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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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장 해묵은 인연5
복중에는 입술에 붙은 밥알도 무겁다는 속담이 있다. 더위에 짓눌려서 만사가 귀찮다는 소리다. 무쌍은 목침을 베고 퍼질러 누워서 손에 든 부채를 살랑거렸다. 부채가 움직일 때마다 딱딱 소리가 났다. 낮잠을 방해하는 파리가 격추당하는 소음이다. 정선이 진경산수화를 그려넣은 합죽선이 파리채로 전락한 끔찍한 현실이다.
양풍수에 맞추어 건축된 사랑방은 대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만으로 충분히 시원했다. 게다가 뒤통수를 받친 목침은 백두산 주목의 속을 긁어내고 표면을 투각한 납량침이다. 머리맡에는 진순표 수박 화채와 살얼음이 낀 식혜가 냉기를 뿌리고 있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도 아니고,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정글도 아니다. 방만한 자세는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의지를 팍팍 뿜었다. 이만하면 함포고복, 안빈낙도, 태평성대다.
“오빠, 법원에서 등기 왔어요오~”
까랑까랑한 연순의 목소리가 안빈낙도를 걷어찼다. 무쌍이 벌떡 일어났다.
“선임 결정문이 왔구마.”
무쌍이 내용물을 확인하고 환하게 웃었다. 번문욕례(繁文縟禮)가 법정후견인 선임 허가서 한 장으로 일단락된 셈이다. 무쌍은 곧바로 전화통을 잡았다.
“형님, 쌍입니다. 행정절차는 끝났심더.”
토요일 밤늦은 시간 대구역, 승객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역무원이 개찰구 차단봉을 철커덕 걸었다. 눈 빠지게 기다리던 무쌍의 인상이 찌그러졌다.
“오빠, 저기!”
진순이 계단을 가리켰다. 곰처럼 건장하고 산적처럼 험악한 남자가 커다란 짐보따리와 캐리어를 끌고 막 계단에 올라섰다. 무쌍의 얼굴이 환해졌다. 무호형이다.
살집 좋은 여자와 얼굴이 통통한 계집아이가 뒤따라 나타났다. 무쌍의 얼굴이 웃는 듯 우는 듯 일그러졌다. 빨간 가방을 메고 울새처럼 통통 튀듯이 걷는 눈 큰 계집아이, 훌쩍 커버렸지만, 유아 때 얼굴이 그대로 남은 미나다.
빨간 에나멜 구두와 깡총한 프릴 치마, 하얀 나시 티가 아프게 눈을 찔렀다. 한 눈에도 시장바닥의 싸구려 물건이다. 비싼 옷을 입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여행의 즐거움일까? 빠빠를 만난다는 기대일까? 계집아이의 얼굴은 밝고 걸음은 가벼웠다. 깡충거리던 걸음이 딱 멈추었다. 커다란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웃는 듯 우는 듯 얼굴을 실룩이던 계집아이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빠빠!”
무쌍은 울컥했다. 한마디 부름에 담긴 온갖 감정이 일시에 밀려들었다. 기쁨, 서러움, 분노, 외로움, 슬픔……. 무쌍이 양팔을 잔뜩 벌렸다.
계집아이가 개찰구 차단봉 아래로 다람쥐처럼 빠져나왔다. 왼쪽 신발이 벗겨지고, 오른쪽 신발이 벗겨졌다. 아랑곳하지 않고 맨발로 달려들어 포탄처럼 가슴에 처박혔다.
“으앙!”
“우리 코알라, 마이 컸구나.”
무쌍의 목소리가 떨렸다. 진순이 손수건을 꺼내서 눈꼬리를 찍었다. 인간은 정으로 살아간다는 오빠의 말이 새삼 가슴을 울렸다. 무호 내외는 멀뚱하니 서서 청년과 계집아이의 격렬한 재회를 바라보았다.
“빠빠, 미워!”
미나가 여린 팔로 무쌍의 목을 단단히 감았다. 무쌍은 가슴이 아렸다. 어린 마음에 기다림의 시간이 길었던 것일까.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기억을 잃고 아침가리 골에서 보낸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어린 미나는 날만 밝으면 찾아왔다.
자신이 살던 귀틀집과 홍천 할머니 댁은 50m쯤 떨어져 있다. 홍천 할머니가 기함했지만, 눈보라 치는 겨울에도 기어코 찾아왔다. 방문을 열고 나오면 다짜고짜 등에 달라붙었다. 그토록 정이 고팠을까! 무쌍은 빨리 데려오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이기 얼마 만이고. 얼굴 본지 오 년 만이지.”
박무호가 무쌍의 어깨를 두드렸다. 인제 지서의 직원들은 박무호와 박무쌍이 진짜 형제인 줄 안다. 이름도 비슷하고 둘 다 키 크고 건장하기 때문이다.
“무심한 놈이라 할 말이 없심더.”
무호가 껍질을 벗길 듯이 훑어 보았다.
“사나이가 되었구나!”
“아직 멀었심더.”
무쌍이 씩 웃었다. 5년 만에 만난 의형제치고는 썰렁한 대화다. 남자들의 만남은 원래 그렇다.
“형수님, 얼라 키우느라 고생하셨심더.”
“아녜요. 아녜요.”
얼굴이 붉어진 무호의 아내, 교동 댁이 손사래를 쳤다. 무쌍의 인사를 받을 만큼 그녀의 얼굴이 두껍지 못했다. 그녀는 자식을 사랑하고 박봉으로 살림을 꾸려가는 억척스러운 한국 아줌마일 뿐이다.
“얼라들은 우야고 두 분만 내려 왔는교?”
“외할머니 집에 맡겨놨다. 애들을 더운 날씨에 끌고 다니기가 그렇더라고.”
형의 의사가 아니라 형수의 의지일 것이다. 미나가 입은 싸구려 입성을 보면 알만했다.
“갑시다.”
“그래 얼른 가자. 대구 날씨가 지랄이구먼.”
무호가 손수건으로 척척해진 목을 닦아냈다. 송알송알 돋는 땀방울이 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공주님 반갑습니다.”
알리 집사가 무쌍의 품에 안겨있는 미나에게 허리를 숙였다.
“나 공주 아니에요.”
깜짝 놀란 미나가 급히 부정했다.
“이제부터는 공주님입니다.”
알리 집사가 빙그레 웃었다. 푸근한 웃음에 경직되었던 미나의 얼굴도 풀렸다. 진순은 속으로 웃었다. 집사님의 말이 수사적 표현이 아닌 사실임을 아무도 모른다.
무호 부부는 눈이 둥그레졌다. 외제 승용차와 후덥지근한 날씨에 양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대기 중인 외국인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나, 삼촌 차예요?”
광택이 번들거리는 시트로앵에 못 박혀있던 교동댁의 눈길이 무쌍을 향했다. 무호도 혼란스러웠다. 운전기사로 보기엔 너무나 이질적인 외국인 노신사와 번들거리는 외제 승용차는 누더기를 걸치고 눈에 파묻혀 죽어가던 무쌍과 매치되지 않았다.
80년대의 한국에서 외제 승용차를 탄다는 사실만으로 최상위 계층이다. 무쌍은 의문이 가득한 무호 내외의 눈길을 무시하고 지시했다.
“알리, 집으로 간다.”
“옙!”
알리 노인이 운전대를 잡았다. 무쌍이 조수석에 앉자 진순이 미나를 안고 뒷좌석에 앉았다. 미나는 5년간 함께 살아온 무호 부부를 제쳐놓고 진순에게 달라붙었다.
‘쯧, 잘 좀 챙겨주지.’
무쌍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이들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귀신같이 알아보는 재주를 가졌다. 또한, 감각적으로 권력의 추가 기울어진 쪽을 알아본다. 돌아보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와! 미끄러지는 것 같아. 버스처럼 흔들리지도 않아.”
미나가 환성을 질렀다. 미나는 눈 오는 날 강아지처럼 잠시도 가만있지 못했다. 암 레스트를 잡고 무쌍의 귀에 입을 대고 끝없이 조잘거렸다.
“이거 빠빠 차야?”
“응, 이제부터 미나가 타고 다닐 거야.”
“와, 진짜? 빠빠가 태워주는 거야?”
“응, 빠빠가 바쁘면 알리 아저씨와 진순이 언니가 태워 줄 거야.”
“외국인 할아버지 이름이 알리야?”
“응, 알리 아저씨라고 부르면 돼.”
“알리 아저씨, 저 미나예요.”
“알고 있습니다. 공주님!”
운전대를 잡은 알리가 슬쩍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에이 또 공주래. 언니, 난 미나!”
미나가 진순을 말끄러미 올려보았다. 무쌍이 말한 진순과 자신을 안고 있는 언니를 순식간에 연결하는 영악한 계집아이다. 그만큼 눈칫밥을 먹었다는 의미다.
“호호, 나는 진순! 아유 귀여워라.”
진순이 막 익어가는 복숭아처럼 싱싱한 볼을 살짝 꼬집었다.
“언니는 빠빠 색시야?”
‘윽! 쪼그만 게 못하는 말이 없어.’
예상치 못한 공격에 진순이 흠칫했다.
“미나는 왜 빠빠라 불러?”
진순은 영악한 계집아이의 질문을 슬쩍 비켜갔다.
“빠빠는 그냥 빠빠야.”
“응, 그랬어! 언니는 빠빠와 한집에 사는 가족이란다.”
진순은 동지의식을 느꼈다. 오빠도 아니고 아빠도 아니고 그냥 빠빠란다. 자신도 그렇다. 오빠도 아니고 신랑도 아니고……. 그냥 오빠다.
“그럼 미나는 빠빠와 언니와 함께 사는 거야?”
“그러엄. 이제부터 다 함께 살 거다. 미나야, 학교를 옮길 건데 괜찮아?”
무쌍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응, 빠빠와 함께 살 건데 뭐 어때. 친구는 다시 사귀면 돼.”
미나가 배시시 웃었다.
“어이쿠, 이 녀석 다 컸구나.”
무쌍이 손을 돌려 미나의 볼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볼살에서 전해지는 감각에 가슴이 저렸다. 무호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집에서 거의 말이 없던 아이가 저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아우와 비교할 수 없이 쪼잔한 자신의 인덕을 보는 듯했다
지잉- 대문이 좌우로 갈라졌다. 승용차가 대문을 통과하자 무호 내외의 눈이 화등잔으로 변했다. 주말을 맞아 모여있던 오자매가 우르르 뛰쳐나왔다.
“우와, 니가 미나구나.”
“예쁘게 생겼네.”
“대박, 엄청 귀엽다.”
자매들의 관심은 온통 미나에게 쏠렸다. 입이 쩍 벌어진 무호 내외는 없는 사람 취급받았다. 주인공이 된 미나의 눈이 흥분으로 반짝였다. 이렇게 열렬한 관심을 받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미나입니다.”
처녀들은 공손한 배꼽 인사에 꺼벅 넘어갔다. 미나는 오자매에게 납치되어 순식간에 사라졌다. 진순과 연순이 서둘러 늦은 저녁을 준비했다.
“이야, 내 평생에 이렇게 큰 식탁은 처음 보네.”
무호는 식탁에 앉아서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스무 명이 넉넉히 앉을 수 있는 식탁은 듣도보도 못했다.
“세상에나, 식탁이 우리 집 거실보다 크네요.”
“에이, 뭔 말씀을. 형님댁이 얼마나 넓은데요. 마당이 넓어서 애들 키우기도 좋고요.”
“집만 넓으면 뭐해요. 옛날 집이라 불편하기만 하고 쓸모가 없어요. 차라리 작은 아파트가 좋아요.”
교동 댁이 손사래를 쳤다. 무호의 얼굴이 굳었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 교동 댁은 평정을 잃었다.
“시멘트 덩어리 아파트보다야 한옥이 좋지요.”
“삼촌 집 같은 한옥이면 백배 천배 좋지요. 삼촌, 어떻게 돈을 벌었어요?”
무쌍은 오랜만에 만난 형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들이대는 형수가 난감했다. 사람을 떼거리로 죽여서 벌고, 석유를 팔아서 벌고, 돈 많은 놈 삥 뜯어서 벌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외국에서 에이전트 일을 합니다. 간혹 어려운 일을 처리하면 수수료가 짭짤하지요.”
“어머나 세상에! 얼마나 짭짤해요?”
“글쎄요. 들쭉날쭉합니다.”
무쌍은 대답을 회피했다. 백억, 천억 단위가 튀어나오면 거품을 물 여자다. 아차 하면 다음 날 아침까지 질문을 던질 기세다.
“윤희 아버지도 어떻게 안 될까요. 말단 경찰의 쥐꼬리 봉급을 받아서 살기엔 살림이 너무 팍팍하거든요.”
말이 많아지더니 기어코 삑사리 났다.
“언니, 엄살떨지 마요. 경찰 아저씨가 남편인데 얼마나 듬직해요. 나는 언니가 부러워요.”
식겁한 진순이 재빨리 실드를 치고 무쌍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은 알지도 못하고, 남의 떡만 커 보이는 여자, 오빠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의 여자다.
오빠가 입양을 서두를만한 이유가 있었다. 타인 면전에서 남편을 깔아뭉개는 여자가 미나를 제대로 보살폈을 리 없다.
‘쯧!’
무쌍은 속으로 혀를 찼다. 되바라진 여자다. 의형제를 맺었지만, 무호 형수와는 별로 친분이 없다. 호형호제한 후로도 딱 두 번 만났다. 무호 형이 출장 가고 없을 때 채취해두었던 산나물과 더덕을 가져다 줄때였다.
아침가리 골에서 방동으로 나가려면 산길을 한 시간 반은 걸어야 한다. 험한 길을 내려온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하지 않았던 여자다.
저래서야 수더분한 무호 형의 결혼생활이 순탄할 리 없다. 슬그머니 무호 형의 눈치를 봤다. 다행히 별다른 기색 없이 무덤덤했다. 무쌍은 한숨이 나왔다. 여자가 살갑지 못하다 보니 의형제를 맺었음에도 거리가 생겼다.
미나는 무호 부부와 달리 달라진 분위기에 광속으로 적응했다. 무호 내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무쌍의 옆자리에 껌딱지처럼 붙어서 조잘거렸다.
“빠빠, 언니들이 너무 좋아요.”
“어이쿠, 이 녀석 벌써 정치를 할 줄 아는구나. 하하하!”
무쌍이 껄껄 웃으며 갈비를 잘게 찢어서 입에 넣어 주었다. 미나가 제비처럼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미나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머나, 니는 와 우노?”
우순이 티슈를 뽑아서 눈물을 닦아 주었다.
“너무 좋아서요. 빠빠와 함께 있으면 너무 좋아요. 빠빠가 약속했거든요. 미나가 크면 데리러 온다구요. 아빠가 데리러 오는 꿈을 꾸어도 슬프고, 꿈을 꾸지 않으면 더 슬펐어요. 흑흑흑!”
마나가 무쌍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식탁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무쌍이 미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빠빠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다. 너는 내 딸이다. 이제부터 실컷 먹고, 마음껏 놀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해라. 사나운 동물도 나쁜 사람도 아빠가 지키는 미나를 아프게 하지 못한단다.”
“흑흑흑!”
미나의 울음이 커지자 오 자매가 모두 따라 울기 시작했다. 무쌍은 감회에 젖었다. 인연의 시작인 이기수는 자신의 살을 찢고 뼈를 부러뜨렸던 원수다. 이기수가 마지막 순간에 참회한 결과가 미나다. 뉘라서 감히 인연의 시작과 끝을 알겠는가!
“언니들이 공부도 가르쳐주고 예쁜 옷도 사줄 거야. 필요한 것, 가지고 싶은 것은 모두 언니에게 말해. 언니가 용돈 많이 모아 놓았어. 우리는 한 식구 거든.”
막내 우순이 호기롭게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