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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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장 종두득두8->27권
덕산댁이 소매로 눈물을 찍어냈다. 선남선녀라는 말은 아가씨와 무쌍 학생을 이르는 말이었다. 무쌍 학생은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럽고 진중했다. 연상인 아가씨가 철없는 여동생으로 보일 정도였다. 어린 딸을 팽개치고 떠났던 어미란 년이 나타나서 난리만 치지 않았어도……. 덕산댁은 새삼 울화가 치밀었다.
“시상이 참 좁은 기라. 박 사장이 취하도록 술 마시고 툭하면 사설을 늘어놓던 사람이 무쌍 학생일 줄 꿈에도 몰랐능 기라. 그런데 부자 백부를 두고 와 그렇게 어렵게 살았노. 진작에 알았으마 그 여편네가 쌍지팡이 짚고 반대하지는 않았을 낀데.”
덕산댁이 안타까워했다. 무쌍은 말없이 자작으로 두 잔을 연거푸 비웠다. 덕산댁의 푸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우르르 쏟아지는 온갖 추억에 뇌리가 난마처럼 얽혔다. 덕산댁은 이민주 여사 때문에 두 사람이 헤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오해다. 하긴 이민주가 거지새끼라고 난리 치며 쫓아냈으니 그렇게 생각할만했다.
천박한 영혼을 가진 여자, 허영과 욕심에 눈이 가려진 여자, 저급한 쾌락을 자유라 착각하는 여자, 방종을 용기로 착각하는 여자, 버려두었던 딸마저 정략에 이용하려는 여자가 이민주 여사였다.
대정 복지관에서 만난 이민주는 여전했다. 그 여자의 뱃속에서 혜영처럼 순수하고 여린 영혼이 태어났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유전자요 유전 법칙이다.
“다 지난 이바구죠.”
무쌍의 얼굴이 늦가을 플라타너스잎처럼 버석 말랐다.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혜영의 친모를 차마 손댈 수 없어서 지하실에 내버려두었다.(무쌍은 김극도가 이민주의 머리에 이따이 독액을 주입한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그녀도 불쌍한 인간 군상 중의 한사람이다. 인제 와서 덕산댁의 오해를 풀어주려고 이러쿵 저러쿵 할 형편도 아니다.
“에구, 이노무 정신통머리!”
덕산댁이 손바닥으로 머리를 치고 계산대 서랍에서 항공봉투를 꺼내왔다.
“아가씨가 미국으로 떠나고 두 달이 지나서 편지가 왔었어. 다행히 집이 팔리기 전이라 내가 받아 놓았제.”
“고맙습니다.”
무쌍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사랑은 타오르는 불꽃이다. 첫사랑은 화인과 같다 했던가. 질풍노도의 시기에 물불을 가리지 못했던 폭발적인 감정이 남긴 낙인은 너무나 깊고 선명했다.
덕산댁은 편지를 건네주고 내실로 들어갔다. 무쌍은 항공봉투 속에서 봉해진 또 다른 봉투를 꺼냈다. 겉봉에 쓰인 [내사랑에게!]라는 글귀가 눈텡이를 때렸다. 동글동글 굴러가는 듯한 귀여운 글씨체, 혜영의 글씨다. 울컥하고 눈물이 솟았다. 봉투를 뜯었다.
[사월 팔 일에 노인송에서 만났네인적없는 지하에서 깊은 정을 주었네!
바라오니 하늘에선 비익조가 되고
땅에선 연리지가 되게 하소서
영원한 천지가 다함이 있을지라도
한스러움은 끝없이 이어져 다하지 않으리
……]
자신이 고쳐 불렀던 장한가가 상처를 덮은 굳은 딱지를 뜯어냈다. 가슴이 빠개지는 아픔이 밀려왔다. 연리지는 꺾이고, 비익조 날개는 찢어졌다. 누군가 말하기를 인간의 본체는 기억이라 했다. 달콤하고 행복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떠나보낼 때는 쿨한 척 대인인 척 굴었지만, 말짱 헛소리였다. 가슴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내사랑, 산타바바라의 강렬한 태양이 목덜미를 태운 지 벌써 두 달이 지났네. 붉은 석양의 장막이 스러지고 창밖의 빠세오 누에보 거리에 노란 나트륨등이 주르륵 켜졌어. 텅 빈 아파텔에서 또다시 외로움과 투쟁을 벌일 시간이야.누군가와 말을 나누고 싶어 수첩을 뒤적이지만, 전화 걸 사람 한 명 없네. 내 사랑의 가슴엔 지금도 뻐꾸기가 울고 있을까? 당신이 불렀던 장한가 앞 구절도 뒤 구절도 생각나지 않아서 너무 슬퍼. 단단한 가슴과 슬픈 얼굴만 떠오르는 내가 너무 싫어.
석사, 박사 학위증이 행복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막걸리 마시는 내사랑의 곁에서 젓가락 장단으로 육자배기를 뽑을 수 있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철판처럼 단단한 가슴에 젖가슴이 눌리는 행복을 맛보고 싶어.
……
두 달 동안 세 번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세 번 찢었어. 내사랑이 웨이터 복장으로 껄렁거리며 나타나서 이별을 통보할 때 당신의 마음을 다 알고 있었어. 난 기어코 성공할 거야. 세상이 무너져도 이곳에서 성공해서 돌아갈 거야.
……
사랑 직전과 사랑 직후엔 누구나 죽을 듯이 굴지만, 사랑이 사랑하는 사람의 발목을 잡는다면 그간 아집이고 집착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난 떠났어.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하기에 떠나야 했어.
영혼을 사랑하고 강건한 육체를 사랑했어. 당신의 영혼이 혼탁해지고, 육체가 무너져도 사랑할 수 있을까? 나 자신을 속일 수 없었어. 내가 틀렸는지도 몰라. 지금도 가슴을 치며 꺽꺽 울고 있어. 하지만 성공에 대한 야망이 남아있는 한 앞으로도 그럴 거야. 죽기 전에 미리 죽지 않을 거야. 반드시 싸워 이기겠어.
……
당신은 내가 다른 세상에 발을 들여놓을 용기를 주었지만, 나는 당신에게서 떠나는 것이 아니야. 나 자신에게서 도망친 거야. 남자의 집은 여자라는데 나는 당신의 집이 될 용기가 부족했어.
당신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해. 지치고 망가지더라도 대문을 열어두고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야 해. 활짝 핀 화초가 맞이하고, 된장국이 보글보글 끓는 집으로 돌아가야 해. 내사랑이 있어서 행복했어. 지금도 행복하고 앞으로도 행복할 거야. 내사랑은 행복해야 해. 힘들고 괴로웠던 세월을 꼭 보상받아야 해.]
“니기미 떠그랄!”
무쌍이 거친 욕설을 뱉으며 편지를 와락 구겼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화초가 활짝 피고 된장국이 보글보글 끓는 집의 의미가 무엇이던가? 진순이다. 진순은 당시에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어린 계집애고 보살펴야 할 동생이었다. 핑계일 뿐이다. 삼 년이란 세월 동안 불꽃처럼 타올랐던 사랑이 어린 진순에게 겁먹을 정도로 가벼웠단 말인가!
“우리 사랑이 기껏 이거였더냐? 니 맘대로 하세요!”
무쌍은 구겨진 편지지를 연탄불에 집어 던졌다. 편지지 두 장은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인간은 기대어 살지만 근원적으로 고독한 존재다.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는 둘임을 왜 모른단 말인가!
“안녕, 내 사랑아!”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의 찢어진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혜영이 떠난 배경엔 친모 이민주의 트라우마가 있다. 이민주 때문에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덕산댁의 오해가 오해만은 아니다.
평생을 여성운동입네 하고 집 밖으로 떠돈 페미니스트 이민주, 지쳐버린 혜영의 아버지는 딴살림을 차렸고, 혜영은 일곱 살부터 홀로 버려져 덕산댁의 손에서 자랐다. 학문의 열망이 어머니처럼 살지 않으리라는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다.
헌신적 사랑의 열망과 자신의 야망 틈바구니에서 더듬이 떨어진 개미처럼 우왕좌왕하는 그녀, 그래서 떠나라고 모질게 등을 밀었다. 그녀가 마음을 정했으면 되었다. 놓아주고도 놓아주지 못한 자신이 못난 남자였다. 덕산댁은 내실에서 나오지 않았고, 홀에는 새벽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무쌍은 퀴퀴한 곰팡내에 잠이 깨었다. 창으로 쏟아져 들어온 햇빛이 창처럼 동공을 찔렀다. 천장의 격자무늬가 시냅스를 일깨웠다. 노원동 뒷골목 여관방이다. 관자놀이가 둥둥 울렸다. 싸구려 희석식 소주는 숙취라는 불청객까지 몰고 왔다. 전장의 악몽 블랙맘바가 술에 취해 블랙아웃되었다면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취하자고 작정한 바에야 취하지 못할 것도 없다.
“아무리 고향이지만 이렇게 늘어질 수 있나!”
어이가 없었다. 혜영의 편지가 금강석처럼 단단한 정신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신체는 괴물로 진화했지만, 정신은 여전히 인간이었다. 인간의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 쳐왔으니 나무랄 일도 아니다. 솨아아- 공진이 숙취를 몰아내고 뇌리에 남아있는 추억의 찌꺼기를 털어내고, 곰팡내까지 창밖으로 몰아냈다. 이미 새 인연이 맺어졌는데 흘러간 인연에 매달리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슈트 안주머니에서 이물질이 느껴졌다. 백부가 준 학자금 봉투다. 아무렇게나 쑤셔 넣어 둔 봉투를 확인한 무쌍은 조금 놀랐다. 액면 삼천만 원짜리 수표다.
“멍청한 양반, 육성회비 200원이 더 큰돈이었어.”
사막 조난자에게 한 잔의 물은 생명이지만, 저수지에서 헤엄치는 놈에게 한 양동이를 부어준들 무슨 소용인가. 내친김에 노란 서류 봉투도 확인했다. 최근 5년간 재무제표와 사업 현황, 경영 자료, 주식증서 복사본, 명의신탁 계약서, 유서 사본이 줄줄이 나왔다.
향심섬유 지분 30%가 땡전 한 푼 들이지 않고 수중에 들어왔다. 백부가 사망하면 나머지 지분 22%가 자동 상속된다. 매출 280억을 올리는 중견기업의 지분 52%를 가진 절대 주주가 되는 셈이다.
“아무래도 아수라의 화신이 아니라 이슬람세(아랍권 신화에 등장하는 재물의 신)의 화신인가 봐! 크크크!”
무쌍이 툴툴 웃었다. 유소년기에는 돈이 없어서 죽을 고생을 했는데 툭하면 돈이 쏟아졌다. 돈에 깔려 죽을 판이다.
따르릉- 여관방 인터폰이 울렸다.
-총각, 12시에 퇴실하지 않으면 추가 요금을 내야 혀. 돈 아까우면 싸게싸게 챙기더라고.
걸걸한 아줌마 목소리가 수화기를 울렸다.
“크크크!”
웃음이 나왔다. 한국의 아줌마는 천하무적이다. 죽음의 천사, 노바토피아의 국왕, 도바 유정의 주인도 한국 아줌마에게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무쌍은 해가 중천에 뜬 한낮에 귀가했다. 스위스 시계처럼 일과가 정확한 무쌍으로서는 파격적인 하루다. 진순이 말없이 미소로 맞이했다. 화초가 활짝 피어있고, 된장이 보글보글 끓는 집이다.
“순아, 술 한잔 하자.”
“웬일로?”
“집안일!”
진순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빠는 농담을 별로 않는 편이다. 집안일이라고 했으면 집안일이다. 외박하고 평소 즐기지도 않는 술을 찾는 걸 보면 할 이야기가 있다는 소리다.
진순은 지하실로 내려갔다. 지하실에 에밀 아저씨가 국제특송으로 보내준 씨아까렐로 오크통이 다섯 개나 보관되어있다. 무쌍이 좋아하는 술은 딱 두 가지다. 씨아까렐로와 발렌타인 30년산이다.
시아까렐로는 코르시카 특산이다. 화강암 토양에서 지중해의 바람과 풍부한 일조량을 받으며 영글어야 과육이 아삭이고 후추 향이 나는 와인이 만들어진다. 생산량도 많지 않고 국내에 수입되지도 않는 와인이다.
“대나무 숲에서 낮술로 즐기는 가을도 나쁘지 않구마. 미녀의 소수가 치는 향기로운 술이 있고, 서걱이는 대나무 바람을 안주 삼으니 세상이 돈짝만 하구나. 이만하면 족한데 내 가슴은 왜 이리 휑할까.”
무쌍이 중얼거렸다. 진순은 가슴이 덜컥했다. 오빠는 정에 약하고 사랑에 약한 사람이다. 인형처럼 오밀조밀 예쁜 여자가 뇌리에 퍼뜩 떠올랐다. 에델이란 영국인 아가씨는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혜영은 아니다. 그녀는 오빠께 짐이 될 여자지 도움될 여자가 아니다. 오빠의 발판이 될 여자가 아니라 오빠를 발판삼아 날아오를 여자다. 적어도 자신의 판단으로는 그랬다.
“오빠, 고모 찾는다고 돈이 억수로 들어가제? 큰돈은 아이지만 고모 찾는데 보태라.”
진순은 심중의 의구심을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고 품속에서 통장을 꺼내서 내밀었다.
“엉, 이기 머꼬?”
무쌍이 통장을 펴들었다.
“이야, 이백십만 원이나! 순이가 살림꾼은 살림꾼이구먼. 간호사 박봉으로 우예 이리 마이 저축했노?”
텅 빈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다.
“생활비, 옷, 동생들 학비까지 오빠가 다 해주는 데 내 월급을 쓸 일이 오데있노.”
“고맙다. 이 돈으로 전단을 찍을게. 전국 방방곡곡을 전단으로 덮어뿌자.”
진순이 자신의 재력을 모를 리 없다. 모은 돈을 값지게 쓰고 싶어하는 마음일 뿐이다. 울컥한 무쌍이 진순을 당겨 안았다. 무쌍의 품속에서 진순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여자가 하기 나름이다. 불은 더 큰 맞불로 끄면 된다. 혜영이 모닥불이라면 실종된 고모는 산불이다. 큰불로 작은 불 끄기 성공이다. 진순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오빠! 너무 조급해하지 마.”
“내 나이 아홉 살에 혼자 되었다. 어머니가 사라진 지 십칠 년째다. 기다림에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날마다 가슴에 바람구멍이 난 것 같구나.”
“넙치 아저씨가 부산에 추적 본부를 차리고 500명을 동원했다메. 큰스님이 혀를 차시더라. 삽질한다고.”
“나도 안다. 사부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하지만 자식이 하늘만 쳐다볼 수 있나. 사부님 말씀이 아니었으면 내가 직접 나섰겠지. 에이 술이 와이래 밍밍하노. 극도야!”
“예, 큰형님!”
정자밖에 대기하고 있던 면도날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김극도는 무쌍을 하늘로 알았다. 말려도 늘 지근 거리에 머물며 입안의 혀처럼 놀았다.
“금복주 몇 병 가져온나.”
“오빠, 웬일로?”
“송충이는 솔잎을 파먹어야 하는 모양이다. 돼지껍데기와 닭똥집이 있으마 좋을 낀데.”
무쌍이 안주로 나온 치즈와 베이컨을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와인과 와인 안주로는 뭔가 부족했다. 입맛이 과거로 돌아갔는지 소위 ‘노도고시(のどごし, 목넘김, 목구멍 맛)’가 부족했다.
김극도가 그릴과 숯, 삼겹살, 쌈장까지 챙겨왔다. 눈치 빠르고 영리한 김극도는 단 며칠 만에 응심제 집사를 꿰찼다. 하나를 말하면 두셋을 헤아리는 능력에 진순도 혀를 내둘렀다. 쌈디 아저씨가 나르는 곰이라면 김극도 아저씨는 물찬 제비다. 오빠가 어디서 이런 사람들을 데려오는지 신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