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588
x 588
제53장 인연중중9
‘조것도 인물을 알아보나?’
이민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청년이 멋있기는 했다. 모자와 나이방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척 보기에도 쓸만한 남자다. 대나무처럼 쭉 뻗은 하체와 표범 허리, 곰의 어깨, 호랑이 가슴, 묵직한 바리톤 목소리, 사나이의 조건을 모두 갖춘 상남자다.
에고티스트인 이민주에게는 납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영숙이 앙칼지고 새침한 계집애로 보일 따름이다. 다른 사람이 머리를 쓰다듬거나 볼을 만지면 제 어미가 죽은 듯이 빽빽 울어대는 년이 처음 보는 남자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안기는 장면에 기함했다.
이민주가 영숙의 사정을 모를리 없다. 계집애가 납치된 상태고, 도너임을 알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자신의 목적에 도움되는 만큼 이용하면 그만이다. 그녀는 울고불고 보채는 아이를 온갖 수단을 써서 구슬리고 달랬다. 같은 방을 쓴지 3일이 지나서야 곁을 내준 년이 영숙이다.
‘저렇게 낮고 묵직한 목소리를 언제 들었더라?’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혀로 빨간 입술을 핥았다.
무쌍이 영숙을 보듬어 안고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과 먼지로 범벅된 얼굴을 닦아냈다. 통통- 여린 심장 박동이 돌 틈 사이에 피어난 한 송이 제비꽃을 떠올렸다.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인가! 이 여린 심장을 꺼내려는 인간은 도대체 어떤 부류일까?
그리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열 쌍의 눈동자, 저 어린것들은 무슨 죄가 있어 지옥에 빠졌단 말인가! 세상은 왜 이 모양이란 말인가! 상식을 비웃는 부조리에 스멀스멀 분노가 치솟았다.
“영숙아, 무서웠니?”
“응!”
“지금도 무섭니?”
두웅- 간섭장이 아이를 휘감았다.
“아니, 안 무서워!”
“영숙이는 착하구나.”
무쌍이 영숙의 볼을 쓰다듬어주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아이들을 손짓했다.
“너희도 이미 오너라!”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음성이 웅 울렸다. 가을볕이 결실을 북돋우고, 바람이 들판을 흔들어 해충을 떨어내듯이 상처 난 영혼을 감싸는 공감의 울림이다. 아이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좋은 아저씨다!’ 공감의 눈빛이 오갔다.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 나왔다.
눈물 젖은 얼굴, 겁먹은 눈동자, 울음을 터뜨릴 듯 삐죽이는 입꼬리, 엎어질 듯 달려오는 모습이 맹수의 발톱에서 용케 탈출한 새끼 사슴에 다름 아니었다. 아직 응석을 부릴 나이에 공포에 길들고 체념을 알아버린 슬픈 영혼이다.
“아저씨가 늦게 와서 미안하다.”
무쌍이 한 명씩 차례로 꼭 안아주었다. 이 아이들은 박꽃이다. 저녁노을이 스러지면 슬그머니 피어나는 담장 위의 박꽃이 되어버린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이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을까? 가슴에 총알을 한 방 맞은 듯 구멍이 휑 뚫렸다.
“아!”
김극도가 가벼운 탄성을 터뜨렸다. 거역할 수 없는 위엄과 따뜻함, 저 아이들은 등을 비빌 든든한 언덕이 생겼다. 억울하면 고자질할 사람이 있고, 힘들면 칭얼거릴 사람이 생겼다. 사마의 품에 안긴 아이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자신도 저 나이 때 사마를 만났더라면…….‘조센진!’ 누군가 소리치면 곧바로 곧바로 돌멩이가 날아왔다. 주먹과 깡이 부족하지 않았지만, 일본 애들이 떼로 덤벼들면 당할 길이 없었다. 터진 머리에 된장을 바르며 울던 어머니, 한숨만 쉬는 무기력한 아버지.
벤또를 싸지 못해 거지새끼 소리를 들으며 살아야 했던, 너무나 막막하던 시절, 비빌 언덕은커녕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도 없었다. 아버지는 툭하면 숟가락 밥그릇 공출당하고 나무를 깎아 만든 숟가락으로 송구죽을 퍼먹던 시절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 말을 들을 때마다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당신이 그렇게 살았으니 아들의 서러움은 별것 아니란 말인가! 사마는 아버지처럼 한숨만 쉬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다. 저분이야말로 자신이 몽매간에도 원했던 힘 있는 주인이자 신이다.
대기자들은 뜻밖의 전개에 숨을 죽였다. 오전에는 정중히 협조를 요청하던 나이방들이 저녁에는 가죽 몽둥이를 휘두르는 악귀가 되었다. 이들은 다른 조직원인가? 또 다른 술수를 부리는 것은 아닐까? 의구심 가득한 눈길이 무쌍에 집중되었다. 무쌍이 깊은 호수처럼 잔잔한 눈으로 시선을 받아냈다.
“이곳이 지옥임을 눈치챈 사람도 있고, 아직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고 아는 것도 잊어라.”
“선상님은 누군교?”
사십 대 남자가 말 허리를 툭 잘랐다. 무쌍이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척 보기에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날품팔이 행색이다.
“당신은 왜 이곳에 있나?”
“먹고 살기 어려워서 콩팥 한 개 팔아묵을라꼬 왔심더.”
“어떻게 알고 찾아왔나?”
“동대구역 화장실에 붙은 광고 보고 왔심더.”
“헐!”
무슨 개 풀 뜯는 소린가? 무쌍이 김극도를 돌아보았다.
“중간 연락책이 전국의 공공 화장실에 스티커를 붙이고 다닙니다. 광고를 보고 연락하면 중간 연락책이 신상을 확인해서 복지관으로 데려옵니다.”
“무서운 일이군.”
무쌍이 고개를 저었다. 이들은 직접 희생자를 납치하기도 하지만, 사방에 거미줄을 쳐놓고 희생자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흡혈귀다. 거미줄에 걸리는 희생물도 딱했다. 손발 멀쩡한 사람이 자진해서 자신의 장기를 돈 몇 푼에 팔아먹는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피를 팔러 온 사람도 마찬가지다. ‘오죽하면!’이란 말이 있긴 하지만, 본인의 육체가 그리도 가치 없단 말인가!
“콩팥 한 개에 얼마 받기로 했나?”
“이백만 원 받기로 했시다.”
“그 대가로 나무코트 입으려고?”
“신장 한 개를 떼어내도 사는 데 지장 없다는 것쯤은 상식아임니꺼.”
남자가 큰 진리라도 안다는 듯이 우쭐거렸다.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다. 무쌍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간단히 설명하지. 이곳은 복지관도 아니고 병원도 아니다. 여러분은 대기조라 아직 지옥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수술실에 들어가면 쓸만한 장기를 전부 떼고 시체는 사료분쇄기로 갈아서 버리거나 암매장한다. 매혈하러 온 사람도 마찬가지다. 혈액 치환은 한 사람의 피를 통째로 받을 때 효과가 크다. 400mL가 아니라 5,000mL를 뽑는다는 소리다.”
“그 그럴 수가!”
남자의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 분위기가 좋지 않다고 생각은 했지만, 너무나 끔찍한 소리다.
“말도 안 돼!”
“우짠지 이상타 켔능기라.”
“피를 비싸게 산다케서 팔라꼬 왔는데 무신 소리고!”
“그라마 여는 머하는 곳인교?”
“아저씨는 누군교?”
사람들이 늦봄 무논의 악마구리처럼 떠들었다. 무쌍이 혀를 찼다. 똥인지 된장인지 알려줘도 모르면 어쩔 수 없다.
“조용! 이곳이 어떤 곳인지 내가 누군지 알 필요 없다. 당신들은 반딧불이에 속을 파먹힌 우렁이 꼴이 되었을 사람들이다. 조상묘 잘 쓴 덕분에 삼도천에 발만 적시고 돌아섰음을 다행으로 여겨라. 이곳은 곧 사라진다. 혹시 갈 곳이 없는 사람 있나?”
“안돼요!”
이민주가 뾰족한 소리를 질렀다. 무쌍이 서늘한 눈으로 이민주를 쳐다보았다.
“난, 저 사람들과 달라요. 저 아이와 함께 내일이면 일본으로 가야 해요. 당신이 뭔데 내 사업을 망치나요.”
“허어, 저런 바보 같은 년이 있나!”
무쌍의 등 뒤에 공손히 시립 해있던 김극도가 헛바람을 불었다. 스이도바시 병원에 도착하면 저 여자는 몸속의 혈액을 수혜자에게 몽땅 헌납하고 호도께(부처, 일본인은 죽는다는 표현을 호도께를 만난다고 말함.)를 만나러 가야 한다. 대라신선을 만난 줄도 모르고 약 먹은 오리처럼 꽥꽥거리는 모습에 입만 쩍 벌어졌다.
무쌍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죽음에 처한 수많은 사람을 구해주었지만, 보따리 내놓으라는 인간은 처음이다. 사람은 죽을 때가 되어야 변한다는 말은 고금의 진리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이민주의 인격은 8년이란 세월이 흘러도 여전했다.
“당신이 이 아이의 엄마라도 되나? 하긴 엄마라면 자식을 지옥에 처박을 리 없지.”
“닥쳐! 어쭙잖은 영웅 흉내를 내고 싶은 모양인데 번지수가 틀렸어. 영숙아, 이리와!”
할 말이 없어진 이민주가 눈에 독기를 품고 억지를 부렸다.
“싫어! 난 아줌마 싫어.”
영숙이 빽 소리쳤다.
“저 저런, 배라먹을 년!”
“당신이 일본을 가든 말든 말리지 않아. 이 어린 생명이 왜 당신 사업에 희생되어야 하지?”
“내 일에 당신이 상관할 바도 아니잖아욧.”
이민주가 바락했다.
“허허, 내 참! 이봐, 저 여자가 내막을 알고 있나?”
어이를 상실한 무쌍이 김극도에게 물었다.
“계약할 때 대충 알려주었습니다. 한 번에 피를 몽땅 뽑히고 돼지 사료가 된다는 사실은 모를 겁니다.”
“뭐라고욧!”
이민주가 새파랗게 질렸다. 육 개월에 걸쳐서 네 번 헌혈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는데 이게 무슨 소린가.
“멍청한 년, 계약은 인간끼리 맺는 약속이다. 참새는 모이 때문에 죽고, 고양이는 호기심 때문에 죽는다더니……. 똥인지 된장인지 여태 맛보고도 몰라?”
짝- 무쌍이 세심하게 강약 조절해서 싸다구를 날렸다. 혜영의 친모라 여태 꾹 참았지만, 상판대기를 계속 보기가 역겨웠다.
“아악!”
이민주의 입에서 핏물이 튀었다.
“더러운 년, 권력에 미쳐서 딸을 팔아먹더니 이젠 돈에 미쳐서 어린아이를 팔아먹으려 하느냐.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다만, 차마 그러지를 못하겠구나.”
‘딸을 팔아먹어? 저놈이 누구지?’
의식이 까무룩 꺼지는 순간에 떠오른 의문이다.
무쌍이 냉엄한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봄바람이 살랑이던 지하실에 북풍한설이 몰아쳤다.
“갈 곳 없는 사람 있나?”
“……”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무쌍이 김극도를 돌아보았다.
“사마, 바깥에 맹견이 돌아다닙니다. 그냥 나가면 죽습니다.”
“이미 조치했다.”
유형화된 살기를 맞은 도사견과 아키타견들은 공포에 질려서 개집에 틀어박혀 있다.
“알겠습니다.”
눈치 빠른 김극도가 품속에서 돈뭉치를 꺼냈다. 주인이 된 무쌍의 성향을 파악하고 미리 준비했다. 보좌관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직업이다.
“다시 얻은 삶을 엄숙히 살기 바란다. 이곳은 곧 잿더미가 된다. 최대한 빨리 벗어나라. 저승사자를 만나고 싶거나 맹견에게 물어뜯기고 싶으면 소란을 피워도 좋다.”
김극도가 겁을 주고 돈을 나누어주었다. 고맙다고 인사를 남긴 사람은 몇 명 없었다. 대부분이 무쌍을 흘낏거리며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지하실에 실신한 이민주와 열 명의 아이, 품속의 영숙만 남았다.
“사마, 배은망덕한 인간들입니다. 섭섭하지 않습니까?”
“이 또한 잠시광경(暫時光景)이다. 마음 가는 대로 할 뿐이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무쌍은 담담했다. 저들도 레미제라블이다. 각박한 경쟁에 치여서 악다구니치며 살다 보면 순수와 믿음을 잃을 수밖에 없다. 저들은 또 다른 해를 입지나 않을까? 저 사람의 말이 정말일까? 하는 불안과 의심에 잠식되었다.
달이 산보다 작게 느껴짐은 산이 가깝고 달이 멀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사부대중은 그냥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면 된다. 거대한 아수라의 영혼도 깨닫지 못하면 객체로 존재하는데 장삼이사야 말할 것도 없다. 마음 가는 대로 했을 뿐, 이미 잊었다.
“훌륭한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김극도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정리하고 떠나야지. 사료 파쇄기는 어디 있나?”
“건물 뒤쪽에 묻었습니다.”
“가자! 너희는 여기서 잠시 기다려라.”
“아저씨 따라갈래요.”
“무서워요!”
아이들이 곧 울 듯한 얼굴로 매달렸다.
“휴, 알았다.”
무쌍이 앞서나가자 아이들이 오리 새끼처럼 따라갔다. 김극도가 정신을 잃은 이민주를 흘끔 보고 뒤따라 나갔다. 주인은 무골호인이 아니다. 후안무치한 여자를 내버려두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인적없는 지상은 달빛으로 휘영청 밝았다. 무쌍은 신선한 공기를 폐가 터지도록 들이마시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이틀만 지나면 보름달이 될 상현달이 천중에 박혀있다. 찌르르- 때 이른 귀뚜라미 소리가 울렸다.
부우웅- 전조등 불빛에 아이들이 눈을 가렸다. 잠시 사라졌던 김극도가 버스를 끌고 왔다. 무라이와 우범석이 끌려 나왔다.
“으아아!”
얼굴을 알아본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여자아이들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무쌍이 김극도를 쳐다보았다.
“무라이는 로리타, 우범석은 사디스트입니다. 아이들을 많이 괴롭혔습니다.”
“가지가지 한다. 너는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군.”
“불쌍한 애들입니다.”
무쌍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이다. 두려움에 질린 아이들은 자신들을 챙겨주는 김극도에게 의지했을 것이다.
“사마, 기계를 파내겠습니다.”
김극도가 삽을 들고 나섰다. 무쌍이 손을 들었다.
“어느 천년에! 애들이 볼만한 장면이 아니다. 버스에 태워라.”
“옙, 알겠습니다.”김극도가 영숙을 받아안고, 애들이 우르르 버스에 올랐다. 무쌍이 두 손을 뻗어서 좌표를 지정하고 염력을 집중했다. 후두둑- 땅속에서 소형 승용차 크기의 기계가 솟아올랐다. 김극도는 놀라지 않았다. 신이 무슨 일을 못 하랴. 잽싸게 케이블을 끌어서 전원에 연결하고 스위치를 올렸다. 우웅- 파쇄기 롤러가 힘차게 맛물려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