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341
x 341
제36장 행복한가? 2
보고 있던 하동댁이 앞치마를 들어 올려 코를 팽 풀고, 덕산댁이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문디 가시나, 지가 먼 중뿔났다꼬 차장질을 하디마는…….”
버스가 차고에 들어오면 차장을 사무실에 데리고 가서 발가벗긴다는 말을 듣고 기함했다. 억장이 무너져도 선 듯 딸을 데려오지 못했다. 땅 한 뙈기 없는데 서방 병원비와 목구멍은 어쩌란 말인가.
무쌍이 다녀간 뒤로 암담하던 집안에 서광이 비쳤다. 수년간 자리를 보전하던 남편이 털고 일어났다. 진보 아주벰이 짓던 땅도 도지 없이 받았다. 차장을 그만두라 했으나 막내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고집을 부리더니 그예 졸다가 승강구 발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회사는 딱 잡아뗐다. 본인의 실수인 만큼 치료비를 부담할 수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경순이가 모아놓은 돈을 병원비로 써버렸다. 다친 다리는 회복되었지만 당장 내야 할 입학금이 문제다. 이런저런 일들이 떠오르자 설움이 복받쳤다.
“이보게 동상!”
“야!”
“이거 받게.”
하동댁이 통장과 도장을 내밀었다.
“이기 머다요?”
“쌍이가 내한테 매껴놓은 상철이 집세 통장인데 점순이 학비로 쓰라 카더라.”
“야?”
덕산댁의 눈이 황소눈깔처럼 커졌다. 이게 무슨 황소 영각 켜는 소린가?
“공짜 아이다. 점순이 고등핵교 끝나마 쓴 돈만큼 채아나라 카더라.”
“정말입니꺼?”
“속고만 살았디나. 이자도 있다. 정월과 팔월에 영곡마을 진보 아주벰 산소에 술 한잔 올리돌라 카더라. 쌍이는 외국에 자주 나가거든.”
“으흐흐흐, 형님!”
덕산댁이 하동댁을 부여잡고 눈물을 쏟았다. 친구들이 책가방 들고 버스 탈 때 손바닥으로 철판을 두드리며 오라잇을 외쳐야 했던 딸년이다. 가슴이 찢어져서 버스를 타지도 못했다.
“이 사람이 내한테 와 이카노. 쌍이에게 고맙다 케야제.”
“그라지예. 젊은 아가 우찌 저래 속이 깊은지.”
“충무댁 형님 아들아이가. 그 형님이 얼매나 속 깊고 정이 많았노. 휴우”
하동댁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충무댁 형님만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졌다. 아들이 저리도 훌륭하게 자랐건만 충무댁 형님은 오데로 가버렸는지!
“어이, 점순이 가시나야, 오빠가 니 끼가? 오데 은근슬쩍 안기노.”
우르르 달려온 계순이와 말순이가 점순의 뒷덜미를 잡아끌고 갔다. 무쌍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바로 이것이 주역에서 말하는 자강불식 후덕재물이요, 레버리지 효과다.
삼출 아재댁은 빈곤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지만 딛고 올라설 발판을 던져주자 곧바로 수렁을 빠져나왔다. 가정이 건강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가정은 출구만 뚫어주면 스스로 역량을 키운다.
무쌍은 사지 멀쩡한 거지에게 적선해 본 적이 없다. 파리에도 거지가 많다. 망디앙(mendicant, 거지)이라 불리는 이들은 공원과 역 광장은 물론이고, 샹프 엘리제, 블러바드 오스만 스트리트 같은 관광호텔 밀집 지역, 명품 샵이 즐비한 상젤리제, 몽테뉴 스트리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무쌍은 망디앙에게 동전 한 개 던져준 적이 없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을 자격이 없다. 파리에 터키인이 없으면 시청이 쓰레기에 덮이고, 센강이 똥물로 변한다고 할 정도로 막노동자가 부족하다.
유럽에서 망명자와 불법 체류자가 가장 많은 나라가 프랑스다. 진보적인 이민정책과 불법체류자에 비교적 관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권과 자유를 중시하기 때문이라 하지만 험한 일을 할 노동자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파리의 망디앙은 일을 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고용정책국에서 운영하는 고용센터에 요청하면 즉시 일자리를 알선해준다. 일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세 차례나 재요청할 수 있다. 그럼에도 거지 근성에 물든 망디앙은 거지 영업을 버리지 못한다. 기회를 주었음에도 거부하는 자를 돌아볼 이유가 없다.
더 웃기는 것은 파리의 망디앙 대부분이 거지 영업의 방편으로 강아지를 키운다는 사실이다. 덩치 큰 개가 아니라 반드시 강아지다. 살이 통통한 강아지 한 마리, 커다란 종이컵이나 찌그러진 양은 냄비, 더러운 페도라나 보울러가 이들의 영업 무기다.
거지가 개를 키우는 이유가 있다. 첫째는 단속을 피하기 위해서다. 프랑스는 애완동물을 유기하면 처벌한다. 경찰이 거지를 단속하려면 개까지 책임져야 한다. 개를 책임지기도 곤란하고, 단속 과정에서 개를 학대했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난처해진다. 자연히 단속이 헐렁해진다.
둘째는 추울 때 난로 대용품으로 쓰기 위해서다. 기온이 떨어지는 아침저녁과 겨울철에 안고 자면 무척 요긴한 바이오 히터가 된다. 셋째는 실업자가 개를 키우면 지방 행정부에서 사육 보조금이 나온다. 코 묻은 돈, 아니 강아지 오줌 묻은 돈을 챙기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동정심 증폭용이다. 인정 많은 사람은 거지가 강아지를 굶길까 걱정한다. 강아지 사료를 사라는 의미에서 돈을 던진다. 파리 거지는 나름대로 고도의 영업 전술을 구사하는 셈이다. 행인이 돈을 페도라에 던져주는 한 파리의 망디앙이 거지 영업을 그만둘 확률은 제로다. 무쌍은 거지를 ‘서비스 없는 영업맨’ 이라 불렀다.
어릴 때 거지가 찾아오면 엄마는 밥을 주었지만, 아버지는 밭을 매거나 논에 가서 피를 뽑아주면 일당을 주겠다고 했다. 일하고 일당을 받겠다는 거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엄마가 인정머리 없다고 잔소리해도 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쌍아, 세상에 제일 나쁜 놈이 도둑놈이고, 제일 추잡한 놈이 거지인 거라. 일하지 않고 배를 채우려는 놈은 정신이 썩은 놈인 거라. 정신이 썩으면 몸이 아무리 건강해도 쓸모없는 인간이데이.’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공짜가 없음을 배웠다. 무쌍이 무임승차를 유난히 싫어하는 이유도 어릴 때부터 받은 거지는 거지일 수밖에 없음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아재, 행복하십니까?”
무쌍이 불쑥 물었다.
“행복하다 마다. 요즘은 살맛이 나네.”
삼출 아재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와 행복합니까? 아재는 목발을 짚어야 하고, 모아놓은 돈도 없다 아입니까?”
“딸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거 바라. 시방 내가 얼매나 행복한지 자넨 모를 끼라. 허리가 뿌라져서 꼼짝 못 하다가 걸어 다닐 수 있게 되고, 부쳐 먹을 땅이 있고, 딸년이 다시 핵교에 가게 되었는 기라. 이만하마 행복하제. 남에게 기대지 않고 사는 기 행복아이가.”
무쌍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행복이 인간의 조건이구마!’
행복은 ‘어디에?’라는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라는 방법의 문제다.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인 자기실현의 개념이다. 타인의 시각으로 자신을 보면 행복은 죽을 때까지 찾아다녀야 하는 파랑새가 된다. 자신의 삶을 주관적인 사유의 측면으로 보면 긍정적 만족이라는 행복은 이미 내재해 있다.
다리 병신이 된 삼출 아재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원천은 ‘어떻게?’라는 행복의 사유에 대한 응답이다. 행복은 ‘너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당신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해지는 파이 게임이다. 전체 파이를 키우면 돌아오는 몫도 커진다.
행복은 개인이 존재와 삶을 보존하려는 주체적 노력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부산물이다. 결국, 행복하려고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영위하려고 행복하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무쌍 본인의 오지랖 역시 행복인 셈이다.
무쌍은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미래의 불안을 당겨서 조급해지지 말고 오늘을 충실히 사는 것, 그것이 행복이다. 늘 고민해오던 화두 한 개를 나름대로 해결한 셈이다.
진순이 동생들을 지휘해서 법당과 요사채 대청소에 들어갔다. 빨리 청소를 마쳐야 이벤트를 시작할 수 있다.
“연순이는 점순이 데리고 빨랫거리 몽땅 끌어내. 계순이는 빗자루, 우순이는 걸레, 경순이 말순이는 법당으로 올라가. 빨랑 청소하고 준비해야제.”
그녀는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상사처럼 동생들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처녀 일곱이 설쳐대자 한적하던 절간이 도떼기시장이 되었다.
“형님, 딸 다섯을 정말 잘 키웠심더. 내년에 계순이가 들어가마 대학생이 셋이네요. 시상에, 짚은다리에서 애들을 마카 대학에 보낸 사람은 형님밖에 없심더. 다 형님이 쌓은 덕입니더.”
“내 능력에 대학생이 가당키나 하나. 쌍이 덕분이제. 내 가 무신 덕을 쌓았다고…….”
하동댁은 덕산댁의 치사에 멋쩍은 얼굴이 되었다.
“박 씨들이 인동댁과 합세해서 충무댁 형님을 깔아뭉갤 때 형님 내외분만 펄펄 뛰었지예. 지는 따돌림 당할까 봐 겁이 나서 입도 뻥긋 못했심더. 쌍이에게 면목이 없심더. 쪼매만 신경썼으마 충무댁 형님이 가출하지는 않았을 낀데 말임다. 똑같이 힘들고 곤궁한 처지에 머땀시 그렇게 포달을 떨고 괴롭혔는지……. 인동댁은 언젠가는 천벌을 받을 낌니다요.”
“다 지난 이야기야. 쌍이가 저렇게 훌륭하이 컸응께 충무 형님은 행복한 거여. 험하고 힘든 일은 우리가 감당해야제. 저것들은 쪼매 핀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나.”
하동댁이 우울한 얼굴로 법석을 떠는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그렇지요. 자식이 내보다 더 잘살 수 있다는 희망만 있으마 고상이야 얼매든지 하지요.”
“그건 그라제. 진순이가 음식 몇 가지를 부탁했네. 공양간에 들어가서 전이나 몇 개 굽고 땅콩 볶아내고 과일이나 준비하세.”
“절에서 기름 냄새 피아도 개안을 랑가요?”
“그건 안 되제. 선사님은 세속의 작은 일에 상관치 않지만 지킬 건 지켜야제.”
“쌍이는 고기를 마이 묵어야 하는디요.”
“여서는 저 가스나들이 지들 오빠를 위해서 이벤똔가 뭔가 한다 카이끼네 요깃거리만 간단히 채리마 돼. 저녁이야 짚은다리 가서 묵을 끼고.”
“아, 미역국도 형님댁에서 끓일라꼬요?”
“그라제. 미역국에도 고기가 들어가잖아.”
“그라마 할 것도 없구마요. 형님은 쉬시소.”
덕산댁이 앞치마를 털털 털고 공양간으로 들어갔다.
“아재요, 지가 출장을 가는 바람에 아재를 고문했다는 놈들은 찾지 못했심더. 사북 계엄분소에 있던 놈들이 김영노, 유영출이하고, 장계장이라 불리는 놈이라 캤지요?”
“아이구 조카, 그놈들은 경찰도 아이고 기관원인 기라. 그것들 위세가 어떤지 조카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내사마 다 이자뿟네. 할 일 많은 조카가 행여나 그딴 일에 신경 쓸 생각말게.”
화들짝 놀란 삼출 아재가 손을 내저었다. 법 없이도 살아갈 사람, 공권력이라면 겁부터 먹는 순박한 민초다. 그러기에 독재가 가능해지고, 쓰레기 같은 것들이 알량한 권력을 몽둥이로 사용한다.
“하하, 알겠심더.”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 대답은 했지만 속은 편치 않았다. 공권력이란 미명하에 국민을 때려잡는 몽둥이, 부패와 뒷거래에 익숙한 자들의 행태는 질리도록 경험했다. 한바탕 휘젓고 싶지만, 이곳은 사헬이 아니다.
사헬은 서발 장대를 휘둘러도 걸릴 게 없지만, 한국은 장애물이 많다. 하동댁이 있고, 엄마가 있고, 아침가리 골에 어르신들과 미나가 있다. 가능하면 블랙맘바가 아니라 무쌍으로 조용히 살고 싶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자꾸 흔들마 어쩔 수 없지.’
서늘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전체를 뒤집어엎을 수야 없겠지만, 눈앞에 보이는 똥 덩어리마저 눈감아줄 생각은 별로 없다.
일 년 중 해가 가장 짧을 때다. 어느새 날이 어둑해졌다. 요사채 큰방에 상차림이 끝났다. 사방 벽이 처녀 일곱이 준비해온 배너와 장식용 반짝이로 덮였다. 사단 케이크와 폭죽도 준비되었다. 진순의 눈꼬리에 눈물 한 방울이 맺혔다. 어릴 때는 어쩔 수 없었다지만 여전히 자신을 위해 살지 못하는 오빠가 서러웠다.
“언니, 준비 끝났어. 오빠 델꼬 온나.”
연순이 등 떠밀어 진순을 내보냈다. 진순은 영고석으로 향했다. 역시 오빠는 바위에 정물처럼 앉아 있다. 머리와 어깨에 눈이 수북이 쌓였다. 진순은 선 듯 부르기가 망설여졌다. 명상에 든 오빠는 다른 세상 사람 같다.
“오빠!”
무쌍이 눈을 번쩍 떴다. 푸악- 머리와 어깨에 쌓여있던 눈이 저절로 확 뿌려졌다.
“저녁 묵으라꼬?”
움직임을 보지도 못했는데 바로 옆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진순은 놀라지도 않았다. 스님이나 오빠나 신통력을 부리는 사람이다.
“응, 고모님 생각한 거야?”
“음!”
“잘 계실 거야. 스님 할부지가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잖아.”
“암, 잘 계셔야지. 잘 계시지 못하면…….”
무쌍의 눈동자에 선홍색 혈광이 어렸다. 진순이 무쌍의 손을 꼭 잡았다.
“오빠 시험도 끝났으니까 나도 나설께.”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 중이다.”
“그 생각 미뤄두고 민생고 해결해야제. 아저씨와 엄마도 기다리셔.”
“그래? 어여 가자. 나도 배가 등짝에 붙었능 기라.”
“두만가앙 푸른 물에~딸꾹!”
얼큰히 취한 상철이 영곡마을을 나섰다. 뒤늦게 장가간 친구가 딸아이 돌잔치를 열었다. 금복주 몇 병 까고 맥주로 입가심한 후유증이 슬슬 기어올랐다. 기분 좋게 한 곡조 뽑던 상철이 노래를 뚝 그쳤다.
“저 쉐이들 머꼬?”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 산을 오르는 검은 그림자 다섯이 눈에 들어왔다.
“거 이상한 새끼들이네. 오밤중에 산에 올라가서 산삼이라도 팰라 카나?”
머리를 갸우뚱한 상철이 다시 가던 길을 갔다. 남이야 오밤중에 산을 오르던 전봇대로 귀를 후비든 알 바 아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여 잘 자라…….”
음정도 박자도 엉망인 군가가 산모퉁이를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