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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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장 해묵은 인연9
동지섣달 꽝꽝 얼어붙은 땅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던 소작농들이 눈앞을 스쳐 갔다. 소출이 적게 나왔다고 소작을 회수당한 사람들이다. 계속 부쳐 먹게 해 달라고 읍소하던 절박한 얼굴들, 그 꼴이 될까 두려워서 미친 듯이 돈을 벌었다.
미친 듯이 사업을 확장하다 보니 자신도 장인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뒤늦게 재산보다 소중한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관리만 필요한 향심여객은 아무래도 좋다. 향심섬유는 외화벌이를 하는 수출기업이다. 제대로 된 놈에게 물려주기 전에는 쉴 수 없다.
“휴, 그놈이 받아주려나!”
박인보가 무거운 걸음으로 차에 올랐다.
“아줌마!”
쨍하는 고주파 음이 거실을 흔들었다. 대답이 없다. 찬모와 침모는 장씨가 주방 집기를 박살 냈을 때 이미 줄행랑쳤다. 장씨는 치받는 분기와 편두통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근래 삐딱선을 타긴 했지만, 설설기던 남편이 나 몰라라 할 줄은 몰랐다. 아니 이미 돌아선 남편이 도와줄 가능성은 희박했다. 불안한 심정을 애써 외면해왔을 뿐이다.
잠 못 이루는 친정아버지. 엉망이 된 자식들, 손아귀를 벗어난 남편, 우뚝 서버린 무쌍, 비웃는 하동댁, 목에 올가미를 걸고 시간 측정에 들어간 삼식 캐피탈……. 온갖 군상이 뇌리를 맴돌았다.
“아악, 빌어먹을 김말순!”
와장창-
“아악, 하동댁! 이 빌어먹을 년!”
와장창-
“아아악! 땅이나 파먹던 땅강아지 주제에 날 비웃어!”
와장창-
“그년 딸년들이 전부 대학을 다닌다고? 아아악!”
새된 비명이 터지면 여지없이 집기가 박살 났다. 인간이 불안한 이유는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능력, 신분, 자아의 형상을 파악하고 있다면 불안할 이유가 없다. 모르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원래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에 대한 대답이다. 자신의 발밑도 살피지 못하면서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을 알려 하느냐는 선문답이다.
장씨의 불행은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장씨 가문의 큰 아가씨가 아니라 박인보의 아내다. 장경주의 딸이 아니라 삼 남매의 어머니다. 장씨가 조고각하를 알았더라면 자신과 주위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헉헉!”
장씨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체력이 독한 심성을 따르지 못했다. 삼식 캐피탈의 올가미를 목에 건 아버지와 동생이 천장 무늬 사이를 뱅뱅 돌아다녔다.
천사였던 삼식 캐피털의 정체는 악마였다. 매달 1%씩 올라가는 기한 상실 연체 이자는 2년이 지난 시점에서 월 24%가 되었다. 베이스 이율 1.5%를 더해서 이번 달 이율은 25.5%다. 모레 이자를 갚지 못하면 문중 선산과 종가가 넘어간다.
친정아버지의 사채는 5억, 숙부인 장경모는 2억, 큰 당숙 장경택은 1억, 작은 당숙 장경남은 8천만 원이었다. 그동안 문중의 토지를 팔고 장씨 집안의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이자를 갚았다. 이미 갚은 이자가 원금의 3배인 25억이었다.
그것이 한계였다. 원금은 한 푼도 갚지 못했다. 체증식 이자의 함정은 깊고도 넓었다. 이번 달 이자가 무려 이억이다. 하소연 할 곳도 없었다. 가문의 역량을 총동원했지만, 삼식 캐피탈은 명분을 확보하고 모든 시비를 빗겨갔다.
조직원을 동원한 두 차례 습격도 무위로 돌아갔다. 장씨들 측에선 삼식 캐피탈이 CB 담보권을 행사하지 않는 것만도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친정아버지와 문중 어른들이 하루걸러 그녀를 찾아왔다. 비난하고 원망하는 날 선 언사가 이어졌다. 그녀의 자부심과 자존심은 치유 못 할 상처를 입었다.
박인보가 던진 말은 상처를 헤집고 소금을 뿌렸다. 건강한 몸에 뿌려진 소금은 별것 아니다. 찢어진 상처에 뿌려진 소금은 극악한 통증을 유발한다. 상처를 낸 놈은 망각되고, 소금 뿌린 놈에게 증오가 집중되었다.
소금을 뿌린 놈은 수십 년 동안 머리도 못 들던 난쟁이 똥자루다. 계집년처럼 도자기 쪼가리를 비싼 돈 주고 사오는 덜떨어진 인간이 감히 장씨 가문에 소금을 뿌렸다.
“내가 왜 그랬을까?”
장씨는 멍하니 수정 샹들리에를 올려다보았다. 도깨비에게 홀리지 않고는 질 나쁜 전환사채를 덥석 인수할 리 없었다. 발행조건을 꼼꼼히 검토만 했어도 독을 삼키지 않았을 것이다.
말은 쉽지만, 전형적인 후견지명이다. 쉽게 사기당하는 자들의 공통점은 탐욕이다. 욕심이 없으면 사기당할 이유가 없고, 욕심에 눈멀면 충고도 잔소리도 들린다. 장씨는 가문의 탐욕이 부메랑으로 돌아왔음을 알지 못했다.
기운이 쭉 빠진 장씨는 늘어지듯 소파에 누웠다. 문중의 토지가 고스란히 남편의 뱃속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무리 지쳐도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미쳐버렸을지도…….
우탁은 이 층 계단에 기대서서 난장판이 된 거실을 내려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은 장씨를 향해 있었지만, 시선은 창밖에 머물렀다.
흔히 보는 풍경이라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놀라운 건 오히려 아버지였다. 사악할 정도로 단호한 아버지, 자신이 알고 있는 아버지가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집은 남부럽지 않은 고급 주택이지만, 가정은 없다. 아무리 똥통 학교에 다녀도 하우스와 홈의 의미는 구분할 줄 안다. 아버지는 회사에 몸과 마음을 다 팔아 버렸다. 가정과 가족은 당신의 몸이 망가져도 쉴 줄을 몰랐다.
어머니는 늘 무슨 일인가를 꾸몄다. 외삼촌들과 통화가 잦아지고, 안면 없는 사람들이 무시로 찾아왔다. 대화의 주제는 별로 아름답지 못했다. 누구를 임원으로 넣어야 한다는 둥, 누구를 잘라야 한다는 둥, 누구를 만나야 한다는 둥, 돈을 얼마 주라는 둥, 언듯 들어도 회사에 도움이 되지 않을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큰누나인 희자는 결혼을 하고도 쇼핑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낭비벽 때문에 이혼당하고 친정으로 돌아왔지만, 쇼핑중독증은 여전했다.
작은 누나인 화자는 술과 마약에 쩔어 지냈다. 몇 년 전에는 누군가에게 옴팡지게 구타를 당했다. 육 개월간 입원 치료를 받았다. 퇴원 후에는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다시 마약에 손댔다. 쇼핑, 수면, 음주, 대마초가 그녀 인생의 모든 것이었다. 지금은 실종상태다.
자신은 어떤가? 고등학교 삼 년 동안 교과서는 한번 들춰 보지도 않았다. ‘질주 달구벌’이란 촌스런 오토바이 폭주족으로 허송세월했다.
‘가족이 언제 식사를 했더라?’
우탁의 얼굴이 흐려졌다. 가족 다섯이 식탁에 앉지 못한 세월이 5년이다. 대화가 사라진 지도 오래되었다. 대화할 주제도 없었다. 서로를 챙기지 않고, 공통 주제가 없으니 당연히 대화는 사라졌다.
가족은 없다. 아버지 회사를 뺏으려는 엄마, 가족을 백안시하는 아버지, 쇼핑 외에는 관심 없는 큰 딸, 마약에 취해서 헤롱거리다 실종된 작은 딸, 양아치들과 어울려 다니는 골빈 아들, 동거인들의 면면이다.
무쌍이 퇴학을 당하고 구속되었을 때는 무척 놀랐다. 하늘이 무너져도 그딴 지저분한 짓을 할 놈이 아니었다. 어머니와 화자가 함정을 팠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럼 그렇지 했다. 무쌍이 웨이터 노릇한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는 유일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게 기분 좋을 일이었나?’
우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길 가는 사람 누구를 잡고 물어도 웨이터가 폭주족보다 못하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소파에 잠든 어머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한바탕 히스테리를 부리고 새우처럼 꼬부리고 잠든 모습이 서글펐다. 어머니와 대화를 나눈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어머니의 삶은 박인보의 아내, 박우탁의 어머니가 아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장씨 가문 종갓집 장녀다. 그럴만했다. 인동 장씨 가문의 위세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인동면 일대의 토지는 대부분 장씨 가문 소유다. 종가인 외할아버지댁이 소유한 전답만 2,700마지기였다. 논 한 마지기에서 쌀 세 가마가 나온다고 했다. 한해 쌀 8,100가마 소출을 올리는 만석꾼 지주가 외할아버지다.
외할아버지의 위세는 무소불위였다. 소작인만 100가구가 넘고, 경찰서장이나 군수도 외할아버지에게 부임 인사를 오곤 했다. 친정의 위세를 업은 어머니는 당당했고, 아버지는 기가 죽어 지냈다.
명절에 외가를 다녀오면 아버지는 최악의 상태가 되었다. 분을 못 이겨 욕지거리를 뱉고, 벽을 발로 찼다. 나이가 들어서 알았다. 아버지가 처가에서 상갓집 개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학 관계가 달라진 시점은 향심섬유를 설립한 후였다. 향심섬유 매출은 이백억이 넘었다. 그 대단하다는 외가가 일 년 농사 지어봐야 십억원도 벌지 못한다.
기세등등하던 외삼촌들의 어깨가 처지고 아버지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결국, 돈 많은 자가 갑이 되었다. 우탁 본인도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은 장씨가 아니라 박 씨다. 분위기 변화를 읽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아버지와 외가의 역학 구도가 달라진 시점부터 어머니와 외가 분들의 회동이 잦아졌다. 외가에서 경영권을 인수한다고 설치더니 되레 외가가 풍비박산났다. 콩가루 집안이다. 콩가루 집안의 시작은 어머니 장필녀 여사다.
자신은 무조건 옳다는 무오류성, 웃다가도 화내고 짜증 내는 돌발적인 성격, 남편에게 부엌칼까지 던지는 공격성, 맹목적인 자식 편들기……. 지금까지 참고 살아온 아버지가 대단했다.
어머니는 예전부터 독단이 심했다. 본인은 무조건 옳고, 본인이 옳기 때문에 자식도 옳다는 독단 말이다. 자식 편들기는 있어도 따뜻한 손길은 없었다. 일곱 살 때 숙모가 엄마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가 뺨맞고, 종일 굶었다.
엄마와 달리 숙모는 다정다감했다. 엄마는 새옷을 버렸다고 야단치지만, 숙모는 다치지 않았는지부터 물었다. 숙모를 엄마로 둔 무쌍이 녀석이 너무 부러웠다. 좋은 옷과 맛있는 과자보다 엄마가 숙모처럼 다정했으면 했다.
“그 새끼 얼굴이나 한번 봤으면 좋겠어.”
우탁은 자신의 말에 움찔했다. 무쌍을 보고 싶다? 진심일까? 아버지와 엄마는 무쌍이 얼마나 무서운 녀석인지 모른다. 창자가 목구멍으로 기어 나오도록 모지락스럽게 때리고, 기절하면 강물에 처넣었다가 깨어나면 또 때렸던 독한 놈이 무쌍이다. 그래도 보고 싶었다.
우르릉- 천둥이 울렸다. 쏴아아- 소나기가 쏟아졌다. 세찬 빗줄기가 잔디밭을 두드렸다.
“아 몰라! 빗속을 달리면 우우우♬”
우탁이 현관을 나섰다. 새로 산 일제 바이크로 빗속을 달리면 답답한 속이 뚫릴 것 같았다.
“어디가!”
쨍하는 소리가 귀를 두드렸다. 우탁은 대꾸 없이 차고로 들어갔다.
‘무쌍이 놈에게 개 쪽 팔리게 생겼어. 그래도 내가 형인데 말이야.’
와우웅- 오토바이가 빗속을 튀어 나갔다.
우탁은 무쌍과 함께 보낸 5년 세월 동안 2년은 갑질을 하고, 이후 3년은 숨도 못 쉬고 지냈다. 스스로 열등감을 벗어나기엔 나름대로 상처가 깊었다. 우탁도 레미제라블의 일인이다.
“해임요, 큰 해임요!”
진순표 7층 반합 도시락을 즐기던 무쌍이 고개를 들었다. 과대표를 맡은 성식이다.
“머꼬?”
무쌍이 입에 가득한 참치 덮밥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좋은 사람 프로젝트 덕분에 점심을 거르는 놈이 사라졌다. 하이에나떼도 염치가 있었던지 도시락을 덮치지 않았다. 진순표 도시락을 즐기는 비용으로 무려 17억 원을 지불한 셈이다.
“가산산성으로 엠티 갈라카는데 우예 생각하십니꺼?”
“헐, 가산산성!”
무쌍이 이마를 쳤다. 이 기사 녀석을 묵사발 냈을 때 백부댁 동향을 적어서 가산산성 치키봉 바위굴에 넣어 두라고 했다. 벌써 7년 전의 일이다. 별 의미는 없었다. 이 기사를 괴롭히려고 시킨 일이었다. 바쁘게 살다보니 까맣게 잊었다.
“해임요, 무쌍 해임요.”
성식의 부름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 그 자식 참, 물에 빠진 사람 부르듯이 부르는구마. 아까 머라 캤노?”
“엠티 말입니더. 해임 의견을 물었다 아인교?”
딱-
“끄악!”
이마에 딱밤을 맞은 성식이 단말마를 질렀다.
“임마, 과대표가 알아서 해야제. 이 나이에 감 뇌라 배 놔라 하리?”
성식은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딱밤이 아니라 망치다. 골이 윙윙 울렸다. 간신히 정신이 돌아온 성식이 볼멘소리를 했다.
“너무 함더. 해임 손은 흉기라 안 캤심니꺼. 아우, 해골이 뽀사진거 같심더.”
“사나 자슥이 엄살은, 언제 가기로 했노?”
“요번 토욜로 정했심더.”
“바라 바라 이놈의 자식, 니들끼리 결정해놓고 통보만 하는 기제. 니들이 형을 가마니로 보는겨?”
무쌍이 짐짓 눈을 부라렸다.
“아이고 해임요, 그기 아이고요. 해임은 그딴 행사에 벨로 관심이 없다 아임니꺼.”
성식이 고개를 쑥 집어넣었다. 무려 네 살 차이다. 감히 쳐다볼 군번이 아니다.
“흐흐흐! 농담이다.”
“농담 두 번만 했으면 간 떨어지겠구마요. 해임은 시간 내서 입만 가꼬 오시면 됩니더. 평소에 맨날 뜯긴다 아임니꺼. 헤헤헤!”
순간적으로 쫄았던 성식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자식이 엉 까네. 니 찬조받으러 왔제?”
“헤헤헤, 지들이야 주머니 털어봐야 먼지만 나온다 아입니꺼.”
성식이 파리처럼 손을 비볐다.
“얍삽한 놈, 좋은 사람 덕분에 등록금도 해결되었잖아.”
“헤헤헤, 울 아버지 허리가 펴졌지 제 허리가 펴진 건아임니다요. 좋은 사람님께 감사 편지는 올렸심다요.”
“임마, 바쁜 사람이 그딴 편지 보기나 하겠어.”
무쌍이 빙그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