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339
x 339
제35장 몰락의 전조11
분가루가 묻어날 듯 해사한 용모, 버들가지처럼 흔들리는 가는 허리, 풍덩 빠질 것 같은 맑은 눈동자, 절로 보호본능을 부르는 섬약한 몸매, 김말순은 창밖의 눈처럼 하얗게 빛나는 꿈속의 여자였다. 눈앞에 어른거려도 손댈 수 없는 보석이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여자였다.
장필녀, 용모도 품성도 김말순의 반대쪽에 선 여자다. 김말순이 어둠 속에 빛나는 보석이라면 아내는 칠월 장마에 물러버린 호박이다. 걸망진 체격에 거친 피부, 마맛자국으로 박박 얽은 쌍판데기를 보면 솟아나던 욕정도 푹 꺼졌다.
왜 하늘은 동생에게만 행복을 주는가? 질투심이 폭발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갈증은 커져만 갔다. 동생이 죽은 후, 아내의 눈치를 보며 중곡마로 올라갔다. 김말순이 잠든 안방 봉창 밑에 숨어서 성기를 조몰락거리는 행위로는 갈증이 풀리지 않았다.
평생을 후회와 번민에 빠지게 된 그 날, 제수씨를 덮친 놈이 도망갔을 때 자신도 곧바로 빠져나왔어야 했다. 어쭙잖은 위로를 한답시고 꾸물거리다 사달이 났다.
치한과 몸싸움을 벌이느라 밀려올라 간 홑적삼, 발목에 걸린 고쟁이, 달빛에 떠오른 하얀 가슴과 검은 숲, 눈이 뒤집혀버렸다. 몸이 확 달아올랐다. 일생에 경험해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욕정이 머리를 채웠다. 소담한 가슴과 검은 숲만 눈앞을 가득 채웠다.
봉창 밑에서 김말순의 육체를 상상하며 손장난을 친 물건은 터지기 직전이다. 툭탁거리는 사이에 흥분은 끝을 치달았다. 김말순이 허약한 여자라는 사실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우악스럽게 누르고 잔뜩 성난 물건을 돌진시켰다.
‘어헉!’
동작이 딱 멈추었다. 삽입 직전에 터져버렸다. 소위 문전옥답 어지럽히기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어이구 화상아, 이녁이 토끼야?]쨍하게 울리던 아내의 지청구가 고막을 울렸다. 잔뜩 부풀었던 물건이 번데기처럼 쪼그라들었다. 본래 조루증이 심한데다 불안정한 심리까지 겹친 탓이다. 장필녀가 남편을 우습게 보는 가장 큰 이유가 조루증이다.
‘이게 뭐야?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욕정이 사라진 자리를 놀람이 채웠다. 진동한동 중곡마를 빠져나왔다. 달빛 부서지는 신작로를 뛰듯이 걸어서 사랑방으로 숨어들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못할 짓은 하지 않았다고, 자신이 아니었으면 김말순은 괴한에게 겁간을 당했을 거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정조 관념의 차이라고!’
동생 내외의 금슬은 뭐라 표현할 말이 없을 정도다. 한 점의 저어함도 없는 완벽한 신뢰와 하늘이 시기할 사랑으로 맺어진 한 쌍이다. 제수씨는 어린 자식이 없었으면 남편을 따라 죽었을 사람이다. 무쌍은 김말순의 전부다. 김말순이 왜 무쌍을 두고 사라졌을까? 내내 생각해온 의문이다.
‘가만, 빌어먹을 년이 제수씨에게?’
퍼뜩 까맣게 잊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새벽에 몰래 집으로 돌아온 그는 이불을 덮어썼지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내가 살며시 집을 나섰다.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아내는 득의에 찬 요악한 눈빛을 번쩍였다. ‘이녁이 내 원을 풀어주었는지도 몰러!’ 아내가 했던 말이다. 머릿속이 얼크러졌다. 멍청하니 아내의 조종대로 움직인 것은 아닐까? 아내가 자신의 행동을 빤히 들여다보고, 제수씨를 겁박했다면? 그러면 제수씨가 사라진 원인이 설명된다.
“맞다. 빌어먹을 년! 더러운 장가 놈들, 몽땅 엎어주마.”
박인보의 눈이 뻘겋게 변했다. 원한이 쌓였지만 그래도 아내와 처가다. 작전을 진행하면서도 내내 마음이 편치 못했다. 장씨 일가가 박씨를 망쳤다. 자신의 행동은 개인적인 복수가 아니라 박씨의 복수다. 박인보는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졌다.
박인보의 편집증적인 성정이 발동되었다. 박인보의 뇌는 기명된 자신의 행위를 거부했다. 행위에 대한 절대적 거부는 재인 도치 현상을 일으켰다. 김말순의 가출은 그 자식인 무쌍의 탓으로 인식되었다. 그 결과가 학대로 나타났다.
박인보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지만, 원인을 알고자 하지 않았다. 원망과 혐오의 대상이 무쌍에서 아내와 장씨 일가로 고스란히 전이되었을 뿐이다. 프로이드형 억압 기전의 발동이자, 신경병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자기애적 편집증 환자다.
“크으, 빌어먹을!”
날카로운 통증이 가슴을 헤집었다. 영혼의 통증인지 육체의 통증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박인보가 자작으로 술을 따르자 아영이 술병을 빼앗았다.
“사장님예, 벌씨로 한 병이나 마셨심더. 이카다 클납니더.”
박인보가 멀뚱히 정아영을 쳐다보았다. 오이씨처럼 작은 김말순의 얼굴이 아니다. 고개를 돌리고 픽 웃었다.
“알았다. 글마 그거 마누라보다 잔소리가 더 심하구마. 아이다, 내 마누라는 원래 잔소리가 없제. 정양아, 니도 고마 들어가라. 나는 쪼매만 있다 가꾸마.”
정아영이 측은한 눈길로 사장을 바라보았다. 아사리판이 된 사장의 집구석은 익히 알고 있다. 남편을 홍어 거시기 취급하는 마누라, 명품 쇼핑 중독증이 걸린 큰딸, 마약에 빠진 둘째 딸, 철딱서니 없이 사고만 치는 아들, 보아하니 이번에도 우탁이 여자를 건드렸다. 사장의 태도로 볼 때 처리하기 만만치 않은 상대인 모양이다.
‘돈이 많다고 행복하지는 않은가 보다. 살려고 행복해야지 행복하려고 사는 건 아이거던.’
정아영은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다. 기흉에 시달리는 바짝 마른 몸보다는 뚱땡이가 좋다. 각질 일어나는 피부보다는 문스킨이 좋다. 행복은 마음속에 있지 마음 바깥에 있지 않다. 건강해서 행복하고, 열심히 일 할 수 있는 직장이 있어 행복했다. 부모님이 사고로 일찍 돌아가셨지만, 엄하고 자상한 오빠가 있어 행복했다. 가난하지만,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어 행복했다.
사장님은? 병고에 시달리고, 가족의 일탈과 불화로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오죽하면 크리스마스이브에 자신을 불렀겠는가. 재산이 많은들 행복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아영아, 할 말이 아이다만, 니가 아는 사람에게 당해서 강간 직전까지 갔다고 쳐. 어떻게 될까?”
박인보가 우물쭈물하며 물었다.
“당해보기 전에는 뭐라 말하기 곤란한데예. 복잡한 심리적 에스컬레이터를 겪겠죠. 저야 워낙 털털한 성격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털어버릴 수 있을 낍니다. 현실도 벅찬데 지난 일에 매여서 감정과 기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지예. 문제가 쪼매 복잡은 모양이지예?”
‘흐흐흐, 복잡은 정도면 내가 평생을 이러겠나!’
박인보가 두 손을 머리카락 속에 푹 집어넣고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머리를 빠개서 오염된 기억을 뽑아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찍 들어가 쉬시소. 때로는 시간이 최고의 해결책이 되잖아예. 몸을 쫙 풀마 좋을 텐데……. 사장님이 자갈마당을 갈수는 없고, 호텔에 가셔서 비싼값 하는 애를 부르시소. 저번에 이태리에서 온 코쟁이 녹아웃 시킨 현아를 부르까예?”
정아영이 당장 전화기를 들 기세다. 박인보가 주먹을 들었다.
“이 자슥이, 내를 뭘로 보노. 내사마 아무리 굶어도 군것질 안 한다.”
“에그, 그건 자랑이 아이라 푼수인 기라요. 사업하는 분이 군것질도 안 한다 카마 소가 웃을 낍니더. 내일은 산에라도 가이소. 휴일에 맨날 출근하는 사장을 좋아할 직원은 아무도 없심데이.”
“알따 알았어, 그 기집애 차암. 이거나 가져가.”
박인보가 봉투를 툭 던졌다.
“사장니임~”
“시끄럽다. 내가 줄 끼라고는 이거밖에 없어서 미안타. 얼릉 들어가서 식구들하고 불고기라도 먹어야제.”
성공한 중년 남자의 외로움과 공허함이 짠했다. 사장의 조카가 어떤 사람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아니다. 그녀는 핸드백을 챙겨 일어났다. 마초 남성은 홀로 있고 싶을 때 홀로 있어야 한다.
술청에 들어온 손님 세 패가 떠들었지만, 정아영이 사라진 술청은 찬바람이 휭 돌았다. 박인보의 얼굴에 쓸쓸함이 뒤덮였다. 초겨울 산정에 서걱이는 억새보다 더 건조해 보이는 얼굴이다.
“덕산댁, 여그 금복주 하나만 더 줘.”
“아이고 사장님예, 정 차장이 사장님 술 주지 말라꼬 신신당부하고 갔심다. 자기 말 안 들으마 회사 직원들 출입을 금지 시킨다꼬 협박하데예. 저 좀 봐주이소.”
박인보는 오랜 단골이다. 지병을 알고 있는 덕산댁이 설래발쳤다.
“허허, 그노무 기집애가 마누라 행세 할라카네. 덕산댁, 맥주 한 병만 주소. 금복주는 그노무 기집애가 다 묵어삐고 난 몇 잔 마시지도 못했다 아이요.”
박인보는 허허 웃었다. 정 차장을 핑계 삼아 술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가 빤히 보였다.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도 있다. 헛된 인생은 아니다.
사정해서 겨우 맥주를 한 병 받았다. 박인보는 컵을 넘쳐흘러 사그라지는 거품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살아온 세월이 우르르 컵에 차올랐다가 스르르 꺼지는 거품인양 했다. 무엇을 위해, 무엇을 얻고자 악을 쓰며 살았을까!
쇼핑 중독에 빠져서 외국을 돌아다니다 이혼당한 큰딸, 마약에 쩔어버린 둘째 딸, 양아치들과 어울려 깽판 치고 돌아다니는 아들, 남편 회사를 친정에 바치려고 날뛰는 마누라, 직원을 들쑤셔서 노조를 만든다고 지랄하는 처남들, 남들이 보기엔 번지르르 하지만, 빛 좋은 개살구다.
돈이 자식들을 망쳐버렸다. 화자가 사들인 이탈리아제 신발 한 켤레가 중견간부 석 달 치 봉급과 맞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식겁했다. 옷 한 벌 가격은 여직원 연봉보다 더 비쌌다.
아내와 큰딸마저 화자에게 물들었다. 세 여자의 관심은 동일 방향에 집중되었다. 필요한 물건을 사들이는 쇼핑이 아니라 원하는 물건을 구하는 행위에 빠져들었다. 세 여자는 원하는 물건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얻는 전형적인 졸부 근성에 매몰되었다.
물론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다. 계급은 없지만, 계층은 엄연히 존재한다. 고가 소비재 쇼핑이 배덕한 일은 아니다. 시장에서 생선 파는 아줌마는 데드롱 몸뻬를 입는다. 아내는 코튼 원단의 샤넬 수직 스커트를 입는다. 아내가 몸뻬를 입을 이유는 없다. 자동차 매니아가 457대가 한정 생산된 BMW M1 오마주 슈퍼 스포츠카를 수억 원에 사들였다고 비난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가격 그 자체에 의미와 가치를 두는 순간부터 구매자는 천박해진다. 천만 원짜리 파텍 손목시계를 찬 사람이 십만 원짜리 방수용 테그호이어 시계를 찬 사람을 비웃을 어떤 근거도 없다. 박인보가 아내와 딸 둘에게 학을 뗀 것은 그 때문이다. 가격표에 매몰된 영혼 없는 여자들이 바로 자신의 가족이다.
“자업자득이지. 클클클!”
웃는지 우는지 어깨가 들썩였다. 손에 든 맥주잔에서 거품이 튀어나왔다. 화자가 다섯 살 때다. 흙투성이가 되어 울면서 들어온 아이를 제수씨가 달래고 있었다.
“와 우노?”
“철수가 때렸어.”
“너는 안 때렸어?”
“나도 때렸어.”
“그럼 됐네. 니가 아픈 만큼 철수도 아플 거야. 담엔 싸우지 마. 철수에게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해. 그럼 철수가 널 좋아할 거야.”
“정말?”
“그러엄, 먼저 양보하고, 먼저 사과하면 친구가 많아져.”
제수씨가 훌쩍거리는 화자를 다독거렸다.
“본배없는 상것이 이바구도 이상하게 하는구마. 그깟 거지새끼 아픈 거랑 우리 화자가 아픈 거랑 어떻게 같아.”
대청마루에 앉아 듣고 있던 아내가 꽥 소리 질렀다.
“병신 같은 년, 맞고 들어올 거면 나가 디져뿌라. 힘이 약하마 돌로 찍어. 눈까리를 손가락으로 팍 쑤시마 돼.”
에미가 어린 딸에게 할 소리가 아니다. 자신도 거들었다.
“한 번 지마 계속 지는 기라. 담에는 불알을 잡고 확 잡아땡기라. 디지는 소리 낼 끼라. 힘이 약할 때는 독하마 이기는 기다.”
“어머나! 아지벰요, 얼라한티 무신 그런 험한 말씸을……”
김말순은 질린 얼굴로 자신과 아내를 흘끗 보고는 아래채로 내려갔다. 울듯 하던 그녀의 얼굴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흐흐흐, 무조건 이기라고 가르쳤으니……. 햇볕은 높낮이가 없건만 풀대궁은 크고 작구나.”
박인보는 예전 동생이 흥얼거리던 말을 자신도 모르게 뱉었다. 자식들에게 관용과 배려를 가르쳐 본 적이 없다. 남을 등치고 이용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비열하고 얍삽한 수단을 쓰더라도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가르쳤다. 아니 비열하다거나 얍삽하다거나 하는 거리낌 자체가 없었다. 그렇게 키운 아이들인데 누구를 탓한단 말인가.
마음 둘 곳이 없다 보니 사업에 미쳤다. 몸을 파먹는 병고를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몸을 돌아볼 틈도 없었다. 워낙 독하게 사업을 하다 보니 친구는 없고 적만 가득했다.
‘얼마나 살 수 있으려나?’
죽음이 두렵지는 않지만, 할 일을 끝내지 못하면 눈을 감지 못한다. 폐기종, 자신이 생명을 갉아먹는 지병이다. 오 년 전에 지주막하출혈이 발생했다. 우탁이 문제로 아내와 다투다 쓰러졌다. 지주막하출혈은 뇌동맥이 터져 뇌간의 지주막에 혈액이 고이는 현상이다. 대부분 환자가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목숨을 잃거나 후유증을 앓게 된다.
다행히 출혈량이 많지 않았고, 외과적으로 수술이 용이한 부분에 혈액이 고인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그 후로 현기증, 이명, 손 떨림, 복시(複視)같은 후유증에 자주 시달렸다. 업무 중에도 현기증을 느끼거나 손발이 떨릴때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