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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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장 행복한가? 1(수정)
철근, 시멘트, 규소 집합물로 만들어진 하우스는 가족 공동체의 끈적한 관계를 통해 따뜻하고 안락한 홈이 된다. 관계가 사라지는 순간 홈은 무기물의 집합체가 뿜는 써늘한 하우스로 돌아간다. 가족 구성원 간의 사랑과 정이 사라진 집은 또 다른 지옥일 뿐이다.
사달을 겪은 박인보는 집을 떠났다. 아내의 얼굴을 마주 보는 자체가 고통이고 분노였다. 얼굴을 보는 순간 살의가 치밀어올라 자신도 모르게 부엌칼이나 드라이브, 골프채 같은 흉기에 손이 가곤 했다.
미움과 증오는 다르다. 미움은 미련이라는 개념의 연장이다. 미움에서 미련이라는 끈이 사라지면 두 가지 길이 남는다. 상대가 나보다 우위에 있다면 증오가 남고, 내가 우위에 있다면 무관심으로 돌아선다.
여기서 우위와 열위의 개념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상호 심리적인 현상이다. 심리적 약자인 박인보는 증오만 남았다. 가출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내를 우발적으로 살해할 수는 없지 않은가!
더욱 고약한 상황이 벌어졌다. 과로가 계속되자 폐기종이 만성 폐쇄성 폐 질환(COPD)으로 진행되었다. 치료는커녕 증상 보전이 급급할 만큼 예후가 나빴다. 금복주 한 병을 꿀꺽한 사건이 발각되면 김 박사가 잔소리로 자신을 죽일 판이다.
눈 오는 크리스마스이브다. 김빠진 맥주와 닭똥집의 조합이라니,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맥주는 금복주처럼 톡 쏘는 맛과 화끈한 목 넘김이 없다. 밍밍하지만 시원한 맛으로 마신다. 거품이 사그라진 맥주는 시원한 느낌조차 사라진다.
덕산댁을 흘낏 돌아보았다. 방금 들어온 아베크족 한 쌍의 상차림에 바쁘다. 몸뻬를 입고 술청을 지키고 있지만, 인간 냄새가 풀풀 나는 여자다. 바쁘게 흔들리는 커다란 엉덩이가 예뻐 보였다. 구차한 소리 해봐야 금복주를 내놓을 여편네가 아니다. 그래서 이곳을 자주 찾지만.
황금빛, 아니 오줌색깔의 맥주잔에 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단아한 이마, 짙고 단정한 눈썹, 긴 속눈썹에 덮인 젖은 눈동자, 끝이 살짝 들린 코, 야무진 입꼬리,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거품 사라진 맥주잔을 채웠다.
김말순의 얼굴에 무쌍의 얼굴이 겹쳤다. 수년 동안 짓밟고 때리고, 혹사하고, 도둑누명을 씌우고, 유치장에 감치까지 시킨 조카다.
[힘이 생기마 돌아올 낍니더.]무쌍이 녀석이 마지막으로 던진 말이 환청처럼 들렸다. 녀석이 가출하지 않고 학대를 버틴 이유는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다. 애비의 유언을 지키려고 김말순을 기다렸다. 그 사실을 안 순간 소름이 쭉 끼쳤었다.
한이 맺혔겠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가슴이 답답해진 박인보는 밍밍한 맥주를 벌컥 들이켰다. 피처를 내려놓던 박인보가 움찔했다.
‘김말순이 아들에게 그날의 사건을 말하면?’
풉- 숨이 컥 막힌 박인보가 맥주를 뿜었다. 무쌍이는 단호하고 치밀한 놈이다.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인간들을 일일이 찾아내서 병신으로 만들어놓고 사라졌다. 여자도 예외 없었다. 이미 5년 전의 일이다. 어떤 종류의 인간에겐 세월 그 자체가 힘이 된다.
제수씨가 아들에게 그날의 사건을 말할 것인가?
별로 가능성 없는 이야기다. 김말순은 배움이 짧을 뿐 성품이 고아한 여자다. 자식에게 지저분한 사건을 이야기할 사람이 아니다. 그래도 사람의 일은 모른다. 만에 하나 고자질한다면? 김말순을 찾는 자신의 행위는 스스로 목에 올가미를 거는 행위다.
“흐~ 그렇다고 제수씨를 찾지 않을 수야 없지. 죗값을 물으면 받아야지. 그노마가 백부를 죽이기야 하겠어.”
어차피 각오한 일이고, 시한부 인생이다. 두려울 것도 없다. 맥주잔을 노려보았다. 앞머리 벗겨지고 남은 머리도 엉성한 중늙은이가 퀭한 눈으로 마주 보고 있다.
“박인보, 행복한가?”
중늙은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흐흐흐, 행복하진 않은 모양이군. 후우~”
김빠진 맥주잔과 새카맣게 타버린 닭똥집을 앞에 두고 박인보의 한숨이 깊어졌다.
“진보야, 미안하데이. 그래도 니 자식은 혼자 금강송처럼 잘 컸는 갑더라. 내 자식들은 마카 쑥부쟁이 망초가 되삐맀어. 내 재산은 마카 쌍이에게 물려줄라 칸다. 그라마 되제. 그 자슥이 워낙 맺힌 기 많아가꼬 어떻게 나올지는 모리겠다만, 그래도 가족 아이가.”
박인보는 한 잔 더 마시고 그을음 가득한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서 내 욕 마이 하제. 형가 되가꼬 면목이 없능 기라. 내도 곧 니를 만나러 갈 끼다. 니미랄, 형제가 마카 명대로 못 살고 뒈지는구마. 삼 년은 버틸 수 있을라나.”
박인보가 맞은편 빈자리에 건배하듯 술잔을 들어 올렸다.
“크크크, 미안하요. 제수씨, 정말 미안하요.”
때 묻은 테이블에 박인보의 푸념과 한숨이 켜켜이 쌓였다.
장씨 일가의 몰락은 무쌍의 손이 아니라 사위 박인보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독물을 자꾸 찝쩍거려 화나게 하면 물리게 마련이다.
장씨 종가 사랑방에서 고성이 오가고, 닭발 집에서 박인보가 회한에 몸부림칠 때, 화자는 자신의 방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며칠 뽕을 못 빨자 슬슬 금단증상이 발동했다.
“조가튼 새끼야, 니가 먼데 내를 못 나가게 해. 니가 내 서방이야 아비야?”
와장창- 길길이 날뛰는 화자의 발길에 차인 전축이 박살 났다. 앞차기에 걸린 옷장 문이 떨어져 나갔다. 경비원 이달수는 방문을 막아선채 화자의 포달을 꿋꿋이 버텼다. 분을 못 이긴 화자가 화장대를 확 쓸었다.
딱- “에쿠!” 에센스 크림 병에 맞은 이달수가 눈두덩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이고! 아가씨, 지발 고정하시소. 사장님이 엄명을 내리싰다 아인교. 저 좀 살리 주이소.”
이달수는 상처를 아랑곳하지 않고 통사정했다. 그는 죽을 맛이었다. 둘째 아가씨가 히로뽕을 다시 시작하는 바람에 집안이 벌컥 뒤집혔다. 오랜만에 집에 들른 사장님이 노발대발했다. 사모님과 김 기사가 직살나게 욕먹었다. 기세등등한 사모님도 둘째 아가씨와 관련된 일에 대해선 기를 펴지 못했다. 사장님은 예전처럼 둘째 아가씨에게 외출금지령을 내렸다.
‘씨바, 재수도 존나 없지!’
이달수는 속으로 한탄했다. 하필 동료 여씨가 맹장 수술을 한 날에 김 기사가 사모님을 모시고 외출했다. 미친년의 외출을 막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흐흥, 종노무 새끼, 간이 배밖에 튀어나왔구마.”
화자가 비릿하게 웃으며 골프채를 손에 잡았다.
‘조또, 쥑이라. 목구멍이 포도청인 기라.’
두들겨 맞는 아픔과 치욕보다 가족이 먼저다. 이제 막 말문이 트여 재롱부리는 첫째와 백일도 안된 둘째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달수는 피가 줄줄 흐르는 눈두덩을 움켜쥐고 방문을 사수했다.
‘얼래, 저 새끼 봐라!’
화자는 주춤했다. 땡강을 부린다고 비켜줄 놈이 아니다. ‘니놈이 어떻게 버티나 볼까?’
화자의 눈이 요악스럽게 번득였다. 블라우스를 훌렁 벗고 청바지를 반쯤내렸다. 시커먼 치모가 드러났다.
“억!”
이달수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이 씨, 내가 지금 옷을 찢을 거야. 무슨 뜻인지 알지?”
“아가씨, 이러시마 우짭니꺼!”
이달수의 얼굴이 썩어 문드러졌다.
“흐흥, 꼴리면 진짜 올라타도 돼.”
화자가 비시시 웃으며 엉덩이를 앞뒤로 흔들었다.
‘더러운 년!’
이달수는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되면 사장님께 연락하는 수밖에 없다. 눈치 빠른 화자가 이달수의 내심을 모를 리 없다.
툭- 돈뭉치가 이달수 앞에 떨어졌다.
“이 씨, 한 시간만 나갔다 올 거야. 한 시간 뒤에 잘난 당신 사장님에게 연락하라고. 애도 둘이잖아. 돈 들어갈 구석 많지?”
이씨가 힘없이 방문 앞에서 물러났다. 화자는 그 길로 부산의 대표적인 홍등가인 포프라마치로 달라뺐다. 대구 자갈마당의 뽕 조직이 된서리를 맞은 후로 약을 구하려면 직접 포프라마치로 가야 했다. 화자는 자신이 시커먼 나락으로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액셀을 밟았다.
천성사는 변함없이 고즈넉했다. 터가 넓은 천성사에 콧구멍이 두 개 있다, 법당과 요사채다. 반면에 암자 마당은 논산훈련소 연병장 수준이다.
절간이 언밸런스한 이유는 대우 선사의 무욕 때문이다. 선사에게 감복한 어떤 갑부가 절터까지 닦아서 보시했다. 선사는 절을 세우려는 갑부를 만류했다. 콧구멍만 한 법당을 짓고 더 이상 건물을 세우지 않았다. 건물이 들어 설 자리가 암자 마당인 셈이다.
퍽- “까울!”
자동차 범퍼가 충돌하는 타격음이 터지고 괴상한 비명이 뒤따랐다. 검은 곰 한 마리가 요사채에서 튕겨 나와 마당에 털퍽 엎어졌다.
“타이어 묶는다. 실시!”
쌈디가 허겁지겁 일어나서 대형 트럭 타이어에 묶인 밧줄을 허리에 둘렀다. 예전에 무쌍이 끌던 타이어다.
“뛰어!”
쿠두두두- 쌈디가 발정 난 황소처럼 내달렸다. 거대한 타이어 두 개가 허공에 뜨다시피 뒤따랐다. 암자 마당에 쌓인 눈이 부옇게 흩날렸다.
“좌로 달려, 우로 달려, 뒤돌아 달려!”
명령이 떨어질 때마다 쌈디가 방향을 팍팍 꺾었다. 암자 마당의 눈이 깨끗이 쓸려나갔다.
“발이 보이지. 뒤통수 깨지고 싶어!”
무쌍이 빽 소리 질렀다. 쌈디의 발이 더욱 빨라졌다. 유격장 악질 조교와 불쌍한 올빼미 데자뷰다.
쌩- 파공성이 울렸다.
“으갸갹!”
쌈디가 미친 듯이 속력을 높였다. 허리에 매달린 거대한 타이어 두 개가 광풍폭우처럼 마당의 눈을 쓸어냈다. 대형 트럭 타이어 무게는 65~100kg이다. 보통 사람은 꼼짝도 못 할 중량이다.
빡- 처절한 회피 노력에 불구하고 돌멩이가 뒤통수를 때렸다.
“아악! 주-인-나-쁘-다-아~”
“이 자식, 말더듬이 행세 그만두지 못해. 와킬이라 불러.”
“와키르, 잘못했다.”
“흐흐, 멍청한척하면서 감히 엉아를 놀려. 발이 보인다.”
“우야압!”
좀비, 아니 쌈디는 죽을 둥 살 둥 속력을 높였다. 마당에 쌓인 눈이 사라지고 젖은 흙도 말랐다. 먼지가 뿌옇게 일었다.
쌈디는 마당이 넓은 구구한 사연을 알 바 아니다. 조금만 속도가 떨어지면 돌멩이가 날아온다. 주인이 던지는 돌멩이는 피할 재간이 없다. 꿈틀거리는 검은 근육을 타고 땀이 물줄기처럼 흘러내렸다.
쌈디는 놀랍도록 빠르게 정상을 찾았다. 한 달이 지난 지금은 좀비적인 요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대우선사가 뇌를 씻어주고, 신체 내부에 쌓인 요룬바의 독성을 뽑아낸 덕분이다.
어눌한 말투도 정상에 가까워졌다. 사부의 신통력에 힘입어 한국말도 대충 익혔다. 공진파에 실린 어의전승술은 발음형태, 말의 의미를 직접 뇌에 새겨준다. 사기적인 외국어 마스터법이다.
쌈디가 얼차려를 받는 이유는 겨울잠 자는 너구리를 몰래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빵빵하게 배를 채우고 계곡 물에 들어가서 냄새를 지웠지만, 무쌍을 속일 수 없다. 딱 걸려서 뒈지게 얻어맞고, 얼차려를 받는 중이다.
“머꼬? 웬 사람이 이래 몰려오노?”
무쌍이 귀를 쫑긋 세웠다. 일주문을 넘어선 발걸음 소리가 무려 열 개다. 일주문을 넘어섰다면 암자로 온다는 소리다.
‘사부님이 영업하셨나?’
고개를 갸우뚱했다.
“우와!”
암자 입구에 들어선 남녀노소 열 명의 입이 일제히 쩍 벌어졌다. 거대한 덩치의 흑인이 무식한 타이어를 끌고 눈보라를 일으키며 질주하고 있다. 그들이 언제 이런 희한한 장면을 보았겠는가. 눈동자 스무 개가 삼각팬티 한 장만 걸치고 암자 마당을 질주하는 쌈디의 특정 신체부위에 꽃혔다.
“천강역사다.”
삼출 아재가 감탄사를 뱉었다. 칠척장신에 먹물처럼 검은 육체, 대보름 줄다리기용 동아줄처럼 꿈틀거리는 근육. 거대한 타이어 두 개를 매달고 준마처럼 달리는 용력……. 용암사 주지승이 들려준 야담에 나오는 천강역사가 분명했다. 그런데 천강역사치곤 모양새가 조금 빠졌다.
“주인, 쪽 팔린다아~”
쌈디가 젖가슴과 사타구니를 손으로 가리고 고함질렀다.
“허, 저 자식 저거 이젠 사람 다 됐구마.”
무쌍이 혀를 찼다.
“우와!”
뒤늦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눈이 똥그래진 여자 아홉이 지르는 소리다. 쌈디의 분투를 응원하는지 육체미에 정신이 빠졌는지 알 수 없는 감탄이다.
“와키르, 암컷, 아니 여자가 본다. 진짜 쪽 팔린다.”
“쌈디야, 멧돼지나 한 마리 잡아와.”
“그거 쌈디 전문이다.”
쌈디가 노루처럼 껑충껑충 뛰어서 산속으로 사라졌다. 아쉬운 시선들이 일제히 평상처럼 넓은 등을 쫓았다.
“오빠, 저 사람 머꼬?”
“오빠 부하다. 너희가 웬일이니?”
무쌍은 어리둥절했다. 뜬금없이 찾아온 하동댁 식구들과 삼출 아재 식구들이다. 천성사 창건(創建)이래 손님들로 북적이기는 처음이다. 하동댁 식구 여섯, 삼출 아재 식구 넷, 열 명중에 여자가 아홉이다. 중구난방 입을 열자 고즈녁한 절간이 돛대기시장으로 변했다.
“스님 할배와 오빠가 불쌍해서 크리스마스 함께 보낼라꼬 왔능 기라.”
산타 털모자를 쓴 계순이 생글거리며 무쌍의 팔을 잡고 애교를 떨었다. 그러고 보니 진순이 빼고 전부 산타 코스프레다.
“이놈 시키들, 절간에서 크리스마스 보낸다 카는 사차원 발상은 누가 한 기고?”
“헤헤헤, 스님 할부지나 오빠나 그런 거 가릴 사람 아니잖아. 그치?”
“오빠, 나 예쁘지?”
처녀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하하하! 자기들 멋대로구마.”
방향에 어찔해진 무쌍은 웃고 말았다. 이곳은 거친 사헬이 아니라 안온한 고향이다.
“조카, 날세. 주책없이 찾아와서 수련을 방해했구만.”
목발을 짚은 삼출 아재가 나섰다. 걸음걸이가 편안해 보였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사람이 오지 않는 절간은 절이 아니지요. 아지메도 잘 지내시지요.”
무쌍이 하동댁과 삼출 내외에게 인사했다.
“우리사 늘 그렇제. 저것들이 작당해서 오빠 보러 간다고 난린기라. 우린 기양 따라왔네.”
하동댁과 덕산댁이 주뼛거렸다.
“헹, 엄마가 오빠 보고 싶다고 더 난리를 치고서는 오리발 내미시네.”
“저런 촉새 같은 기집애 봤나.”
우순의 말에 하동댁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잘 오셨습니다. 지가 없는 동안에 두 분 아지메가 수시로 오셔서 사부님 공양 수발 들었다민서요. 고맙심다.”
“무신 소리고, 자주 못 와서 지송허지. 스님은 계시나?”
“탁발 나가셨심다. 한번 나가시마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그러냐, 아직 정정하시셔 다행인 기라.”
삼출 내외와 하동댁은 쌈디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나이 어린 조카지만 무쌍은 특별하다. 그들은 함부로 호기심을 내비치지 않을 만큼 세상을 오래 살았다.
“아재는 요짐 어떻습니까?”
“오이야. 니 덕분에 목발만 짚으마 읍내 장도 문제없능 기라.”
무쌍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태공명장(形態共鳴場), 아니 공진파로 바로잡아 준 추간판 중핵과 찢어진 피막이 제대로 자리 잡은 모양이다. 그 정도가 한계다. 비틀린 채 굳어버린 무릎은 사부님도 고치지 못한다.
“쌍이 니가 우리 식구들을 살리준 기라. 조카 은덕을 우예 갚으마 되겠노?”
재종숙모인 덕산댁이 눈물을 질금거렸다.
“무신 그런 섭섭한 말씸을 하십니까. 가족끼리 은혜가 오데 있심니꺼. 불공 끝내고 밤에 한 번 더 손을 보입시더.”
“오빠, 고맙심더.”
계순이 또래의 처녀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얼래? 니는 경순이 아이가. 그래 공장에 다닌다꼬 마이 힘들제? 염색 공장은 냄새도 지독하다 카던데.”
“아이라예. 오빠 덕분에 아부지도 좋아졌고, 점순이도 다시 공부하게 된 기 어뎁니까. 오빠 은혜는 꼭 갚겠심더.”
까무잡잡한 얼굴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은혜는 무신 은혜, 논밭을 묵히마 잡초 투시(투성이)되가꼬 토지 베린다. 내가 필요해서 그라는 기다.”
무쌍은 백부에게 되돌려받은 논 열 마지기와 밭 두 마지기를 삼출 아재가 부쳐 먹도록 내 주었다. 물론 도지는 없다. 삼출 아재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점순은 차장을 그만두었다. 아버지 병원비를 벌려고 나섰던 점순은 뒤늦게 고등학교를 들어가려고 준비 중이다.
“오빠!”
짧게 단발친 여자아이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 점순이구나. 니 학비는 오빠가 빌려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라. 니가 잘 되는 기 효도하는 기다.”
“오빠, 고마바예.”
커다란 눈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혔다가 주르륵 떨어졌다. 점순의 나이 겨우 17살이다. 장시간 노동도 힘들었지만, 밤마다 차장 기숙사에서 발가벗겨서 몸을 수색당할 때는 죽고만 싶었다. 무쌍이 두툼한 손으로 점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백부가 운수회사를 하는 만큼 여차장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잘 알고 있다.
“으헝헝!”
설움이 치받친 점순이 무쌍의 가슴에 파고들어 울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