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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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장 사랑보다 정이라네1
무쌍은 들킬세라 자연동화술까지 발휘해서 슬그머니 물러났다. 소크라테스가 말하기를 좋은 아내를 만나면 행복하고 잔소리쟁이 아내를 만나면 철학자가 된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대학자가 정신승리에 해당하는 발언을 했겠는가!
무쌍은 골목을 빠져나오며 시냅스 회로가 타도록 머리를 굴렸다. 행복하게 살고 싶지 철학자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진순의 기분을 풀어주지 못하면 뚜바이부르파가 아니라 철학자가 된다.
진순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외유내강의 전형이다. 진순을 만난 남자는 우월한 몸매와 용모에 세 번 놀라고 야누스적인 성격에 세 번 놀란다.
진순의 몸매는 보는 것만으로 안구가 정화된다. 가는 발목이 지탱하는 큰 엉덩이에 놀라고, 가는 허리가 지탱하는 큰 가슴에 놀라고, 가는 목이 지탱하는 시원시원한 얼굴에 놀란다.
진순은 보살이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백화점에서 물건을 깎아도 시장 좌판에선 절대 깎지 않는다. 환자의 똥오줌을 받아낼 때도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는다. 상대의 입장을 먼저 배려하고, 말 한마디에도 정이 묻어난다. 오죽하면 환자들이 관음보살이라 부르겠는가.
진순은 화통하다. 빈정 상한 일도 곧바로 툭툭 털어버린다. 상대가 사과하면 즉석에서 용서한다. 후배가 전화하면 한밤중에도 나가서 술값을 대신 갚아준다.
진순은 강단 있고 집요하다. 한 몸매와 한 미모를 하는 아가씨가 성격마저 좋으니 벌레가 꼬이기 마련이다. 선을 넘는 순간 보살은 메두사로 변한다.
추근남은 앞차기에 쌍방울을 걷어차이고 엎어치기에 땅바닥과 키스하고, 암바에 팔이 부러진다. 똥집이 한번 틀어지면 강의실과 하숙집까지 찾아가서 묵사발 만든다. 진순은 본래 뼈대가 튼튼한데다 공진파 벌모세수를 받고 호신술까지 전수받았다. 진순에게 찍힌 남자는 용서를 빌든 숨어다니든 선택해야 했다.
무쌍과 진순은 한자릿수 나이 때부터 가시버시 하며 고난을 함께한 사이다. 진순이 무쌍 본인보다 무쌍을 더 잘 안다면, 무쌍 역시 누구보다 진순을 잘 안다.
두 얼굴의 진순이 겨우살이처럼 뿌리박고 남은 세월을 바가지 긁겠다니, 이 얼마나 섬뜩한 소리인가! 기분을 풀어주는 수밖에!
부처님도 여자에겐 때때로 선물을 주어야 신관이 편해진다고 가르치셨다. 골목을 빠져나온 무쌍이 바이크를 타고 득달같이 인애원으로 달려갔다. 천하의 무쌍도 여성학엔 낙제 수준이었다.
무쌍의 행차를 꿈에도 모르는 진순의 사설은 그로부터 삼십 분이나 이어졌다.
“아이고오!”
진순이 응어리진 심정을 축원인지 신세 한탄인지 모를 사설로 쏟아내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목이 버석 마르고 눈앞이 꺼멓게 변했다. 개다리소반에 얹힌 정한수 사발을 들고 통쾌하게 원샷했다.
“끄윽!”
탁배기 한 사발 들이킨 듯 시원스럽게 트림이 나왔다. 머리 양 갈래로 묶은 여고 시절에도 막걸리 한 주전자쯤은 간단히 들이킨 진순이다.
타는 목은 가라앉았지만, 피로가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뼈마디가 해체되고 세포가 줄줄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진순의 하루는 고달팠다. 새벽 세시면 일어나서 고란골 토굴암에 올라 약수를 떠 온다. 토굴암 약수를 다녀오려면 한 시간 이상 걸리지만, 영험하다는 소문에 포기 못 했다. 정한수를 올려놓고 오빠의 무사 귀환을 축원하고, 잠시 눈을 붙였다가 여섯시에 밥 한술 뜨고 출근한다.
간호원 근무는 12시간 맞교대다. 교대 시간은 오전 일곱 시지만, 쫄따구가 정시에 출근했다간 밤새운 고참의 도끼눈에 급살 당한다.
꼬박 12시간 동안 환자를 돌보고, 의사 따까리 노릇에 시달리면 다크 서클이 입까지 처지고, 잇몸이 부어오르고, 눈알은 안구건조증인 듯 뻑뻑하고 충혈된다.
오늘은 난데없이 인근 고등학교에서 식중독 환자가 떼거리로 몰려오는 바람에 점심도 먹지 못했다. 게다가 퇴근 시간에 걸려온 연순의 전화까지 부아를 질렀다.
[언니야, 나 저녁에 메밀 소바 묵고 싶은디.]모닥불에 휘발유가 뿌려졌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것이 언니를 부엌데기로 안다.
[언니가 준 용돈은 염소 주둥아리에 처너었삣나. 국시집에 가서 처묵어라!] [옴마야!]놀란 연순이 덜거덕 전화를 끊었다. 부아가 곱빼기로 치밀었다.
“내가 왜 이러지?”
엉뚱한 인격이 본래의 인격을 잡아먹었다. 퓨리(분노의 여신)가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드는 느낌이다. 세로토닌 과다 분비로 인한 급성 조울증임을 알고 있지만, 해소할 수단이 없다.
조울증의 원인은 흔적없이 사라져서 석 달째 꿩 구워먹은 소식이다. 오빠가 갈 곳은 뻔했다. 아귀 지옥이다. 얼마나 힘들까? 상처는 입지 않았을까? 밥이나 제대로 먹을까? 추위와 더위에 시달리지는 않을까? 일각이 여삼추다. 걱정할 것 없다는 스님 할부지의 말씀이 없었으면 미쳐버렸을 것이다.
불안, 피로, 짜증 삼중주가 조진순이란 청춘을 지옥 불에 던져넣었다. 퇴근길에 누군가가 시비를 걸어주기만 바라는 격렬한 감정이 끓어올랐다.
여자가 시비 걸면 머리끄덩이를 뽑아버리고, 남자가 시비 걸면 고환을 걷어찰 준비를 하고 대로를 활랑활랑 걸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누구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미워도 다시 한 번’ 그렇게 정한수를 올리고 빌었다.
진순은 화장대 면경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 부석부석했다. ‘나는 진순이 풋풋한 얼굴이 보기 좋더라.’ 그 한마디에 구리무 한번 찍어 바르지 않은 얼굴이다.
“하이고, 풋풋하기는 개뿔이! 풋풋이 다 얼어 디졌는갑다.”
진순은 영양 크림을 손바닥에 듬뿍 쏟았다. 화장품을 발라봤어야 알지. 성마른 남정네가 바람벽에 황토 개 바르듯이 얼굴에 처덕처덕 처발랐다. 언제 샀는지 기억도 안 나는 분갑을 찾아서 넓지 않은 방을 까뒤집었다.
“이거는 또 오데 갔노?”
화장대를 뻥 걷어차자 먼지 앉은 분갑이 거짓말처럼 튀어나왔다.
“하여튼 국산은 인간이든 물건이든 처맞아야 하는 기라. 호호홋!”
진순이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분첩으로 얼굴을 난타했다. 무쌍이 겁낼만한 터프함이다. 시작한 김에 연분홍 루주를 꺼냈다. 오빠가 유난히 좋아하는 색이다.
“오빠!”
물기 어린 부름이 절로 새나왔다. 연분홍 복사 꽃잎 날리는 사월이면 오빠 얼굴은 그리움으로 검게 물들었다. 살모사 장씨와 백부의 학대에 불구하고 어머니를 기다리며 꿋꿋이 버티던 오빠다.
“내가 머하는 기제! 나가요 걸도 아이고 이기 무신 도깨비 무논 건너가는 짓거리고!”
연분홍 입술이 그렇게 생경할 수 없었다. 해가 진 마당에 루주를 들고 설치는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도 한심했다. 루주로 면경에 글씨를 썼다.
[오빠는 나쁜 놈!]쓰고 보니 말이 안 된다. 오빠는 나쁜 짓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지우고 다시 썼다.
[오빠는 멍청이!]이것도 아니다. 오빠는 똑똑하다. 장씨에게 시달리는 와중에도 국민학교 도서실에 있던 책을 몽땅 읽은 오빠다. 읍내 중학교에서도 늘 일 등 하던 오빠다. 지우고 다시 썼다.
[오빠는 풍각쟁이!]“구뜨, 바로 이긴 기라!”
진순이 배시시 웃었다.
“오빠는 풍각쟁이야, 오빠는 심술쟁이야, 난 몰라이 난 몰라이. 줄 듯 줄 듯 가슴에 바람만 불어넣고 공자왈 맹자왈 하는 오빠는 풍각쟁이. 난 몰라이 난 몰라이. 오빠는 깍쟁이야. 포도는 영글다 못해 농익고, 깊은 산 옹달샘은 넘치는데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돌아앉은 오빠는 깍쟁이 밥맛이야. 난 몰라이 난 몰라이…….”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이며 한바탕 날구지를 치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내가 이러다 종내 머리에 꽃을 꽂고 말지.”
진순이 우울한 얼굴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생기 넘치던 진순의 청춘은 간곳없이 웬 가부끼 배우가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고 있다.
“이기 머꼬? 내가 와 이유 없이 감정을 낭비하고 있노?”
생각의 중심을 외부에 두지 말고 내부에 두라는 큰 스님의 말씀이 머릿속을 윙 울렸다. 하지만 오빠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다. 외물은 떨쳐내면 되지만 가슴속에 들어있는 복장을 어쩌란 말인가!
“피로해서 그래. 스트레스 때문이야.”
진순은 머리를 짤짤 흔들었다. 정한수는 샘의 첫물을 떠야 한다. 토굴암 약수는 고란골 8부 능선에 있다. 제일 먼저 물을 떠 오려면 새벽 3시에는 집을 나서야 한다. 캄캄한 밤에 랜턴과 물통을 챙겨서 나서면 연순이 난리를 쳤다.
계곡에 굴러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산짐승을 만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언니 몸띠가 강철이냐 잠이나 채워라. 언니가 이러면 오빠가 좋아할 것 같냐. 잔소리가 한 바지게 쏟아졌다. 물론 연순이 말이 옳다. 오빠가 알면 혼 날 일이다.
연순이 말대로 약수만 떠오지 않아도 두 시간은 더 잘 수 있다. 하지만 아귀 같은 전장을 전전하는 오빠를 생각하면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도밖에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진순은 난장판이 된 방안을 정리했다.
“오빠가 불쑥 나타날지도 몰라. 늘 도깨비처럼 사라지고 도깨비처럼 나타나잖아. 오빠도 메밀 소바를 좋아했었지. 아자! 조진순 힘내라.”
진순이 벌떡 일어나서 청바지로 갈아입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무쌍은 인애원 지하에서 귀고리가 들어있는 작은 상자를 챙겼다. 광종의 비 대목왕후가 착용했다는 귀고리다. 돌아오는 길에 막 문 닫는 화원 주인의 뒤꼭지를 잡아채서 장미꽃도 한 다발 샀다. 오글오글하지만 굶주린 암사자를 달래려면 무슨 짓인들 못하랴.
문득 마카롱 한 상자를 들고 눈물짓던 에델이 생각났다. 에델은 천사고 진순은 보살이다. 입꼬리가 자신도 모르게 슬며시 올라갔다. 양손에 보기 좋고 맛좋은 서양떡 동양떡을 쥐고 좋아 어쩔줄 모르는 전형적인 도둑놈이 무쌍이다.
“진순아!”
묵직한 바리톤 목소리가 낡은 기와집을 드르릉 울렸다.
‘머꼬? 진짜 도깨비가 왔나?’
밤새 산고(産苦) 치른 아줌마처럼 축 퍼져있던 진순이 천장의 무늬 세기를 멈추었다.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환청이라도 한 번 더 듣고 싶었다.
“진순아, 이리 오니라!”
장난기 어린 거침없는 목소리, 오빠다. 진순은 정신이 아찔했다.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고 폭죽이 터졌다.
“오빠!”
미닫이문이 와당탕 열렸다. 청바지와 티셔츠로 갈아입은 진순이 맨발로 튀어나왔다.
“하하하, 별일 없었지?”
무쌍이 돌진하는 진순에게 장미꽃 다발을 불쑥 내밀었다. 가슴에 폭 안기려던 진순이 타이밍을 놓쳤다. 진순의 눈썹이 꿈틀했다. 장미꽃 다발 백 개보다 한 번 안기는 게 백만 배 좋다. 그러고 보니 평소 안하던 과도한 퍼포먼스다. 사람이 안하던 짓을 하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
“오빠, 죄지은 거 있제?”
진순은 진순이다. 울먹임을 감추고 목소리에 칼날을 장착해서 핵심을 푹 찔렀다.
“으응, 사실은 며칠 전에 귀국했는데 말이다. 선물을 준비하느라…….”
무쌍이 어물어물했다. 열 가지쯤 준비된 변명이 그렁그렁 고여서 넘치는 눈물에 녹아버렸다.
“선무울? 내가 사지에서 돌아온 오빠에게 선물이나 바라는 골빈 여자로 보여?”
진순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그 그건 아이지만 부처님도 여자에게 선물은 하라고…….”
무쌍은 겨우살이를 올려놓고 각오를 다지던 진순의 모습이 떠올랐다. 선물 상자를 꺼내는 손에 힘이 빠졌다.
‘젠장, 방금 도착했다고 생 까야했는데.’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
“솔직히 말해. 잊었지?”
“네버! 네버! 절대로 잊지 않았거든.”
식겁한 무쌍이 선물 상자를 덥석 쥐여주고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당연히 잊지 않았다. 찔리는게 있어 피했을 뿐.
진순은 다부지게 사려 먹은 가슴이 한순간에 출렁 흔들렸다. 오빠가 어떤 존재인가! 쌈디 아저씨께 들은 바로는 능력이 하늘에 닿고, 수십만 명이 왕으로 추앙하는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빠는 여전히 짚은다리의 무쌍이다. 선물은 아무래도 좋다. 변함없는 오빠가 유일한 선물이자 최고의 선물이다.
“열어보지?”
무쌍이 눈치를 보며 재촉했다. 진순이 눈을 하얗게 흘겼다.
“금 쪼가리 보석 부스러기가 며칠이란 날짜와 바꿀 만큼 가치 있을까?”
“그 그러냐?”
무쌍의 얼굴이 난감해졌다. 작전 실패다.
“열어볼 것은 따로 있거든.”
진순이 다짜고짜 손을 잡아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무쌍은 어어 하면서 정신없이 끌려갔다.
“홀랑 벗어!”
“아직 날도 밝은데?”
“부장님 농담은 웃기지도 않거든. 얼른 벗어!”
추상같은 호령에 지은 죄가 있는 무쌍은 비실비실 옷을 벗었다. 쫄티를 훌렁 벗어젖히자 조각상 상체가 드러났다. 진순의 눈이 몽롱해졌다. 바지를 훌렁 벗었다. 벗는 김에 팬티도 벗었다.
이투리 정글에서 레그바 타란툴라에 물린 덕분에 존슨이 한 차원 진화했다. 타란툴라의 독액 성분인 아트락스는 만드라고라를 능가하는 존슨 강화제다. 에쿠스 존슨이 출렁 튀어나왔다.
‘옴마나, 저기 머꼬!’
기세등등하던 진순이 식겁했다. 간호원으로 근무하면서 남자의 성기를 수없이 보고 주물렀건만 이게 웬일! 가슴이 쿵쿵 뛰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진순의 착각이다. 환자의 존슨과 사랑하는 사람의 존슨은 물성 차체가 다르다.
게다가 얌전한 고양이와 거친 호랑이는 인식 차원이 다르다. 에쿠스의 존슨의 위용이 간호원의 눈을 단숨에 여자의 눈으로 돌려놓았다. 호흡이 가빠지고 얼굴에 피가 몰려 터질 것 같았다.
간호원의 눈으로 오빠가 다치지 않았는지 확인해 보겠다는 옹골찬 자세가 일거에 허물어졌다.
“꺅, 팬티는 왜 벗어!”
진순이 뒤늦게 빽 소리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