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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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장 종두득두7
뚝배기보다 장맛이라고 했다. 단골 음식점을 보면 그 사람의 성품을 알 수 있다. 정아영은 털털하고 꾸밈없는 실속파다. 검소함이라는 점잖은 말로 포장된 짠순이는 부록이다.
“이 집에서 사장님께 술을 배운지도 십 년이 넘었네요. 중간에 주인이 세 번 바뀌었는데 덕산댁 아줌마가 제일 좋아요. 닭똥집이 특별할 거야 없지만 푸짐하이 주거던예.”
“오호, 창업멤버?”
땅거미가 스멀스멀 밀려드는 창밖에 눈길을 두고 있던 무쌍이 건성으로 감탄했다. 끌려온 장소가 하필 풍국 캐피탈 부근이다. 날이 어둑해졌지만 가게 앞에 산더미처럼 쟁여놓은 각종 장비와 기계를 천막지로 덮는 주인은 아무도 없었다.
공구 골목은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려는 상인과 싸게 사려는 손님의 고성으로 왁자지껄했다. 개판 정치에 데모로 날이 새고 지지만, 밑바닥 경제는 활기찼다. 저것이 바로 한국인의 저력이고 나라가 굴러가는 원동력이다.
“맞심더. 이래 봬도 내가 직원 일호라예. 사장님과 입사 동기죠. 덕분에 인물도 실력도 개뿔인 주제에 부장 감투를 썼죠. 크크크!”
정아영이 킬킬 웃으며 의자를 당겨서 털썩 앉았다. 철제다리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의자 끌리는 소리가 신호일까. 내실에서 살집이 퉁퉁한 아주머니가 나왔다.
“정부장 요짐엔 와 통 안 보이노.”
“동성로에 붙어있심더. 노원동엔 월초에 감사할 때만 온다 아임니꺼.”
“그랬구마잉. 사장님은 요짐 좀 어뗘?”
“그저 그래예.”
“우짜노! 하늘도 무심하지. 나쁜 놈은 잘 먹고 잘사는데 착한 사람은 와 그래 고생하는가 몰러. 내가 장사 하민서로 박 사장님 맨치로 정 많고 인간적인 사람은 첨 봤능 기라.”
‘백부가 착한 인간? 정 많고 인간적이라고라!’
무쌍이 뜨악해서 주인 여자를 쳐다보았다. 정신 건강에 심각한 데미지를 주는 충격적인 발언이다.
“시상에! 이래 훤칠하이 인물 좋은 총각은 처음 본다. 정 차장이 용꿈을~ 어머낫!”
무쌍의 얼굴을 더듬던 덕산댁이 비명을 질렀다. 손에 들린 쟁반이 툭 떨어졌다. 탱탱탱- 양은 쟁반이 바닥을 구르고 손질된 닭똥집이 도끼다시 바닥에 흩어졌다.
“무쌍 학생!”
덕산댁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아주머니!”
무쌍이 벌떡 일어났다. 까라락- 와당탕- 철제의자다리가 바닥을 긁고 훌렁 넘어졌다. 혜영의 유모 덕산댁이다. 총 맞아도 눈 하나 깜짝 않는 무쌍이지만, 어머니와 혜영이 관련된 일에는 평상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무쌍은 덕산댁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덕산댁은 혜영의 유모이자 가정부다. 친모 이민주는 단 한 번 만났지만, 덕산댁은 꼬박 3년간 얼굴을 본 사이다. 행색이 변했지만 몰라보려야 몰라볼 수 없었다. 인연중중이다. 혜영의 친모 이민주를 만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혜영의 집 가정부를 만났다. 우연일까? 전조일까?
“오랜만입니다.”
무쌍은 순식간에 평정을 찾았다.
“그랴. 아가씨는?”
무쌍이 대답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덕산댁의 얼굴이 흐려졌다.
“에고고, 이런 주책! 얼릉 준비해 주꾸마.”
덕산댁은 세파를 겪을 만큼 겪은 50대 아줌마다. 본인이 호구조사 통계원이 아닌 이상 손님은 손님으로 맞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를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정신을 수습해서 커다란 엉덩이를 흔들며 주방으로 튀었다.
“아는 분이라예?”
정아영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야, 인연이 있던 분입니다.”
“놀라는 거 보이끼네 보통 인연이 아인갑네요. 세상이 참 좁다. 거죠?”
“인연따라 가는 세상, 만날 사람은 만나고, 만나보면 만날만한 이유가 있지요.”
“하이고, 땡중 같은 이바구는 나중에 하고 한 꼬뿌하입시다. 내가 우리 사장님 말고 남자에게 잔을 치기는 처음인 기라요.”
정아영이 병목을 탁 쳐서 웃물을 날렸다. 손놀림만 봐도 금복주 내공이 만만치 않았다.
“영광입니다.”
무쌍이 비시시 웃으며 잔을 받았다.
“영광은 제가 영광이지예. 내 손은 고급이라서 사장님께만 술을 따른다 아임니꺼.”
정아영이 잔을 받고 병을 넘겼다.
“우리 사장님 너무 미워하지 마이소. 밤낮없이 죽을 둥 살 둥 회사 키운다꼬 설치다가 덜컥 병들어서 오늘내일하는 불쌍한 사람이라예. 술만 묵으마 후회하고 가슴을 치더니만 결국 가슴 병이 들었네요.”
정아영의 목소리에 설핏 물기가 어렸다.
“인간 박인보의 인생이 바닥까지 망가지지는 않았나 봅니다. 정아영씨 같은 분을 곁에 뒀으니 말이요. 백부 변호를 하려고 술자리를 잡았으면 술값만 날렸소. 지난날을 잊지는 못하지만 이미 용서했소.”
“쉽지 않을 텐데……. 무쌍님은 좋은 분이라예.”
정아영이 배시시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그리 좋은 놈은 아니오. 용서는 강자의 특권이오.”
무쌍이 새 병을 따서 부족한 잔을 채워 주었다. 정아영은 한입에 탁 털어 넣고 닭똥집 두 개를 겹쳐서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웃지 마이소. 눈은 호강이지만, 정신이 어질어질하네예.”
무쌍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남자 찜쪄먹을 호탕한 여자다. 꾸밈없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헐렁한 에밀의 신붓감으로 딱이다.
“사장님은 외로운 분이라예. 지가 가정사에 콩팥을 가릴 주제는 아니지만, 처가에서 사사건건 경영 간섭하고 뒷구멍으로 돈을 빼내는 통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지예. 오죽하마 맨날 여기 와서 씹었겠어요. 술에 취하면 그때부터 동생네와 무쌍님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지요. 열두 살에 쌀가마니를 한 손으로 들었다는둥, 서른 마지기 농사를 혼자서 지었다는 둥, 믿지못할 이바구를 까다가 못할 짓을 너무 많이 했다고 가슴을 치고 울었지요. 그러다가 육 년 전부터 고아원에 기부를 하기 시작하데예. 지금도 매달 삼백만 원이 고아원으로 빠져 나갑니다.”
“별로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이야기요. 나는 인간이 그렇게 훼까닥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오.”
무쌍은 덤덤했다. 이미 벌어질 일은 벌어졌고 흘러갈 일은 흘러가 버렸다. 그래서 용서는 강자의 몫이다. 약자는 용서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본인이 일군 기업을 아무런 반대급부 없이 물려주는 배경에도 죄책감이 작용한 것 같아요. 씨비를 발행해서 장가 쪽을 물 먹인 것도 회사를 깨끗이 세탁해서 넘겨주려는 잔머리지예.”
“이바구가 처음 보는 외인과 나누기엔 너무 깊은 거 아니오.”
무쌍이 슬쩍 발을 뺐다. 정아영이 씩 웃었다.
“무쌍님은 향심섬유 대주주고, 곧 사장이 될 분인데 외인이라 카마 말도 안 되지요.”
“음, 별로 내키지 않소. 자다가 보쌈당한 기분이오.”
“호호호, 그런 보쌈은 저도 당해보고 싶어요.”
호탕한 웃음에 풍성한 가슴이 흔들렸다.
‘모유는 충분하겠네.’
무쌍은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양반이 모타리(몸집)는 적어도 건강했는데 왜 그렇게까지 나빠진 거요?”
“육 년 전에 뇌출혈이 일어나서 수술을 받았지예. 그라고 일 년쯤 있다가 폐기종이 생겼심더. 맨날 고물 버스를 고친다고 배기가스를 들이마신 탓이지예. 장 씨들의 압박, 가정불화, 줄 담배, 깡소주도 한몫했을 거라요. 기관지 확장제, 항생제, 스테로이드제 등등 주치의가 처방한 약만 한 도락꾸(트럭)는 드셨을 거라예. 이제는 약물 부작용이 심해지고, 면역력이 떨어져서 약발도 별로라예.”
정아영의 눈에 고인 눈물이 백열등 빛에 반짝했다. 무쌍은 정아영이 점점 마음에 들었다. 정이 깊고 의리있는 아가씨다. 본인 물건은 아니지만, 난봉쟁이 에밀에겐 주기엔 아까웠다.
“사장님이 얼마나 더 살 것 같예요? 오늘 돌아가시는 줄 알고 식겁했심더.”
정아영은 무쌍이 보여준 능력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능력에는 그만한 비밀이 따른다. 그녀는 얕은 호기심으로 상대를 곤란하게 할 만큼 경솔한 여자가 아니었다.
“오늘이 아니라도 삼 개월을 넘기기 힘들었을 거요. 육체적인 부조화는 내가 잡아줄 수 있지만, 바닥난 선천지기는 채울 방법이 없소. 내가 수시로 손보면 큰 고통 없이 오 년은 살 수 있을 거요.”
“아! 오 년!”
정아영이 벌떡 일어나서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사장님은 지 은인이라예. 사장님 덕분에 일자리를 얻었고, 남동생 둘을 공부시키고, 부도난 오빠 도장도 지킬 수 있었심더. 정말 고맙심더.”
“어허, 술맛 떨어지게 와캅니까. 앉으소 앉아.”
무쌍이 손사래 쳤다.
“댁의 은인인 백부가 내 인생을 망친 사람이요. 범부중생의 은원은 베틀에 올려진 삼베처럼 씨줄 날줄이 엉켜서 인과를 알기 어렵다고 했소. 원한과 유감이 팔공산만큼이나 쌓였지만, 죽어가는 모습을 외면할 수 없었을 뿐이오. 덕분에 골칫거리만 떠맡았소.”
정아영은 꼿꼿한 자세로 술잔을 비우는 남자를 슬쩍 훔쳐보았다. 몇 번을 봐도 가슴이 저릴 만큼 잘 생겼다. 얼굴도 장 생겼지만, 수컷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남자다. 야성적인 남자도 드물고 이지적인 남자도 드물다. 야성적이고 이지적인 남자는 멸종되고 없다. 멸종된 존재가 눈앞에 있다. 사장님이 자랑할만했다. 나이가 어리고, 스펙만 되면……. 정아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술기운을 빌려서 슬쩍 문질러보고 싶은 사심이 무럭무럭 피어났다.
“대단하시네요. 사모님과 장 씨 가문이 경영권을 뺏으려고 사생결단으로 덤비는 알짜 회사를 골칫덩어리라니! 사장님은 무쌍님에게 깨끗한 회사를 넘겨주려고 육 년이나 노심초사하셨어요. 곁에서 지켜보는 제가 질투 날 지경이었죠.”
“나는 벌 만큼 벌고 있소. 돈이 아무리 많아 봐야 하루 백 끼를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몇백 년을 사는 것도 아니지 않소? 아까도 말했지만, 회사는 내게 별 의미가 없소.”
무쌍은 심드렁했다. 세계적인 그룹사 회장이 똘마니인데 코딱지만 한 회사가 성에 찰 리 없다. 마지못해 받았을 뿐이다.
“호호호, 그냥 하는 말씀으로 들었는데 진심이네예. 진정한 사나이를 만난 기념으로 석 잔!”
정아영이 잔을 내밀었다.
“본인의 주량만큼 알아서 드시오.”
무쌍은 술잔을 돌리지 않는다. 술을 권하지도 않는다. 본인이 술을 즐기지 않는 탓도 있지만, 술 권하는 강압적인 문화 자체를 좋게 보지 않았다. 술은 자신의 주량에 맞게 알아서 마시면 된다.
“야속해라!”
정아영이 눈을 흘기고 자작 모드로 홀짝홀짝 잔을 비웠다. 술이 엄청 쎈 아가씨다.
“우탁이는 무슨 일을 하고 있소?”
“다섯 달 전부터 여객에서 배차와 정비를 배우고 있어요. 여차장들 감금도 없애고, 몸수색도 없앴어요. 맨날 말썽만 부리더니 철이 든 거지예.”
“잘됐군!”
무쌍이 머리를 끄덕였다. 사시미파를 묵사발 낼 때 본 우탁은 싹수가 없어 보이지 않았다. 우탁이 집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바깥으로 나돈 것도 장 씨 때문이다. 날마다 다른 집 아들과 비교해서 닦달하면 누군들 배겨내겠는가.
“정부장, 사귀는 바지 있소?”
무쌍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와예? 남자 소개해 줄라꼬요?”
술기운으로 붉어진 눈이 번쩍했다.
“외국인은 어떻소?”
“어머나, 대박! 진짠가 보네예. 심신이 건강하고 마누라를 먹여 살릴 능력만 있으면 국산이든 외제든 따질 것 없지예. 노처녀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도 아니고요.”
정아영은 의외로 쿨했다.
“외인부대 용병이오. 스페인 바스크 출신으로 국적은 프랑스인이오. 나이는 서른쯤 되었을 거요.”
“오우, 외인 용병에 영계! 좋아요.”
“잠시 기다리시오.”
무쌍은 곧바로 가게 전화기를 들고 국제 전화를 신청했다. 정아영은 프랑스어와 영어로 대화하는 무쌍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장단을 맞추었는데 설마하니 곧바로 일을 추진할 줄은 몰랐다.
‘피는 못 속여.’
고개를 끄덕였다. 박인보 사장도 우물쭈물하는 법이 없다. 결정을 내리면 거침없이 추진하는 모습이 판박이처럼 닮았다. 무쌍이 송수화기를 올려놓고 미소를 지었다.
“다음 주에 입국할 거요. 연봉은 우리나라 은행원 대리 연봉 세배쯤 되지만, 주식 배당금이 연봉보다 많으니까 굶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좋소.”
“심 봤다!”
정아영이 장난스럽게 두 팔을 번쩍 들고 만세를 불렀다. 술이 확 깼다. 이게 웬 날벼락 아니 돈벼락, 남자 벼락이란 말인가. 어쩐지 달성공원 입구에서 토정비결 펴놓고 신수 봐주는 할아버지가 귀인이 나타나니 막혀있던 부분이 뚫리리라 하더라니.
“미리 눈도장 찍고, 노처녀 딱지 뗄 건수도 챙겼으니 술값은 제가 낼게요. 축축한 노처녀 인생에 볕을 쨍하고 비춰준 멋진 사장님이여 영원하라!”
정아영이 먼저 일어났다. 그녀는 무쌍과 덕산댁 아줌마의 해후가 심상치 않음을 잊지 않았다. 소주 세 병은 양에 차지 않았지만, 젊은 사장은 회사 사정을 구구절절 알려줄 필요가 없는 걸물이다.
정아영이 자리를 뜨자 덕산댁이 간판불을 내렸다. 술청에 남은 노동자 셋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덕산댁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나도 한잔할까.”
덕산댁이 소주잔을 내밀었다. 무쌍이 말없이 잔을 채우고 자신의 잔도 채웠다.
“어쩌다 이런 일을 합니까?”
“할 줄 아는 게 음식밖에 없는데 우짜노. 먹고 살라꼬 시작했제. 망할 여편네가 집을 팔아버리고, 학생과 아가씨가 떠나고 나니까 가슴이 휭 비어버렸어. 아가씨와 학생이 맺어졌으면 얼매나 좋았겠노. 시상에서 젤로 잘 어울리는 짝인데. 하늘도 무심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