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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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장 인연중중2
“은혜는 무신 은혜. 공짜 아닙니다. 빌려 주는 겁니다. 순아 필기구 가져 온나.”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 무쌍이다.
“네!”
돌아서는 진순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응심제 집들이하던 날 오빠에게 물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엄청난 돈을 사막에 쏟아붓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인생 오래 살아야 백 년이다. 내가 누구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 석가모니와 예수를 비롯한 수많은 선각자가 몸소 보여주었다.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부류 중의 하나가 달마대사의 화두를 끌어안고 세월을 보내는 땡중인 기라. 부처의 삶을 살면 될 것을 부처가 되겠다고 죽을 때까지 화두를 끌어안고 참선하면 머하노. 영혼이 외로운 사람에게 괜찮다고 어깨를 두드려 주고, 육신이 고단한 사람에게는 하룻밤 편히 쉴 잠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 부처의 삶이 아이겄나. 태종대 자살 바위에 올라 신발을 벗는 사람에게 응무소주 하고 외친다고 그 사람이 이생기심 하고 화답하겠냐? 광야를 수십 년 헤매는 유대인들이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고난이 끝날까? 천만의 말씀이지. 유토피아는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란 뜻이다. 삶 자체가 고난인데 언제 어디에 산들 힘들지 않을까! 그럼 인간은 무엇으로 살까? 희망이다. 인간은 희망으로 산다. 희망이 현실의 고난을 희석하고 살아갈 힘을 주지. 인간은 행복해지려고 살지 않는다. 살기 위해 행복감을 느낀다. 그런데 말이야 행복과 희망은 거울 같아서 타인을 통해서 느끼게 되거든. 남을 미소 짓게 만들면 그 미소는 내 행복으로 돌아오는 기라.]말을 끝내고 환한 미소를 지을 때 겁이 덜컥 났었다. 오빠가 신선이 되어서 학을 타고 날아갈 것만 같았다. 뚜바이부르파! 오빠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따르는 외국인들이 부르던 호칭이다.
풍국파란 악질 사채 조직이 사라짐으로써 수많은 영희네 가족이 희망을 찾게 되었다. 희망이 있으면 행복은 절로 따라온다. 어벙한 얼굴로 실실 웃는 저 남자가 희망을 뿌리고 행복을 줍는 뚜바이부르파다. 목숨보다 사랑하는 자신의 남자다. 진순의 가슴도 행복으로 가득 찼다.
무쌍이 차용증과 필기구를 김기택에게 밀었다. 선잠에서 깬 여관주인이 밤늦게 찾아든 손님에게 숙박계(1998. 11. 1 자로 숙박계와 임검은 폐지되었음.)를 들이밀 듯 심드렁한 태도다.
“암만! 써야지요. 벼룩도 콧등이 있다 아임니까.”
김기택은 환한 얼굴로 읽지도 않고 서명하고 날인했다. 박 사장이 적지 않은 액수의 사채를 대납해 주었는데 차용증이라도 쓰지 않으면 얼굴을 들 수 없다. 박 사장은 마음의 짐까지 덜어 주었다. 세상에 이토록 정의롭고 속 깊은 청년이 있을까! 차용증을 쓰면서 넘치는 행복감에 가슴이 터져 죽는 인간이 있다면 바로 자신이다.
원금 : 금 6,000,000원(금육백만원)
차용일자 : 1986년 8월 28일
변제기일 : 1996년 8월 27일
원금 상환 방법 : 3년 거치 7년 분할 상환
연이율 : 10%
이자 지급 방법 : 매 월말 연이자의 1/12지급
특약사항 : 이자 및 원금 미상환 시 노무 제공으로 충당함. 노무비는 건설현장 반장 노임에 따름.
채무자는 위와 같은 조건으로 위 금액을 차용하였으며……
계순이 어깨너머로 서류를 보다가 초를 쳤다.
“헹, 특약사항은 머꼬, 아저씨가 이자를 내지 말고, 별관에서 기양 살라는 이야기네.”
“어허, 이 녀석이!”
속내를 들킨 무쌍이 피식 웃었다. 사실 부담 될 것도 없다. 집은 넓고 방도 많다. 넓은 집에 사람이 없으면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김 사장 식구가 함께 살면 집안이 북적거려서 좋고, 재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엉! 머라꼬?”
김기택이 차용증 문구를 다시 읽었다. 처자 말대로다. 집안일을 노무비로 쳐서 이자를 충당하겠다는 뜻이다.
“그것참! 하하하!”
김기택은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머쓱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세상엔 강민석 같은 악종이 있는가 하면 박 사장 같은 보살도 있다. 뼈가 가루가 되도록 일하고 싶다는 욕구가 불끈 솟았다.
“순순히 포기할 놈들이 아닐 텐데요…….”
울컥한 김기택은 말끝을 매조지지 못했다.
“알아듣도록 타일렀더니 금고에 보관된 사채 장부와 대출 서류를 몽땅 소각하더군요. 생각보다 착한 녀석들이었어요.”
“헐!”
김기택과 양 여사가 입을 쩍 벌렸다. 악질 거머리 강민석과 사채꾼들이 착한 놈이면 세상의 착한 놈은 전부 죽었다.
“그 그게 말이 됩니까?”
“갑자기 부처가 되고 싶었나 보지요.”
무쌍은 웃기만 했다. 알아서 득 될 것이 없다. 오 자매가 키득거리고, 김기택은 혼자 꿍얼거리며 연신 머리를 흔들었다. 알아듣도록 타일렀다는 말이 대충 이해되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영지는 환호작약했다. 킹카 오빠가 사채를 해결해 주었단다. 다시는 입 냄새나는 깡패들을 볼 일이 없다.
“오빠, 사랑해요!”
영지가 다짜고짜 무쌍을 안고 뽀뽀했다.
“이게 감히 얻다 대고!”
퍽- 연순에게 뒤통수를 야무지게 맞은 영지가 계순에게 질질 끌려갔다.
“언니, 큰 언니 무서버.”
“영지야, 니는 방금 맞아 죽을 뻔 했데이. 나도 오빠에게 문대면 디지게 맞는데 니가 감히 뽀뽀해. 응심제 규칙 일조, 오빠에게 스킨십하지 말 것. 알았제?”
“아 알았어요.”
영지는 서슬 퍼런 협박에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큰 언니는 늘 조용한데 둘째 셋째 언니는 터프하기가 남자 찜쪄먹을 수준이다. 영지가 제대로 기함할 일은 따로 있었다.
넙치가 쫄따구 다섯을 데리고 대문을 들어섰다. 미리 언질을 받은 진순이 짐을 든 덩치들을 별채로 데리고 갔다. 넙치가 큼직한 낚시 가방을 쿵 내려놓았다. 전날 챙겨둔 무기다.
“큰형님, 챙겨왔심더!”
“응, 그거 연순이 줘라.”
넙치가 가방을 대청마루에 올려놓고 연장을 꺼냈다. 토마호크, 쇠파이프, 사시미, 손도끼, 체인, 소태도, 슈리켄 등등이 줄줄이 나왔다. 쪽발이와 풍국파가 들고 설치던 연장들이다. 김기택 가족은 살벌한 흉기의 행진에 기함했지만 오 자매는 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수시로 보던 물건이다.
무쌍의 기감은 천하무적이다. 쓰리꾼은 즉각 응징당하고 연장을 압수당한다. 행인을 위협하는 양아치도 마찬가지다. 무쌍은 누명을 덮어쓴 불유쾌한 경험 탓에 증거물을 수집해서 보관하는 버릇이 붙었다. 얻어터진 놈이 고소하면 증거로 제시하기 위해서다.
흉기에 꼬리표를 붙여서 정리하는 작업은 연순의 몫이다. 연순은 꼬리표에 일자, 장소, 이름, 사건 내역을 간단히 기록해서 보관했다. 거실 구석의 잡동사니 창고가 흉기 보관소다. 흉기 보관소에는 흉기로 쓰일만한 아이템은 모두 들어있었다. 피와 머리카락이 엉겨 붙은 것도 있다.
“보소 보소, 덩치 큰 분, 이거 좀 씻어 오소.”
연장을 챙기던 연순이 피 묻은 쇠파이프와 도끼를 넙치에게 집어 던졌다.
“예, 아가씨!”
넙치가 두말하지 않고 피 묻은 연장을 들고 가압 펌프가 껄떡대는 야외 수도로 갔다.
“임마, 증거물을 씻으마 우짜노.”
무쌍이 볼멘소리했다.
“오빠야, 이거 마카 씰데없는 짓이라예. 언놈이 우리 집에 와서 오빠에게 시비를 걸겠어예.”
오빠가 툭하면 양아치와 쓰리꾼을 때려잡는 바람에 창고에 쌓인 흉기가 한 짐이다. 매번 피 냄새를 맡아야 하는 연순은 스트레스가 잔뜩 쌓였다. 언니에게 오빠를 말려달라고 했지만 웃기만 했다.
“그라마 엿장수에게 몽땅 넘기든가.”
“허이고, 그기 말입니까? 솝니까? 엿장수가 당장 신고할 낀 데요. 이 자식들은 사채꾼들이라 카디마는 연장도 찌질하네. 깔끔한 사시미를 쓰마 정리하기도 좋잖아. 디디하게 쇠파이프가 머꼬.”
연순이 각종 흉기를 커다란 상자에 던져 넣고 문을 꽝 닫았다. 스물 초반의 처녀가 할 말이 아니다. 연순의 박력과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은 양 여사와 영희 자매의 얼굴이 탈색되었다. 종내 영희와 영지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연순 아가씨, 잘 봐주이소.”
넙치가 허리를 구십 도로 꺾었다. 안주인들에게 잘 보여야 신관이 편해진다. 오 자매 중에 연순이 군기 반장이다. 소위 내무반 통신병급인 셈이다.
“하는 걸 봐서요.”
연순은 만만치 않았다.
“도야지 한 마리 잡아왔심더.”
넙치가 비시시 웃으며 끌고 온 포니를 가리켰다. 넙치가 나름 발휘한 순발력이다. 연순이 대답도 하기 전에 영희와 영지가 득달같이 달려가서 트렁크를 열고 각을 뜬 돼지고기를 주방으로 옮겼다. 처녀가 포장된 고기도 아니고 벌건 돼지 다리와 갈비짝을 옮기는 모습이 생경했다.
“점마들이 약 먹었나?”
무쌍이 머리를 갸우뚱했다. 주눅이 들어서 시키는 일만 하던 영희와 영지가 갑자기 적극적으로 변했다. 어쨌든 좋은 현상이다. 인간은 집단생활에 중독되어 있다. 공동 생활을 하다보면 상태가 호전될 수도 있다.
무쌍은 기즈 박사를 호출하려던 생각을 잠시 늦추었다. 그는 연순의 입가에 흐르는 희미한 미소를 보지 못했다. 진화 심리학이 늘 맞는 건 아니었다. 영희와 영지는 집단에 적응하기도 전에 권력자에게 찍힐세라 결사적이었다.
“사장님, 오늘 큰스님을 찾아뵈었으면 합니다.”
“큰일을 겪었는데 좀 더 쉬시지요.”
“아닙니다. 사장님 덕분에 우환도 정리되고, 애들 학교도 해결되고, 영희 아범도 장사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저도 할 일을 해야지요. 연로하신 큰스님이 공양주도 없이 지내신다면서요.”
양 여사가 짐 보따리를 가리켰다. 당장 떠나자는 압박이다.
“아저씨는 무슨 장사를 준비 중입니까?”
“포터를 한 대 사서 토스트와 찐빵 장사를 한다네요. 땅을 파든 물을 팔든 빨리 사장님 신세를 갚아야지요.”
“잘 될 겁니다. 그럼 가시지요.”
무쌍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기택은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이다. 한때는 백여 명의 직원을 둔 사장이 난전을 결심하기까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할 일은 묵묵히 지켜보는 일이다.
“얼래, 사부님께서 웬일로 산문밖에 계시지?”
시트로앵이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순간 무쌍의 눈이 커졌다. 오척단구의 노승이 일주문에 기대어서 휘파람을 휘휘 불고 있다. 곡조를 듣고 있던 무쌍의 입꼬리가 삐죽이 올라갔다. 일편단심 민들레야를 구성지게 잘도 불렀다. 아이처럼 순수하고 장난끼 많은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어째 느낌이 싸했다.
“사부님, 웬일로 제자를 마중 나왔습니까?”
“이놈아, 네놈이 무시기 예쁘다고 마중을 나와. 속세의 모진 운명과 입맞춤이 그리 좋더냐!”
대우선사가 버럭 했다. 쿠르르- 대기가 유동했다.
“으갸갸, 사부님 손님도 있는데!”
무쌍은 난데없는 추뢰술 발동에 식겁했다.
“에잉, 돼지 잡는 날인데……인사나 제대로 혀.”
딱- 여지없이 명아주 지팡이가 정수리를 두드렸다.
“아이고오!”
머리를 움켜쥐고 호들갑을 떨며 사부의 안색을 살폈다.
‘에구구! 심통이 잔뜩 나셨네. 티브이가 말썽을 일으켰나? 속세의 모진 운명은 무슨 말씀이지?’
무쌍은 스승이 삐친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까맣게 몰랐다. 대우선사 입장에선 깨달음의 막바지에서 굴러떨어진 제자가 애물단지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사부님, 기체후 일양만강하옵신지요.”
무쌍이 땅바닥에 철퍼덕 엎드렸다. 지팡이에 평소와 달리 감정이 실렸다. 머리가 윙윙 울렸다.
“이놈 무아야, 이 나이에 일편단심 민들레나 찾는 늙은 땡중이 일양만강할 일이 무에 있겠느냐. 하긴, 제자놈 덕분에 삐까번쩍한 하레이를 타고 빠라빠라빵 깝치는 땡중 팔자도 그리 나쁜 건 아니지.”
대우선사가 한탄했다. 눈치 빠른 무쌍은 일편단심 민들레에서 사부의 심정을 읽었다. 자진상납이 최선이다.
“사부니임, 제자는 의발을 이어야 한다는 사명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심더. 불철주야 정진하고 있으니 너무 심려마시고, 사부님 건강을 잘 챙기셔야 합니데이. 미욱한 제자로 부족하면 사손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흘흘흘, 이놈이 불법은 나 몰라라 하고, 구공(口功)만 정진했구나. 노납은 잘 먹고 잘 싸고 잘 돌아댕기니까 걱정말거라. 어쩐 일로 예쁜 보살님을 모셔왔누. 사부가 긴 밤을 지겨워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구나. 둔해 빠진 제자 놈이 드디어 철이 들었어. 흘흘흘!”
대우선사의 얼굴이 금세 풀어졌다. 종두득두다. 제자 놈의 아들이 의발을 이으면 바랄 게 없다.
“사부니임~ 체통 쫌 지키시소. 제자와 인연이 닿은 분인데 살림을 맡을 분입니다. 큰누님, 인사 드리시소.”
노소 사제간의 사차원 대화에 얼이 빠져있던 양 여사가 화들짝 했다.
“큰스님, 소녀는 양 씨 성에 미자라 불리는 박복한 년입니다. 불민한 일로 고난을 겪던 중에 제자분의 도움으로 예까지 왔습니다. 성심껏 모시겠심더.”
대우선사는 공손히 합장하는 중년 여자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진중하고 교양이 배어있는 여자인데 그늘이 남아있다.
‘어찌 사람의 눈이 저토록 포근할까!’
대우선사를 흘끔 쳐다본 양 여사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갓난아이처럼 푸른빛이 나는 노승의 눈에 따뜻함이 넘쳤다.
“선한 인상이로고, 궁벽한 절간에 올 시주가 아닌데, 잠시 마가 끼었구나. 네놈이 한바탕 휘저었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