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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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장 몰락의 전조6
패션은 가처분 소득의 증가와 궤를 같이한다. 70년대 들어 산업화 바람을 탄 한국인의 가처분 소득은 급격히 높아졌다. 의복이 생필품 수준을 벗어나 패션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의류시장이 폭발했다.
향심섬유가 생산하는 폴리에스터 면 혼방과 코듀로이(골덴)는 없어서 못 파는 품목이다. 서문 시장의 도매상들이 물량을 받으려고 새벽부터 공장 정문에 대기했다.
장 씨는 회사가 커질수록 불같은 욕심이 일었다. 향심운수를 설립할 때 친정 자금이 반 이상 들어갔다. 남편은 여객 사업으로 떼 돈을 벌어서 섬유회사를 만들었다. 따지고 보면 향심섬유는 박 씨 회사가 아니라 장씨 회사다. 장씨의 셈법은 그랬다.
“잘됐네요. 일단 이 변호사님이 전환사채 발행을 밀어붙이세요. 우리 집안에서 전량 소화하겠어요. 물론 몇 사람 명의를 빌릴 거니까 명의신탁 문제는 잘 처리해 주시고요.”
“염려 탁 놓으시소. 박 사장도 이미 CB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어요.”
이 변호사의 장담에 장씨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도 명색이 임원이다. 시설 확장이 시급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회사가 워낙 빠르게 성장하는 바람에 유동자금이 부족해졌다. 제3공장 건설 자금은 외부자금을 끌어올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쪼잔한 난쟁이 똥자루 영감은 지분하락과 이자 부담을 저울질하느라 머리털이 빠지도록 고민해왔다.
‘흥, 영감탱이가 이제와가꼬 천한 것을 불러들이서 밥술이라도 멕일라 카는 모양인데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어림 턱도 없어.’
장씨가 얄팍한 입술을 앙다물었다. 남편은 무쌍이 가출한 후부터 사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시동생을 그리워하고, 조카에게 못 할 짓을 했다고 가슴을 치기도 했다.
장씨는 기가 막혔다. 도대체 뭘 잘못했단 말인가? 배은망덕한 놈은 무쌍이다. 짐승도 재워주고 밥을 주는 주인은 알아본다. 오 년이나 거두어 주었으면 은혜를 뼈에 새겨야 한다. 배은망덕한 놈이 악담을 퍼붓고 가출했다.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위치가 있다. 천출로 태어났으면 고개숙이고 빌붙어 살아가면 된다.
백모에게 눈을 부릅뜨고 대들다니 못 배워먹은 천한 근본은 어디 가지 않았다. 그놈이 가출하는 바람에 동네 사람들에게 얻어먹은 욕이 한 바지게다. 생각만 해도 울화가 치솟았다.
회사가 커지자 남편의 간덩이도 커졌다. 예전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경영 문제로 다툼을 벌인지 오래다. 향심여객과 향심섬유에 친정집 식구를 떨굴 때마다 신경전이 벌어졌다.
며칠 전 남편이 앞으로 일체의 정실 채용을 배제하고 공개 채용을 원칙으로 하겠다고 했다. 사업 자금을 대준 처가를 배신하는 처사다. 아내의 입장은 생각도 않는 몰인정한 인간이다. 취직을 부탁하는 일가붙이들은 어쩌란 말인가. 짭짤하게 챙겨온 뒷돈은 어쩌라고?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은 양반이 웬 욕심을 그렇게 부리는지. 회사를 물려줄 생각도 않는다. 장씨가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부분이다.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말은 불변의 진리다. 자신만 해도 장씨가의 딸이지 박씨가 사람이 아니다. 남편도 마찬가지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문제는 아들놈이다. 우탁은 회사 일을 배울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다. 오토바이 타는 불한당들과 어울려 놀기 바쁘다.
우탁이 다음엔 무쌍이다. 팔촌 이내의 친족을 뒤져봐야 인물도 없고 남편과 사이좋은 친척도 없다. 무쌍이는 인물도 좋고 똑똑하다. 아무리 밟아도 일어서는 끈질긴 기질을 가진 놈이다. 국민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집을 떠나서 혼자 공부한 놈이다. 그것도 전교 수석을 하면서 말이다. 아무리 후하게 평가해도 우탁이는 무쌍이 놈의 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한다. 남편이 무쌍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확신할 건더기는 없다. 지난날을 후회하는 남편의 태도에서 예민한 촉이 경보를 발했을 뿐이다.
무쌍을 파렴치범으로 몰아넣은 이유가 바로 훗날을 대비하는 심모원려다. 자라나는 싹은 잘라버려야 후환이 없다. 부관참시 영겁속박도 그 연장선이다. 어쨌든 이번 기회는 향심섬유를 가문의 젖줄로 만들 절호의 기회다.
장씨가 생각에 잠겨있자 이 변호사가 엉덩이를 들었다.
“그럼 일어나겠습니다. 내일쯤에서 박 사장을 만나보지요.”
“고마워요. 기름값으로 한 장만 넣었어요.”
장 여사가 핸드백에서 봉투를 꺼냈다.
“이런,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과 달리 이 변호사는 장씨가 내미는 봉투를 당연한 듯 받아서 양복 안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쏠쏠한 부수입도 오늘로 마지막이다.
“일본말에 ‘가타즈케루’라는 말이 있어요.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변호사가 쐐기를 박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다음 주에 회나 한 접시 해요. 수성못 안쪽에 달빛선장이란 횟집이 잘해요.”
“그라지요. 컴페니언(companion, 동지)은 빵을 함께 먹는 사이를 뜻하거든요.”
“호호호, 이 변호사님은 역시 베스트맨(best man)이에요.”
“사모님은 최고의 여장부입니다. 그럼 이만.”
돌아선 이 변호사의 입꼬리에 비웃음이 매달렸다. 육중한 대문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멍청한 여자 같으니, 베스트맨의 뜻이나 알고 말하는 거여? 베스트맨은 신랑의 들러리라고. 약탈혼 시대에 신부 측의 공격을 막는 들러리 말이야. 어, 그러고 보니 내가 베스트맨이네.”
이로써 장 여사와 갈라섰다. 사 년 전 박무쌍 강간치상 사건 때 검찰에 돈을 뿌린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다. 장 여사의 부탁을 받아 박무쌍이 경찰에 체포된 때부터 개입했다. 돈 받고 한 일이지만 내내 찝찝했던 사건이다.
경찰서 취조실에 끌려가면 별을 서너 개 붙인 놈도 주눅이 든다. 박무쌍은 형사가 눈을 부릅뜨고 으르딱딱 거려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야경봉으로 구타를 당해도 태연히 자신이 할 말을 다했다. 번쩍이는 눈빛, 꼿꼿한 자세, 조리 있는 답변, 박무쌍은 물건이었다.
그는 박 사장이 언급한 조카가 박무쌍이라는 사실을 알고 식겁했다.
‘장치수, 당신 이름과 얼굴은 기억해 두었다. 오늘 일을 후회하게 해주지.’
검찰에 송치될 때 입꼬리를 삐죽이 올리며 내뱉던 말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했다.
“세상일은 한 치 앞을 모른다더니 그놈이 박 사장 조카일 줄이야. 무덤 속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이 생겼구먼. 허허허!”
이 변호사는 웃음이 실실 나왔다. 자신이 박무쌍 사건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박 사장이 알면 입장이 곤란해진다. 과거 몇 년간 박 사장과 장씨 사이에서 적당히 줄타기하며 실리를 챙겼다. 박사장이 박무쌍이라는 강력한 후계자를 준비하는 순간 마음이 싹 바뀌었다.
변호사는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다루는 직업이다. 그는 박무쌍을 보는 순간 절대로 대척점에 서서는 안 될 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 변호사는 시류에 따라 배신하고, 적당히 이득을 챙기고, 적당히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다. 제법 지위 있고, 방귀깨나 뀌고 사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인간형이다.
“오호호홋!”
텅 빈 거실에 하이에나 울음소리 비슷한 소리가 울렸다. 세로토닌이 과다분비된 장씨는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남편 몰래 고문 변호사를 치마폭에 넣은 효과는 컸다. 고급 정보가 술술 들어왔다. 이젠 곧 남편을 끌어내리고 향심섬유를 손에 쥐게 된다. 박 씨의 회사가 아닌 장씨의 회사가 된다. 기뻐하는 친정아버지의 얼굴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인동 장씨 가문은 조선 시대 중기부터 누대를 내려온 양반 가문이다. 장씨 가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인동에 들어설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장씨의 친정은 인동 장씨 종가다. 종가의 논만 8,000마지기다. 전근대 사회에서 토지는 권력이다. 장씨의 친정아버지 장경주 옹은 지역의 제왕으로 군림했다.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세상이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했다. 공장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부의 기준이 달라졌다. 지주가 행세하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장씨 종가의 연 소출은 25,000석이다. 소작농과 칠삼제를 하므로 7,500 석이 들어온다. 수매가로 이억오천만원 남짓이다. 보리와 밭작물을 합해봐야 사억에 미치지 못한다. 향심섬유의 년 매출은 200억이다. 게임이 되지 않았다.
난쟁이 똥자루 남편은 탁월한 선택을 했고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덕분에 가문의 계륵이었던 장씨는 공주 대접을 받았다. 처녀 적에 머슴과 응응응을 하는 바람에 옹조지한 박인보에게 내던져지듯 시집온 그녀로서는 상전벽해다.
가문에서 제 목소리를 내게 된 그녀는 욕심을 부렸다. 자신의 힘으로 장씨 가문을 환골탈태할 꿈에 부풀었다. 전근대적인 대지주를 벗어나 대기업을 경영하는 가문으로 우뚝 서는 꿈이다.
모략과 함정을 파고, 약점을 잡아 사람을 부리는 능력은 장씨가 박인보에 비해 한 수 위다. 노자는 상사(上士) 무쟁(無爭), 하사(下士) 호쟁(好爭), 상덕(上德) 부덕(不德), 하덕(下德) 집덕(執德)이라 했다.
꾀를 부리고 수단을 잘 쓴다고 해서 항상 이익을 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큰 이익은 베풂으로써 얻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다. 장씨는 모략과 돈이 당장은 효과를 발휘하지만, 더 큰 모략 앞에서 한순간에 녹아 버린다는 사실을 몰랐다.
1984년 12월 초순, 입시날은 예외 없이 한파가 몰아쳤다. 윤이 번들거리는 외제 차가 교문 앞에 멈추었다. 시커먼 레이벤을 쓴 쭉 빠진 몸매의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매서운 추위에 불구하고 검정 슈트와 바지를 입은 단출한 차림새다. 교문 앞에 몰려있던 사람들의 눈길이 일제히 남자를 향했다.
무쌍은 심사가 묘했다. 오 년 만에 먼 길을 돌아서 와야 할 자리에 돌아왔다.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닌듯한 위화감이 들었다. 대학이 사회적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발판이라면 자신에겐 별 의미가 없다.
못다 한 공부를 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프랑스의 그랑제콜로 들어갈 수 있음에도 한국의 대학을 택한 이유는 자신도 명확히 설명하기 힘들었다. 구태여 설명하라면 향수다.
“와, 옵빠!”
말만 한 처녀 다섯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으잉, 니들이 웬일이고?”
무쌍의 눈이 잔뜩 커졌다. 하동댁 오 자매가 몽땅 몰려왔다.
“오빠, 너무해! 어쩜 그럴 수 있어?”
연순이 눈을 하얗게 흘겼다.
“그럼, 오빠 나빠”
“오빠는 거짓말쟁이!”
처녀 다섯이 떠들어대자 정신이 쑥 빠졌다. 뒤쪽에 그림처럼 서 있는 진순을 바라보았다. 우는 듯 웃는 듯 묘한 표정이다.
또각- 또각- 진순이 바람에 날리는 주름치마를 모아쥐고 다가섰다. 성숙한 여자의 향기가 훅 끼쳤다.
‘점마 저거, 이자 다 컸삐맀구마!’
쭉 빠진 몸매에 볼륨감이 장난이 아니다. 빵빵한 가슴은 에델을 능가했다. 짚은다리에서 혀를 빼물고 리어카를 끌던 진순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조용!”
큰 언니의 한마디에 자매 넷의 입이 조개처럼 다물어졌다.
“오빠, 일한다꼬 공부를 제대로 못 했제?”
섬뜩할 정도로 차분한 모습이다. 무쌍은 뒤가 켕겼다. 시험 끝나면 단단히 따지겠다는 투로 들렸다.
“시험이야 평소 실력으로 보는 거지. 하하하!”
무쌍이 공허한 웃음을 흘렸다. 막바지에 입시 준비는커녕 아수라장을 굴렀다. 마무리는 고사하고 제대로 훑어보지도 못한 과목도 있다.
“전교 수석의 실력이 어디 가겠노. 편안하이 풀어라. OMR 카드 작대기 긋는 연습도 안 했제? 단디 신경 써야 한데이. 사인펜은 준비했나?”
“엉, 하나 사면 되지 뭐.”
준비를 못 한 무쌍이 버벅거렸다.
진순이 사인펜 세 자루를 핸드백에서 꺼내서 슈트 포켓에 꽂았다.
“덜렁거리지 말고 잘해.”
역시 똑소리 나는 진순이다.
‘예 예, 그라지요. 근데 어떻게 알았노?”
“어제 스님 할부지 전화받은 기라.”
“아이구, 노친네 오지랖은~”
“됐고, 오빠 파이팅!”
진순이 등짝을 짝 소리 나도록 때렸다.
“오빠, 파이팅!”
네 자매가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었다.
“내 원 참!”
민망해진 무쌍이 슬그머니 주위를 돌아보았다. 수백 쌍의 부러운 눈길이 집중되어있다.
“에휴, 이 나이에 대입 시험이라니! OMR 카드 실수하마 안 되는데.”
무쌍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고사장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오 자매가 연신 파이팅을 외쳤다. 무쌍은 쫓기듯이 시험장으로 들어섰다. 전장의 악몽 블랙맘바, 죽음의 천사 아즈라일도 학력고사장에서는 OMR 카드 기재를 걱정하는 수험생에 불과했다. 한국의 입시는 역시 대단했다.
동성로 향심섬유 사장실, 박인보가 전화기를 들었다. 평소와 달리 차분히 다이얼을 돌렸다. 손 떨림도 멎고 얼굴 피부도 들떠 지 않았다. 밤새 숙면을 방해하던 기침도 멎었다. 예후가 좋아 보이지만, 병근이 더욱 깊어지는 일시적인 현상이다.
“이 변호사, 잘 처리했소?”
가래낀 음성이 구리선을 타고 달려가서 상대방의 목소리를 물고 왔다.
-처리할 것도 없었어요. 미끼를 덥석 물더마요.
“욕심이 눈에 찌짐 붙인 거제. 고네이는 호기심에 죽고 참새는 모이로 죽는다 카디마는 그 짝 아이요. 할증 발행만 이야기하고 전환가는 이야기 안 했지요?”
-전환가야 어차피 변동된다 아입니까.
“우얄라 카던가요?”
-장씨 가문을 동원할 모양입디다.
“그래요? 마카 똥구디 들어가는 거지. 담에 자세히 이바구하고 낼 바로 이사회를 열어야겠군. 장기수가 날뛰겠구마. 흐흐흐”
-현금이 부족할 겁니다. 할증을 올리고, 이자를 낮춰주면 지화자 할 겁니다.
“조삼모사인가! 아니 조사모삼인가? 흐흐흐!”
박인보가 득의의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