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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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장 종두득두1
태평양전쟁이 끝난 1945년 8월 15일 당시 전승국인 연합군의 식민지는 60개가 넘었지만, 패전국(이탈리아는 패전 후 일찌감치 연합군에 한 다리 걸쳤고, 독일은 5월에 이미 항복했다.)인 일본의 식민지는 단 한 개, 바로 한반도였다. 식민지의 지위도 전승국과 패전국에 따라 갈렸다. 1951년 일본과 연합국이 강화조약을 맺을 때 베트남, 필리핀,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버마(미얀마)등 승전국의 식민지는 연합국의 지위를 물려받았다.
한국은 식민지라는 아픔에 패전국이라는 주홍글씨까지 물려받았다. 패전국 식민지는 한국이 유일했고, 강화회의에서 배제된 나라도 한국이 유일했다. 그 결과 승전국 식민지는 강화조약에 따라 일본으로부터 당당히 배상권을 인정받았지만, 한국은 뼈아프게도 배상권을 받지 못했다.
국제사회 룰은 냉혹하다. 힘이 없으면 명분이라도 있어야 한다. 한국은 힘이 없었고, 국제 사회에 어필할 만한 뚜렷한 항전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황량한 만주 벌판에 외로운 해골로 남은 독립군, 독립만세를 외치며 초개같이 스러져간 민초들의 핏값에 불구하고 일본에 협조하고 부역한 부일 귀족과 매국노들의 족적이 더 컸다.
한 나라의 왕비가 궁궐 침소에서 일본 양아치 패거리의 칼에 맞아 죽고 시신마저 불탔다. 왕궁 수비대 무관은 일본 무뢰배와 손을 맞추고, 왕궁 수비대는 총성에 놀라 도망쳤다. 왕과 왕세자는 아내이자 어머니가 살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시해에 가담한 중심인물인 아다치 겐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 놈들이 (러시아를 믿고) 머리를 불쑥 쳐들고 대일본을 무시했다. 그래서 여우를 쳐죽였다.’ 아다치 겐조는 대정익찬회 중심인물로 85세까지 잘 먹고 잘살았다.
왕실, 내각, 언론, 누구도 아다치 겐조의 발언에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이런 나라가 국제사회에 어필할 수 없었음은 당연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그냥 생긴 말이 아니다. 외부에 드러나는 부분은 하부 민초의 항전이 아니라 상층부 매국노와 비열한 왕실의 언행이다. 외부에서 볼때 조선은 일본의 지배를 당연시 여기는 나라였다.
필리핀은 일본으로부터 배상금 5억 달러를 받았고, 한국은 우여곡절 끝에 청구권 협정을 통해서 경제협력이란 명목으로 같은 5억 달러를 받았다. 한국이 강화조약에서 배상권을 얻었다면 50억 달러도 모자랐을 것이다. 위안부 문제로 징징거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같은 5억 달러지만 성격은 전혀 달랐다. 필리핀은 당당하게 받아냈고 한국은 자존심을 팔아서 받아냈다. 나라를 발전시킬 종잣돈을 얻어야 했던 당시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우리 손으로 광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광복은 한국인이 잠자고 있을 때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하늘은 이집트 카이로 시내에서 15km 떨어진 기자 피라미드 지구의 메나하우스 호텔이고, 떨어뜨린 사람은 루즈벨트, 처칠, 장개석 3인이었다. 그것도 처칠이 몽니를 부리는 바람에 기약 없이 표류할뻔했다. 한국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한국과 한국인의 운명이 그렇게 결정되었다.
더 기막힌 일은 1945년 8월 15일 이후에 벌어졌다.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反民特委) 활동을 강제로 중단시켰다. 친일파를 요직에 기용하고, 일제 강점기 순사들을 대거 경찰로 재기용해서 민족주의자를 탄압했다. 일제 강점기에 수많은 애국지사를 체포해서 형장과 감옥으로 보낸 고등계 형사 노덕술조차 고위 경찰직에 복귀해서 제 세상인 양 날뛰었으니 어안이 벙벙할 일이다.
그 결과 친일청산은 물 건너가고, 배덕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민족에 빌붙어 민족을 배반한 자들이 대를 이어 호의호식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과 재산을 던진 애국 열사의 후손은 끼니를 거르는 통절한 현상이 벌어졌다.
“샤트르, 자네 말이 옳았네.”
무쌍이 중얼거렸다. 전직 역사학자였던 샤트르는 한국에 국부(國父)가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권력욕에 눈먼 지도자가 배신자와 배덕자를 품에 안으면서 정의가 사라졌고, 정의가 사라진 나라는 부패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국은 35년이나 식민 지배를 당했지만, 프랑스가 독일 치하에 들어간 기간은 1940년 6월 14일부터 1944년 8월 25일까지 4년 2개월이다. 그 짧은 기간에 나치에 부역한 혐으로 기소당한 프랑스인이 10만을 넘었다.
프랑스는 나치에 부역한 프랑스인을 철저히 응징했다. 즉결처형을 포함해서 사형당한 자만 1만 2천 명, 5만~6만 명이 징역, 종신 노역, 공민권 박탈 등의 형을 받았다. 이에 반해 35년간 강점당한 한국은 221명 기소, 사형 1명, 징역 12명, 공민권 정지 18명이란 어이없는 현상이 벌어졌다. 한국인이 유별난 애국자라 35년간 친일 매국노가 없어서는 아닐것이다.
배신자를 단호하게 처단한 프랑스는 그 후에도 반역자는 무조건 종신형을 선고하는 강수를 두었다. 언론도 예외가 없었다. 나치에 협조한 언론은 폐간과 동시에 자산을 몰수당했다.
한국은?
친일 청산은커녕 정계, 관계, 경제계 할 것 없이 친일파의 독무대가 되고, 배덕의 찌꺼기는 양아치 새끼들까지 오염시켰다. 친일에 앞장선 신문사는 더욱 뻔뻔한 기사를 쏟아냈다. 대정익찬회, 하몽가 등의 음습한 조직이 마수를 뻗고, 양아치가 그들의 손발이 되고, 이들을 박멸해야 할 사법기관과 행정조직이 이들을 비호하는 어이없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는 매국노가 잘산다는 학습효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뿌리를 뽑아내기엔 이미 늦었다. 무쌍이 현실에 관여하지 말라는 대우선사의 명을 어기고 손을 쓸지는 두고 볼 일이다.
아이들을 프랑스로 보낸 다음 날 오후, 가물치가 육중한 배기음을 뿜으며 섬유회관으로 향했다. 이래저래 마음이 급해진 무쌍은 백부를 만나서 정리할 것은 정리하기로 했다.
“어떻게 오싰능교?”
젊은 경비가 앞을 막았다. 허리를 젖히고 턱을 들어 올린 거만한 자세다.
“사장님을 만나러 왔소.”
“약속은 했능교?”
무쌍이 젊은 경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던 경비가 움찔했다. 뒤쪽에 서 있던 경비가 슬그머니 허리에 찬 방망이를 잡았다. 무쌍이 방망이를 잡은 경비를 흘낏 돌아보았다.
“헉!”
경비가 헛바람을 불어내고 비척비척 물러났다. 한마디 던지려던 무쌍이 고개를 돌렸다. 벼룩 콧등만도 못한 권한만 주어져도 유세하려고 안달하는 인간에게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비서를 연결하시오. 비서도 미리 약속해야 합니까?”
“그건 아이지라.”
경비가 내키지 않는 태도로 다이얼을 돌렸다. 방문 목적을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쌍이 수화기를 건네받았다.
“그렇소……. 조카요……. 그렇소. 짚은다리가 고향이요.”
조카라는 소리에 듣고 있던 경비가 화들짝 놀랐다.
“받아보시오.”
무쌍이 경비에게 송수화기를 넘겨 주었다. 경비가 방아깨비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네 네 소리만 연발했다.
“가시지요.”
급 공손해진 경비가 엘리베이터 단추까지 눌러주고, 거수경례를 붙이고 돌아갔다.
“사장이란 자리가 좋긴 좋은가 보군. 나도 거드름 좀 부리면 살까.”
무쌍이 피식 웃었다. 노바토피아 국민은 백만 명이 넘었다. 한 나라의 군주이자 세계적인 갑부가 바로 자신이다. 달팽이 뿔에 불과한 권력과 재산을 가지고 거들먹거리는 소인배들이 가소로웠다.
“진짜 조카의 등장이네. 왕자의 귀환인가!”
정아영 부장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찾아오는 조카도 많고 회사에 근무하는 조카도 몇 명 있다. 물론 사장의 외조카들이다. 예전엔 열 명도 넘었지만, 자신의 손으로 월급도둑들을 잘랐다.
사장의 조카는 단 한 명, 사장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대단한 조카, 천하의 박인보 사장이 보고 싶어 하면서도 만나기를 두려워하는 조카, 박무쌍밖에 없다. 짚은다리가 고향이면 볼 것도 없이 그 대단하다는 조카다.
똑똑- 정부장이 ‘피라미 통발’을 노크했다. 병세가 깊어진 사장은 날이 갈수록 초조해하고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일단 사장실에 불려가면 초주검이 되다 보니 직원들이 사장실을 ‘피라미 통발’이라 불렀다.
정아영은 응답을 듣지 않고 곧바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녀는 피라미 통발을 겁내지 않는 유일한 직원이자, 박인보 사장과 농담을 주고받는 유일한 문고리다.
“사장님, 조카분이 왔어예.”
“또 언놈이고. 기양 돌리보내 삐라.”
박인보가 돋보기를 벗어들고 휘저었다. 지긋지긋했다. 기둥뿌리가 뽑힌 처가에서 어린 외조카들을 동원해서 읍소 작전으로 나선지 오래다.
“짚은다리 조카라 카는데예.”
“머라꼬!”
박인보의 손에 들려있던 돋보기안경이 툭 떨어졌다. 컥컥- 박인보가 떨리는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거칠어진 호흡을 달랬다. 천하의 냉혈한 박인보도 무쌍의 등장에는 식겁할 수밖에 없었다.
“놀래 디질뻔 했네. 델꼬 온나. 흐흐흐, 어떻게 변했을라나.”
박인보는 역시 박인보다.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았다. 황달 끼로 노래진 눈알이 기대와 흥분으로 번쩍였다.
방문자가 나타나자 비서실 데스크에 앉아있던 아가씨가 고개를 들었다. 비서의 눈이 커졌다. 그리스 조각상처럼 섬세하고 뚜렷한 이목구비, 육 척 장신의 당당한 체격과 균형 잡힌 몸매를 가진 보기 드문 킹카다.
“어멋!”
자신도 모르게 나지막한 감탄사가 터졌다. 서류에 코를 박고 있던 여비서 둘이 시선을 들었다. 아가씨들의 눈이 커지고 정아영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박, 진짜 사나이다!’
정아영은 숨이 콱 막혔다. 자상하고 포근한 분위기와 맹수처럼 거칠고 바위처럼 묵직한 포스가 동시에 느껴졌다. 키가 다섯 자 반에 불과하고 이목구비가 옹조지한 사장과는 손톱만큼도 닮지 않았다. 우탁, 희자, 화자와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한마디로 강하고 포근한 사나이 냄새가 물씬 풍기는 상남자다. 남자를 국으로 보는 노처녀 정아영의 가슴이 쿵쿵 방아를 찧었다. 이런 남자가 존재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이 여자였구마!’
무쌍은 한눈에 정아영이 삼식 용역 연락책임을 알아보았다. 통통한 몸매의 삼십 대 중반, 미녀는 아니지만 선한 인상에 눈빛이 맑고 입매가 다부졌다. 이런 인상의 여자는 대체로 신의가 있고 고집이 강하다.
‘에밀의 마누라감으로 딱 맞네.’
푸짐한 몸집과 강단 있어 보이는 눈빛이 껄떡대는 에밀을 꽉 움켜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디서 봤더라?’
정아영은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 줄도 모르고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다.
‘아하, 재작년 초겨울에 본 블랙패션 결정남!’
생각났다. 검정 쫄티에 검정 슈트를 걸치고 검은 백 팩에 시커먼 나이방을 쓴 남자, 꿈에도 그리던 몸매를 가진 남자, 충격을 받은 나머지 다이어트까지 하게 만들었던 남자가 기억났다. 그런데 그 남자보다 더 멋있는 남자가 나타났다. 정아영은 블랙 패션 남이 눈앞의 박무쌍임을 상상도 못 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무쌍이 불편한 한마디를 던졌다. 화들짝 놀란 정아영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반가워요. 정아영 부장입니다.”
“반갑습니다. 박무쌍입니다.”
깊은 동굴을 빠져나온 바람 소리 같은 바리톤 음성이 비서실을 울렸다. 정아영의 눈이 몽롱해졌다. 이런 남자를 찾았다. 이 남자가 ‘벗어!’라고 말하면 절대 거절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이것들이!’
여비서 둘의 눈이 박무쌍에 못 박혀서 떨어질 줄 몰랐다. 눈에서 레이저가 줄줄 뿜어졌다. 당장에라도 팬티를 벗을 기세다. 정아영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뭣들 해. 야근하고 싶어?”
쨍하는 소리에 기겁한 여비서들이 서류에 코를 박았다. 정아영은 쫄따구들의 눈에서 노처녀 히스테리 발작이라는 경고문을 읽었다.
‘내 나이가 어때서?’
애써 위로하지만 걸망진 외모 때문에 누구나 서너 살 위로 보니 미칠 노릇이다. 무쌍이 삼십 대 중반으로 본 정아영의 나이는 서른둘이다. 여자 나이 서른이 넘으면 일 년이 악몽이다. 서산에 해지고, 고삐 풀려 도망간 소는 찾을 길 없는 딱한 상황이지만, 정아영은 시집가기 더욱 힘들어졌다.
“시장님과 별로 안 닮았네요.”
정아영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쌍은 대꾸 없이 사장실을 턱짓했다. 닥치고 안내나 하란 뜻이다. 정아영은 그것조차 멋있어 보였다.
“사장님 건강이 좋지 않심더. 주제넘은 부탁이지만 사장님 건강에 영향이 갈 말과 행동은 삼가주이소.”
무쌍이 가타부타 말없이 정아영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주제넘은 부탁은 하지 않으면 된다. 주제넘은 줄 알면서 부탁하면 그것이 주제넘은 짓거리다. 정아영은 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후유, 그냥 제 부탁입니다.”
정아영이 한숨 쉬듯 덧붙였다.
“후후, 자식 복은 지지리 없두만 직원 복은 있는 양반이구마.”
정아영은 혼잣말하듯 툭 던져진 말에 묵직한 세월의 무게를 느꼈다. 동갑내기 사촌 형인 우탁과 비교하면 신작로에 구르는 돌멩이와 산 정상에 눌러앉은 천 년 거암만큼이나 다른 남자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세상을 살아왔을까?’
정아영은 호기심이 불길처럼 일었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요.”
무쌍이 한마디 툭 던지고 미소 지었다. 정아영이 움찔했다. 보라! 남자의 얼굴에 가느다란 흰 선이 그어지고, 얼굴 근육이 물결치듯 주르륵 풀렸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싱그러운 미소가 가득 들어찼다.
“아, 아름답다!”
웃음기가 떠오른 사장 조카의 얼굴은 아침 해를 받아 활짝 피어나는 연꽃이다. 남자의 미소가 저렇게 황홀해도 되나! 정아영은 정신없이 끌려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