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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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레종 에뜨랑제 4
무쌍은 기분이 나빠졌다. 설마 잘한다는 뜻은 아닐 테고, 비웃는 제스처다. 촌놈 무쌍의 오해다. 외인부대는 세계 각지에서 온갖 종류의 인간이 지원한다. 언어 문제는 모병 측에서 애초 고려 대상으로 삼지도 않았다.
동양인 지원자는 거의 중국인이거나 중국계다. 모병 상사가 중국인이냐고 물었던 이유다.
무쌍은 헌병 분견대에서 입대 지원서를 작성하고 곧바로 인근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질병 유무와 마약 경력등 몇 가지 조사를 받고 3일을 대기했다.
4일째, 다른 4명의 지원자들과 함께 마르세유로 항공 이송되었다. 마르세유 공항을 빠져 나오자 지프가 대기하고 있었다. 지프가 도착한 곳은 오바뉴의 외인부대 본부 중대다. 마르세유 동쪽으로 15km 떨어진 거리다. 오바뉴 본부에서 인성검사, IQ검사, 신체검사를 받고 2주 동안 오리엔테이션을 받았다.
외인부대의 심사 과정은 엄격하다. 지원자중 각종 테스트와 훈련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케피 블랑을 받는 비율은 20%내외에 불과하다.
본부에 집결한 60명의 지원자중 대부분이 사전조사와 테스터 단계에서 걸러진다. 잘해야 15명이 카스텔노다리의 에콜(ecole,학교. 훈련소)을 수료하고 ‘케피 블랑’(불란서 외인부대가 쓰는 흰색 모자, 외인부대의 상징이다.)이라 불리는 흰색 군모를 받을 수 있다.
무쌍의 신체 치수는 키 182cm, 몸무게 75kg이다. 동양인치고 우수한 체격이다. 이곳에서는 왜소한 편에 속한다. 흰 얼굴과 검은 얼굴은 대부분 190cm 이상이다. 푹 파묻혀서 존재감이 사라졌다.
“어이, 원숭이 비켜.”
코가 짜뿌라진 흑인이 바위덩이 같은 어깨로 밀어냈다. 무쌍은 별 말없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한 주먹거리도 안 될 놈이지만 말썽을 일으켜서 쫓겨나면 낭패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우습게 보고 시비를 걸었다. 툭하면 어깨로 밀거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무쌍은 꾹꾹참았다. 반응을 보이지 않자 기가 살은 놈들이 더욱 심하게 나왔다.
노란 턱수염이 뒤덜미를 잡고 밀쳤다. 무쌍은 하체에 중심을 두고 딱 버텼다. 바위덩이처럼 꿈쩍도 않자 노란 턱수염의 손바닥이 날아왔다.
턱- 손바닥이 무쌍의 손에 잡혔다. 불끈 힘을 주었다. 뿌드득- 뼈가 비틀리는 소리가 났다.
“끄아악!”
노란 턱수염의 비명이 연병장을 울렸다.
“이 새끼야, 엉아가 참을 때 작작해라. 엉!”
무쌍이 칼날같은 눈으로 휘 둘러보자 둘러서 있던 덩치들이 후다닥 물러섰다.
“양아치같은 새끼들!”
더러워서 고향을 떠났건만 인간이 사는 곳은 어디나 같다. 약해 보이면 물어뜯으려 한다.
외인부대의 급여는 생각만큼 넉넉한 편이 아니다. 프랑스의 일반 기업체 근로자와 비슷한 수준이다. 게다가 보급품을 자신의 셀러리로 구입해야 한다. 전투 장비도 기본 장비만 지급된다. 액세서리나 자신만의 무기는 직접 구입해야 한다. 따지고 보면 박봉이다.
그럼에도 지원자는 넘쳤다. 남자의 로망 따위에 홀린 녀석이든, 먹고 살기 위해서든, 자원은 차고 넘쳤다. 아랍권과 동구권, 아프리카, 남미에서 끊임없이 지원자가 밀려들었다. 거칠게 살아온 인생이 대부분이다.
체력 테스트가 실시되었다. 외인용병이 되기 위한 중요한 관문이다. 첫 번째 테스트는 20분 동안 달리기다. 둘레가 800미터 쯤 되는 연병장 외곽을 달린다. 훈련의 기본은 체력이다. 체력 측정의 베이스는 달리기다.
당초 4,000m나 5,000m로 정해놓고 시간을 측정하면 될 것을 거꾸로 시간을 정해 놓고 거리를 측정한다. 인종이 다르니 문화도 다르다.
탕- 출발 신호와 함께 신체 건장한 60명의 남자가 튀어 나갔다. 로데오 경기장의 황소 같은 기세다. 용병 채용시 가장 중요한 항목이 신원 조회와 체력 테스트다. 달리기에서 합격점을 받지 못하면 바로 보따리를 싸야 한다. EV(외인부대 초보 지원자)들은 결사적이었다.
무쌍은 처음부터 선두로 치고 나갔다. 덩치들과 부대끼기 싫었다. 100kg 통나무를 메고 천생산을 달렸던 무쌍이다. 육중한 트럭 타이어 두 개를 허리에 매달고 달렸던 무쌍이다. 맨몸으로 연병장을 달리는 정도야 삼박사일도 끄떡없다. 외인부대의 체력 테스트는 애들 장난이다. 대충 남들보다 조금 나은 정도로 달렸다.
첫 바퀴를 돌고, 두 바퀴째부터 달리기 대열은 먹이를 찾아 나선 개미 떼처럼 길게 늘어졌다. 네 바퀴째부터 낙오자가 속출했다. 선두의 무쌍은 네 바퀴째를 돌 때 후미를 추월했다.
모병관 콜롱은 아쥐당쉐프(준위)가 엄지로 모자챙을 밀어 올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제법 체격 좋은 동양인이 후미를 추월했다. 그는 혀를 찼다. 간혹 체력 안배를 하지 않고 처음부터 전력으로 달리는 놈들이 있다. 저런 놈들은 선두를 끌어 주는 선도차 역할을 해주고 곧 나가떨어진다. 관심을 접은 콜롱이 손에 든 서류로 눈을 돌렸다.
다시 연병장으로 눈을 돌린 콜롱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동양인은 여전히 선두에서 일정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콜롱은 서류철을 든 병장을 불렀다.
“카포랄(병장)”
“위!”
“선두 지원병이 누군가?”
“사우스 꼬레앙 팍입니다.”
테스트 목록의 사진과 얼굴을 대조한 병장이 파일을 뽑아냈다.
“꼬레앙? 꼬레앙 마피아!”
“위!”
콜롱이 말한 마피아는 범죄조직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한국인 외인 부대원은 희귀한 존재다. 외인부대 전체를 통틀어도 열 명에 불과했다. 꼬레앙은 소수지만 워낙 독하게 훈련받고, 그들끼리 결속력이 강한 탓에 꼬레앙 마피아라 불렸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선두의 꼬레앙이 후미를 두 바퀴째 추월했다. 꼬레앙이 달리는 자세를 관찰하던 콜롱의 눈빛이 달라졌다.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하체에 비해 상체는 흔들림이 없다. 발에 스프링이라도 부착한 듯 땅을 박차는 탄력이 경주마의 질주를 연상하게 할 정도다.
“허, 진짜배기였구먼.”
콜롱이 감탄했다. 지원자 테스트 역사상 최고 순위에 올라갈 기록이 나올 것 같았다. 이처럼 뜻하지 않은 재목이 입대할 때가 있다. 팍이라는 꼬레앙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몽 디우, 쎄 브헤!(세상에, 말도 안돼!)”
카포랄로부터 기록을 건네받은 콜롱의 입이 벌려졌다. 지원자들의 평균이 6,800미터다. 그 정도면 일반인 기준으로 충분히 뛰어난 체력이다.
꼬레앙 팍은 20분 동안 9,900미터를 달렸다. 세계적인 육상 중거리 선수도 명함을 못 내밀 기록이다. 콜롱은 흥분했다. 괴물의 등장이다. 다른 테스트는 볼 필요도 없다.
“흐흐흐, 삐에프 녀석이 침을 질질 흘리겠군.”
친구 삐에프 대위가 생각났다. 삐에프는 카스텔노다리의 에콜에 중대장으로 복무중이다. 삐에프 대위의 별명이 콜렉터다. 인재 수집상이라는 별명처럼 뛰어난 사병은 어떻게든 휘하로 끌어 들이는 장교다.
꼬레앙 팍을 끌어들이려고 안달복달할 친구를 생각하니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무쌍이 튀지 않으려고 대충 테스트에 임하고 있음을 알았다면 콜롱의 얼굴이 볼만했을 것이다.
콜롱은 파일 상단에 붉은 펜으로 particularité(특별)이라고 적어 넣었다. 이 붉은 주기는 대상자를 무조건 카스텔노다리로 보내라는 표시다.
무쌍은 이어지는 각종 체력 테스트에서도 크게 튀지 않는 수준에서 테스트를 끝냈다. 100미터 수영, 10미터 잠수, 팔굽혀 펴기, 윗몸 일으키기, 6미터 외줄타기등의 테스트가 이어졌다. 100m수영 테스트는 최선을 다했지만 겨우 중간을 차지했다. 낙동강 개헤엄 수준인 무쌍이다.
몸으로 때우는 테스트 따위는 하등 문제될 게 없다. 정작 큰 문제는 낯선 문화와 언어였다. 월송산의 해골과 조우한 뒤로 육체만 강화되었다.
음식도 별 문제 없었다. 문제가 있을 리 없었다. 한때는 부패한 구렁이를 생으로 뜯어먹고, 지네와 동굴 곤충을 주식으로 삼았던 무쌍이다. 그가 못 먹을 음식이란 없다.
진순이 끓인 얼큰한 김치찌개와 구수한 된장찌개가 그리웠지만 오바뉴 본부의 음식도 만족할 만 했다. 아니, 촌놈이 감당하기에 너무 황홀했다.
오바뉴 본부 첫날, 무쌍은 본부 식당 테이블에 놓인 수많은 형형색색의 용기를 보고 어리둥절했다. 그는 테이블 장식용 미니어처로 알았다. 그 용기들이 모두 음식에 바르고, 뿌리고, 찍어 먹는 각양각색의 소스임을 알게 되자 문화적 충격에 빠졌다.
한국의 소스는 간장, 된장, 고추장 세 가지다. 궁색하게 추가 한다면 막장, 집장, 초장 정도다. 프랑스 음식은 소스가 부가되지 않는 음식이 없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소스가 정신을 쑥 빼 놓았다.
오바뉴 본부내 식당은 미쓜렝 등급과 상관없는 단체 급식소다. 그럼에도 신선한 야채와 미트, 과일, 해산물로 만들어지는 요리가 저급한 입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악식에 익숙한 무쌍이다. 위기에 처하면 하이에나에 필적할 정도로 악식을 처리할 능력이 있다. 입이 저급한 탓에 웬만한 음식은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입이 저급하다는 것은 음식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군대 단체 급식조차 그에게는 천상의 맛이었다.
프랑스 대표 요리라는 에스카르고(escargot), 푸아그라(foie gras), 흑갈색의 송로(松露:바닷가 솔밭 모래 속에 나는 버섯)로 만든 트뤼프(truffles)등은 구경도 못했다. 그럼에도 다양하게 제공되는 요리와 이국적 맛에 넋이 빠졌다. 무쌍은 프랑스행을 결정한 자신의 선택을 찬양했다.
본부 식당에서 제공되는 요리 중에 무쌍이 유난히 즐기는 요리가 몇 가지 있었다. 라타투이(ratatouille), 부야베스(bouillabaisse), 크레페(crepe), 코코뱅(Coq au Vin)이다. 요상한 이름 탓에 기억하기도 힘들었지만 기억했다는 자체가 입맛에 맞는다는 뜻이다.
라타투이는 가지, 토마토, 피망, 양파, 호박, 마늘 등의 여러 가지 채소와 허브를 넣어 만든다. 모든 재료를 올리브유에 볶아서 만든다. 바게뜨나 샌드위치와 상성이 맞는 요리다.
부야베스는 비린내가 적게 나는 흰살 생선을 주재료로 만든다. 샤브샤브 비슷한 음식이다. 게, 새우, 조개류, 토마토, 아스파라거스, 백포도주, 올리브기름 등을 한꺼번에 넣고 끓이면서 소금과 후춧가루로 조미한다. 비린내 나는 음식을 싫어하는 자신이 무난히 소화할 수 있는 해산물 요리다.
크레페는 얇은 팬케이크 내부에 치즈, 다진 고기, 야채 등의 혼합물을 채운 요리다. 코코뱅은 닭고기와 야채에 포도주를 부어 가며 조린 프랑스 전통 요리다. 한국의 닭도리탕에 견줄 음식이다.
몸은 프랑스에 있지만 그의 정신과 입은 어쩔 수 없는 한국산이다. 고향에서 먹던 음식과 연관이 있거나 비슷한 음식을 찾게 되었다.
촌놈이 언제 그처럼 다양한 재료와 조리법을 거친 음식을 먹어 보았겠는가. 백부 댁에 들어간 아홉 살부터 그의 소원은 잘 먹는 것이다. 신체가 변이된 후로는 더욱 먹거리에 집착했다.
공부는 틀려 버렸지만 잘 먹고 싶은 그의 소원은 이역만리 프랑스에서 이루어졌다. 적어도 먹거리에 있어서는 행복했다. 요리에 관한한 그는 프랑스에 압도당했다.
프랑스 요리에 비하면 한국의 요리는 단순한 편이다. 생식을 고집하는 스승님과 한 요리하는 진순에게 선을 보여주고 싶을 정도였다.
무쌍의 나이 21세, 아홉 살부터 혼자 살았다. 자연히 음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나름 연구도 했다. 요리 실력도 실력이지만 볼 줄 안다. 프랑스 요리의 다양한 재료와 현란한 조리법은 분명 한국 요리보다 한 수 위다.
사실 음식의 맛이란 지극히 상대적이다. 장-루이 프랑드랭의 저서 ‘음식의 역사’를 보면 소스에 대해 서술한 부분이 있다.
15세기경 프랑스에서 고기를 먹을 때 반드시 그린 소스를 쳐서 먹었다. 이 그린 소스 래시피를 보면 입이 딱 벌어진다. 식초 열 스푼에 오일 한 스푼을 넣어 만들어진다. 소스가 아니라 그냥 식초인 셈이다. 현대인이 15세기 그린소스를 바른 고기를 맛본다면 식겁을 하고 뒤로 나자빠지질 것이다.
한국인은 신맛에 약한 편이다. 매운맛, 짠맛에 단련되면 단맛에 둔감해지고, 신맛에 민감해진다. 악식을 마다하지 않는 무쌍도 샤르귀뜨리(charcuterie, 소시지,햄,순대등 돼지고기를 재료로 보존 처리하거나 염장한 가공식품)에 15세기 그린 소스를 곁들인다면 먹는 즉시 화장실로 달려가야 할 것이다.
양념도 마찬가지다. 정향(clov)은 캐러멜 냄새를 풍기는 톡 쏘는 맛의 향신료다. 정향의 향과 맛은 후추보다 훨씬 강하다. 14세기에는 닭 한 마리 요리에 80그램의 정향을 넣었다고 한다. 정향 1그램을 만드는데 정향 꽃봉오리 15개가 소요된다. 닭 한 마리 요리에 정향 꽃봉오리 1,200개가 들어가는 셈이다. 요리에 미친 부유한 중세 귀족이나 먹을 수 있는 요리다.
닭 한 마리에 후추 80그램을 넣어도 눈물을 쏟으며 기절할 판이다. 후추보다 더 강한 정향 80그램이 들어간 닭을 먹는다고 상상해 보라. 그냥 죽음이다. 오바뉴 본부 식당에서 닭 한 마리 요리에 약 0.2그램의 정향을 사용한다. 중세 유럽인의 입맛은 현대 유럽인과 차원을 달리했던 모양이다.
지역적으로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은 기름이 줄줄 흐르는 중국 음식에 쉽게 젓가락이 가지 않는다. 반면에 중국인은 한국 음식이 너무 밋밋하다고 불평한다.
음식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를 받게 된다. 어느 누구도 섣불리 특정 지역의 특정 음식을 폄하할 이유도 없고 그럴 자격도 없다.
음식에는 그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가 녹아 있다. 입맛에 맞지 않더라도 차려진 음식을 맛있게 먹어 주는 것이 매너다. 같은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쉽게 가까워 질 수 있는 첩경이 된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먹어야 산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쌀독에서 인심 나고, 먹거리에 의가 상한다. 그런 점에서 무쌍은 매너 있는 신사요, 환경 적응이 빠른 진화된 인간이라 평가받을 만 했다.
인간은 커뮤니케이션 동물이다. 인간 사회와 문명의 바탕은 커뮤니케이션이다. 바벨탑이 실패한 원인이 바로 커뮤니케이션 불통이 아닌가.
무쌍은 오바뉴에 머무는 이주일 동안 언어 절벽의 고통을 실감했다. 집합시간을 몰라서 허겁지겁하고, 화장실을 찾지 못해 빙빙 돌았다. 안내 책자를 펼치면 검은 것은 글씨고 흰 것은 종이다. 그는 커뮤니케이션이야말로 인간 생존의 첫 번째 조건임을 절감했다.
미리 불어를 공부하지 않은 자신을 한탄한들 늦었다. 운명에 휩쓸려 산 넘고 물 건너 프랑스에 올 줄을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프랑스에 오기 열흘 전부터 벼락치기로 불어 공부를 했다. 한국 수험생들의 비장의 스킬은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프랑스 말은 노래하듯 흘러간다. 한 줄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자신의 귀와 뇌의 거리는 프랑스와 한국만큼이나 거리가 멀었다. 온통 엥, 옹, 욍, 뼁, 숑, 앙등 이응 발음만 들렸다. 도대체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일단 귀에 들려야 뇌가 알아들을게 아닌가?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유럽계 흰둥이 EV들은 물론이고, 얼굴 검은 녀석들도 불어를 대충 알아들었다. 노란둥이인 그는 심각한 인종적, 지리적 열등감에 빠졌다.
한참이 지나서야 흑인과 아랍계가 불어로 소통 가능한 이유를 알았다. 불어가 공식어인 아프리카 프랑스령 태생인 녀석들이다. 그제야 인종적, 지리적 열등감을 일정 부분 벗을 수 있었다. 그가 아시아 극동지역에 산다는 것과 황인종이라는 사실은 언어 습득 능력과 무관했다.
그렇다고 열등감을 온전히 벗어 버리지도 못했다. 불어에 완전 먹통인 놈은 자신을 포함해서 채 열 명이 되지 않았다. 다섯 명의 동양인은 모두 그 열 명에 포함되어 있었다.
프랑스어 교관도 교육에는 건성이었다. 필수 단어만 암기시키고 피 교육자들의 이해도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니놈들이 답답하면 알아서 배워라는 식이다. 무성의함의 극치였다.
이러다간 전투 중에 ‘수그리라’(전투 중에 경상도 소대장이 ‘숙이라’를 사투리로 말해 알아듣지 못한 사병이 총에 맞았다는 유머)에 버벅대다가 날아온 총알에 맞아 죽을 판이다.
무쌍은 독하게 마음먹었다. 점심 식사 후 1시간30분, 6시 저녁 식사 후 자정까지 자유 시간을 몽땅 불어에 투자했다. 일단 커뮤니케이션이 되어야 적응 할 수 있고, 남보다 앞서 나갈 가능성이 생긴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살아남으려면 입이라도 빨리 트여야 했다.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동안에도 단어장은 그의 손을 떠나지 않았다. 다행히 교습지는 영어 발음이 주기되어 있어 암기에 불편은 없었다. 그는 표범과 싸우던 심정으로 회화 집과 결전을 벌였다.
…….
제 팽 (나는 배가 고픕니다.)
젬므 사 (나는 그것을 좋아합니다.)
우 송 레 드왈레뜨 (화장실은 어디에 있습니까?)
레스또랑 봉 마르쉐 (싼 음식점)
빠를레 부 앙글레 (영어를 할 줄 아십니까?)
에스끄 즈 쁘 퓌메 이씨? (여기서 담배를 피워도 됩니까?)
께스 끄 씨? (이것은 무엇입니까?)
세 멕셀랑 델라사므 (정말 맛있습니다.)
쟈프레시 브레망 (정말 감사합니다.)
…….
“크크크크!”
화장실 옆칸에서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프랑스어 교육 담당 보팔 상사다. 창피했지만 창피를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꼬레앙, 고생이 많다.”
교육 시간에 보팔 상사가 낄낄거리며 어깨를 쳤다. 보팔 상사는 기초 회화집과 사전을 무더기로 챙겨주었다.
생소한 음식,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 흰 얼굴과 검은 얼굴, 체구로 압도하는 덩치들, 무쌍은 자신이 전혀 다른 세상에 와 있음을 절감했다.
몇몇 EV들은 대기 생활이 빡빡하다고 불평했다. 무쌍은 군대 생활을 해 보지 않았다. 빡빡한지 헐렁한지 모른다. 그가 느끼기에 오바뉴 본부의 일과는 천하태평이다.
6시에 점호를 받으면 바로 쁘띠 데제네(아침)다. 7시30분에 제식훈련을 시작하고, 12시면 데제네(점심)다. 2시부터 다시 제식 훈련을 하고 6시에 디네(저녁)다. 저녁 식사 후에는 자유시간이다. 9시30분에 취침한다. 이처럼 헐렁한 생활을 빡빡하다고 느낀다면 당나라 군인이다.
맛과 영양이 풍부한 요리를 양껏 먹을 수 있다. 적당히 소화될 정도의 가벼운 훈련만 받으면 된다. 오금공으로 몸을 풀고 편안한 침대에 들어가면 된다. 의사소통 문제만 빼면 이런 태평성대가 없다. 그야말로 격양가를 부르고 함포고복(含哺鼓腹)을 외칠 일이다.
제식 훈련과 교육 외에 다양한 영외 활동이 있다. 외인부대 박물관과 은퇴촌 견학이 커리큘럼에 들어 있다. 그리 지루하지 않은 대기 생활인 셈이다.
외인부대 은퇴촌은 오바뉴 북쪽 60km지점인 푸이로비에 있다. 은퇴촌 거주 노병은 대략 250명이다. 연금을 받아 평안한 노후를 보내는 사람들이다. 이곳에는 별도의 의료진이 상시 근무한다. 묘지까지 별도로 있다. 가히 노병의 천국이었다.
2층이나 3층으로 지어진 노병 숙소는 통풍과 채광이 잘 되도록 꾸며져 있다. 은퇴 노병들은 이곳에서 외인부대와 관련된 기념품을 만들거나 은퇴촌에 딸린 포도원을 경작하며 만년을 보낸다.
노병들이 직접 만든 포도주는 후배 용병들에게 증정되거나 저렴한 가격에 판매된다. 은퇴촌의 시설과 환경은 노인이 되면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훌륭했다. 노병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지만 턱도 없는 이야기다. 필수 생존 단어 습득에 급급한 그로선 꿈조차 꿀 수 없었다.
퇴역 노병에 대한 수준높은 예우는 외인부대가 통상적인 사설 용병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외인부대원은 프랑스군의 일부로 프랑스를 위해 싸우는 정예 병력이다.
부대원은 5년간의 계약기간 동안 프랑스 군법의 적용 을 받는다. 규칙 위반과 허가된 바운더리를 벗어난 행위는 즉각 벌칙의 대상이 된다.
일반적으로 용병은 돈을 받고 대신 싸워 주는 전투 인원을 말한다. 전투원일 수도 있고 경호원일 수도 있다. 용병은 돈과 대가에 따라 움직인다. 그들과 고용주의 관계는 오로지 돈을 매개로 엮여 있다. 즉, 용병은 고용주가 원하는 기간 동안, 또는 특정 사안에 있어 전투나 작전을 완료하고 계약된 대가를 받는다.
그들의 관계는 상호간에 필요한 돈과 전투 기술이 교환되면 종료된다. 심하게 말하면 돈으로 목숨을 사고파는 행위다. 따라서 어제의 고용주가 오늘은 말살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사설 용병은 사병(私兵)이다. 용병에게 애국심을 강요할 수 없다. 본인의 신념 또는 조직의 공동선 역시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사설 용병은 자신의 몸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 제네바 협정에 따른 포로 대우도 받을 수 없다. 포로가 되면 몸값을 지불하지 못해 사살 당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프랑스 외인부대는 용병이라기 보다는 정규군이다.
레종 에뜨랑제가 돈을 받고 싸운다는 점에서는 용병이지만 프랑스 정규 부대 소속이다. 제네바 협정 대상이며 프랑스에 충성한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돈을 받고 싸우는 정규 군인이 외인부대다.
3주째 금요일, 최종 테스트를 통과한 15명이 카스텔노다리행 열차에 올랐다. 훈련소인 에콜은 프랑스 남서쪽 피레네 산맥 북쪽에 있다. 60명중 45명이 탈락했다. 이동 열차에는 다른 파트에서 선발된 EV들도 동승했다.
입대 희망자 대부분이 특수부대 출신이거나 정규군 출신임을 감안하면 테스트 통과 비율이 극악한 셈이다. 에콜에 도착한 무쌍은 다시 일주일을 대기했다. 2주마다 편성되는 훈련 기수 탓이다. 동네 형이 군대는 대기라더니 딱 맞는 말이다.
훈련대기는 그야말로 먹고, 잠자고, 기다림의 나날이다. 무쌍은 식사 때마다 메뉴를 골라 먹는 재미로 무료함을 달랬다. 오늘은 데제네 주식으로 스테이크를 골랐다.
혜영과 함께한 첫 외식이 스테이크다. 당시엔 경양식이 유행했고, 최고로 쳐주는 요리가 스테이크였다. 대구 동성로에 위치한 경양식집은 실망만 잔뜩 안겼다.
무쌍은 악식을 마다하지 않지만 미각 자체는 엄청나게 예민하다. 당시 그가 먹은 스테이크 가격이 자장면 열 그릇 값이었다. 만족도는 자장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맛있다는 기색을 팍팍 풍기며 칼질을 했지만 내심 무척 짜증스러웠다.
육질 자체도 질겼고, 오븐 과정에서 육즙을 제대로 보전하지 못해 퍽퍽했다. 게다가 화학조미료 냄새가 진동했다. 선입견은 무섭다. 스테이크는 맛없는 음식으로 간주되었다. 당연히 그의 메뉴에서 제외되었다.
비싼 요리는 비싼 만큼 맛이 있어야 한다. 고급 한정식 요리가 동네 백반보다 못하면 당연히 성질이 난다. 역전의 가락국수는 1000원어치 만족을 주면 된다. 그 이상의 만족을 주면 맛집이 되어 자리가 부족해진다. 레스토랑의 스파게티는 5,000원어치 만족을 줘야 된다. 그 이하면 욕을 먹는다.
고객은 가격에 비례하는 퀼리티를 기대한다. 동네 떡볶이 집에서 말통 고추장을 사용한다고 불평할 사람은 없다. 자장면 소스에 쇼트닝을 쓴다고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없다. 떡볶이와 짜장면은 싼 음식이다. 고객은 높은 퀼리티를 요구하지 않는다.
무쌍은 오바뉴에서도 스테이크를 먹지 않았다. 카스텔노다리 급식소에서 스테이크를 한 입 베어 물고 바로 선입견을 수정했다. 스테이크는 엄청 맛있는 요리였다.
안심은 쇠고기중 가장 비싼 부위다. 600kg암소를 도축하면 안심은 겨우 10kg내외가 생산된다. 그가 동성로에서 먹은 스테이크는 안심 부위가 아니었다. 양지육을 연육제로 처리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육즙이 보존된 진짜 안심육은 경인할 맛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살짝 익힌 스테이크에 올린 매콤하고 쌉쌀한 머스터드 소스도 일품이었다. 식사량이 많은 그로서는 외인부대 급식소가 바로 천국이었다.
무쌍은 스테이크를 다섯 장 해 치우고 벤치에 앉아 포만감을 즐겼다. 스테이크가 얼마나 부드러운지 입에서 그냥 녹았다. 배워서 스승님께 요리를 해 드리고 싶었다.
“헉!”
무쌍은 헉 소리를 낼만큼 놀랐다.
혜영과 함께 먹고 싶다가 아니라 스승님께 요리를 해 드리고 싶다? 사랑보다 더 강한 것이 정이던가? 고작 일 년이 지났건만 그토록 격렬하던 감정이 잔잔해졌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일년 동안 목탁이 깨져라 두들긴 덕분인지도……
혜영은 미국에서 잘 지내고 있을까?
갑자기 가슴이 저릿해졌다.
숙소 앞 잔디밭은 식사 후 휴식을 즐기는 대기병들로 소란했다. 오바뉴에서 사귄 중국인 장쒼도 잔디밭에 앉아 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장쒼은 필담을 통해 서로 안면을 튼 사이다. 중국은 공산국가다. 적성국이지만 외인부대에서 별 의미가 없는 구분이다. 외인부대원은 프랑스에서 급료를 받으며 프랑스를 위해 싸워야 한다. 출신 국가는 의미가 없어진다.
“점마들은 딸코, 짝귀, 스카? 또 말썽이 나겠구마.”
무쌍의 이마가 찌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