 젖가슴을 닦아내고, 마지막으로 허벅지와 둔덕의 난잡한 흔적을 닦아내도 혜영은 깨어 날 줄 몰랐다. 놋대야의 물을 다섯 번이나 바꾸고서야 힘든 작업이 끝났다.
밤을 새웠지만 여전히 힘이 펄펄 남아돌았다. 변이를 이룬 신체는 밤새 사랑을 나눠도 지칠 줄을 몰랐다. 아니 펄펄 끓어올랐다. 새삼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고샅을 달려 내려가서 마을 뒤쪽 절벽으로 올라갔다.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바다로 뛰어 내렸다.
동지섣달이다. 바닷물은 심장마비가 걸릴 정도로 차가웠다. 심장마비는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다. 이미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육체다. 불을 끄는 데는 역시 물이다. 달아올랐던 열기가 피시식 식었다.
혜영은 점심나절이 가까워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문창호를 통해 쏟아져 들어온 햇빛이 굴속 같던 방을 환히 밝혔다.
“아!”
놀라서 몸을 일으키던 혜영이 낮은 비명을 질렀다. 억센 팔뚝이 허리를 휘감았다. 남자의 향기가 그녀의 몸을 가득 채웠다. 넓은 가슴에 안겨 살 내음에 취하는 것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털 한 개조차 양보 할 수 없는 그녀만의 남자다. 두툼한 손이 엉덩이를 더듬었다.
“깼어?”
“응, 방금.”
잠기가 가시지 않은 남자가 웅얼거렸다.
“몰라, 짐승! 일곱 번도 넘었어.”
“그랬어? 욕을 먹어도 싸네.”
“어휴, 짐승과 살아갈 생각을 하니까 눈앞이 캄캄해.”
하얗게 눈을 흘기는 여자와 듬뿍 미소를 지은 남자.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맹세한 단 한 명의 여자, 혜영이다.
*
“크크크, 스고이(대단해) 스고이! 이제야 제대로 된 물건을 건졌어. 카카카.”
최도식! 뇌속에 깊숙이 공포로 새겨진 존재다. 사악한 웃음소리에 잠들어 있던 무쌍도 꿈틀했다.
“Are you sick? Would you like an airsickness bag?”
낯선 언어가 고막을 두드렸다. 무쌍은 눈을 번쩍 떴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뇌가 연산을 못하고 버벅 거렸다. 스튜어디스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 컵을 내밀었다.
“Thank you, Can I have a wet towel.”
스튜어디스에게 물수건을 받아서 식은땀을 닦아냈다. 방태산 흑담을 울리던 최도식, 일본명 사이 도지쿠의 음산한 웃음, 악연의 시작이었다.
“Where are we now?”
“Arrive in Singapore soon.”
옆자리의 노부인이 스튜어디스를 불렀다.
“쀠-즈 셩제 드 쁠라쓰?(Puis-je changer de place? 자리를 바꿀 수 있나요?) 불어를 모르지만 눈치만 보아도 좌석을 바꿔 달라는 주문이다. 무쌍은 쓴 웃음을 지었다. 살짝 맛이 간 건장한 남자가 겁이 나기도 할 것이다.
스튜어디스가 고개를 젓고 노부인을 달랬다. 낙담한 노부인이 무쌍의 눈치를 살폈다. 무쌍은 물 한 컵을 마시고 다시 눈을 감았다. 아직도 환승 공항인 싱가포르에 도착하지 못했다. 파리에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다. 싱가포르에서 환승해서 다시 14시간을 비행해야 한다. 역시 세계는 넓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인생을 흔들어 버린 최도식, 영원히 함께 하리라 했던 여인과의 별리가 그토록 영혼 깊숙이 트라우마로 새겨졌던가!
‘이것도 세혼술의 부작용인가!’
한때는 잃어버렸던 기억들이 꿈속에까지 생생히 살아서 따라다닌다. 이젠 지겹지도 않다. 그냥 일상이다.
옹색한 기내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날이 어둑해졌다. 홀로 계시는 사부님이 공양이나 제대로 챙겨 드실지 마음이 불안해졌다. 명아주 지팡이만큼이나 짱짱한 분이지만 팔순을 넘긴 연세다.
*
싱가포르에 도착한지 세 시간 후, 무쌍은 에어 프랑스에 몸을 실었다. 환승 비행기도 나르는 관 짝이라 불리는 DC-10이다. 육체는 피로를 모르지만 정신이 피로를 호소했다. 스튜어디스에게 드링크를 요청했다.
“키가 자신만큼이나 큰 늘씬한 스튜어디스가 연한 녹색 와인 병을 들고 왔다.
“씨아까렐로!”
“예스, 씨아까렐로!”
촌놈 무쌍은 씨아까렐로가 마시라는 뜻의 불어인줄 알았다. 나중에야 와인 이름인줄 알고 쓴 웃음을 지었다. 두 홉짜리 와인을 병나발 불고 잠을 청했다. 평생 즐기게 된 씨아까렐로와 첫 만남이다. 다시 눈을 감았다.
기즈 박사는 걱정 말고 받아들이라고 했다. 재인 과정을 거쳐 손상된 기억이 제자리를 찾는 과정이라고 했다. 주입된 의기억이 잠잠해진 것만도 스승님의 은덕이다.
*
짝짝- 최도식이 박수를 쳤다. 적면이 자신을 번쩍 들고 통나무집으로 들어갔다. 철제 침대에 눕히고 최도식이 몸 이곳저곳을 손가락으로 건드리고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컥 컥”
건드릴 때마다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최도식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별로 고장 난 곳이 없군. 이해할 수 없도록 단단해. 이 정도면 뼈가 아카이카오보다 두 배는 더 단단해. 이런 재료가 있다니 이해가 안 돼. 가슴뼈와 왼팔 뼈가 금갔고, 오른쪽 어깨는 탈골. 갈비뼈 네 대가 금갔군. 내상이 있지만 내출혈은 별로야, 정강이뼈가 부러졌구먼. 이곳저곳 근육 손상이 있지만 별로 망가지지 않았어.”
최도식은 우시장에서 소를 살펴보듯이 살벌한 진단을 무덤덤하게 내렸다.
‘망할 새끼야, 이게 별로면 진짜는 도대체 머꼬!’
무쌍은 절규했다. 병 주고 약주는 놈의 행태에 진정머리가 났다. 병원에 가면 중환자 수술실로 직행할 몸이다.
“시술하기엔 아주 적당해.”
적면이 만신창이가 된 몸을 베드에 결박했다. 무쌍은 절망했다. 처음 침을 놓을 때도 이렇게 묶어 놓지 않았다. 이번엔 고통의 강도가 훨씬 높을 것이란 예고에 다름 아니다.
최도식이 침통에서 다섯 치에 가까운 은색 침을 빼어 들었다. 무쌍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침만 봐도 가슴이 쿵 떨어지고 몸이 떨렸다.
무쌍이 놀라거나 말거나 최도식은 장침을 옥침혈에 서서히 밀어 넣었다. 옥침혈은 족태양방광경에 속한 혈자리로 뇌호혈에서 좌우로 일촌 떨어진 곳이다.
“끄으으”
무쌍은 머릿속이 하얗게 백열되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경험 해 보지 못한 엄청난 통증이다. 몸부림을 치자 베드에 결박된 벨트가 찢어지기 시작했다.
흘끔 쳐다본 최도식이 일곱 번째 척추 부근에 침을 꽂았다. 몸부림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머리만 빼고 상하체가 마비되었다.
최도식은 비슷한 크기의 침을 상성혈과 뇌호혈에 박았다. 그는 극도로 신중하게 시침했다. 침 하나를 박는데 5분이 걸렸다. 침이 한 개씩 천천히 박힐 때마다 고통이 배증되었다.
정신은 말짱하고 몸이 움직여 지지 않자 정신이 받는 충격은 더욱 커졌다. 다섯 번째 장침이 백회혈을 파고들자 정신이 아득히 멀어졌다. 코에서 피가 줄줄 쏟아졌다. 그렇게 다섯 대의 침이 혈을 찾아 들어갔다.
무쌍은 소금물에 며칠 담근 김장 배추 꼴이 되었다. 적면 3호가 머리를 들어 올려 약물을 먹였다. 의식이 비몽사몽 오락가락했다.
“너는 내 종이고 제자다. 나 최도식은 네 아버지다. 너는 나 아버지 백백 교주를 영원히 존경하고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
같은 말이 계속 거듭되었다. 묘하게 그 말이 머릿속에 콕콕 틀어 박혔다.
적면이 무쌍을 번쩍 들어다 푸르죽죽한 약물에 푹 담갔다. 그리고 10일간의 회복기를 거쳤다. 신체가 회복되자 적면에게 경동맥을 얻어맞고 기절했다. 다시 동굴로 옮겨졌다.
무쌍은 어둠속에서 이빨을 갈았다. 머릿속에 박히는 침이 생각나자 부르르 떨렸다. 온몸의 신경이 뽑혀 나가는 듯, 작은 바늘이 몸속에 돌아다니는 듯 한 고통은 생각만으로 오금이 저렸다.
증오심이 불타올랐다. 교주 놈의 살을 씹고 피를 마시고 싶었다.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 질질 끌고 다니고 싶었다.
“최도식, 개 같은 놈, 반드시 네놈을 때려 죽이겠다아.”
처절한 고함이 동굴을 울렸다. 무쌍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
크르르르-
굵은 울림통을 통과한 묵직한 저주파음 하울링이다. 짐승의 노린내가 확 풍겨 왔다.
“헉!”
무쌍은 기가 막혔다. 불길한 예감은 너무 잘 맞아 탈이다.
“이런 씨파 말이 씨가 되었구마. 씨잘데기 없는 소리 하마 안 된다 카이. 제삿날 받아 놓게 생깄구마.”
노린내가 퍼지며 발걸음 소리도 없이 살기가 밀려들었다.
캬우우욱- 어둠속에서 짐승이 포효했다.
“뎀벼 새꺄!”
무쌍도 고함을 질렀다. 적면 놈이 뿌리고 간 피의 의미가 확실해졌다. 저놈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피 냄새를 맡은 놈이 광분하기 시작했다. 소리 없는 발걸음과 울음소리로 볼 때 고양잇과 동물이다. 호랑이나 사자 같은 대형 종은 아니다.
“최도식! 이 빌어먹을 새끼야아”
캬오오오!
절규에 짐승의 울부짖음이 답했다. 무쌍은 맹수의 울부짖음에 현실을 인식했다. 잔뜩 화가 난 짐승의 한 끼 식사로 전락할 처지다.
‘설마, 표범?’
전투태세에 들어가자 짐승의 크기가 감각에 잡혔다. 암흑 동굴 속에서 지네를 잡아먹으며 습득된 감각이다. 보이지 않아도 명암과 크기를 알 수 있다.
‘표범, 퓨마, 재규어?’
B급 고양잇과 맹수 리스트가 주르륵 흘러갔다. 짐승이 내뿜는 살기가 예민한 감각에 오롯이 잡혔다. 피부가 짜릿하고 솜털이 곤두섰다. 아드레날린이 대량으로 분비되었다. 피가 끓어올랐다. 미려골에서 시작된 소름이 척추를 타고 정수리까지 자르르 흘렀다.
한편으로 오기와 뜨거운 생존 본능이 눈을 떴다. 살려고 방태산에 왔지 죽으려고 오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온 삶인데, 얼마나 치열하게 지켜 온 나날인데 짐승 따위에게 목숨을 내 놓는단 말인가. 억울해서라도 못 죽는다.
“으아아, 뎀벼 새꺄.”
짐승을 압도하는 포효가 터져 나왔다. 살의와 투지가 원초적인 두려움을 밀어냈다. 적대적인 생명체를 말살하겠다는 강력한 투기가 짐승을 압박했다. 야만의 유전자 파란트로푸스의 발현이다. 꿈속에서 겨룬 고대 맹수와 비교하면 호랑이도 별게 아니다.
흉폭한 기세에 짐승도 쉽사리 달려들지 못했다. 죽거나 죽여야 하는 생명의 부딪힘이다. 순수한 살의와 살의의 대립이다. 생존 욕구 외에 어떠한 욕망도 자리할 틈이 없다. 짐승과 인간은 서로가 만만치 않음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짐승은 좌우로 움직이고 인간은 꼼짝도 하지 않고 짐승을 노려보았다. 사람의 영역과 짐승의 영역이 절로 나누어졌다. 지루한 대치 시간이 흘러갔다.
짐승의 흉포한 살의가 인내를 넘어서는 순간, 놈이 소리 없이 도약했다. 피냄새의 유혹을 이기기엔 굶주린 맹수의 살육 본능이 너무 강했다.
무쌍은 놈의 표적이 자신의 목임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자세를 낮추며 오른 주먹이 짐승의 얼굴을 노리고 포탄처럼 뻗었다. 놈은 영악했다. 머리를 틀어 주먹을 피하며 앞발이 섬광처럼 볼을 긁어내렸다.
“으윽”
얼굴을 틀어 내려치는 앞발을 피했지만 조금 늦었다. 칼날 같은 발톱이 왼쪽 뺨과 쇄골 부위에 피고랑을 만들었다. 옷과 피부를 길게 찢어발긴 짐승이 소리도 없이 착지했다.
크르르르- 깊게 울려 나오는 중저음이 동굴을 울렸다. 첫 판에 피를 본 무쌍의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걷잡을 수 없는 살의가 고통을 잊게 만들었다. 야만의 폭주다.
“크아아”
괴성이 동굴을 울렸다. 두려움의 찌꺼기가 증발했다. 짐승의 뼈를 부러뜨리고, 살을 찢고 싶은 본능만이 남았다.
어차피 빛 한 점 없는 동굴이다. 안 보이기는 표범이나 자신이나 마찬가지다. 양쪽 다 시각을 제한당한 상태에서 나머지 감각으로 상대를 포착하고 싸워야 한다.
어둠의 포식자인 표범은 말 할 것도 없고, 무쌍 역시 어둠에 별로 구애받지 않는다. 전투 본능이 눈을 떴다. 육참골단(肉斬骨斷)이다. 놈이 공격할 때 살을 주고 뼈를 꺾어야 놈의 스피드를 잡을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좌측 45도 방향, 열 걸음 앞이다. 도약하기 위해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다. 한 발을 내딛는다. 곧 도약한다. 짐승의 움직임이 생생히 느껴졌다. 지네를 잡아먹으며 얻은 감각이다. 적면들과 개싸움을 벌이며 얻은 능력이다.
고정됐던 동굴 속 공기가 움직였다. 아니, 어둠이 출렁거렸다. 짐승이 십여 미터를 단번에 줄였다. 도약한 짐승의 쩍 벌린 아가리가 목을 물어 왔다. 놈에게 왼쪽 어깨를 내 주고, 오른쪽 주먹으로 놈의 복부를 후려쳤다.
“크윽”
캬오옹-
이번에는 그리 늦지 않았다. 차츰 타이밍을 맞아 들어갔다. 놈의 이빨이 어깨뼈를 파고들기 전에 옆구리 콩팥어림을 가격했다. 놈이 물었던 어깨를 놓고 떨어져 나갔다.
“고네이 새끼가 감히!”
생각 이상으로 놈의 순발력이 좋았다. 주먹에 얹힌 무게감이 얕았다. 짐승이 허깨비처럼 빠지는 바람에 치명상을 주지 못했다.
뼈와 힘줄 손상은 피했지만 면도날 같은 이빨이 어깨 근육을 한 뭉텅이 뜯어내 갔다. 앞가슴도 발톱이 헤집었다. 격통이 척수를 치달려 머릿속을 휘저었다.
손가락 끝에 티끌만한 가시가 박혀도 괴롭다. 뼈가 드러날 만큼 근육이 뜯겼으니 그 고통이 오죽하겠는가! 코끝에 본인의 피비린내가 물씬 닥쳤다.
둥둥- 피 흐름이 더욱 빨라졌다. 눈앞이 붉어지며 투기가 치솟았다. 저까짓 고네이 새끼 조금도 두렵지 않다. 예전 꿈속에서 상대했던 괴수들이 생각났다. 표범은 맹수 축에 들지도 못한다. 꿈속에서 찢어진 복부에서 밀려 나온 창자를 움켜쥐고 싸웠다. 먹느냐 먹히느냐, 투기가 맹렬히 솟아올랐다.
무거워진 짐승의 움직임이 감각에 잡혔다. 콩팥이 위치한 옆구리에 한 주먹 안겼다. 네발짐승의 급소다. 놈은 가볍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크르르르- 상처 입은 인간과 맹수는 다시 살의를 불태웠다. 이번에도 굶주린 짐승이 먼저 달려들었다.
캬우우-
“죽어라!”
일인 일수는 물고, 때리고, 잡아채고, 뒹구는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 놈의 송곳니와 발톱을 피하려다 보니 결정적인 한 방을 넣을 수 없었다.
칼날 같은 발톱이 인간의 전신을 헤집었다. 인간의 손발이 짐승의 몸을 두드렸다. 태고의 종유 동굴이 피비린내와 살기, 짐승의 포효와 인간의 고함으로 가득 찼다.
내려치는 앞발을 감각만으로 피했다. 몸이 뒤로 젖혀지며 솟아 오른 발에 짐승의 턱이 덜컥 걸렸다.
캬옹- 제대로 얻어맞은 짐승이 비명을 지르고 후퇴했다. 놈이 머리를 절절 흔들었다.
“고네이 새끼, 맛이 어떠노.”
무쌍은 의기양양해서 소리쳤다. 일인 일수는 다시 간격을 벌리고 탐색에 들어갔다. 인간도 지치고 짐승도 지쳤다. 짐승이 내쉬는 숨이 급박했다.
짐승은 내상을 입었고, 인간은 외상을 입었다. 실혈이 늘어나자 현기증이 찾아왔다. 짐승의 위치가 제대로 감지되지 않았다. 바깥이라면 눈앞이 흐릿해졌을 것이다.
무쌍은 조급해졌다. 시간은 자신의 편이 아니다. 표범 역시 조급했다. 허기와 피비린내가 흉성을 끊임없이 자극했지만 먹이가 만만치 않았다. 짐승의 살기가 폭발했다.
표범의 통상 몸무게는 50kg~100kg이다. 150kg짜리가 보고된 사례도 있다지만 그런 대물은 특별한 경우다. 150kg이면 거의 호랑이급이다. 감각에 잡힌 크기로 보아 놈의 중량은 대략 80kg, 자신의 몸무게가 70kg이다. 중량과 힘에서 밀릴 이유가 없다. 물론 표범은 60kg짜리 사슴을 물고 나무에 뛰어 오를 만큼 힘이 좋다. 힘이라면 자신 있다. 놈의 스피드가 부담스러울 뿐이다.
위험하지만 놈을 유인해서 끝장내기로 마음먹었다. 무쌍은 한차례 비틀하고는 픽 쓰러졌다. 잔뜩 노리던 짐승이 지체 없이 목줄을 끊으려고 달려들었다.
“짜식아, 그래서 니가 짐승인기라.”
무쌍은 놈의 아가리에 다친 왼쪽 어깨를 밀어 넣었다. 놈이 기다렸다는 듯이 어깨를 덥석 물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짐승의 허리를 양팔로 틀어잡고 몸을 밀착시켰다.
끄아앙-
놀란 짐승이 만만찮은 인간을 털어 내려고 몸부림쳤다. 힘이라면 자신이 우위다. 어깨로 짐승의 두터운 목을 밀어 올리며 허리를 잡아 당겼다.
허리가 반대로 꺾이는 고통에 짐승이 발톱으로 등을 긁어 댔다. 칼날 같은 발톱에 등에 너덜너덜해졌다.
“끄아악!”
무쌍은 자신도 모르게 성대가 찢어지도록 비명을 질렀다. 불타는 숯을 등에 들이 붓는 것 같은 통증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죽어랏”
고함소리에 동굴이 드르렁 울렸다. 무쌍은 짐승에게 바짝 붙었다. 두 다리로 짐승의 허리를 감고 두 팔로 목을 감았다. 그 자세에서 황소처럼 짐승의 목을 밀어젖혔다.
이 기술은 네이키드 초크란 그라운드 기술이다. 원래는 목을 죄어서 뇌 혈류를 막아 기절시키는 기술이다. 강력한 무쌍의 힘은 경동맥만이 아니라 목뼈 자체를 부러뜨렸다.
뚜뚝- 캬오오-
지렛대에 끼인 짐승의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짐승이 째지는 비명을 질렀다.
“죽어라아!”
무쌍은 흐릿해지는 눈을 부릅뜨고 마지막 힘을 몰아서 밀어붙였다.
뚝-
목이 뚝 부러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짐승의 몸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목을 죄던 팔을 풀고 짐승의 정수리를 주먹으로 힘껏 내리쳤다. 단단한 종유석을 부수던 돌주먹이다.
쩍-
두개골이 파열되는 느낌이 감각에 잡혔다.
캬웅-
살기어린 포효가 아니라 단말마의 비명이다.
짐승의 변 냄새가 코에 확 들어왔다. 짐승의 머리가 툭 떨어졌다.
“크아아악!”
그는 괴성을 지르며 짐승을 번쩍 들어서 바닥에 내 팽개쳤다. 맹수와 맹수 같은 인간의 울부짖음으로 가득 찼던 동굴에 일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인간도 바닥에 털썩 널브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