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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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장 해묵은 인연18
김기택의 눈이 응심제와 무쌍의 얼굴을 분주히 오갔다. 본관 좌측에 날개처럼 줄지어 세워진 별관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응심제 용마루에 걸린 노을 때문일까. 청바지에 감색 슈트를 걸친 평범한 차림의 청년이 광배를 둘러쓴 듯 눈부셨다.
당시 구치소에서 갓 출소한 젊은이는 박박 깎은 머리에 물들인 구제 군복을 걸치고, 얼굴 피부는 마른버짐으로 허옇게 들떠 있었다. 상전벽해도 유분수지. 눈앞의 청년이 8년 전 친구 집에서 만났던 초췌한 젊은이와 동일 인물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하긴, 내가 이 꼴이 된 것도 말이 안 되긴 마찬가지지. 후후후!”
김기택이 툴툴 웃었다. 잘 나가던 중소기업 사장 김기택이 일당쟁이 잡부가 될 줄이야. 김기택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무쌍을 따라갔다.
“헐, 이기 머꼬? 식탁이가 운동장이가?”
김기택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응심제의 식단은 풍성하다. 진순은 대량의 단백질을 섭취해야 하는 무쌍을 위해서 온갖 종류의 육류 메뉴를 개발하고, 식단 균형을 맞추려다 보니 생선 메뉴와 채식 메뉴도 덩달아 다양해졌다. 김기택은 식탁 크기에 놀라고, 식탁을 가득 채운 음식에 놀랐다.
“아저씨, 학교 운동장은 우리 집 식탁보다 훨씬 넓어요.”
미나가 즉시 오류를 수정했다.
“그 그렇제. 운동장은 식탁보다 넓긴 넓제.”
김기택이 볼살이 통통한 미나를 쳐다보며 비시시 웃었다. 특이한 가족 구성이다. 한눈에 자매간임이 표시 나는 아가씨 다섯은 오빠라 부르지만, 청년과 닮은 구석이 없다. 청년을 아빠라 부르는 똘똘한 계집애도 딸이라기엔 나이가 맞지 않았다.
“자네, 결혼했는가?”
김기택이 미나와 무쌍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하, 결혼은 안 했지만, 미나는 제 딸이 맞심다.”
“그 그런가?”
김기택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고아를 데려와서 키우나 보다 했다.
“자아 일용할 양식을 준비한 진순 언니에게 감사하고 맛있게 묵자.”
“큰언니, 잘 먹겠습니다아~”
청년이 수저를 들자 식사가 시작되었다. 김기택은 감탄했다. 자유스럽지만 엄격한 질서가 잡혀있는 가족이다. 여자들은 제비처럼 재잘대고 청년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일일이 받아주었다. 언밸러스한 가족 구성인데 그것이 또 그렇게 정겨워 보일 수 없었다.
“차린 건 벨로 없지만, 마이 드시소.”
“고 고맙심더. 가족 식사에 불청객이 꼽사리 끼어도 되는지.”
진순의 인사에 김기택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버벅거렸다.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음식을 나눠 먹기 때문이래요.”
미나가 쫑알거렸다.
“허!”
김기택이 감탄했다. 어린 계집애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집주인의 인품을 알만했다.
“헤헤, 아빠가 하신 말씀이에요.”
미나가 혀를 날름하고 배시시 웃었다. 김기택은 자신도 모르게 미나의 볼을 쓰다듬으려고 손을 내밀다 흠칫했다. 천사의 볼을 만지기엔 손가락 두 개가 잘려나간 손이 너무 흉측했다. 미나가 김기택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저씨, 많이 아팠죠?”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넘쳤다.
“아!”
김기택은 전기에 감전된 듯 부르르 떨었다. 작은 손에서 전해진 온기가 가슴을 가득 채웠다. 분노, 증오, 자학, 후회로 굳어진 가슴이 온통 허물어져 내렸다.
처녀 다섯의 시선이 시커먼 손을 움켜쥔 조가비처럼 작고 하얀 손을 향했다. 도떼기시장처럼 소란스럽던 식탁이 조용해졌다.
“미나야, 아저씨는 가족을 위해서 일하다 다쳤단다. 아버지는 가족을 지키는 울타리거든. 다치고 아파도 울지 않는 울타리가 아빠란다.”
진순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술 배달 중에 자동차에 치여 돌아가신 아버지, 농약 살포 중에 중독되어 돌아가신 진보 아재, 기계에 손가락을 잘린 아저씨, 그들은 아버지란 이름의 천사들이다.
“흑흑!”
넷째 말순과 막내 우순이 흐느꼈다. 김기택의 얼굴이 웃는 듯 우는 듯 실룩였다. 참으로 특이한 가족, 아니 사랑과 정이 넘치는 가족이다.
“하느님도 자식을 키우는데 나 몰라라 하시겠냐. 아저씨와 우리 미나를 위해 건배!”
무쌍이 뜬금없는 소리로 분위기를 수습했다.
“건배!”
여자는 남자보다 감정이입이 빠르다. 가라앉았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먹자 분위기로 바뀌었다. 잔뜩 허기졌던 김기택은 정신없이 배를 채웠다.
“아저씨, 물 드세요. 음식은 천천히 꼭꼭 씹어먹어야 영양을 잘 섭취할 수 있어요.”
미나가 물컵을 건넸다.
“응, 천사님은 똑똑하기도 하구나.”
“헤, 이것도 아빠 말씀인데.”
미나가 배시시 웃었다. 김기택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여관에서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있을 아내와 두 딸에 생각이 미쳤다.
“김 사장님, 수저는 들고 마음은 내려놓으세요. 오빠는 아무나 식탁에 모시지 않아요. 수저를 내려놓으면 마음을 들어 올릴 기회가 있을 거예요.”
진순이 숟가락을 들고 멍하니 생각에 잠긴 김기택을 일깨웠다.
“아, 알겠습니다.”
김기택은 마음속의 돌을 내려놓은 듯 편안해졌다. 큰 언니라는 아가씨는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묘한 위엄이 있다. 세상 물정 모르고 투정만 부리는 큰 딸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사랑채로 내려온 김기택은 서재의 위엄에 할 말을 잊었다. 서른 평은 되어 보이는 서재는 소나무 향과 묵향이 가득하고 집기 하나도 예사로운 게 없었다. 응접실로 쓰이는 전실의 넓이만도 스무 평이 넘었다.
“여가 자네 집이 맞나? 도대체 우예 된 기고”
김기택은 하나 마나 한 질문을 다시 던졌다. 군바리 출신 대통령 말 한마디에 대그룹이 해체되는 요지경 세상이지만, 상전벽해도 정도가 있다. 겨우 칠팔 년 사이에 사람의 처지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당최 전후 사정이 요량되지 않았다.
“세상에 내 것이 있습니까. 잠시 이곳에 머물러 있는 거지요.”
“허, 자넨 딴 세상에 사는 사람인 듯하이. 내가 자네 나이에 뭘 했나 하는 회의감이 드네.”
“고답적인 소리지만 마음이 중요하지요. 오십 평 아파트가 좁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백 평 아파트로 이사 가도 불평합니다.”
“그렇긴 하지. 저 시계도 마음인가?”
김기택이 서재 벽면 중앙에 걸린 싸구려 뻐꾸기시계를 가리켰다. 서재에서 딱 한 가지 눈에 거슬리는 소품이다. 아무리 봐도 서재에 있을 물건이 아니다.
“상한이 선물입니다. 이 방에서 제일 무거운 물건이지요.”
무쌍이 빙그레 웃었다.
“아!”
김기택이 탄성을 뱉었다. 은혜사에 원공으로 계시는 묘연거 스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부처가 밥을 먹겠습니까? 떡을 먹겠습니까? 백화점에 쇼핑을 가겠습니까? 돈과 쌀포대를 들고오지 말고 마음을 들고 오십시오. 백만 원짜리 수표에 일푼의 마음을 담지 말고, 고무신 한 짝에 백만원 마음을 담으십시오. 무거운 마음, 상처난 마음, 깨진 마음을 들고 오십시오. 그리고 이곳에 팽개치고 가십시오. 소승은 여러분이 팽개치고 간 마음을 다리고, 꿰매고, 붙이며 한세월을 보낼랍니다. 그러다 보면 부처님이 힐끔 돌아볼지도 모르지요. 허허허!]
맞은편에 앉은 청년이 묘연거 스님으로 보였다. 김기택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잠시 시름을 잊고 대숲에서 불어오는 밤바람과 달달한 커피 향에 묻혔다.
‘망쪼가 들어도 단단히 들었구마.’
무쌍은 김 사장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듣지 않아도 알만했다. 넉넉한 풍채가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여위고, 두 눈은 불안으로 흔들리고 있다.
백 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렸던 사장이 막노동 일당쟁이로 변했다면 우환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 엄지 한 마디는 기계에 잘린 지 오래되었지만, 검지는 예리한 날붙이에 잘린 지 오래되지 않았다.
“자네도 곡절이 많았겠구먼.”
“곡절은 저보다 사장님 쪽인 듯합니다만.”
“훗, 보다시피 쫄딱 망한 거라. 사장은 무슨 사장! 기양 아저씨라 캐라.”
김기택이 픽 웃었다.
“사연이 많았던 갑지요.”
“말하자면 끝이 없는 기라. 빌어먹을, 내가 공장은 단디 운영했는데……. 향심섬유가 야료만 부리지 않았어도…….”
김기택이 말을 끊고 뜨거운 차를 후루룩 마셨다. 아우성치며 튀어나오는 지난 기억에 속이 탔다. 무쌍이 움찔했다.
“향심섬유? 본사가 동성로에 있는 향심섬유 말입니까?”
“자네도 아는구먼. 하긴 대구에서 젤로 잘 나가는 회사라 아는 사람은 다 알겄제. 오 년 전에 수출 오다가 마이 밀려가꼬 공장을 널쿠고 직원을 마이 채용했는데 그때 채용한 직원들이 사단이었어. 스무 명이 똘똘 뭉쳐서 노조를 만들디마는 기존에 있던 직원들까지 들쑤시기 시작한 기라. 월급을 올려달라. 삼 교대 작업은 못 하겠다. 공조 시설을 새로 해달라. 아이 놀이방을 만들어 달라. 심지어는 맨날 밥만 묵냐고 스테이크를 점심으로 달라고 지랄하더구먼.”
“뭔가 냄새가 나네요.”
“그렇지. 월급 올린다는데 싫어할 놈이 있나. 기존의 직원들까지 동조해서 아사리 판이 되었제. 주문이 잔뜩 밀렸는데 우야겠노. 월급을 20% 올려주고 공조 시설도 해주고 놀이방도 만들어 줬거든. 그런데 섬유 쪽은 이교대 작업을 할 수 없어. 기능공의 피로도가 높아지면 불량이 많아지고 안전사고 위험도 높아지거든. 꼬투리 잡은 노조가 파업을 했능기라. 공장 정문을 드럼통으로 막고 쇠파이프와 각목을 들고 멀쩡한 직원들까지 두들겨 패서 출입을 막았능 기라. 바이어에게 납기 지연 페널티만 팔백만원이나 물었다. 내사마 미쳤뿔 지경이제.”
“쯧쯧, 불법 파업으로 신고하지 그랬어요.”
무쌍이 혀를 찼다.
“당연히 했제. 근디 경찰 놈들도 다 한 통속이더라. 노사 간에 대화로 해결하라는 소리만 하더락꼬. 육 개월 만에 회사가 엉망이 돼 삔기라. 대갈통을 싸쥐고 있을 때 향심섬유 장전무가 공장을 팔아라 카더라. 내가 십 년이나 아들같이 키아온 공장인데 우예 파노. 딱 잘라 거절했지. 그 다음 날 노조위원장이 기계를 팔아서 밀린 월급을 챙겨가겠다고 겁을 팍 주데. 은행 대출은 이미 막히뿌고 우야노. 사채를 내서 밀린 월급을 정산해 줬지라. 후우!”
김기택이 긴 한숨을 쉬었다. 뒷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알만했다. 70년대 중반부터 방적·섬유산업은 패션 바람을 타고 급속히 성장했다.
대구 노원동, 비산동, 성서 일대에 영세한 섬유공장과 염색공장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다. 자금 수요는 넘치고 산업 자본은 달렸다. 그 틈을 비집고 불법 사채가 판쳤다. 자금에 몰린 사업자가 사채를 덜컥 당겼다가 공장과 집을 날린 이야기는 선데이서울(70~80년대를 풍미한 대중잡지) 가십에 오르지도 않았다.
“독을 삼켰군요.”
“그때도 놈들이 작정하고 회사를 흔든다는 생각은 못 했네. 멍청해도 그렇게 멍청할 수 있을까! 밀린 오다가 있으니까 파업만 수습되면 모든 문제가 풀린다고 생각했네. 그때 눈 딱 감고 공장을 정리했으면 이 꼴은 되지 않았을 텐데…….”
김기택의 얼굴이 회한으로 물들었다.
“얼마를 땡겼는데 결딴났습니까?”
“허허허, 꼴랑 삼백만 원일세. 삼백만 원을 빌맀는데 첫 달 건너뛰고 두 달째 이자가 십오만 원, 석 달째는 삽 십만 원, 넉 달째부터는 사십만 원이 되더라꼬.”
김기택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훤히 열려있는 장지문 밖에 늘씬한 그림자가 비쳤다.
“오빠, 큰 언니가 차보다는 술이 필요할 거래요.”
계순이 티 테이블에 술과 안주를 차렸다.
“오이야, 언니한테 고맙다 캐라.”
역시 진순이다. 눈치 백 단인 진순이 칙칙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술을 내려보냈다.
“아저씨, 잠자리는 별채에 봐 놓을게요. 주무실 때는 왼쪽 첫 번째 집에서 주무시소.”
“아가씨, 나는 가봐야 하는데.”
김기택이 난감한 얼굴로 계순을 올려보았다.
“주무시고 가시소. 언니가 그렇게 하시래요.”
계순이 생긋 웃고 물러갔다. 김기택이 헛웃음을 흘렸다. 큰 언니는 무조건 옳고 언니가 말하면 따라야 한다는 투다. 하여튼 특이한 집안이다.
“처자들이 마카 인물 좋고 똑똑하고 상냥하구먼.”
“제 복이지요.”
무쌍이 빙그레 웃었다. 오 자매와 함께 살라는 사부님의 말씀은 신의 한 수였다. 진순과 동생들, 미나는 삶의 활력이고 살아가는 목적이다. 녀석들이 없었으면 광활한 사막에 내동댕이쳐진 고독한 영혼을 부둥켜안고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술이 요상하구마. 안주도 요상하고.”
김기택이 씨아까렐로를 큰 잔으로 원샷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맛이 익숙하지 않지요? 술은 지중해에서 건너온 포도주고, 안주는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과일입니다. 제가 외국에서 일하거든요.”
“그렇구먼. 자네 덕분에 호사시런 저녁 먹고 비싼 외국 술도 마시보고 호강이 넘치는구먼.”
“천천히 드시소. 말썽부린 노조위원장 이름이 뭡니까?”
“이수복이란 놈일세. 내 살다 살다 그놈처럼 악질은 처음 봤네. 내가 회사 재산을 빼돌렸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멀쩡한 직원들까지 선동하고, 가족들 신상을 위협하고, 노동부에 온갖 고소를 하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김 사장이 이빨을 빠드득 갈았다.
무쌍이 전화기를 들었다. 정상적인 근로자가 기존 직원을 선동하고, 얼토당토않은 조건을 걸어서 악질적인 파업을 할 수는 없다. 짚이는 바가 있었다.
“불로동이요.”
-억, 형님! 이 시간에 웬일이십니까?
깜짝 놀란 삼식의 목소리가 구리선을 타고 왔다.
“이수복이란 놈을 아시오?”
-노원동 참치 밑에 있는 사기꾼입니다.
“잡아 와!”
-옙, 알겠습니다.
통화는 간단했다. 김 사장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