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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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장 해묵은 인연16
“보십시오. 그분의 동선은 경상도 바닷가를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직원 80%가 경남과 경북 해안을 뒤지고 있습니다.”
삼식이 빨간 매직으로 아스테이지를 입힌 대형 지도에 선을 죽죽 그었다. 붉은 선은 충무-마산-부산-기장 해안을 벗어나지 않았다. 삼식이 짚은다리에 점을 찍고 외곽에 원을 그렸다.
“그분이 살았던 짚은다리입니다. 혹시나 해서 짚은다리를 중심으로 반경 20km 이내인 칠곡, 인동, 동명, 구미, 왜관, 북삼, 약목 일대를 뒤지고 있습니다. 넙치 글마가 내륙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무쌍은 붉은 동그라미를 뚫어지라 노려보았다. 어머니가 경상도 남쪽 바다를 떠도는 이유는 방년 18세에 아버지를 만나 일 년을 함께 보낸 남쪽 바다가 마음의 고향으로 매김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 그토록 짚은다리가 싫으셨습니까?’
짚은다리는 자신에게 고향이지만 어머니에게는 연옥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버지의 깊은 사랑이 없었으면 성정이 여린 어머니는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지나가듯이 장 씨의 학대와 혹독했던 시집살이를 들려주곤 했다. 장 씨는 시동생의 눈을 피해서 은밀히 아랫동서를 괴롭혔고 어머니는 가족 간에 분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입도 뻥긋 못했단다.
장 씨만이 아니다. 짚은다리 박가들은 약속이나 한 듯 어머니를 따돌렸다. 따돌림의 배경은 장 씨의 사주와 장 씨 가문의 위세였지만, 여자들의 질투도 한 몫을 차지했다.
버들가지처럼 낭창이는 몸매와 눈이 번쩍 뜨이는 해사한 미모는 짚은다리 같은 깡 시골에서 이질적이긴 했다. 고아로 자란 어머니는 이웃 간의 정에 목말라했지만, 손을 잡아준 사람은 하동댁이 유일했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아버지를 떠나보낸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 추행을 당한 충격이 얼마나 컸으면 기억을 휘발시켜 버렸을까!
일렁이는 호롱불 그림자에 선잠 깨서 실눈 뜨면 열에 일곱은 호롱불 아래 다소곳이 앉아있는 어머니가 보였다. 양말을 깁거나 아버지 옥양목 외출복을 다림질하거나 놀다가 찢어진 아들 옷을 바느질하거나……. 어머니가 호롱불 아래서 흥얼거리던 사설이 들렸다.
[……몽당치마 열여덟에 임을 만나 여자가 되었네. 고추 당초 매워도 동기 시집살이만 못 하네. 손에 물 마를 날 없고 허리 빠지지 않는 날이 없었네. 임이 마음 상할세라 입도 벙긋 못했네. 고개 넘어가면 또 한 고개, 넘고 넘어도 끝이 없는 고개, 배속 자식까지 덜커덕 잃었네. 임은 자식 잃은 년을 따뜻이 품어주었네……. 임은 말씀하셨네. 슬퍼할 줄 알면 희망이 있다고. 나는 손가락 임은 골무, 나는 물고기 임은 강물, 고단한 몸 찾아들 곳 있어 행복하네. 임의 정은 바다보다 깊고 구름보다 높아라. 내 정은 두멍(식수를 담아두는 독)도 못 채운다네. 한 번, 단 한 번, 단 한 사람에 주기에도 모자란다네……. 쌍아 쌍아, 금쪽같은 내 아들 쌍아, 에미 죽거들랑 니 아부지 발치에 묻어다오. 이승에서 못다 한 정, 죽어서 머리 풀어 발닦아 드리리……]무녀(舞女)였던 어머니는 사설도 구성지게 뽑았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아버지 발치에 묻어달라 하셨을까! 죽어서도 머리 풀어 발을 닦아주겠다는 치열한 사랑에 소름이 돋았다. 어머니는 추행을 오쟁이로 인식하고도 남을 여자다.
미인박명이라 했던가! 행복했던 가정을 파괴당하고, 하늘을 지붕 삼아 동가숙서가식하는 어머니, 하늘은 도가 있을 뿐 정이 없다 했지만, 운명의 장난이 이다지도 고약할 수 있단 말인가.
가슴 아래쪽에서 뜨거운 기운이 치받혔다. 장씨의 모진 학대를 5년이나 감내한 이유가 무엇이던가? 엄마가 반드시 돌아온다는 굳센 믿음 때문이었다.
그리움은 원망으로 바뀌고, 믿음이 증오로 바뀌었던 철없던 세월이 주르륵 흘러갔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기억은 인격이다.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돌아올 수 없었다.
‘헛, 저런!’
삼식이 흠칫했다. 악몽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철판처럼 무표정하던 얼굴에 온갖 종류의 감정이 떠올랐다. 극장 스크린에 비치는 색 농도 테스트가 따로 없다. 악몽이 눈물을 흘렸다고 하면 누가 믿을 것인가.
삼식은 가슴이 아릿했다. 악몽은 삼불이 아니라 실종된 어머니를 찾는 청년일 뿐이다. 가까이하기엔 너무나 두려웠던 존재가 안타까움으로 다가섰다.
“경찰 쪽은 어떻소?”
무쌍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았다.
‘놀라운 자제력이구먼!’
삼식은 감탄했다. 얼마나 험한 세상을 살아왔으면 이십 대 중반의 나이에 비등한 감정을 저토록 빨리 수습한단 말인가! 역시 나이로 판단할 수 없는 인간이다.
“경찰요?”
삼식이 피식 웃었다.
“글마들은 신경도 안 써요. 경찰서 다섯 곳에 몽타주를 건넸는데 다른 서에는 전달도 안 했더군요. 우리가 발품을 팔아서 찾을 수밖에요.”
“그렇군!”
무쌍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태산에서 실종되었을 때 무호 형이 교육청과 경찰에 협조 공문을 보냈지만, 캐비닛에 처박혀 있었다고 했다. 삼식의 말대로 발품을 팔 수밖에 없다. 애써 찾아봐야 인연이 억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부의 말씀이 이해되었다.
“박 사장이 그분을 찾는 이유가 뭐요?”
무쌍이 불쑥 물었다.
“이유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삼식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것이다. 박인보라는 인간은 40년간의 수모를 참고 견디다가 한 방에 장 씨 가문의 기둥뿌리를 흔들어버린 인간이다. 와신상담의 고사를 남긴 구천이나 부차보다 더 독한 인간이 일개 조폭 두목에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을 리 없다.
“아! 박 사장님이 저와 만날 때면 회근보춘(晦根葆春)이란 문자는 자주 쓰셨습니다. 무식한 저야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지만요.”
정보를 주고 싶어 안달 난 삼식은 기억을 더듬어서 찾아낸 문자를 알려주었다.
“회근보춘?”
무쌍이 흠칫했다. 회근보춘은 송나라 주희의 스승인 유자희가 쓴 자주희축사에서 나온 말이다. 직역하면 뿌리에 간직해서 봄에 무성히 피어난다는 뜻이다. 어려울 때 움츠리고 준비해서 때가 되면 뒤집어엎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와신상담(臥薪嘗膽)과 통하는 말로 뒤끝 강한 백부의 좌우명으로 딱 맞다.
그런데 자주희축사 전편에 흐르는 의미는 [남들이 이러쿵저러쿵 욕된 말을 하더라도 내 길을 굳건히 지키겠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지만 나 자신 앞에 부끄러움 것만은 참을 수 없다.]라고 이해된다.
말하자면 세상의 욕을 먹을 짓은 하지 않았다. 스스로 양심에 부끄러울 뿐이다. 라는 식이다. 또 한편으로 보면 회근이란 말에는 후회가 들어있고, 보춘이란 말에는 되돌려 준다는 뜻이 있다.
무엇을 후회하고 무엇을 되돌려 준다는 말일까? 자신만큼 백부의 성정은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뒤늦게 가족애가 발동되었다는 식의 황당한 기대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그렇다면 거금을 들여서 어머니를 찾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는 게 병이라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애써 줘서 고맙소.”
무쌍이 손을 내밀었다. 삼식은 자신도 모르게 악몽이 내민 손을 두 손으로 잡고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저도 돈 받고 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동선은 어느 정도 파악되었습니다. 조만간에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고맙소. 내륙 쪽 인원도 바닷가로 돌리시오. 그분은 정신이 돌아오지 않는 한은 짚은다리에 코끝도 비치지 않을 거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박 사장님이 경비와 보수 외에 성공 보수금 이천만 원을 걸었습니다. 우리도 결사적입니다.”
“그래요? 나는 내 이름을 걸겠소. 내가 빚진 걸로 하고 당신이 원할 때 한 번 나서 주겠소.”
“정말이십니까!”
삼식이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나는 빈말을 하지 않소.”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삼식이 코가 바닥에 닿도록 허리를 숙였다. 악몽의 약속은 억만금보다 더 가치 있다. 양지로 나왔지만, 사채업과 용역업의 기반은 여전히 음지다. 아차 하면 이권 투쟁이 벌어지고 모략이 횡행한다. 이 바닥에 정면 대결은 없다. 연장질과 뒤통수 치기가 정석으로 굳었다.
악몽을 모르는 조직이 없고 악몽의 이름 앞에 거들먹거릴 조직도 없다. 돈이 그를 살리지 못할 때 악몽의 이름은 그를 살려 줄 수 있다. 얼떨결에 구명줄을 쥔 셈이다.
‘대박이닷! 내가 전생에 삼천궁녀라도 구했나? 넙치 이 새끼에게 수당을 줘야겠어.’
악몽을 끌고 온 죽일 놈의 새끼가 길몽을 몰고 온 우수 사원으로 훼까닥 변했다. 누구든 블랙맘바와 잘못 엮이면 쪽박 차고 잘 엮이면 대박 친다. 넙치야말로 전생에 삼천궁녀를 구한 인간이었다.
“삼식 캐피탈은 장 씨 일가를 겨냥한 거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깜짝 놀란 삼식이 반문했다. 악몽의 정체가 새삼 궁금했다. 삼식 캐피탈은 박 사장이 장 씨 일문을 들어먹기 위해 만든 유령회사다. 일수와 사채놀이는 본래의 목적을 숨기려는 코 묻은 위장 사업일 뿐이다.
“어디까지 진행되었소?”
무쌍은 반문에 반문으로 대답했다.
“철저히 준법 영업을 하느라 진행이 많이 늦어졌습니다. 담보로 잡은 토지는 종가인 장경주의 논 2,700마지기와 밭 300마지기, 임야 100정보(1정보는 3,000평)를 포함해서 논 5,000마지기, 밭 1,200마지기, 임야 300정보입니다. 장 씨 가문이 보유한 토지의 90%가 담보로 잡혀있습니다. 시세로는 대략 85억 원쯤 됩니다.”
삼식은 의기양양했다. 인동, 구미, 산동, 석적, 약목, 선산 등에 퍼져있는 장 씨 가문의 토지는 어마어마했다. 담보로 잡은 토지의 70%만 건져도 수수료가 8천만 원이다.
“85억이라~ 장 씨 가문이 경주 최 부자를 우습게 여긴다더니 별것 아니잖아. 백억도 못 되는 재산으로 그토록 유세를 떨었단 말인가!”
무쌍이 탄식했다. 85억은 달팽이 뿔에 불과하다. 장 씨 가문의 갑질에 놀아난 농사꾼이 얼마며, 고리대를 갚지 못해 농토를 뺏긴 사람이 얼마던가. 와각지쟁(蝸角之爭)을 벌이는 장 씨 가문과 백부가 한심했다.
“헐~”
삼식의 입이 쩍 벌어졌다. 85억이 대단하지 않으면 무엇이 대단하단 말인가? 악몽의 배포에 기가 질렸다.
“토지 매입 자금은 박 사장의 주머니지요?”
“다 알고 계셨군요. 저는 수수료 일 프로를 먹습니다. 담보 걸린 토지 절반은 이미 넘어왔습니다. 박 사장님은 화수분, 최고의 고객이죠.”
“흐흥, 장 씨 가문에서 알면 피를 토하겠군.”
“법적으로 전혀 하자 없는 사업입니다.”
삼식은 당당했다. 진절머리나게 태클 걸던 장 씨들도 이젠 자포자기 상태다.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진 사장!”
“예, 말씀만 하십시오.”
“김말순 씨 추적에 비용이 얼마나 들어가나?”
“한 명을 일 년간 움직이면 인건비, 교통비, 식대를 포함해서 대략 이백오십에서 삼백이 들어갑니다. 올해에 60명으로 인원을 늘리는 바람에 매달 1,500만 원이 들어갑니다.”
“한 달에 1,500이라~”
무쌍이 수표책을 꺼냈다. 20만 불을 기재해서 삼식에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건달로 살아온 삼식이 꼬부랑 글씨가 잔뜩 쓰인 프랑스 은행 수표를 알아볼 재간이 없다. 빙판에 자빠진 황소처럼 눈알만 굴렸다.
“20만 불, 우리나라 돈으로 찾으면 대략 1억 7천만 원이 될 거요.”
“헉!”
삼식의 손에서 수표가 흘러내렸다. 화들짝 놀란 그는 고려청자를 떨어뜨린 듯 다이빙해서 수표를 집어 올렸다. 삼식이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무쌍을 쳐다보았다.
“일을 하자면 돈이 필요한 법이지. 일억 원은 경비요. 인원을 180명으로 늘려서 삼 개월 내에 끝장내시오. 삼 개월 내에 그분을 찾아서 내게 모셔오면 나머지 7천만 원은 당신 성과급이오.”
“으헉!”
삼식이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무쌍을 만난 후로 열 번은 식겁하는 삼식이다.
‘설마 사기?’
손에 든 수표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머리를 흔들었다. 악몽이 용돈을 요구하면 빚을 내서라도 줘야 한다. 천하의 악몽이 사기를 칠 이유도 없고, 뭐가 답답해서 사기를 치겠는가?
“형님, 대단하십니다.”
재신의 왕림에 허리가 재까닥 숙어졌다. 삼식은 삼금을 구호로 정할 만큼 돈에 집착하는 인간이다. 박 사장의 배포도 놀랍지만, 악몽의 배포와는 잽도 안 된다.
“진 사장이 나보다 연배가 많이 앞서는데 형님은 쪼매 거시기 하지 않소?”
“이 바닥이 나이순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말씀 낮추십시오. 헤헤헤!”
삼식은 당당했다. 실력과 재력을 갖춘 악몽이 형님이 아니면 형님 될 놈은 아무도 없다.
“때가 되면 그러지요. 할 수 있겠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니 할 수 있습니다.”
삼식은 이빨을 물었다. 돈은 부차적이다. 악몽의 후원을 받으면 전국의 밤이 자신의 손에 들어온다. 똘마니들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꿍쳐 둔 돈을 털어 넣어서라도 3개월 이내에 김말순을 찾아야 한다.
“믿겠소. 앞으로 향심섬유 사장에게 손 벌릴 필요 없소. 필요한 자금은 내게 청구하고 수시로 진행 상황을 보고하시오.”
무쌍이 전화번호와 집 주소를 건네주었다.
“형님을 모신 기념으로 기필코 어무이를 찾겠습니다.”
삼식은 대놓고 어무이라 했다. 형님으로 모셨으니 어무이가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