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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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장 사랑보다 정이라네3
갑자기 비어있는 옆집 아래채는 왜? 뜬금없는 깜둥이의 등장도 어이없고, 아드레날린 과잉 상태로 휑하니 대문을 나선 진순의 행동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겨우살이처럼 뿌리박고 바가지를 긁겠다고 했는데……. 깜둥이 녀석이 말한 게임의 규칙이 변태적으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스코폴라민(자백제)을 투입해서 여자관계를 추궁하려고? 환각 파티를 벌이려고? 빈집에 묶어놓고 나인 테일을 휘두르려고?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세상엔 그보다 훨씬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부지기 수로 널렸다.
“나는 오빠를 사랑하는 걸까?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걸까?”
대문을 나선 진순이 먹물처럼 검어진 하늘을 올려보며 중얼거렸다. 천중에 박힌 상현달 주위에 불그스름한 달무리가 지고, 검은 구름 한 조각이 달무리 한쪽을 파먹고 있다.
십 년 전, 오빠와 함께 심야의 숲데미 산을 넘을 때 올려다본 하늘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그러고 보니 여름 가뭄이 길었다. 스님 할부지와 오빠는 다른 세상에 한 발을 걸치고 사는 존재다. 비정상의 정상에는 이미 길들만큼 길들었다. 깜둥이의 존재보다 사라지기 전에 던진 한마디의 충격이 더 강했다.
게임의 규칙? 그렇다. 낙동강 봇도랑에서 땀 냄새 풍기는 오빠의 등에 업혔을 때 끝없는 게임은 시작되었다. 사랑은 게임이고 게임은 보정과 조율이 필요하다. 경마도 부담 중량이 있고, 바둑도 접바둑이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으면 스토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집(我執)의 울타리에 갇혀서 제멋대로 오빠를 재단하고 오빠의 행복을 규정지었다. 심신이 지친 오빠를 따뜻이 품어주리라 했던 결심이 어느새 투정하고 매달리는 어리석은 여자의 행태로 변질하였다.
이는 어린아이가 넘어졌는데 아이는 걱정 않고 비싼 옷이 찢어질 것을 걱정하는 전도몽상(顚倒夢想)이다. 오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스스로 세뇌했을 뿐이다. 지친 오빠의 영혼에 때 묻은 영혼의 무게를 추가했을 뿐이다. 스토리 방향이 틀렸다.
“호오, 어리석은 년!”
받기만 하다 보니 생각의 중심이 어느새 자신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바로 법집(法執, 실상을 정해놓고 집착하는 아집)이다. 바지 주머니에서 선물 받은 보석함을 꺼냈다. 세공된 나전 조각이 달빛에 반짝였다. 보석함 자체가 보물이다.
뚜껑을 밀봉한 밀랍을 머리핀으로 살살 긁어내고 뚜껑을 열었다. 뚜껑 안쪽에는 정교한 구리거울이 붙어있고, 한 쌍의 황금 귀고리가 들어있다.
“아!”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동경이 재반사한 황금 귀고리의 영롱한 빛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고풍스럽고 장중한 자태가 척 보기에도 국보급이다.
“차라리 풍각쟁이 오빠처럼 이미테이션이나 사오지.”
진순은 귀고리를 착용하고 동경을 들여다보았다. 날줄 씨줄로 엮인 스토리의 쓰고 시고 짜고 단 맛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싱아 순 한 움큼에 기뻐하던 자신의 모습이다.
뚱한 표정으로 내민 손안에 개물(까마중)이 한 움큼 들어있었다. ‘니 다 무라!’ 퉁명스런 말과 달달하고 쌉싸름한 맛이 오버랩되었다.
말없이 쑥 들이밀던 찔레 새순의 싱그럽고 들척한 맛, 돌너덜을 더듬으며 배 터지게 따다 주던 머루알, 물이 불어난 개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를 때 말없이 들이밀던 등, 황홀했던 들척한 땀 냄새, 십수 년 전에 느꼈던 감각이 사금파리 조각처럼 새파랗게 살아났다.
머리끝이 쭈뼛할 정도로 날카로운 감각이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선물을 들이미는 어눌한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도 변하지 않았을까. 달라진 것은 바로 자신이다.
오빠가 귀국하면 당연히 찾아와야 한다고 생각한 자신이 어리석었다. 오빠가 편하면 그만인 것을, 지친 영혼이 잠시라도 편히 쉴 수 있다면 그만인 것을…….
“오빠, 미안해! 내가 귀신에게 홀렸나 봐.”
진순의 볼 위로 물방울이 돌돌 굴러내렸다. 오빠가 자세한 사정을 말하지 않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설사 다른 여자가 생겼더라도 이미 지난 일이다. 덮어두면 될 것을 자신이 뭐라고 오빠 마음을 불편하게 한단 말인가.
울지 않는 새는 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자신의 행동은 울고불고 안달복달하는 대가리 나쁜 년들의 질 낮은 연출과 다를 바 없다.
스토리! 오빠와 함께 만들고 쌓아온 수많은 스토리!
스토리는 문장으로 쓰이고, 문장은 단어가 모여서 만들어진다. 단어를 한 개씩 늘어놓으면 별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다. 단어와 단어가 어울리면 의미를 전달하는 문장이 되고, 문장이 어울리면 스토리가 만들어진다.
사랑은 스토리다. 러브 스토리라는 말은 선후가 바뀌었다. 행복하려고 살지 않듯이 사랑해서 스토리를 만들지 않는다. 스토리가 쌓여서 사랑을 만든다. 한눈에 반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섹슈얼리즘일 뿐이다. 사랑은 기억으로 쌓아올린 스토리의 총합이다.
하루 내내 자신의 감정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온갖 날구지를 쳤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해결될 일을 법집으로 그르쳤다. 부실한 스토리는 부실한 사랑을, 탄탄한 스토리는 탄탄한 사랑이 된다.
연인이면 어떻고 동생이면 어떤가! 오빠가 편하면 되는 것을.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예쁘고 단단한 스토리를 쌓아놓고는 어리석게도 또 다른 스토리를 탐냈다. 조진순은 오빠가 언제라도 편히 쉴 수 있는 흔들의자, 편히 드러눕는 물침대, 배불리 먹는 식탁이면 족하다.
오늘만이 날이 아니다. 오빠 동생이 여보 당신으로 변하는 법이다. 쇠털같이 많은 나날이 기다리고 있다. 호박 덩굴을 잡아끌면 호박이 딸려온다. 거칠게 잡아당기면 덩굴이 뚝 끊어진다. 울지 않는 새는 울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진순은 옆집 아래채를 월세 오만 원에 일 년간 계약했다. 엄마가 되어도 좋다. 누이가 되고, 친구가 되고, 하녀가 되어도 좋다. 영혼이 짝짝 찢어져서 술안주가 되어도 좋다. 눈앞에 붙들어 놓으면 스토리가 만들어진다. 현재를 움켜잡으면 미래는 저절로 따라온다.
진순은 그렇게 겨우살이의 전설을 만들었다. 훗날 노바토피아 역사서는 조진순 황후의 겨우살이 각성이라고 기록했다.
“오빠는 풍각쟁이, 사랑은 스토리! 이제야 알았네. 마주 보려면 규칙을 바꾸어야 한다네. 마주 보려면 같은 방향을 먼저 보아야 한다네. 사랑은 편하고 좋은 것. 불편하면 사랑이 아니라네. 오랫동안 같은 방향을 보면 절로 마주 보게 된다네. 임을 보아야 뽕을 딴다네.”
진순이 흥얼거리며 대문을 들어섰다. 얼굴에 득의함이 넘쳤다.
“늦었네!”
“응, 옆집 심마니 아저씨 댁에 오빠 거처를 준비해놨어.”
“내 거처? 사부님은 어쩌고?”
“아 놔, 스님 할부지가 언가이 좋아하겠다.”
“끙!”
무쌍이 할 말을 잃었다. 사부는 진순과 함께 살라고 등 떠밀어 낼 양반이다.
“그 그래도 그렇지.”
“불로동에 집을 짓고 있다며? 암자에서 불로동까지 거리가 얼마야.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쓸데없는 짓 말고 여서 살아.”
진순이 무쌍의 연약한 반항을 한 방에 잠재웠다.
“으음, 그래도 이건 아닌데.”
무쌍은 겨우살이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오빠, 생각 같은 거 하지 마. 생각은 내가 할게. 기-승-전-진순! 알지? 내한테 그양 맡기고 오빠는 내가 해주는 밥 먹고 자유를 즐기면 돼. 오케이?”
“어어, 이거 참!”
진순의 박력에 속절없이 밀린 무쌍이 버벅거렸다.
“옆집 아저씨는 심마니야. 아저씨는 약초를 찾아서 전국을 떠돌고 아주머니와 딸 둘이 덩그런 집을 지킨다고. 오빠가 함께 살면 얼마나 든든하겠어.”
진순이 쐐기를 박았다. 정 많고 약자에 약한 무쌍의 약점을 절묘한 시점에 파고들었다.
“끙! 알았다. 어차피 공사도 감독해야 하니까 가까이 살면 편하기야 하지.”
무쌍은 스스로 합리성을 찾아서 항복했다. 무쌍의 거처는 졸지에 진순의 살림집 옆집으로 정해졌다. 지은 죄가 많은 무쌍은 꼼짝 못 하고 진순의 페이스에 휘돌렸다.
남자들은 본인이 여자를 선택한다고 여기지만 착각이다. 똑똑한 여자는 쓸만한 남자를 놓치지 않는다. 거미줄을 쳐놓고 고도로 계산된 시나리오를 꾸며서 남자를 거미줄에 밀어 넣는다.
“그런데 사부님 공양은 어쩌지? 깜둥이가 죽이나 제대로 끓일 수 있으려나.”
“깜둥이가 죽도 끓여?”
“깜둥이는 에너지를 충전하느라 흑표범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본신은 흑표범인 동시에 인간이다.”
“그게 가능해? 명색이 간호원인데 내가 여태까지 배운 해부 생리학이 허망해지네. 도대체 정체가 뭐야?”
“수억 년 전 지구에 호모 콘크레투스라는 지성체가 존재했다. 깜둥이는 콘크레투스의 육체다. 우연히 개념을 얻어서 흑표범이 되고, 에피듐 육체를 얻어서 인간이 되었다. 흑표범 개념도 인간의 육체도 내가 주었지. 그래서 영혼이 통하게 되었지.”
“아 몰랑, 머리 아파. 콘크레투스고 에피듐이고 간에 나는 오빠만 있으면 돼. 내 정신 좀 봐. 육회하고 메밀국수 준비해놨어.”
진순은 더 묻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오빠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호랑이가 밥을 짓고, 사자가 반찬을 만든대도 놀랄 일이 아니다.
“엉? 육회와 메밀국수는 미리 준비해야 하는데 내가 올 줄 어찌 알고?”
“흥, 미워도 늘 준비해놨어. 언제 올지 모르잖아.”
진순은 식재료에 월급이 몽땅 들어갔다는 말을 꿀꺽 삼켰다.
“그러냐!”
무쌍의 목소리가 축 처졌다. 언제 올지 모르는 오빠를 위해서 끼니때마다 식사 준비를 했다는 소리다. 듣도보도 못한 정성이다. 물로 배를 채우던 그때의 모습이 그토록 가슴 아팠던가?
‘에델, 네가 양보해야 할 것 같다.’
무쌍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진순의 겨우살이 작전이 순항에 들어갔다.
진순은 다시마와 가다랑어를 우려낸 육수에 간장, 청주, 미림, 소금으로 간해서 소바 국물을 만들었다. 방앗간에서 뽑아온 메밀면을 우르르 삶아서 준비하고, 산마와 무를 강판에 갈아서 종지에 담았다. 어렵게 구한 고추냉이를 강판에 곱게 갈아놓고, 돌김을 실타래처럼 채를 쳤다. 재료를 다루고 돌아치는 솜씨가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흔히 메밀국수를 일본 요리로 알고 있지만, 원류는 한국이다. 일본의 음식 사전인 본산적주(本山荻舟)에도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에도시대 초기, 조선의 승려 원진이 동대사에 건너와서 밀가루와 메밀가루로 섞어서 면을 뽑는 방법을 가르쳤다. 이로써 일본에 메밀국수가 보급되었다.]일본은 16세기 메밀국수가 전수되기 전에는 메밀을 떡처럼 뭉쳐서 간장에 찍어 먹었다. 거의 아프리카 수준이었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의 트라우마로 인해 우리 것의 소중함을 잊고 깎아내리기 바쁘다. 정작 우리 것을 잃어버리고 재수입하는 것이 소바기리(메밀국수)뿐일까.
무쌍의 입이 쩍 벌어졌다. 육회와 메밀국수만이 아니다. 불고기, 육회, 너비아니, 산적 구이, 김치찌개, 그리고 각종 나물 반찬……. 요리장 이지하나도 짧은 시간에 이런 상차림을 낼 수는 없다. 역시 진순이다.
무쌍은 행복했다. 근 백일 만에 볼이 미어터지도록 밥을 퍼먹고 고기를 뜯었다. 신은 에델에 허락하지 않은 요리 재능을 진순에게는 넘치도록 부여했다.
친구들과 심야 영화를 보고 귀가한 연순은 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언니가 좋아죽겠다고 깔깔대는 웃음,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 볼 것 없이 무쌍 오빠가 귀국했다.
“흐흐흐, 물오른 노처녀가 좋아 죽네! 죽어.”
연순은 친구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빠를 보고 싶지만, 지금 들어가서 분위기를 깼다간 언니에게 맞아 죽는다.
그날 밤 연순의 말처럼 물오른 숫처녀가 좋아죽는 밤을 보냈는지 손톱으로 허벅지를 쥐어뜯는 밤을 보냈는지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어쨌든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는 진순의 얼굴은 한없이 밝았다.
무쌍은 심마니 아저씨네 아래채를 독채로 사용하고 진순이 풀 방구리 쥐 드나들 듯 드나들며 챙겼다. 선남선녀는 그렇게 살림 아닌 살림을 차렸다. 집주인 아주머니는 열녀 났다고 혀를 내두르고, 장성한 두 딸은 질투로 눈을 번득였다.
무쌍의 일과는 단조로웠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앞산을 오른다. 대덕식당 앞에서 등산로를 피해서 대덕산으로 오른다. 대덕산에서 청룡산을 거쳐서 가창 저수지를 돌아오면 대략 70분이 소요된다.
숙련된 등산객이 24시간 꼬박 걸어도 부족한 코스다. 등산객들 사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맹수가 앞산에 산다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아침 운동을 마치면 진순이 차려준 아침을 먹고 진순이 싸준 도시락을 들고 등교한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암자와 공사 현장을 들렀다. 무쌍의 돈질에 불로동 건축공사는 무지막지한 속도로 진행되었다.
구내식당의 메뉴는 제일 비싼 오므라이스도 650원이다. 허기진 배를 채우는 본연의 목적에 충실할 뿐, 맛을 음미하고 즐길 수준은 절대 아니다. 진순은 학교 구내식당의 부식이 얼마나 부실한지 잘 안다.
무쌍은 신진대사가 엄청난 만큼 대식가다. 진순은 칼로리로 계산하면 무려 20,000kcal에 달하는 7단통 찬합을 도시락으로 챙겼다. 에델은 죽었다 깨나도 불가능한 진순만의 스킬이다. 가물치와 다스베이더로 유명한 무쌍은 무지막지한 7단통 도시락으로 인해 또한 번 유명세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