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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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장 몰락의 전조10
‘그렇지. 그놈은 멋있는 놈이 되었을 거야.’
새삼 가슴이 쓰렸다. 그놈이 제대로 공부했으면 지금은 법관이 되었거나 박사가 되었을 것이다. 박 씨 가문을 빛낼 전도유망한 조카의 인생을 비틀어버린 것들이 아내와 딸년이다. 새삼 분노가 솟아올랐다.
“무신 생각을 그래 합니까?”
“으응! 머라캤노?”
박인보가 자다 깬 사람처럼 정아영을 쳐다보았다.
“깡소주 마시마 속 베린다꼬예.”
“냅둬 임마, 인간 박인보가 쇠주 몇 잔에 맛이 갈 놈이마 벌써 갔는 기라. 몸이 썩는 건 술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썩었기 때문인 기라. 속이 썩었는데 겉이 말짱할 리 있겠냐! 나는 아영이 니가 진짜로 부러운 기라.”
박인보의 말투가 처연해졌다.
“사장님, 불쌍한척하지 마이소. 99개 가진 사람이 한 개 가진 사람 부럽다 카는 거 아입니데이.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인 거 아시지예?”
“그래?”
놀란 박인보의 고개가 휙 돌아왔다. 회사 일과 장가 놈들을 조질 계획을 세우느라 오줌 누고 물건 털 정신도 없이 살았다. 자신의 생일도 기억 못 하는데 예수 생일이 무슨 대순가? 크리스마스가 그 양반의 생일이 맞는지도 의문이지만.
남편을 쫓아내고 회사를 삼키려는 아내, 처가를 박살 낼 모략을 짜는 남편,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에나 나올 집구석이다. 마음이 헛헛해서 크리스마스이브인 줄도 모르고 정아영을 불러냈다.
“닭똥집에서 할배와 쇠주를 마시며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내는 아가씨 속도 썩긴 마찬가지라예. 그 아가씨가 딱지도 안 뗀 처녀면 속이 썩어 문드러지겠지예. 히히히!”
정아영이 낄낄 웃으며 자신의 잔에 술을 채웠다. 며칠 후면 서른이 되는 노처녀의 농담 반 진담 반 푸념이다.
“짜슥이 사람 미안하게 만드는구마.”
박인보의 얼굴이 머쓱해졌다. 괜히 신세 한탄했다가 덤터기썼다. 예로부터 시집 못 간 노처녀의 한탄, 삼 년 탈상한 청상과부의 한탄, 가랑이 벌려 먹고사는 논다니의 한탄을 들어주지 않는 놈은 빌어먹는다고 했다.
“속이 썩어 문드러진 사람끼리 한잔하시지요. 잔소리쟁이 재수떼기 김 박사님은 이자뿌고예.”
“흐흐, 니가 제법 주도를 아는구마.”
“행복을 위하여!”
박인보와 정아영이 동시에 소주잔을 목구멍에 털어 넣고 진저리쳤다.
“캬아!”
“커어!”
원샷으로 털어 넣은 소주가 화끈하게 목구멍을 타고 넘었다. 이 맛에 술을 끊지 못한다. 가슴의 통증은 잊어버렸다.
“자요. 안주 드시소.”
정아영이 가장자리가 탄화된 닭똥집 한 점을 집어 석쇠에 탈탈 털어서 내밀었다.
“이야! 니가 웬일이고. 할배가 되가꼬 새파란 처자가 안주를 맥이 주는 호강을 다 누리는구마. 호강을 누리다 요강에 빠지뿌마 우야제.”
박인보는 테이블 위로 목을 길게 뽑아 닭똥집을 받아먹고 너스레를 떨었다.
“에휴, 우짜겠어요. 불쌍한 사장님을 위해 천사가 봉사해야지예.”
정아영이 배시시 웃었다. 박인보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가까이서 보니 썩 괜찮은 얼굴이다. 귀염상스런 얼굴에 잡티 없는 피부가 아기처럼 말갛다.
“험, 우리 아영이가 마이 세련됐구마. 여상을 갓 졸업하고 사무실에 앉았을 때는 콧물 찔찔이에 여드름쟁이였는데 천사가 되었어.”
“사장님 와 시빕니꺼. 숙녀한테 콧물 찔찔이가 멉니꺼!”
정아영이 눈을 흘기며 항변했다.
“임마, 사실은 숨긴다고 사라지지 않는 기라. 흐흐흐!”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낄낄 웃었다.
사업 초창기에 정아영은 고생을 바가지로 덮어썼다. 사무실에서 밤새우기 예사였다. 험한 일을 마다치 않고 고성능 모터처럼 일했다. 정아영이 없었으면 지금도 버스 몇 대 굴리는 배차 사무실에 앉아있을지도 몰랐다. 이 녀석도 자신이 죽기 전에 챙겨줘야 할 녀석이다.
정아영의 시선이 사장의 눈길을 따라갔다. 검은 어둠 외엔 아무것도 없다. 눈 내리는 창밖을 향해있는 사장의 눈이 공허했다. 사장의 심정을 알만했다. 피도 눈물도 없다는 소리를 듣는 사장이다. 실제로 피도 눈물도 없이 사업을 키웠다.
그녀가 원하는 남자는 거침없고 당당한 마초다. 그런 면에서 흔들림 없이 자신의 욕망을 안고 달려온 사장은 마초다. 남 탓하고 의존적인 남자에 비하면 욕망에 충실한 남자가 사나이답다.
“언니, 금복주!”
정아영은 술이 세다. 금복주 두어 병은 성에 차지 않는다. 술병을 받아서 오프너로 뚜껑을 날리고 자작으로 술을 따라 홀짝 털어 넣었다.
주당은 술을 홀짝이지 않는다. 술맛은 탁 털어 넣어야 제맛이다. 독한 액체가 혀를 적시고 식도를 줄줄 긁으며 내려가서 뱃속을 후끈하게 만드는 느낌이야말로 주당만의 쾌감이다. 그녀에게 대시한 사내들이 술이라도 호쾌하게 마셨으면 곁을 내줬을지도 몰랐다.
사장은 사업 감각이 뛰어났다. 장거리 노선을 버리고 중단 거리 노선에 집중했다. 뽀대나는 고속버스 노선엔 눈도 돌리지 않았다. 고속버스 한 대 살 돈이면 시외버스 두 대를 산다. 버스를 집중적으로 투입한 회전율 위주의 정책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돈이 가마니로 들어왔다. 자금을 축적한 사장은 섬유로 눈을 돌렸다. 타이밍도 좋았다. 아니 사장의 사업적 안목이 뛰어났다.
자유무역 기조와 소비재 시장을 열어준 미국의 호의에 힘입어 섬유 산업은 불같이 성장했다. 사장은 변화의 흐름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향심여객에서 벌어들인 돈은 원단 공장 매수에 투입되었다.
사장의 전략은 부채 레버리지였다. 차입금으로 회사를 인수하고 인수한 회사를 담보로 차입한 다음, 다시 차입금으로 회사를 인수했다. 고도 성장기에 부채는 지렛대 역할을 충실히 했다. 성장이 정체된 경제구조에서는 턱도 없는 일이다.
사장은 금융기관 담당자는 물론 관련 공무원에게 뇌물과 성 상납까지 해가며 섬유 공장을 사들였다. 원단 제조 공장 다섯 개를 통폐합해서 태어난 회사가 향심섬유다.
박인보는 유능한 경영자이지 도덕적인 경영자는 아니다. 아영은 전차처럼 돌진하는 사장이 좋았다. 인정에 흔들리지 않는 사장이 든든했다. 누가 뭐래도 그는 힘들때 손을 잡아준 은인이다. 가족을 지키도록 도와준 고마운 사람이다.
“사장님은 지한테 빚진 거 많지예?”
“임마, 내는 니 월급 떼먹은 적 없다. 연말 상여금도 받았는데 오늘 술값은 니가 내라.”
박인보가 빙글빙글 웃었다. 동생네를 빼면 빚진 사람은 정아영이 유일하다.
“헹, 문디 콧구멍에 든 마늘을 빼 드시소. 그때 지가 소매치기를 잡지 못했으마 사장님은 회사 설립 타이밍을 놓쳤을 끼라예. 일등 창업공신에게 닭똥집이나 사주마 안되지예.”
“임마, 그때 니가 불고기 십 인분 묵는 바람에 지갑을 탈탈 털었다 아이가. 니도 지갑에서 떨어지는 먼지 봤제?”
“말은 똑바로 하시소. 십 인분이 아이라 구인분인 기라요.”
정아영이 억울한 듯 눈을 똥그랗게 뜨고 항의했다.
“구인분 묵고 냉면 한 그릇 뚝딱 했다 아이가. 그라마 십인분이제.”
“씨이~”
말싸움에 진 정아영이 짐짓 씩씩거렸다.
정아영은 여상을 졸업한 그 해 삼월에 박인보를 만났다. 동인동 중앙공원 벤치에서 눈물 짜던 중이었다. 여상을 졸업하고 몇 군데 입사 원서를 넣었지만 오라는 곳이 없었다. 여상 출신은 회사에서 온갖 잡일을 하는 사환에 다름없다. 입사 기준도 실력이 아니라 몸매와 얼굴이다. 정아영은 번번이 취업에 실패했다.
아영(娥英), 꽃처럼 예쁘고 고상하다는 뜻이다. 이름과 달리 정아영은 150cm를 겨우 넘는 키에 60kg을 웃도는 푸진 몸매를 가졌다. 얼굴에는 화산 분화구처럼 여드름이 가득했다. 친구들이 부르는 별명이 문스킨(moon skin)이었다.
어려운 집안 형편을 생각하는 바쁜 마음과 달리 취업은 쉽지 않았다. 공원 벤치에 앉아 눈물을 찔끔거릴 때 고함이 들렸다.
“저놈 잡아라.”
고함에 놀란 정아영이 고개를 들었다. 손가방을 옆구리에 낀 십 대 소년이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달려왔다. 그 뒤를 초로의 남자가 뒤쫓았다.
‘잉 소매치기 아이가’
정아영은 앞을 지나가는 소매치기의 다리를 턱 걸었다. 소매치기답게 균형 감각이 좋았다. 엎어질 듯하다가 중심을 잡았다. 정아영이 소매치기의 양 오금을 툭툭 차서 중심을 흔들고는 허리춤을 잡아 빗당겨치기로 메다꽂았다. 오빠가 운영하는 유도 도장에 4년째 다니는 정아영이다.
쿵- “악!”
땅바닥에 어깨를 부딪친 소매치기가 비명을 질렀다.
“으악, 이 씨발년”
벌떡 일어나는 소매치기를 뒤따라온 남자가 덮쳤다.
“이 새끼, 니는 디졌어.”
두 사람이 뒤엉켰다. 소매치기의 반항도 만만치 않았다. 그 틈에 정아영이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챙겼다.
“아저씨, 내비도요.”
정아영이 남자에게 소리쳤다. 박인보가 잡고 있던 소매치기의 팔을 놔 주었다.
“씨바, 니들 연놈 다 디졌어.”
소매치기는 욕설을 남기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허, 내가 무신 짓을 했노!’
박인보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책했다. 가방만 찾으면 되었지 늙은 나이에 소매치기와 쌈박질을 할 이유가 없었다. 흉기에 찔리면 자신만 손해다.
“정말 고맙데이. 이기 얼매나 중요한 문서인데 문디 새끼가 채가고 지랄이여. 니 아이마 클 날뻔 했데이.”
“뭘요. 암것도 아인디요.”
“아이다. 나무 일에 누가 니처럼 나서 주겠노. 이거 받아라”
박인보는 별다른 생각 없이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뽑아서 내밀었다.
“아임다. 됐심다.”
정아영은 사양했다. 목구멍에서 손이 나올 지경이지만 그만한 일로 사례금을 받고 싶지 않았다. 박인보는 머쓱했다.
“그라마 우야제? 올치. 내가 밥을 사 주꾸마. 머 무까?”
마침 점심시간이다. 아침을 거른 정아영도 배가 고팠다. 그렇다고 생면부지의 남자를 얼씨구나 따라나서기도 내키지 않았다.
“야야, 니보다 몇 살 더 묵은 딸내미가 둘이나 있능 기라. 멀 찜찜하이 그카노. 퍼뜩 가자.”
박인보의 성화에 정아영은 더 이상 거절 못 하고 따라 나섰다.
“좋아하는 기 머꼬?”
“지는예 아무거나 잘 묵심다.”
“내가 봐도 그래 보인다.”
박인보가 푸짐한 몸매를 흘끔 보고 말했다.
‘자기도 난쟁이 똥자루 만하민서.’
물색없는 말에 정아영이 몰래 눈을 흘겼다.
“젤로 비싼 불고기 묵으로 가자.”
“와, 좋아요.”
정아영은 자기도 모르게 환성을 질렀다. 없는 살림에 언감생심 엄두를 못 내던 메뉴다.
“그래, 시방 취직할라 카는데 잘 안된다꼬?”
“야, 지가 인물이 이래가꼬…….”
“니 인물이 어때서, 푸짐하이 좋기만 하구마. 때려 치아 삐고 내캉 일하자.”
“무신 일예?”
“내가 운수 회사를 차리는 중인 기라. 여상 나왔다메. 경리보고 사무실을 맡아라.”
“진짜지예?”
“임마, 내는 성질이 쪼매 더럽지만, 빈말은 한적없능 기라. 그건 내 조카도 잘 안다.”
“알았어예. 월급은 딴 데만큼 조야됩니데이.”
고깃집에서 박인보와 정아영은 의기투합했다. 조카도 안다는 말이 이상했지만 묻지 않았다. 푸짐하다는 껄끄러운 말도 취직이라는 달콤함에 묻혔다. 정아영은 불고기 9인분을 먹고 향심여객의 직원 일호가 되었다. 인가 서류를 정아영이 찾아주었으니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푸짐한 외모와 달리 정아영은 총명하고 입이 무거웠다. 박인보는 전생에 동네라도 구했는지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인재를 얻었다. 박인보와 정아영은 소매치기를 잡은 인연에 더해서 힘든 창업 과정과 확장 과정을 함께 했다. 두 사람은 부녀간처럼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었다.
“코찔찔이가 싫으마 문스킨이라 카까?”
박인보가 정아영의 여고 시절 별명을 들먹였다. 정아영이 쥐만큼이나 싫어하는 별명이다. 푸짐하다는 말보다 더 듣기 싫은 말이다.
“사장님!”
“하이고 귀청 떨어지겠데이. 니 쪼매 더 성질나마 사장한테 난쟁이 똥자루라 카겠구마.”
“잘 아시네요.”
“그래 고만허께. 쪽팔리게 난쟁이 똥자루 소리는 듣지 말아야제. 니도 한잔해라.”
정아영이 술잔을 비우자 박인보가 지나가듯이 물었다.
“아영아, 여자가 강간당할 뻔한 것과 강간당했을 때의 실리적 충격이 마이 다르나?”
여태 이 말을 묻고 싶어서 흰소리를 늘어놓았다. 정아영이기에 꺼낼 수 있는 말이다.
“와예? 우탁이가 또 사건쳤어예?”
정아영이 눈이 똥그래져서 되물었다.
“그건 아이다, 대답이나 해 봐라.”
“강간범은 짐승보다 못한 놈이지예. 물건을 싹둑 잘라뿌야 됩니더,”
박인보가 움찔했다.
“유사 강간이나 강제 추행과 달리 강간은 성기 삽입이 돼야 성립되잖아요. 그 과정에서 폭행이 동반되고요. 심리적 충격의 강도는 성기 삽입 여부가 아니라 피해 여성의 정조 관념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예. 술집 마담과 여염집 유부녀가 같을 수는 없다 아임니꺼.”
정아영은 우탁이 저지른 강간 사건을 세 번이나 뒤처리했다. 피해자에게 돈을 주고 합의하는 과정에서 법률지식도 얻었다.
“강간미수에 그친 여염집 부인이 강간당한 술집 마담보다 더 큰 정신적 데미지를 입을 수도 있다는 뜻이냐?”
“야, 내 생각은 그래요. 남편을 사랑하는 유부녀라면 설사 삽입이 없었더라도 그에 준하는 단계에 들어 갔으면 죽고 싶을 정도로 수치심과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을까요?”
“그러냐?”
박인보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김말순은 정말 죽었을까? 충격을 받았다 하더라도 어린 아들을 두고 죽을 수 있을까.
‘으윽!’ 폐가 쪼그라드는 통증이 밀려들었다. 정아영이 일그러진 표정을 볼세라 얼른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땅이 하얗게 빛났다. 그날처럼 달이 떠 있나 보다. 눈 위에 푸르도록 하얀 얼굴이 떠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