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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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장 해묵은 인연19
‘잡아와!’라는 말에 김기택이 움찔했다. 시퍼런 칼날로 정수리를 내리치는듯한 살벌한 기세에 가슴이 쿵 떨어졌다. 두세 마디에 불과한 대화지만, 기절초풍할 내용이다.
자라 보고 놀란 놈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눈앞의 청년이 어둠의 세계를 주무르는 암중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더럭 일었다. 그 와중에도 이수복이란 이름이 귀에 콱 틀어박혔다. 눈에 흙이 들어가도 잊지 못할 인간이다.
“이수복을 잡아 온다꼬? 누가? 어떻게?”
김기택이 무릎걸음으로 바투 다가앉았다.
“한잔 하시소. 밤은 길고 내 집 술병은 바닥이 깊습니다.”
무쌍은 김기택의 조바심을 비켜갔다. 술잔을 들어 목젖이 꿀렁거리도록 통쾌하게 털어 넣고 김기택에게 잔을 넘겼다. 엉겁결에 잔을 받아든 김기택은 어리둥절했다.
사위를 찍어누르던 기세가 흔적없이 사라지고,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도인처럼 허허로운 분위기만 남았다. 좀 전에는 헛것을 본듯했다.
“자넨 도대체 누군가?”
“아저씨, 누구냐고 묻지 말고 무엇을 하느냐고 물어야 합니다. 승복을 입었다고 중이 아니듯이, 사시미를 쥐었다고 조폭이 아니지요.”
“아!”
김기택이 가늘게 신음했다. 청년은 거지에 불과한 놈을 식사에 초대하고, 귀한 시간을 내 준 사람이다. 청년이 뭐가 아쉬워서 대우해주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한단 말인가.
몇 년간 사람에 시달리고 두려움에 쫓기다 보니 무조건 의심부터 하는 좁쌀이 되고 겁내는 벌레가 되었다. 비참하고 부끄러워서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었다. 김기택은 잔을 훌쩍 비우고 자작으로 또 한 잔을 비웠다.
“사장님, 천천히 드시소. 은근히 오르는 술입니데이.”
“그려 내가 주책없구먼. 사장이라 카지 말래도.”
김기택이 살짝 역정을 비췄다. 사장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쿵 떨어졌다.
“그러지요. 아저씨 태도를 보이끼네 업자들에게 언캉 시달렸나 봅니다.”
김기택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허물을 슬쩍 덮어주는 청년이 진실로 고마웠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실감 났다. 젊은 나이에 어쩌면 이렇게 세상사에 밝고 가슴이 넓을까!
“흐으~ 그것들은 인간이 아인기라. 내가 꼴랑 삼백만 원을 빌리가꼬 일 년 동안 그놈들 아가리에 털어 넣은 이자만 원금을 넘어섰네. 돈을 땡길만한 데는 다 땡겨서 갚으려고 했더니 몇 달 동안 연락이 안 되는 기라. 연락이 닿았을 때는 준비된 돈을 공장에 털어 넣은 다음이었네. 원금만큼 불어난 이자를 갚을 재간이 있어야제. 이자가 연체되자 놈들이 온갖 협박을 다하더라꼬. 폭언은 기본이고 고양이와 강아지 목을 잘라서 집안에 던지고, 집사람과 딸내미에게 짐승 피를 채운 풍선을 던지기까지 했네.”
격정을 이기지 못한 김기택이 심호흡했다. 놈들의 만행에 새삼 가슴이 떨렸다. 무쌍이 말없이 술잔을 채워주었다.
“큰딸은 피를 뒤집어쓰는 바람에 공황 증세까지 생겼네. 양아치 새끼들의 날구지(못 먹을 것을 먹은 개가 미쳐 날뛰는 행동)를 견디다 못해서 은행대출과 급여 미지급금, 사채를 안는 조건으로 공장을 향심섬유에 넘겼네. 나머지 외상매입금은 집을 팔아서 정리했네. 에이, 망할 놈의 세상!”
김기택이 타는 목을 축이고 대추야자를 악질 사채업자인 양 질겅질겅 씹었다.
‘백부다운 짓이구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백부와 장 씨는 서로 죽이려고 안달하는 인간말종이다. 한쪽은 조직을 동원해서 처가 기둥뿌리를 뽑는 중이고, 한쪽은 독살 기회만 노리고 있다. 남을 짓밟는데 가책을 느낄 사람도 아니고 수단에 연연할 사람도 아니다.
향심섬유가 단기간에 급성장한 배경을 알만했다. 백부는 셈에 밝고 잔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인간이다. 김 사장은 백부가 쳐놓은 거미줄에 걸려든 불쌍한 희생물 중의 하나일 뿐이다.
한편, 백부와 조직이 손잡고 기성섬유를 말아먹었지만, 따지고 보면 후진적 금융제도를 방치한 국가책임이다. 외상매입 담보부 대출 제도만 있었어도 김 사장이 사채를 끌어 쓸 이유가 없었다. 물론 조직과 결탁한 경찰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사방이 썩는 냄새로 진동했다.
무쌍이 안쓰러운 눈으로 김기택을 바라보았다. 집을 팔아서 외상매입금을 정리할 정도로 선량하고 책임감 강한 사람이다. 김 사장은 건실한 중소기업인이 부실한 금융제도와 악질 사채업자, 부패한 공무원으로 인해 망가진 전형적인 사례다. 이 땅에 또 다른 김사장이 얼마나 많겠는가!
“향심섬유가 야료를 부렸다는 말씀은 뭡니까?”
무쌍은 짐작하고 있는 내용을 물었다. 기업인은 선량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대세를 볼 줄 알고 백부처럼 비정할 때는 비정해야 한다. 사람을 쓰려면 그릇을 알아야 한다.
“직원을 선동한 놈은 이수복이고, 뒷돈을 대고 경찰을 주무른 놈은 장 전무 그노마지만, 실제 배후는 박인보 사장일세. 이 바닥에서 그놈의 별명이 바라쿠다일세. 막강한 현금동원력을 바탕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장을 흔들어서 닥치는 대로 삼켰거든. 박인보가 내 공장을 날로 먹으려고 사채업자 놈들과 손잡고 조직원을 투입했다고 봐야지. 어리석은 나는 흔드는대로 장단을 맞추고 말일세.”
‘보는 눈은 있는 사람이구마.’
김기택의 점수가 올라갔다.
“그렇게 해서 정리는 끝났습니까?”
“웬걸, 그렇게라도 정리가 끝났으면 다행이제. 난 끝난 줄 알았지만, 복리로 불어난 사채 이자가 원금보다 더 많이 남아있더라꼬.”
“계약서는 확인했습니까?”
“확인했네. 내 서명과 도장이 버젓이 찍혀있는데 우야겠노. 멍청한 내 잘못이지.”
탕- 분을 못 이긴 김기택이 방바닥을 내리쳤다.
“저런!”무쌍이 혀를 찼다. 얼이 빠진 김 사장이 금전 대차 계약서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거나 놈들이 계약서를 위조했다는 소리다.
“집까지 팔았다면서요. 지금은 우예 지냅니까?”
“식구들이 당장 먹고살아야 되이끼네 나는 막노동을 뛰고, 집사람과 딸내미 둘은 놈들을 피해서 여인숙에 숨어있네.”
“허, 이 더위에……. 가족분들의 고생이 자심 하겠네요.”
“다 내가 못난 탓일세. 걔들에게 잡히마 장끼를 뽑힐 판인데 숨어있어야지.”
김 사장의 얼굴이 암울해졌다. 시커먼 아우라가 자욱이 뿜어졌다.
“장끼요?”
무쌍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몰라서 묻는 게 아니다. 장군 멍군의 장기도 아니고 까투리를 찾는 장끼도 아니다. 뽑는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사악한 부두교에서도 산 사람의 팔다리와 성기는 잘라도 장기를 뽑지는 않는다.
“간이나 콩팥 말일세. 글마들은 인간이 아이라 악마인기라. 빚을 못 갚으마 장끼를 뽑아간다네. 장끼를 전문적으로 적출하는 의사도 있고, 유통 업자도 있지. 이 바닥에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일세. 수술 부작용으로 죽으면 공구리쳐서 바다에 던져넣는다고 하두만.”
“그래요? 인간이기를 포기한 놈들이구마요.”
무쌍의 눈이 서늘해졌다. 김 사장은 은원록에 오르지 않은 사람이지만, 은혜를 베푼 사람이다. 구치소에서 콩밥 먹고 나온 전과자에게 편견 없이 손내민 사람이다. 은혜는 열배로 원한은 백배로.
“아저씨, 부탁 한 가지 하입시다.”
“부탁?”
김기택이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불콰해진 얼굴을 들었다. 기름기 빠진 위장에 술이 들어가자 취기가 급격히 올랐다.
“허허허! 아쉬울 것 없는 자네가 이 꼴이 된 나한테 무신 부탁을 하겠노?”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도 날개가 있고, 깨알보다 작은 벼룩도 뛰는 재주가 있지요. 아저씨는 어째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무쌍이 빙긋이 웃었다. 김기택은 입도 뻥긋 못 하고 머리를 숙였다. 에둘러 한 말이지만 자존감을 잃은 자신을 꾸짖는 말이다.
“천생산 암자에 사부님이 홀로 계십니다. 평소엔 운수 행각을 하시지만, 안거에 들면 공양을 챙겨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주머니가 절을 관리할 겸 공양주를 맡아줬으면 합니다. 장담하지만 사채업자 나부랭이는 암자 부근에 그림자도 비치지 못합니다. 보답으로 딸내미 둘은 내가 챙겨드리지요.”
“이보게, 그게 정말인가?”
김기택이 펄쩍 뛰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나이에 무쌍의 말뜻을 모를 리 없다. 결국, 아무런 대가 없이 가족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보호해 주겠다는 말이다. 무쌍이 정색했다.
“나는 식언을 하지 않습니다. 내 집에는 빈방이 쉰 개도 넘습니다. 사장님 가족을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좁지 않아요. 하지만 공짜는 없습니다. 아주머니는 산속에서 텔레비 안테나와 씨름해야 하고, 딸내미 둘은 청소를 도맡아야 합니데이.”
“고맙네. 정말 고맙네. 체면불구하고 신세를 지겠네.”
김기택이 무쌍의 손을 와락 잡았다. 아내와 딸 둘은 좁고 냄새나는 싸구려 여인숙에서 몇 달째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불안에 떨고 있다.
본인이야 어리석음의 대가를 치른다지만, 가족이 무슨 죄가 있어서 죽을 고생을 한단 말인가! 여인숙 신세를 면하기만 해도 소원이 없다. 무쌍의 제안은 가뭄의 단비요. 지옥에서 듣는 천국의 복음이다. 김기택의 두 눈에 물기가 번쩍였다.
“가족은 우신예 그리하고, 아저씨는 나하고 사채 문제를 해결하십시다. 언제까지나 뒤통수에 거머리를 달고 다닐 수야 없지요.”
“자네가 무신 수로 깡철이(용이 못된 사악한 이무기)같은 놈들을 해결하겠노.”
“사업할 때 오다가 많다고 포기한 적이 없지요?”
“하모. 밤새고, 재하청 주고, 기계를 널쿠고(늘리고), 별별 짓을 해서라도 오다는 처리했었지.”
김기택의 얼굴에 자부심과 회한이 어렸다.
“바로 그겁니다. 수단이 있고 없고는 마음먹기에 달렸지요. 그놈들 사무실은 오데 있습니까?”
김기택은 벙찐 얼굴이 되었다. 그렇다. 수단과 방법은 찾으면 나온다. 자신은 여태 피할 생각만 했다. 그래도 두려운 건 두려운 거다.
“우얄라 카노. 글마들은 수틀리마 연장을 휘두르고, 뒷배를 봐주는 검사도 있다 카더라. 경찰도 손 못 대고 질퍽거리는 조직이데이.”
김기택이 펄쩍 뛰었다. 무쌍이 젊은 혈기에 나섰다간 큰일 난다. 자신과 별 관계도 없는 청년이 상하기라도 하면 평생 가책을 받게 된다.
“저는 아무나도 아니고, 경찰도 아닙니다. 말씀만 하이소.”
“사무실 위치는 모리겠고, 회사 명칭은 풍국캐피탈이네.”
김기택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말했다.
따르르- 전화벨이 울렸다.
-형님, 지금쯤 넙치가 대문 앞에 도착했을 겁니다.
삼식의 연락이다.
“수고했다.”
무쌍은 간단히 대답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에이, 알리 노인을 보내지 않는 건데.”
무쌍이 투덜거리며 일어났다. 차단된 대문을 개방하려면 행랑채에 내려가야 한다. 알리 노인은 늘그막에 가족과 떨어져서 고생하는 모습이 보기 싫어서 노바토피아로 돌려보냈다.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시 났다.
지잉- 대문이 열리자 헤드라이트 불빛을 앞세우고 포니가 진입했다.
“길몽! 잡아왔습니다.”
조수석에서 튀어나온 넙치가 부동자세로 보고했다.
“수고했다. 끌어내.”
“옙! 돌빡, 그 새끼 끌고 나온나.”
운전석 문이 벌컥 열렸다. 머리가 반들반들한 덩치가 튀어나와 허리를 구십 도로 숙이고는 곧바로 뒷좌석에 실린 짐을 끌어냈다.
솥뚜껑 같은 손에 왜소한 남자가 개 끌리듯 끌려 나왔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안대를 차고 손이 뒤로 묶였다. 몇 대 얻어맞았는지 양쪽 뺨이 벌겋게 부풀었다.
“사 살려주이소!”
끌려 나온 남자가 방아깨비처럼 고개를 숙였다.
“시끄러 새꺄, 강냉이 확 털어버리기 전에 닥쳐.”
철썩- 돌빡이 뺨을 사정없이 갈겼다. 성급하고 거친 행동으로 볼 때 급수가 낮은 놈이다. 남자가 입을 조개처럼 꼭 다물고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 암모니아 냄새가 확 퍼졌다.
“지저분한 새끼, 쌌구마!”
넙치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남자의 사타구니가 꺼멓게 젖었다.
“이 새끼, 이수보옥~”
김기택이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릉거렸다.
“아저씨, 서재에서 기다리시지요.”
“아닐세, 내 이놈이 당하는 꼴을 꼭 봐야겠네.”
김기택이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흔들었다. 완강한 거부에 무쌍은 가타부타 말없이 등을 돌렸다.
“끌고 와!”
무쌍이 본채 뒤를 돌아서 후원으로 향했다. 잡놈을 닦달하기엔 지하실이 캡이지만, 외부에 숨겨야 할 장치도 많고 깜둥이가 살고 있다. 이런 잡놈을 다루려고 지하실을 개방할 수는 없다. 넙치와 돌빡이 양쪽에서 이수복의 어깨를 잡고 질질 끌고 갔다.
외등이 꺼진 후원은 불빛 한 점 없이 캄캄했다. 동그란 랜턴 불빛 두 개가 광원의 전부다.
“그 새끼, 안대 벗겨주고 손도 풀어줘.”
“옙!”
이수복은 강렬한 랜턴 불빛에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돌빡은 삼식파 똘마니다. 조폭이나 사기꾼이나 어둠을 자양분 삼아 살아가기는 마찬가지지만 급수는 하늘과 땅 차이다.
조폭은 접시(사기꾼)나 깝지(소매치기)를 쓰레기 취급한다. 족보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돌빡이지만, 평소엔 접시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돌빡의 태도로 볼 때 보스급이 왕림했다. 삼식파가 피라미 사기꾼에 불과한 자신을 왜 납치했을까? 이수복은 바짝 긴장했다. 납치해온 조직의 보스급이 얼굴을 드러낸다는 의미는 자신의 입을 막을 수단과 자신감이 있다는 소리다.
아차 하면 명년 오늘이 자신의 제삿날이다. 호랑이 아가리를 벗어나려면 호랑이가 만족할 먹이를 주어야 한다. 문제는 호랑이가 만족할 먹이가 무엇이냐는 점이다. 이수복의 뇌가 광속으로 기억을 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