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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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장 해묵은 인연7
“빠빠, 무동 태워 줘!”
선잠 깬 미나가 웅얼거렸다.
“어이쿠, 마이 컸네. 무거워서 들지도 못하겠네.”
무쌍이 엄살을 떨며 미나를 번쩍 들어서 어깨에 얹었다.
“이랴 이랴, 노로 노로! 깔깔깔!”
미나가 무쌍의 양쪽 귀를 잡고 깔깔거렸다. 짤랑거리는 웃음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무호는 한없이 넓어 보이는 아우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시광경(暫時光景)은 방태산 치마 바위다. 아니다. 가을 운동회를 찾아온 솜사탕 아저씨가 한껏 부풀린 솜사탕이다. 무호의 얼굴에 웃음이 슬며시 떠돌았다.
[철판 등을 가진 도깨비의 솜사탕 가슴] 애들 동화제목으로 그만이다.‘허, 난 여태 뭘 했지?’
무호는 처음으로 아버지로서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마누라만 탓할 일이 아니다. 어린 것이 추울세라 이불깃을 다독거려 준 적이 있었던가. 손잡고 산책 한 번 나선 적이 있었던가?
집에 있기보다는 집 밖에서 나돌기 좋아하고, 딸들과 놀기보다는 동료들과 술추렴을 좋아했다. 그러고 보니 딸을 셋이나 키우면서 넓은 마당에 그네 한 자락 매어줄 생각도 못 했다. 흘려보내는 수많은 시간 속에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은 없었다. 아버지는 다 그런 줄 알았다.
무쌍과 자신의 차이는 능력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자신은 미나를 키운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아이는 강아지나 병아리가 아니라 사람이다.
내일의 약속을 백번 한들 오늘의 노력 한번보다 중요할까! 자괴감이 가슴을 쳤다. 훌륭한 경찰인지는 몰라도 아버지로서는 꽝이었다. 무호는 뜻하지 않게 각성의 기회를 얻었다.
“큰오빠!”
“응! 큰오빠?”
“오빠의 형님이니까 당연히 큰오빠지요. 박 경사님! 이렇게 부를까요?”
“아 아이요. 분에 넘쳐서 그라요.”
무호는 생각지도 못한 호칭에 버벅거렸다.
“그만 주무시소. 언니는 아직 잘 생각이 없어 보이네요.”
진순이 간간이 웃음소리가 들리는 안채를 가리켰다.
“주책바가지 여편네!”
무호가 투덜거리며 진순을 따라갔다.
이튿날, 진순이 무호 내외의 선물을 바리바리 챙겼다. 무호의 아내가 탐내는 품목은 무조건 챙겼다. 대추야자, 올리브, 무화과, 아보카도 등의 과일은 물론 뒷다리를 통째로 훈증한 바스크 햄, 팔뚝보다 굵은 소시지와 알지도 못하는 온갖 향신료까지 챙겨 넣었다.
과일과 식품만이 아니다. 터키산 양탄자를 둘둘 말아 넣고, 시리아산 올리브 비누 상자를 통째로 챙기고, 커피 원두를 자루째 트렁크에 집어넣었다. 유럽과 아프리카의 온갖 식품과 생활용품이 대형 트렁크 두 개를 가득 채웠다.
무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쥐구멍이 있으면 머리를 처박고 싶었다.
“저런 망할~”
무쌍이 일갈하려는 무호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형님, 여자들의 일은 여자들에게 맡겨 두시소.”
“내가 미친다 미쳐!”
무호는 한숨만 푹푹 쉬었다.
“옴마나, 세상에나! 이게 진짜 진주네.”
오냐오냐하면 수염뽑는다고 했다. 무호의 아내, 홍가해는 진순의 목걸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진주의 평가 기준은 모양, 광택, 흠, 두께, 색상이다.
옴부티가 진순에게 선물한 목걸이에 매달린 완벽한 구형의 레인보우 톤 5mm 천연진주 두 알은 같은 크기의 다이아몬드보다 값비싼 보석이다. 이미테이션 진주나 양식 진주밖에 보지 못한 홍가해의 눈이 돌아갈만했다.
“비싸겠지?”
“네, 황금 체인은 레인보우 펄의 가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래요.”
“목걸이도 삼촌 친구분에게 선물 받은 거야?”
홍가해의 두 눈이 질투로 번득였다.
“네, 아프리카에서 무역업을 하는 오빠 지인께서 선물하셨어요.”
“세상에나! 무지개 색깔이 너무너무 예쁘다.”
목구멍에서 손이라도 내밀 기세다. 진순은 실소했다. 참새는 모이에 죽고, 고양이는 호기심에 죽고, 여자는 보석에 죽는다고 하더니 이 여자가 그 짝이다.
“마음에 드세요?”
진순이 빙그레 웃었다.
“휴! 마음에 들면 뭐해. 삼촌은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걸.”
홍가해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었다. 눈앞의 아가씨는 질투 날만큼 몸매 좋고 인물 좋고 성격도 좋다. 그래도 미나를 5년이나 키웠는데……. 갑자기 무쌍이 섭섭하고 원망스러워졌다. 적반하장이지만, 대부분 인간은 자신의 입장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선물할게요.”
진순이 선뜻 목걸이를 벗어서 홍가해의 목에 걸어주었다.
“뭐! 선물?”
홍가해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보석이 아무리 비싸 봐야 사람보다 비싸겠어요. 미나를 잘 키우셨잖아요.”
“그 그래도!”
홍가해는 말과 달리 목걸이를 얼른 블라우스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만 가자구!”
무호가 버럭 했다. 학을 뗀 무호는 아내를 재촉해서 도망치듯이 떠났다.
“정말 너무해!”
“살다 살다 저렇게 욕심 많은 아줌마는 처음 보네.”
진순의 동생들이 일제히 입을 쩍 벌렸다.
“큰언니야, 목걸이까지 벗어주마 우야노. 그거 옴부티 아저씨가 선물한 거 아이가.”
계순이 쫑알거렸다.
“훗, 사람은 비니루 우산이 아니데이!”
진순이 피식 웃고는 무쌍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떴다. 연순이 동생의 등짝을 탁 때렸다.
“젖퉁이도 덜 여문 가시나가 오데서 언니야가 하는 일에 딴죽을 걸라카노. 하수가 고수의 깊은 뜻을 우예 알겠노.”
“아야, 아푸다. 뭐가 고순데?”
“저 여자는 의형의 마누라, 즉 형수인 거라. 우리 오빠 성질 알제? 저 아줌마가 올 때마다 싫은 기색 없이 퍼줄 끼다. 그래서 큰언니가 일부러 막 퍼준 거라. 점잖은 무호 오빠가 얼매나 창피했겠나. 창피해서 안 올 끼다.”
“큰언니 목걸이까지 벗겨가는 여자가 창피를 알까? 하는 짓으로 봐서는 무호 오빠를 들들 볶아서 또 올 것 같은데…….”
계순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쪼다 같은 년! 그래서 큰언니가 막판에 목걸이까지 벗어준 거라. 무호 오빠는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일 끼다. 이혼하면 이혼했지 절대로 안 온다. 또 오마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연순이 칼로 자르듯이 단언했다.
“우와, 고수다!”
“그렇게 깊은 뜻이!”
계순과 말순, 우순이 입을 쩍 벌렸다.
“비니루 우산은 뭔 소린데?”
우순이 물었다.
“큰언니가 니들 들으라고 하는 소린 기라. 비니루 우산 써봤지? 바람만 불어도 시퍼런 비니루가 쭉 찢어지고, 살짝 부딪혀도 대나무 살대가 뿌라진다 아이가. 저런 여자는 한번 쓰고 버리는 불량품이니까 타산지석으로 삼으란 이바구다. 알았어?”
“언니야, 억수로 무섭다.”
말순과 우순의 얼굴이 굳었다.
“오빠 기대에 벗어나지 않으면 돼. 우순이 너, 쪼끄만 게 발랑 까져가꼬 삐딱선 타는거 언니가 다 알고 있거든?”
연순이 눈을 부라렸다.
“헉!”
우순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언니 화장품을 훔쳐 바르고 남자 친구들과 영화보러간 사실이 들켰다.
“그기 무신 소리고?”
장필녀가 막내 올케를 노려보았다. 무쌍이 외국에 나가서 돈을 벌고, 불로동에 큰 한옥을 지었다는 소문쯤은 별것 아니다.
인동에도 중동 건설현장에서 벌어온 돈으로 집을 지은 사람이 몇 명 있다. 무쌍이 놈은 어릴 때도 어른 뺨치게 일을 잘했다. 별까지 턱 붙은 놈이 할 일은 어차피 막노동밖에 없다.
문제는 그 뒷이야기다. 해인사 대웅전보다 큰 본채가 있고, 대궐 같은 이 층 한옥이 여섯 채나 있다고 했다. 개울이 축구장보다 넓은 본채 앞 잔디밭을 흘러가고, 넓은 대나무 숲이 집안에 있다고 했다. 집들이를 도와주러 간 짚은다리 여자 다섯의 턱이 빠졌단다.
집들이에 코쟁이 손님들이 백 명쯤 찾아오고, 앙숙인 하동댁 식구들이 그놈과 함께 산다는 이야기, 외국인 손님들이 무쌍을 왕처럼 떠받든다는 이야기, 하동댁과 딸년들이 황금과 보석을 무더기로 선물 받았다는 이야기…….
듣느니 고양이가 송아지를 낳았다는 말보다 믿기 힘든 이야기들뿐이다. 무엇보다 퇴학당한 놈이 다시 대학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속을 뒤집었다.
“글씨요. 저도 들은 소문이라…….”
장상수의 아내가 말꼬리를 죽였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짚은다리 박가네 여자들이 전한 말은 밑도 끝도 없는 소리다. 괜한 말을 해서 손위 시누이의 똥집만 건드렸다.
“없이 사는 것들의 눈깔은 해태 눈깔인 벱이여.”
장씨가 고개를 짤짤 흔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아니 절대로 믿고 싶은 않은 소리다.
“형님, 짚은다리 촌년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답니다. 맹탕 헛소리는 아닌 것 같심더.”
큰 올케인 장기수의 아내가 시누이의 눈치를 보며 슬며시 보탰다. 믿기 어렵긴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지 않는 법이다.
“흥, 촌년들이 할 일 없으면 뒷물치고 디비 자기나 할 것이지.”
장씨는 심사가 뒤틀렸다. 친정의 위세가 쪼그라들지 않았으면 여편네들이 감히 떠들고 다니지도 못할 말이다. 토지 대부분이 삼식 캐피탈에 넘어가자 농투산이들의 목이 뻣뻣해졌다. 배워먹지 못한 무식한 것들은 어쩔 수 없다.
‘그놈이 집을 짓긴 지은 모양이지. 불을 확 싸질러주마.’
장씨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 자신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김말순의 새끼가 날뛰는 꼴은 못 본다. 거지새끼는 영원히 땅바닥에 코를 처박고 살아야 한다.
‘어! 저년은 하동띠기?’
짚은다리 앞 신작로를 지나가던 장씨가 차창 밖으로 보이는 여자 잔등에 눈길을 꽂았다. 수건을 덮어쓰고 고랑에 묻혀있지만, 수십 년간 앙숙으로 싸운 년이라 머리 뒤통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김 기사, 차 세워!”
눈치 빠른 김기사가 후진해서 차를 세우고 후다닥 차 문을 열었다. 눈치없이 굴다간 뺨을 맞기 십상이다. 장씨가 우아한 포즈로 내렸다.
‘이상타, 저것이 당장 먹을 게 없어서 새알심을 캐나?’
장씨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동댁이 알이 잔 감자를 소복이 캐 놓았다. 올해엔 봄 가뭄이 심한 탓에 감자 씨 넣기가 늦었다. 그래도 보름만 더 키우면 씨알이 충분히 굵어진다.
예전 보릿고개를 넘길 때는 유월에 여물지도 않은 메추리알 크기의 감자를 캐 먹었다. 말을 걸기 싫었지만, 호기심이 앞섰다. 아니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고 싶었다.
“이보게 하동띠기, 여물지도 않은 감자를 캐서 우짤라 카노?”
하동댁이 허리를 펴고 아픈 허리를 툭툭 두들겼다. 신작로에서 내려다보는 장씨와 눈이 마주쳤다.
‘이보게 하동띠기? 저년이 젖퉁이로 밤송이 까는 소리 하고 자빠짔네.’
하동댁은 배알이 꼴렸다. 천년만년 해먹을 것 같았던 인동 장씨 가문의 기둥뿌리가 흔들린 지 오래다. 세상이 변했지만, 친정 위세를 등에 업고 평생 갑질하는 버릇이 몸에 밴 인동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우탁 어메 아인교. 오랜만입니더. 우짠 일로 여까지 왔심니꺼.”
‘조런 빌어먹을 년이!’
장씨의 얼굴이 썩어 문드러졌다. 어린 김말순에게는 형님 형님 하며 곰살맞게 구는 년이 연배가 까마득한 자신에게 우탁 어메란다. 못 본 척 지나갔어야 한다는 후회가 살짝 들었다.
“지나가던 길일세. 여물지도 않은 감자는 캐서 어쩌려고?”
하동댁은 어설픈 서울말에 짜증이 설핏 돌았다. 우탁 아베가 사업에 성공하자 품위를 지킨답시고 억지로 서울말을 흉내 내는 자발 맞은 인간이 인동댁이다.
“우리 쌍이 반찬 해 줄라 캅니더. 쌍이가 감자를 좋아하는데 장에 나오는 감자는 방아벌레를 쥑인다고 농약을 덮어씌운다 아인교.”
‘우리 쌍이? 아예 붙어먹을 기세구마!’
장씨는 어이가 없었다. 언제부터 신랑 잡아먹은 년과 거지새끼가 붙어서 우리가 되었단 말인가? 말인즉슨 무쌍이 놈에게 무농약 감자로 반찬을 해주려고 여물지도 않은 감자를 캔다는 소리다. 신혼 서방이라도 저래는 못 챙긴다. 하긴 옛날부터 오지랖 넓게 거지새끼를 유난히 챙긴 여편네다.
“더운데 사이다 한잔 마시고 일하게.”
장씨가 아이스박스에서 캔 사이다를 꺼내 흔들었다. 이제 막 나오기 시작한 캔 제품이다. 천민이 언제 삼복더위에 얼음처럼 시원한 음료수를 맛보겠는가. 인동댁은 자랑할 겸 유례없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쌍이 집 냉장고에 프랑스제 캔 음료수가 잔뜩 들었는디.”
하동댁이 시답잖다는 듯 캔을 뜯었다.
“무쌍이가 외국에 갔다 왔다고?”
장씨는 김이 팍 샜지만, 인내심을 발휘해서 슬쩍 간을 봤다.
‘옳거니! 저년이 소문을 들었구먼.’
하동댁의 까맣게 탄 얼굴에 흰 선이 그어졌다.
“야, 계속 외국에 나가 있다가 이자부터 한국에 산다꼬 집을 지었심더. 우리나라에 살민시로 일이 있을 때만 외국에 나간다 카데예.”
장씨는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돈을 마이 벌었다꼬?”
“울매나 마이 벌었는지 지가 우예 알겠능교. 쌍이가 사 년 전부터 우리 딸내미들 등록금하고 생활비를 댔다 아인교. 이번에 지은 집이 7천 평인데 내사마 대가빡이 나빠서 방 숫자도 못 세리겠십디더. 집 짓는데 들어간 돈만 십억이 넘었다 카데요.”
“칠천 평? 십억?”
화들짝 놀란 장씨가 반문했다. 장씨 종가인 친정집이 560평이다. 칠천 평은 감도 오지 않았다. 하동댁의 얼굴에 득의함이 줄줄 흘렀다. 눈치 빠른 장씨가 아차 했지만, 버스는 이미 지나갔다.
“칠천 평이마 논이 서른다섯 마지기다 아인교. 농사를 지었으마 쌀이 백석은 더 나올낀데. 하이고 무시라.”
하동댁이 몸서리를 쳤다.
“자네가 재봤나?”
장씨가 곱지 않은 얼굴을 들이밀었다.
“해태 눈깔이라도 핑생 농사를 지었는디 땅 넓이를 모리겠십니꺼. 고래 등보다 큰 한옥이 일곱 채고, 언덕을 끼고 있는 후원만 3천 평이 넘는다 아인교. 하이고, 이제 말순이 성님만 찾아오마 쌍이는 할 일 다 한기라요. 불행 끝 행복 시작이다. 아임니꺼.”
‘으윽, 김말순!’
장씨는 얼굴이 노래졌다. 하동댁은 기분이 째졌다. 바로 저 얼굴이다. 사흘 굶은 시어머니 쌍판을 보려고 짚은다리 여자들을 불렀다.
‘언니, 오데 있노? 저 쌍판을 언니가 봐야 하는데.’
하동댁은 카메라가 아쉬웠다. 저 얼굴을 꼭 남겨서 말순 언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하동댁이 앞치마를 뒤집어서 맹맹한 코를 팽 풀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어느 하늘 아래를 떠돌고 있을 말순 언니가 서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