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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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장 해묵은 인연22
꼬르륵- 깜박 잠들었던 영지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이게 무슨 소리지?’ 머릿속이 안개 낀 듯 몽롱했다. 다리를 쭉 펴도 발끝이 닿지 않는 욕조, 찰랑대는 따뜻한 물, 기분 좋은 냄새, 다시 눈이 스르르 감겼다. 꼬로록- 이번에는 좀 더 큰 소리가 울렸다. 꼬르륵? 이것은 위장이 음식물을 달라는 신호다. 화들짝 깨어난 의식이 현실과 접속했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정신없이 사방을 훑었다.
“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지옥 같은 여인숙 골방이 아니다. 잘생긴 오빠의 저택 욕실이다.
“하느님 부처님, 감사합니다.”
영지는 경건히 기도했다. 아빠와 엄마는 절에 다니지만, 자신은 교회 다닌다. 공평하게 기도했다. 기도하는 중에도 꼬르륵 소리와 함께 장이 꼬이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24시간 음식물을 섭취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생존본능, 헝거 팽(hunger pangs)이다.
“어맛, 다들 기다릴 텐데 어떡해!”
영지는 허겁지겁 몸을 닦아내고 머리를 감고 난리법석을 부렸다.
김기택의 가족이 모두 모이기까지 두 시간이 걸렸다. 양 여사가 뒤늦게 나타난 영지를 향해 도끼눈을 부릅떴다. 영지가 혀를 날름하고 잽싸게 식탁에 앉았다. 엄마의 위협 따위는 음식냄새의 유혹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필!”
무쌍이 쓴웃음을 지었다. 영지가 빌려 입은 실내복 앞섶에 고양이가 두 발을 치켜든 귀여운 그림이 전사되어있다. 적산가옥 히라니와 정원의 낙엽이 우수수 눈앞을 스쳐 갔다.
‘잘 지내고 있겠지? 잘 있어야 하고말고!’
무쌍의 눈이 먼 곳을 향했다.
“화따, 밝은 데서 보이끼네 인물이 훤하구마. 총각 가슴에 불을 지르는구마.”
무쌍이 너스레를 떨었다. 아닌 게 아니라 한 꺼풀 벗기고 단장을 마친 자매는 인물이 달라졌다. 영지의 볼이 발그레해지고 영희의 눈이 반짝거렸다.
“꾸미면 봐줄 만은 하지만……. 어디 안주인에게 비기겠나.”
김기택이 멋쩍게 웃었다. 예전처럼 밝고 예쁜 모습을 찾은 딸들을 보기 민망하고 가슴 아팠다. 과거에 스치듯이 맺어진 묵은 인연이 가족을 지옥에서 건져 올렸을 뿐, 무기력한 자신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아비로서 슬프고 비참했다.
“총각이라예?”
영희가 물었다.
“그럼, 총각이지.”
무쌍이 싱긋이 웃었다.
“아!”
영희의 눈이 꿈꾸듯 게게 풀렸다.
‘저기 미쳤나? 어딜 오빠를~’
뒤늦게 나타난 말순이 영희를 째려보았다.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때릴 기세다.
“말순아, 찌개 옮기고 수저 챙겨라.”
진순의 명령이 말순의 행동을 막았다.
“늦은 밤이라 간단히 차렸어요. 퍼뜩 들고 쉬시소.”
“지송함더. 폐를 끼쳐서 어떡해요!”
양 여사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응심제 기준에서 간단할 뿐 간단한 차림이 아니다. 굽고 볶고 삶은 요리가 식탁을 가득 채웠다.
“잘 묵을게요.”
영지는 이미 식탁에 고개를 처박았다. 뱃속에 음식이 들어간 지 24시간 지났다. 공복감을 가장 심하게 느낄 시점이다. 양 여사가 딸을 안쓰러운 눈으로 흘끔보고 일어나서 합장했다.
“실 한 오라기 같은 인연에 기대어 하늘 같은 은혜를 입었심더. 염치도 없고 면목도 없심더. 이 은혜는 눈에 흙이 들어가더라도 잊지 않겠심더.”
“얼른 들어요. 영혼이 메마르면 수다를 떨고, 영혼이 외로울 땐 음식을 나눠 드시오.”
미나가 엄숙한 표정으로 무쌍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김기택의 식구들이 뜨악한 표정을 짓고 오 자매가 와르르 웃었다. 근래 미나는 무쌍 흉내 내기에 재미 들렸다.
“콩알만 한 기 무신 뜻인지나 알고 쫑알거리노?”
말숙이 지청구를 날렸다.
“흥, 왜 몰라. 미나도 언니들과 수다 떨며 간식 먹을 때 젤로 행복한 걸. 글구 나는 콩알보다 천배 만배 크다.”
“이잇, 촉새 같은 것!”
한 방 맞은 말순이 주먹을 흔들었다.
“하하하, 우리 미나 말이 맞다. 식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험한 세상살이에 상처 없는 사람이 있겠나. 아프고 힘들 때 가만히 귀 기울이고 들어주기만 해도 위로가 된다. 괜찮다고 한마디만 해줘도 희망을 얻는다. 이제 한 식구가 되었으니 서로 알아야겠지. 사랑하는 동생들을 소개하지요. 첫째 진순 스물다섯, 둘째 연순 스물셋, 셋째 계순 스물, 넷째 말순 열여덟, 막내 우순은 시골 본가에 가고 없네요.”
“큭큭큭!”
오 자매 이름을 듣던 양 여사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영희 자매가 웃고, 김기택도 웃었다.
“호호호!”
쓴웃음을 짓던 진순이 웃자 동생들도 따라 웃었다. 서먹함이 감돌던 식탁은 졸지에 여자들 웃음소리로 낭자했다. 무쌍이 김기택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김기택도 따라서 미소 지었다.
“세상에서 젤로 예쁘고 귀여운 요놈은 내 딸인 미나. 나는 외국에서 일하고 한국에서 탱자탱자 노는 천하의 팔자 좋은 한량이요. 적당한 호칭이 없으면 와킬이라 부르시오.”
“이쪽은 못난 남자를 만나서 고생바가지를 덮어쓴 제 아내 양미자, 큰딸 김영희 스물, 둘째 딸 김영지 열여덟입니다. 저는 회사를 쫄딱 말아묵고 운 좋게 와킬을 만나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김기택입니다. 그냥 아저씨라 부르시소”
김기택이 무쌍의 소개를 흉내 냈다.
‘식구가 안돈되니 여유를 찾았구마.’
무쌍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곤궁한 중에도 여유를 부리는 김 사장이 보기에 좋았다.
“자아~ 편하게 식사하시소.”
무쌍과 김기택은 씨아까렐로를 마시고, 세 모녀는 정신없이 수저를 놀렸다. 개체보존이 종족보존에 앞서고, 개체보존 수단은 식욕이다. 굶주림 앞에서 체면치레는 사치에 불과했다.
“잘 먹었심더. 젊은 처자의 음식 솜씨가 보통이 아니네요.”
양 여사가 초토화된 식탁을 보며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밥알 한 개 남지 않고 된장찌개는 국물 한 방울 남지 않았다.
“내 동생들이 인물도 좋지만, 음식 솜씨는 더 좋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았지요.”
“말도 마이소. 살다 살다 그렇게 악독한 인간들은 첨 보았심더. 옛날에 울 아부지가 막장에 갇혔을 때보다 더 멤이 힘들었심더. 저것들이 없었으마 금호강에 몸을 던졌을낌니더.”
양 여사가 딸들을 쳐다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막장이요? 두 개의 하늘 말입니까?”
“두 개의 하늘을 우예 압니꺼?”
양 여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개의 하늘은 석탄을 파먹는 사람만 쓰는 말로 동굴 천장이 또 한 개의 하늘이다.
“하하하, 나도 문경에서 막장을 탔지요. 물통이 터져서 죽을 삔 한 적도 있고, 버럭에 깔리가꼬 염라대왕 면담을 한 적도 있지요.”
“아, 저런! 은인께서도 막장을 탄 적이 있구마요. 문경이마 은성 탄좌겠네요. 내 고향이 점촌이라요.”
양 여사가 반가워했다. 막장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아버지는 그 길로 곡괭이를 집어 던지고 방앗간을 차렸다. 석탄을 캐 본 사람만이 광부의 애환을 안다.
“오빠, 미숙이 언니 고향도 점촌이잖아요.”
진순이 거들었다.
“어, 맞다.”
양미숙은 중학교 입학하던 날부터 아웅다웅하며 한집에서 살았던 세 살 많은 누나다. 오지랖 넓고 정이 많은 양미숙이 귀찮기도 했지만, 크고 작은 도움도 많이 받았다. 문경 탄광의 이 주임에게 소개해준 사람도 양미숙이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보상금을 챙겨준 사람도 양미숙이다.
“혹시 양미숙을 압니까? 그 누나도 고향이 점촌인데.”
“그 양미숙이 몇 살인데요?”
“지금은 스물아홉이지요. 미숙이 누나 아버지가 점촌에서 방앗간을 했지요. 덕분에 몇 년 동안 쌀을 얻어먹었지요.”
“오메나! 그 미숙이는 지 동생입니더.”
양 여사가 펄쩍 뛰었다.
“이럴 수가! 나무아미타불!”
무쌍은 자신도 불호를 외웠다. 갑자기 튀어나온 불호에 영희와 영지의 얼굴이 뜨악해졌다. 도대체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다.
“혹시, 은인의 이름이 박 씨 성에 무쌍입니꺼?”
“맞심다. 내가 박무쌍이요.”
“세상에!”
양 여사가 입을 쩍 벌렸다. 진순은 오빠와 양미숙의 관계를 잘 안다.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5년을 한집에서 살았다. 오빠는 오지랖이 무쌍이지만 귀차니즘 또한 무쌍이다. 과거에 금전적 도움만 받았으면 김 사장에게 돈을 한 뭉치 던져주고 끝낼 사람이다. 어쩐지 온갖 귀찮음을 무릅쓰더니 양미숙과 연결될 줄이야. 인연의 실타래는 시종이 없다던 스님 할배의 말씀이 생각났다.
“내가 미숙이 큰 언니라요. 걔는 늦둥이 막냇동생이고요. 그 애가 학교 다닐 때 줄창 무쌍씨 이바구만 하더마요. 공부 잘하고, 싸움 잘하고, 요리 잘하고, 무엇이든 잘한다고요. 지가 탄광을 소개하는 바람에 죽게 되었다고 질질 짜고 난리가 아니었어요.”
“아!”
무쌍이 땡중 도 터지는 소리를 냈다. 돌고 돌아 이어지는 인연의 기이함에 전율이 일었다. 정의의 주먹 작전에서 돌아왔을 때 사부와 나누었던 대화가 판화를 찍은 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부님, 사람은 존엄합니까?”
“존엄하다.”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도 존엄합니까?”
“존엄하다.”
“사람과 호랑이 중에 어느 쪽이 더 존엄합니까?”
“둘 다 존엄하다.”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를 죽여야 합니까?”
“마음 가는 대로 할 일이다.”
“호랑이를 죽이고 사람을 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 호랑이에게 새끼가 딸려 있다면 하나를 살리자고 둘 셋을 죽이게 되지 않느냐.”
“사람과 호랑이는 생명의 무게가 다르지 않습니까?”
“무아야, 지렁이와 거머리의 생명이 다르더냐? 잉어가 붕어보다 생명의 무게가 무겁더냐?”
“……”
무쌍은 대답하지 못했다. 거머리나 지렁이나, 붕어나 잉어나 도찐개찐이다. 무슨 구별이 있단 말인가.
“살아있는 모든 것은 그 형태의 차이가 있을 뿐, 생명의 본질은 다를 바 없느니라. 땡중이 불살계를 지킨답시고 육식을 피하는 것도 삽질이니라. 동물을 죽이면 살생이고, 식물을 죽이면 살생이 아니더냐?”
“동물은 식물보다 고등생물 아닙니까?”
“어허, 인간이 무엇이관데 살아있는 것을 고등생물 하등생물로 나눈단 말이냐. 식물이 동물보다 열등하다고 누가 감히 정한단 말이냐. 오만한 인간이 자기 기준에 따라 이리저리 나누고 구분한 헛짓거리에 불과 하느니라.”
“인간을 수천 명 죽이는 행위와 참나무 수천 그루를 베는 행위가 다르지 않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 인간의 지성을 능가하는 지성체가 존재한다면 인간인들 동물이나 식물과 다를 게 있겠느냐. 인간이 본래 존엄한 존재라고 떠드는 놈들은 골통을 목탁으로 까야 하느니라. 생명을 지닌 것은 모두 존엄하고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니라. 이것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니라. 인간의 존엄은 스스로 만들어갈 뿐, 세상 만물은 다를 게 없느니라.”
“제자가 참나무를 벨 때는 아무 말씀 없으시다가 사람을 죽이면 영가 발원을 시키는 이유가 뭡니까?”
“이런 미욱한 놈, 그 이치를 노납이 몇 번이나 일러주었거늘 아직도 헤매고 있느냐? 니놈이 참나무를 자를 때 그 마음에 저어함이 있었더냐? 살기를 키웠더냐? 업이란 스스로 쌓는 것이다. 설익은 네놈의 마음에 업이 쌓이지 않았으면 아까운 황초값을 물면서 발원을 할 필요가 있었겠느냐!”
“영가 발원의 주체는 영가가 아니라 제 마음이란 말씀입니까?”
“흘흘흘! 모든 건 마음에 달렸느니라. 집 지키는 개를 두고 주인은 믿음직스럽다 하고, 도둑은 성가시다 하고, 겁많은 사람은 무섭다고 하지 않더냐. 개라는 존재는 변함이 없건만 마음이 다른 것이다. 스스로 저어함이 없으면 거칠 것이 없도다. 이것이 응무소주 이생기심이요. 천의무봉이니라.”
‘카르마 또한 마음이었구나. 일체유심조! 안다는 것과 깨닫는 것이 이렇게 다르구나.’
무쌍은 적정에 들었다. 자신의 손에 죽어간 수천 명의 인간, 자신의 손에 구함 받은 수만명의 인간, 원한 맺힌 인간들, 은혜를 베푼 인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인간은 긴 세월 동안 집단 생활의 틀을 유지하기 위해서 윤리, 도덕률, 인권, 종교 등의 규칙을 만들어서 서로 구속하고 자신을 구속했다. 자신도 인간이란 틀을 만들고 틀 속에 자신을 우겨넣었다.
쏴아아~ 영대가 열렸다. 심령을 누르던 중압감이 씻은 듯 사라졌다. 머릿속이 알코올로 씻어낸 듯 시원해졌다. 상쾌한 바람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무쌍은 자신도 모르게 사부가 내려준 사구 계를 읊었다.
“제보살마하살 응여시생청정심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마음 가는 대로 행하면 될 것을 애써 이유를 찾고 원인을 뒤지고 다녔던가! 가을바람에 굴러가는 낙엽처럼 헛된 외물에 마음 두고 말로만 금강이로다. 안을 보지 못하고 바깥만 보니 보이는 것마다 소리·향기·맛·감촉·의식이로다. 각인은 달을 가리키건만 나는 손가락만 쳐다보았구나. 소를 치지 않고 수레만 두드렸구나. 놓아주면 될 것을 헛되이 속박하고 있었구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얼굴 전체로 퍼져나갔다. 법열의 기쁨이 세포 가득히 들어찼다. 진공파가 절로 발동했다. 구웅- 무쌍을 중심으로 세찬 기류가 소용돌이쳤다. 식탁에 놓인 그릇이 달각달각 흔들렸다. 기이한 현상에 모두 숨을 죽였다.
‘아, 저것이 깨달음이구나!’
진순은 가슴이 벅찼다. 오빠가 너무나 존경스러웠다. 진순이 살며시 일어나서 합장했다. 양 여사와 김기택이 뒤따라 일어나서 합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