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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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장 종두득두6
서늘한 눈이 박인보를 향했다. 용서라는 명사의 사전적 의미는 ‘죄나 잘못을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줌’이다. 당사자 간에 형성되는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 영역이라는 소리다.
제삼자는 용서라는 말을 너무 쉽게 입에 담는다. ‘용서야말로 진짜 복수다.’ ‘인간은 남을 책망할 권리가 없다.’라고 말하는 미친놈도 있다. 본인이 당해보면 용서라는 말을 절대로 쉽게 내뱉지 못한다.
용서는 사과를 전제로 한다. 헤겔은 퍼차용(Verzeihung, 용서)의 언어적 어원이 퍼치스턴(Verzichten, 단념)과 같다고 했다. 사과 없는 용서는 체념적 포기를 통한 자기기만이고 위안이다. 심하게 말하면 힘없는 자의 마지막 탈출구가 용서다. 응징할 힘이 있는 자가 구차하게 용서 운운할 이유가 없다.
“사과 한마디 없는 장 씨와 화자를 용서하라고요?”
무쌍이 한 박자 늦게 물었다.
“……”
박인보는 선 듯 응답하지 못했다. 십수 년 전 우탁이 사건을 쳤을 때 저 눈빛을 보았다. 분노의 눈빛, 아니 가소로움이 담긴 눈빛이다. 농약병이 깨지며 파편이 이마를 찢고, 퍼런 맹독성 농약과 붉은 피가 뒤섞인 얼굴 사이로 번득이던 눈빛이 바로 저 눈빛이다. 천하의 장필녀도 그때만은 우탁을 데리고 급히 헛간을 빠져나갔다.
“백부, 박말년 아지메 기억납니까?”
무쌍이 불쑥 물었다. 박말년은 삼술 아재 여동생으로 남양군도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고초를 겪다가 해방 후 이십 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고 들었다. 아지메는 얼굴 왼쪽이 으스러지고 코가 내려앉은 흉한 외모에 걸음걸이는 오리처럼 뒤뚱거리고, 툭하면 하늘을 향해 주먹질하며 고래고래 고함지르곤 했다.
긴 세월이 흘러서 고향에 돌아왔지만, 어른들은 더럽다고 상대 않고 아이들은 마귀할멈이라 부르며 피해 다녔다. 허물없이 지낸 사람은 어머니밖에 없었다. 동네 여자들은 무당년과 창녀가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쑥덕거리곤 했다.
박말년 아지메는 자신이 짚은다리를 떠났던 그해 여름에 낙동강에 몸을 던졌다. 고향 사람과 친척의 냉대를 견디지 못했다. 집성촌인 짚은다리의 또 하나 흑역사다.
“동네를 벌컥 뒤집은 그 여자 말이가?”
박인보는 뜬금없는 인물의 등장이 뜨악했다. 껄끄러운 사건을 끄집어낸 조카의 속내가 쉬이 짐작되지 않았다.
“야, 백부도 그 아지메를 창녀라고 생각합니까?”
“글쎄, 본의는 아니라도 왜놈 정액받이 노릇을 했으니…….”
박인보는 조카 눈치를 보며 말끝을 매조지지 못했다. 조카는 퇴학당하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판사나 검사가 되어있을 놈이다. 강간 누명을 씌워서 인생을 뒤틀어버린 가해자가 장필녀다. 쉽게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참 한심하네요. 동네 어른들 생각이 전부 그러니까 백부만 탓할 일은 아니지요. 저는 엄마 곁에서 박 아지메가 눈물을 질금거리며 늘어놓았던 말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남양군도 팔렘방에 끌려간 아지메는 하루에 일본군을 삼사십 명씩 받았답니다. 한 명당 십 분씩 계산해도 사십 명이면 일곱시간입니다. 쪽발이가 대부분 조루라니까 그보다 짧긴 했겠지요. 말라리아에 걸렸을 때 하루만 쉬게 해달라고 요구했다가 오장의 군홧발에 걷어차여서 얼굴이 부서졌다고 하더군요. 순전히 타의에 의해서 위안부로 끌려간 불쌍한 아지메가 창녀입니까? 여자의 기능과 용모를 잃고 청춘을 잃은 아지메가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아지메가 남긴 유서가 생각나지요?”
무쌍이 말을 멈추고 박인보를 빤히 쳐다보았다. 박인보는 입안이 깔깔해졌다. 왜 모르겠는가? 동네가 발칵 뒤집혔던 사건이다.
[나는 살아서 복수할 수 없기에 귀신이 되어서 복수하려고 죽는다. 쪽발이 씨를 말리고 싶은 원한만큼 가증스러운 집안 어른들도 용서할 수 없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내가 왜 창녀라고 손가락질당하고 더럽다는 말을 들어야 하나? 공출을 면하려고 왜놈 정액받이로 보낸 집안 어른들이 왜놈 군인보다 더 나쁘다. 나는 귀신이 되어서 내 말을 한마디도 들어주지 않고 욕설만 퍼부은 박가 놈들에게 먼저 복수하고야 말겠다.]유서가 발견되자 짚은다리는 발칵 뒤집혔다. 박말년은 박인보와 10촌으로 한 살 적은 동생이다. 짚은다리에 박말년이 어른이라 부를 사람은 아홉이 있다. 박말년의 자살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이들은 돈을 추렴해서 구명시식을 한다. 천도재를 지낸다. 위령제를 지낸다. 난리법석을 떨었다.
박말년 아지메는 20세기 화냥년(還鄕女)이었다. 아무런 힘이 없었기에 이역만리 타향에 끌려가서 무참하게 유린당했고, 천신만고 끝에 살아서 고향에 돌아왔건만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다. 박말년이 죽음으로 억울함을 외쳤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동네 분위기만 흉흉해졌다. 동네 사람이 죽거나 큰 병이 날 때마다 박말년 귀신이 붙었다는 소문이 돌고 용한 무당이 불려 왔다. 귀신의 노여움을 피하고자 각자도생에 급급했다. 대부분 인간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존재지만, 짚은다리 박가들은 유난히 비열했다. 무쌍이 짚은다리 친척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유다.
박인보는 그제야 무쌍이 박말년을 끄집어낸 의도를 읽었다. 조카는 가장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못 한 자신을 싸잡아서 욕한 것이다. 힘과 의지가 빈약했으면 박말년과 다를 바 없는 꼬락서니를 당했다는 항변이다.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진보 유골까지 손댄 년을 용서해 달라는 내가 면목없다만, 그 여자는 정신병자다. 미친년을 죽이고 살인자가 될라카나? 화자는 뽕쟁이 질에 빠져서 행방불명되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다. 애비 심정도 쪼매 이해해 도고.”
“정의는 늘 힘 있는 자의 편이고, 장 씨는 힘없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무쌍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참담하고 분노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지금도 판결문을 토씨 한 개 틀리지 않고 기억한다.
[피고는 미성년자를 약취 유인해서 강제력을 동원한 성폭력을 행사했음이 인정된다……. 엄중한 책임을 묻는 것이 불가피하다……. 피고가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동일 처벌 전력이 없는 점, 피해자와 합의했음을 참작한다…….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한다. 다만, 이 판결 확정일로부터 4년간 위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 피고의 인권을 참작하여 실명 보도를 금한다…….]항소심 판사가 읽은 판결문이다. 법대에 높이 앉아 판결문을 읽어내려가던 판사의 귀찮은 표정이 눈에 선했다.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 이전에 어이없었다. 미결수를 200일이나 구치소에 가둬 둔 것도 위법이지만, 혜영이 거액의 로비자금을 뿌리지 않았으면 집행유예가 떨어졌을까?
강영숙이 판사의 딸이었어도 집행유예로 풀어주고 피고의 인권 운운하며 실명 보도를 금했을까? 그런 판사 놈이 있다면 목을 댕강 잘라 버릴 용의가 있다. 범죄자보다 더 가증스러운 놈이 위선자다. 무쌍 본인도 힘과 의지가 없었으면 박말년 아지메처럼 억울함을 유서로 남기고 낙동강에 투신했을 수도 있었다.
박인보는 안타까웠다. 무쌍의 성격으로 볼 때 마누라와 화자는 죽은 목숨이다. 문제는 장씨가 아니라 딸과 조카다. 아무리 엇나간 자식이라도 자식은 자식이다. 집안 꼴이 개판이 되다 못해 조카가 자식을 죽이는 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가족끼리 피를 흘리마 평생 마음의 짐으로 남는다. 처가는 무너지기 직전이다. 박 씨 집에 시집 왔으마 박씨가 돼야 하는데 그 여자는 입때까지 장 씨로 살았능기라. 친정이 무너지마 그질로 죽은 사람이데이. 그카고 보마 나도 속 좁은 놈이다. 나이 오십이면 지천명이라 카는데 하늘의 뜻은 고사하고 어린 조카를 핍박하고 마누라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허망한 인생을 보냈구마.”
박인보의 얼굴에 짙은 허무가 내려앉았다. 무쌍은 한가지 사악한 계획이 번쩍 떠올랐다. 자신은 힘없는 박말년 아지메가 아니다. 사이코패스에 걸맞은 응징이 있다.
“직접 피를 보는 일은 없을 겁니다.”
“고맙다.”
박인보의 얼굴이 환해졌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주어가 생략되었지만, 박인보는 흔쾌히 답했다. 무쌍이 손에 피를 묻히는 데미지만 입지 않으면 된다. 박인보가 인터폰을 눌렀다.
“아영아, 그거 갖고 온나.”
정아영이 색바랜 봉투를 주고 나갔다.
“받아라. 죽을 날을 받아놓아서 그런지 후회되는 일이 천지삐까리다. 이것이 젤로 후회되는 일인 기라.”
“멉니까”
“십 년 전에 준비했던 네 학비와 생활비다. 문경 탄광에서 죽다 살았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그때 준비했는데 용기가 없어서 주지 못 했다. 니 성질에 굶어죽어도 받지 않았겠제?”
“잘 아시네요. 크크크!”
무쌍이 툴툴 웃었다. 짚은다리를 떠날 때 그쪽으로는 오줌도 갈기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후, 일 년이 지날 때마다 돈을 추가하다 보니 제법 두툼해졌구나. 대학졸업 때까지 아쉽지 않도록 준비했다. 너가 용병 질로 얼마나 벌었는지 모르지만, 백부의 마음이거니 하고 받아 도고.”
박인보는 무쌍이 용병 질로 학비를 벌어서 다시 학교에 다니는 걸로 알고 있었다. 조카가 좋은 사람 장학금을 만들어서 수천 명에게 등록금과 점심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얼굴이 될지…….
무쌍은 세월의 무게가 더해진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비틀린 관계지만 피는 물보다 진했다. 감격스러울 거야 없지만, 가슴이 따뜻해졌다.
아버지가 덫을 놓아서 잡은 산토끼를 놓아달라고 떼를 쓴 적이 있었다. 겁에 질린 커다란 눈망울을 보는 순간 불쌍하다는 생각이 토끼 고기의 유혹을 눌렀다.
[니 엄마가 고기를 묵어야 하는데…….] 난감해하던 아버지는 산토끼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풀을 뜯어 먹이며 키우던 정든 집토끼 한 마리가 솥에 들어갔다. 일시적인 충동으로 산토끼를 살려준 대가는 정든 집토끼의 희생이었다. 아버지가 의도했는지, 단순히 고기가 필요했는지 모르지만, 산토끼 집토끼의 교훈은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이만하면 되었다. 공간지각력과 안법을 동시에 운용하면 밥과 반찬에 우글거리는 각종 세균이 보인다. 진순이 얼굴의 땀구멍이 동굴로 나타나고 분비된 피지와 각질이 물고기 비늘처럼 드러난다. 때로는 알아도 모른 척 보고도 못 본 척해야 세상살이가 팍팍해지지 않는 법이다.
무쌍은 버석한 얼굴과 바싹 마른 손목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흰 봉투는 십 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누리끼리해졌다. 변색된 봉투에 백부의 진심이 실렸다. 노바토피아에 챙겨놓은 산토끼가 백만인데 집토끼를 용납 못 하랴!
“잘 쓰겠습니다.”
무쌍이 봉투를 받았다. 이로써 백부와 자신 사이에 쌓인 구원(舊怨)은 모두 털어버렸다.
“고맙다. 낯 간지러운 소리지만, 사람은 누구나 실수한다. 문제는 그 실수를 얼마나 빨리 깨닫는지, 어떤 식으로 실수를 만회하느냐가 문제겠지. 우리는 가족이다. 인도네시아 원시 부족인 다니족은 가족이 죽으마 손가락을 잘라서 가족을 잃은 슬픔을 아픔으로 상쇄한다 카더라. 흘러가버린 세월은 보상할 길이 없어 안타깝구나. 지난날의 아픔은 잊고 이제부터 할 일을 하자꾸나. 네 엄마를 찾는 일 말이다. 그리고 여력이 남으면 내 아픔도 조금 헤아려주면 바랄 게 없겠구나.”
박인보가 한탄하듯이 중얼거렸다. 가족을 잃어버린 늙고, 지치고, 병든 남자가 황혼에 기대어 가슴으로 뱉는 말이다. 백부는 죽을 때가 되어서야 인간의 조건을 찾았다.
‘사부님은 이런 결말을 예상하신 건가!’
사부는 집안일을 성급하게 처리하면 평생 후회가 남게 된다고 누차 말씀하셨다.
“백부, 어머니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백부는 우탁이를 잘 챙기시소. 종손이 똑바로 서면 집안도 똑바로 섭니다.”
무쌍은 묘안거에서 곰탕 한 그릇 하자는 백부를 뿌리치고 섬유회관을 나섰다. 혼란한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보이소! 저 좀 보입시다.”
막 건물 현관을 나설 때 정아영이 헐레벌떡 뒤따라왔다. 유니폼을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핸드백을 든 모양이 조기 퇴근하는 폼새다.
“무쌍씨, 닭똥집에 쐬주 한 꼬뿌 하입시다.”
무쌍은 뜨악한 얼굴로 정부장을 쳐다보았다. 처음 보는 남자에게 아랫도리 들이대는 프랑스 년은 보았어도 다짜고짜 술 한잔 걸치자고 들이대는 여자는 처음이다.
“와요?”
“개털이 범털에게 미리 눈도장 찍어둘라꼬요.”
정아영이 혀를 날름했다. 푸짐한 몸집의 여자가 귀여운척하는 모습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허! 너무 노골적이지 않소?”
“입때까지 솔직하게 들이대지 못하고 내숭 떨다가 요 모양 요 꼴로 늙어간다 아입니까. 애정 전선을 망쳤으니 출세라도 해야지요.”
“훗, 그럽시다. 저녁은 내가 사지요.”
무쌍이 픽 웃었다. 밉상인 여자다. 이 여자는 아무리 봐도 껄떡이 에밀과 궁합이 맞을 여자다. 두 사람은 동성로 뒷골목에서 순댓국으로 간단히 저녁을 때우고 자리를 옮겼다.
정아영이 노원동 공구 골목에서 택시를 세웠다. 덕산댁이라 쓰인 간판이 삐뚜름하니 걸려있는 닭발 집, 박인보가 향심여객을 운영할 때 자주 찾던 단골집이다.
정아영이 앞서서 밀창을 드르륵 밀고 들어갔다. 열 평 남짓한 좁은 홀에 케이블 드럼을 화덕으로 개조한 테이블 여섯 개가 전부인 가게다. 허름한 대폿집이지만 구수하고, 편안하고, 퀘퀘한 분위기가 덕지덕지 묻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