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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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장 사랑보다 정이라네6
숙명통(宿命通)에도 단계가 있다. 부처와 불보살만이 본인과 범부중생, 세상 미물의 전생과 미래를 자유자재로 들여다볼 수 있다. 도통한 인간은 과거의 업장과 현재 상태를 종합해서 미래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과거의 사소한 습관과 생각이 모여서 현재를 만들고, 현재의 총합이 미래다. 운명이나 숙명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본인의 업장이 운명을 만들고 운명이 모여서 숙명이 된다는 소리다.
“설마요! 사부님께서 알고도 베풀지 않는 놈은 무식해서 못하는 놈보다 열 배는 나쁜 놈이라고 하셨기에……. 참한 보살과 달밤에 산길이라도 걸으려면 근골도 튼튼해야 하고 정신도 맑아야지요. 적당한 운동은 치매 예방에도 좋다고 하지 않습니까. 헤헤헤!”
무쌍이 계면쩍은 웃음을 흘렸다.
“예끼 놈! 물 건너가서 주둥이만 단련했구나.”
지팡이가 여지없이 정수리에 떨어졌다. 툭- 둔탁한 타격음이 울렸다. 단단한 두개골을 때리는 소리가 아니라 두툼한 근육을 때리는 소리다. 대우선사의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지팡이가 저절로 궤도를 바꾸어 어깨를 내리쳤다.
“헤헤헤! 안 그래도 미욱한 놈인데 연약한 머리를 아껴야지요.”
“하이고, 니놈 두개골이 연약하다고? 파키케팔로사우루스(박치기 공룡)가 울고 가겠구먼. 네놈이 요상한 재주를 얻었구나.”
“미욱한 제자가 뒤늦게 무아(無我)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에 얻은 작은 재주에 불과합니다. 지금까지 제자는 나 자신의 본질을 타인의 인식에 의지해서 이것저것을 구분하고, 좋고 나쁨을 경계 지었습니다. 무릇 있는 바의 상을 보되 상이 아님을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 비상 즉견여래!”
문득 거지새끼 취급하며 쫓아내던 혜영의 생모 이민주 여사가 생각났다. 천박한 영혼을 가진 여자, 허영과 욕심에 눈이 가려진 여자, 저급한 쾌락을 자유라 여기고 방종을 용기로 착각하는 여자였다. 혜영과 헤어진 직접적인 계기가 이민주 여사다. 결코, 한 식구가 될 수 없다고 여겼다.
그처럼 천박한 여자의 뱃속에서 혜영이 같은 순수한 영혼이 나왔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유전자요. 유전 법칙이었다. 어리석었다. 그녀도 허상에 갇혀서 자신을 보지 못하는 불쌍한 인간이다. 허상에 매달려 분노한 자신도 허상이었다. 모든 것이 헛된 망상이었다.
“오호, 선재 선재로다. 사부가 내린 사구계를 마음에 담아 두기는 했던 모양이로고!”
대우선사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무쌍은 가슴이 따뜻해졌다. 사부의 미소가 봄볕처럼 몸을 휘감았다. 그렇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은 무너지는 자아를 지탱해준 진언이었다. 늘 씹고 참오하는 중에 살심을 억제하고 광기를 다스리고, 작은 깨달음까지 얻어서 오늘에 이르렀다.
“네, 사부님. 실천궁행의 작은 뜻을 얻어 초심을 잃지 않고자 본채를 응심제라 칭했습니다.”
“마음에 화답한다? 아상을 깨달았구나. 선재로고! 가르침은 누구나 줄 수 있지만, 아무나 깨칠 수는 없는 법이거늘. 나무아미타불!”
대우선사가 눈을 감고 불호를 외웠다. 생각할수록 통절했다. 천하의 대기가 불기가 아니라니! 우주의 섭리는 참으로 헤아리기 어려웠다.
“제자는 감히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참뜻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알고자 노력할 따름입니다. 궁구하다 보면 사부님의 바짓가랑이라도 잡을 수 있겠지요.”
“니놈이 외국물을 자주 먹더니 구공이 화경에 달했구나. 헐헐헐.”
대우선사가 파안대소했다. 이래서 명석한 제자보다 속 깊은 제자를 키우는 재미가 더 쏠쏠하다고 했다. 제자는 자식이다. 아니 자식보다 소중하다. 자식은 장성하면 품을 떠나지만, 제자는 스승을 가슴에 품고 일생을 살아간다.
“손에서 총을 놓을까 합니다. 피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이번에 집을 지은 이유도 정착하고 싶어서입니다. 돈은 벌 만큼 벌었습니다. 제주도를 통째로 사고도 남을 겁니다. 벌었으니 써야지요. 그늘진 곳에 등불을 비춰주고, 바람 부는 곳에 벽을 세워주고 싶습니다.”
대우선사가 물끄러미 제자를 바라보았다. 훌쩍 커버린 제자가 기껍고, 애달픈 제자의 운명이 가슴을 후볐다. 자신의 세수가 벌써 미수(米壽, 88세)다 지난해에 왕산해야 했지만, 제자 때문에 상수(上壽, 100세)로 미루었다.
“무아야, 불법과 인연이 없는 너에게 하릴없이 승복을 입히고, 염불하고, 무예를 전수한 이유는 네 심성에 뿌리내린 화기, 지옥겁화를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일전에 말했듯이 네 전생은 아수라다. 아수라의 기운을 항아사라 한다. 강대함이 끝없으니 제석천의 무량수 기운만이 당적 할 수 있다. 내 미력한 법력으로는 강대한 기운을 누를 수 없었다. 지옥겁화는 칠살의 총합이다. 뇌에 침습하면 광인이 된다. 너 같은 강자가 미쳐서 날뛰면 그 누가 말릴 수 있겠느냐? 너를 용병으로 떠나보낸 이유는 제어할 수 없는 지옥겁화를 배출하기 위해서였느니라. 스승의 능력이 부족해서 너를 지옥으로 인도했으니 내 죄가 크고도 크도다. 나무아미타불!”
불호를 외는 대우선사의 음성에 물기가 묻었다. 고난의 벽을 깨고 아상을 깨우친 제자가 너무나 대견했다.
“사부님, 크흐흐흑!”
감정이 복받친 무쌍이 사부를 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사부의 심모원려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지옥겁화라 불리는 에피듐의 광폭한 살기를 배출하지 못했으면 오셀롯보다 더 끔찍한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제자를 지옥에 밀어 넣고 전전반측했을 끝없는 정에 가슴이 무너졌다.
“어허, 세상을 오시할 만큼 큰놈이 울기는 왜 울어, 이놈아, 비싼 가죽 잠바에 콧물 묻는다. 노납이 동대문 새벽 시장에서 두 시간이나 눈총받으며 뒤져서 겨우 건진 물건이니라.”
“사부님, 이건 짝퉁이고요. 제자가 에르메스 진품으로 쫙 뽑아드리지요. 하레이에 번쩍이는 경적을 달고 윤기 좔좔 흐르는 가죽 잠바를 입고 산이고 들이고 막 밟으십시오. 치마 두른 물건들은 전부 꺼벅 죽을 겁니다.”
“클클클! 하레이 뒷자리에 쭉쭉빵빵이를 태우고 달리면 불알 달린 놈들이 부러워 죽겠지. 생각만 해도 통쾌하구나.”
대우선사가 철없는 십 대처럼 방방 뛰었다.
“사부님, 제자는 지옥겁화를 벗어난 겁니까?”
에피듐의 광기는 DNA에 새겨진 본성이다. 머릿속에서 둥둥거리는 북소리, 죽이라는 외침,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피, 무아지경에서 벌인 수차례의 홀로코스트, 두려움이 늘 마음 한구석에 찝찝하니 눌어붙어 있었다.
“네가 아상을 깨닫는 순간 살기와 광기는 무의식 깊숙이 숨었다. 무아야, 조실부모한 네가 고약한 백부모의 학대와 지옥겁화를 이겨냈음은 네 본성이 순후하고 의지가 강한 덕분이지만, 엄친과 자당의 깊은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부모님의 사랑을 잊지 않는 한 이성을 잃고 날뛸 일은 없을 듯하구나. 살계에 대해서는 마음쓰지 말거라. 업장은 마음에 달렸느니라. 저어함이 없으면 업장도 없느니라.”
대우선사가 닭발 같은 손으로 무쌍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의발을 잇지는 못하지만, 세상을 조율할 큰 재목을 깎았으니 여한이 없었다. 게다가 요렇게 귀여운 놈이라니!
“사부님의 은혜 또한 부모님의 사랑과 다르지 않습니다.”
무쌍이 깊이 고개 숙였다. 사부와 인연이 닿은 덕분에 지금의 자신이 있다. 사부의 품은 고향이고, 아버지고, 어머니였다. 에피듐의 광기를 품어줄 만큼 넉넉했다.
“저놈은 왜 저래?”
대우선사가 쿨쩍거리는 깜둥이를 돌아보았다. 잘 생긴 안면이 눈물로 흥건히 젖었다. 깜둥이가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사부님, 이것이 인간의 감정이었군요. 인간으로 만들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깜둥이가 합장했다. 처음 자아를 얻었을 때는 자신의 존재를 자각했을 뿐이다. 동방불패와 친구가 되었을 때도 강력한 동질감, 개미나 벌의 집단 지성과 유사한 감정이었다. 이처럼 무엇인가 저리고 뿌듯하고 충족되는 감정이 아니었다.
등을 긁고 싶을 때 손이 닿지 않는 부분이 있다. 바로 그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기분이다. 무엇이든 주고 싶다. 없는 내장까지 홀딱 꺼내서 주고 싶다. 가슴이 뛰고 뇌가 쾌감으로 부르르 떨었다.
“공공아,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조건은 공감이니라. 타인의 고통과 만족감, 행복을 느낄 수 있고, 공유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이 유일하다. 신은 만유의 공감 능력을 갖춘 존재다. 그래서 인간은 신이 될 씨앗을 품고 있느니라.”
대우선사가 반들거리는 깜둥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우선사의 넓고 깊은 품은 천하의 강자인 무쌍과 깜둥이를 넉넉히 품어주었다.
“가자꾸나. 연못을 팔 자리를 지정해주마.”
대우선사가 본채 우측 대나무 숲을 향해서 휘적휘적 걸어갔다. 명아주 지팡이가 휘릭 날아갔다. 부아악- 지팡이가 홀로 길쭉한 타원을 그렸다. 대략 백여 평 남짓한 넓이다. 땅을 깊숙이 파헤친 지팡이가 휙 날아와서 대우선사의 손으로 들어갔다.
“수맥이 막혀 있는 곳이다. 확인해 보아라.”
두웅- 공간지각력과 공진파가 동시에 발동했다. 의식의 경계가 땅속 깊이 확대되었다. 700m 지점에서 밀도가 달라졌다. 쿠르르 맥동하는 기의 흐름이 잡혔다.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할 기가 첫 고삐 꿴 송아지처럼 아우성쳤다.
“흐름이 막혔네요. 굉장히 탁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지하수는 아닌 것 같은데요.”
“간교한 쪽발이 술사가 이곳에도 장난을 쳤느니라. 공공아, 느껴지느냐?”
“네. 사부님!”
흐물흐물 녹아내린 깜둥이가 순식간에 땅속으로 사라졌다. 슛- 깜둥이가 꼬리 둘 달린 장대한 고양이를 물고 솟아올랐다.
“네코마타!”
무쌍이 황당한 눈으로 깜둥이를 쳐다보았다. 깜둥이는 강력한 물리력을 행사하지만 네코마타는 영력이 모여서 만들어진 요괴다. 물리력이 통하는 존재가 아니다.
퍽- 깜둥이가 네코마타를 땅바닥에 태질쳤다. 스스스- 네코마타가 급속히 덩치를 불렸다. 순식간에 황소만큼 커졌다. 까르르- 네코마타가 털을 곤두세우고 시뻘건 눈알을 번득였다.
“건방진 것!”
깜둥이가 입을 쩍 벌렸다. 콰르르- 강력한 ELF에 대기가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푸스스- 도약하려던 네코마타가 산산이 으깨져서 대기 속으로 사라졌다.
“헐, 물리력에 영력을 가미한 겁니까?”
깜짝 놀란 무쌍이 사부에게 물었다.
“공공은 미욱한 누구와 달리 백지 상태더구나. 백지에는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느니라. 노납이 척사 인(印)을 박았느니라.”
“잘하셨습니다.”
무쌍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가 세상이 혼탁해지는 기미를 모를 리 없다. 깜둥이에게 척사법술을 가르쳤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물길을 막고 있던 쓰레기를 치웠으니 지하수 수위가 높아졌을 것이다.”
무쌍이 공진파로 지하를 더듬었다.
“지하 180m에서 수기가 느껴집니다.”
“흠, 장수혈이 존재하는 곳답게 맑고 생기있는 물이구나. 음용수로는 최고의 상수(上水)다. 집터는 정말 잘 잡았어.”
“지하수 수질까지 알 수 있십니꺼? 대단하십니다. 지하수 업자로 나서면 돈을 갈퀴로 끌겠심더.”
“이놈아, 그래서 사부 아니냐. 헐헐헐!”
무쌍은 낄낄거리는 사부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공간지각력과 초상감각에 우쭐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잡귀가 풍도대제앞에서 재롱떤 꼴이다.
“계곡 물도 연못으로 돌릴까요?”
“아니다. 수기는 풍부할수록 좋다. 계곡 물과 지하수는 연원이 다르니 별도로 하거라. 계곡 물을 섞으면 녹조가 발생한다.”
“그라지예.”
“무아야, 거듭 말하지만, 너에겐 수기가 필요 하느니라. 연못에 정자를 짓고 자주 머물도록 하거라. 훗날 네가 위험에 처했을 때 구명의 술은 물에 있느니라. 큰물을 가까이하거라.”
뜬금없는 당부에 무쌍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사부님이 걱정할 만한 위험이 있습니까?”
“너와 깜둥이 같은 존재가 이 세상에 나왔을 때는 그만한 연유가 있는 법이다. 네놈은 요절할 상이 아니니 에둘러 걱정할 필요는 없느니라.”
“걱정 안 합니다. 억겁 윤회 속에 한순간 스쳐가는 이승 살이 아입니꺼. 크게 연연치 않심더.”
“허, 이놈 말 본새 보게.”
딱- 명아주 지팡이가 여지없이 머리통을 두드렸다. 염력이 절로 발동해서 궤도를 비틀었지만, 이번에는 먹히지 않았다.
“아이고오!”
“이놈아, 하수에 두 번 속을 줄 알았냐? 땡중도 못 되는 행자승 주제에 도 통한척하지 말거라. 노납이 보기에 심히 민망하구나.”
“지팡이에 담긴 근력을 보이끼네 사손이 새끼 깔 때까지 끄떡 없겠심더.”
“이놈 보게. 인제 보니 암자를 넘겨받으려고 사부가 얼릉 죽기를 바랐었구나.”
“그럼요. 요새 부동산이 천정부지로 오른다 아임니꺼. 축구장보다 넓은 암자 마당에 삐까번쩍하게 절을 올리마 시줏돈이 팍팍 들어올낌니더.”
“예끼 놈, 니놈 주기 싫어서 십 년은 더 살란다.”
대우선사가 입을 삐죽거렸다.
‘사부님, 오래 사셔야 합니데이.’
무쌍은 가슴이 저릿했다. 사부가 말씀한 10년은 무심결에 튀어나온 기간이다. 이 넓은 세상에 친인은 사부와 하동댁밖에 없다. 사부가 돌아가시면 그 공허함을 무엇으로 메꿀 수 있을까. 어디 가서 응석을 부릴 수 있을까. 갑자기 세상이 회색으로 변하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무아야, 연못을 추가해도 네놈의 화기와 균형이 맞지 않는구나. 음기는 곧 수기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