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600
x 600
제54장 종두득두10
정아영이 나가자 박인보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무리 개판 쳐도 자식은 자식이다. 걱정되지 않을 리 없었다.
“내가 잘못 키웠으니 우짜겠노! 모든 기 내 업본기라. 휴우~”
박인보가 자조적인 한숨을 길게 쉬었다. 화자가 불에 달군 철사로 무쌍의 허벅지에 북두칠성을 그렸을 때가 13살이다. 그 나이면 사리 분별을 하고 남을 나이다. 시킨 어미년이 문제지만 웃으며 살을 태운 딸년도 정상이 아니었다.
초기에 버릇을 잡아야 했었는데 대충 넘어간 결과가 이것이다. 하긴 두꺼운 가죽 허리끈으로 살이 찢어지도록 때린 자신도 정상이 아니긴 마찬가지였다. 장 씨가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박인보는 와락 짜증이 치밀었다.
“와카노? 또 골치 아픈 일 있나?”
“……”
장씨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완강한 벽이 느껴졌다. 회사 자금을 융통해 달라고 했다간 육두문자가 날아올 기세다. 작은아버지가 부탁한 주식 매수 건을 부탁할 분위기도 아니고 자존심상 입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장 씨가 핸드백을 챙겨 일어났다.
“건강 챙기소.”
장 씨가 툭 내뱉고 사장실을 나섰다.
“허, 건강 챙기라고? 그 말에 진심이 파리똥만큼이라도 들었으마 내가 장가를 살리주꾸마.”
박인보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 잘못된 인연은 본인뿐만 아니라 사방에 독가루를 펄펄 날렸다.
장 씨가 머리를 흔들었다.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인간들이 뇌리에 가래처럼 끈적하니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가라 가! 망할 놈의 새끼,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배신을 때려. 나가 뒈져. 뒈지라고오!”
장씨가 발광했다. 물건도 서지 않는 난쟁이 똥자루 주제에 상갓집 개 취급한 남편, 근본 없는 천민 주제에 고개를 빳빳이 치켜든 여직원, 고립무원인 어미를 버리고 개 같은 남편과 붙어먹으려는 배신자 아들, 생사불명인 딸이 뒤섞여서 낄낄거렸다.
붉은 연기가 바닥에 자욱이 깔렸다. 푸른색 한복을 입고 검은 갓을 쓴 귀신이 바닥에서 쑤욱 올라왔다. 얼굴은 회칠한 듯 창백하고 두 눈이 핏물을 담은 듯 붉었다. 시동생 박진보 귀신이다. 귀신이 입을 쩍 벌렸다. [감히 영면에 든 나를 깨워! 저주를 받으리라.]
“아악!”
장씨가 벌벌 떨며 벽에 파고들 듯이 달라붙었다. 눈이 허옇게 뒤집어지고 입꼬리에 거품이 뻐걱거렸다. 총천연색의 환상은 전두엽 방추세포에 이상이 생겼을 때 발병하는 레비 치매의 특이한 증상이다.
“엄마!”
식겁한 우탁이 화장실로 뛰어갔다. 세숫대야 가득히 받아온 물을 장씨 얼굴에 사정없이 퍼부었다. 작년부터 몇 차례 나타난 발작이다. 주치의 강 박사의 처방은 간단했다. 헛것을 보는 만큼 정신이 번쩍 들도록 뺨을 호되게 때리거나 찬물을 퍼부으라고 했다.
“허푸 허푸!”
장씨가 눈을 뜨고 두리번거렸다. 초점이 잡히지 않은 눈이 허공을 헤맸다.
“귀신은? 진보 귀신은?”
“엄마, 정신 차려요. 귀신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우탁이 고함을 빽 질렀다. 멍하니 아들을 쳐다보던 장씨가 자신의 행색을 살폈다. 가관이다. 집안 어른들과 남편을 흔적없이 죽일 모의를 하던 날 보았던 귀신이 또 나타났다. 보통 사람은 정신이 붕괴할 상황이지만, 장씨는 처녀 적에 머슴과 붙어먹은 현장을 들키고도 태연했던 독종이다. 공고한 정신력은 추태에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았다.
“흥, 난 안 죽어. 내가 인동 장씨 가문의 장녀란 말이다.”
언제 날구지를 쳤느냐는 듯이 멀쩡히 일어나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빌어먹을!”
우탁이 짐가방을 걷어찼다. 싫어도 어머니다. 집안을 망친 장본인이 어머니지만, 저 꼴을 보고도 집을 나갈 수는 없었다.
“휴! 무쌍아, 나는 니가 부럽다. 니는 숙부와 숙모 사랑을 듬뿍 받기라도 했지. 나도 숙부와 숙모를 엄마 아부지보다 백배는 좋아했걸랑. 그래서 니가 싫었어.”
우탁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이튿날, 중참이 지나서 친정 어른들이 들이닥쳤다. 몇 년째 계속되는 풍경이다. 그녀의 자존심이던 수성구 이 층 저택은 스위트 홈이 아니라 장씨 가문의 대책 본부가 된 지 오래다.
“어서 오시소!”
장씨가 편치 않은 얼굴로 마지못해 인사했다. 집안 어른들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작은아버지 장경모가 소파에 앉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질부, 박 서방하고 이바구 해 밨는강?”
질문이 아니라 추궁이다. 장씨의 시선이 삼 년쯤 사용한 몽땅 싸리비 같은 숙부의 눈썹에 머물렀다. 절반쯤 남은 듬성듬성한 눈썹도 확 뽑아 버리고 싶었다.
“후유, 화자 때문에 암말도 못 했습니다.”
그녀는 가는 한숨으로 불만을 대신했다. 장씨 가문의 후광이자 뿌리인 친정 어른들이 지긋지긋한 물귀신으로 바뀐 지 오래다.
“무신 소리하노. 가문이 자빠질라 카는데 정신 나간 지지배(계집애)가 문제가.”
매몰찬 언사에 장씨의 눈꼬리가 홱 치켜 올라갔다.
“작은아부지는 자식 손자 없습니까? 어떤 어미가 자식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데 나 몰라라 캅니까. 그딴 말씀을 하시면 안 되지예.”
“머시라! 그딴 말?”
장경모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그래, 조카가 말 잘했다. 자식이 그케 중요하마 어린 년이 마약이나 처묵고 돌아 댕기도록 여태까정 머했노? 장씨 집안에 뽕쟁이 외손녀 나왔다고 온 사방에 알려졌능 기라. 집안 우사가 말이 아이다. 허이구 내 남사시러버서 미쳤뿔겠구마잉.”
당숙모 낙동댁이 발끈해서 냅다 퍼부었다. 장 씨의 눈이 벌게졌다. 인간들이 해도 너무했다. 회사를 쥐락펴락할 때는 공주처럼 떠받들던 인간들이 시세 불리해지자 너도나도 등을 돌렸다.
“숙모님, 이자는 막 가자는 거지요?”
제 욕심에 미쳐서 뛰어든 인간들이 상황이 나빠지자 무조건 남 탓이다. 억울하고 분한 나머지 피가 머리로 몰렸다. 따다다닥- 딱따구리가 쪼듯이 관자놀이가 아팠다. 장씨가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어허! 이 사람, 말을 가리게.”
장경주가 딸을 흘끗 쳐다보고는 동생을 나무랐다. 말은 동생인 장경모에게 했지만, 시선은 사촌 제수씨를 향했다. 종손인 장경주의 시선을 받은 낙동댁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비록 곤란한 지경에 처했지만, 인동 장씨 가문은 종손의 말을 허투루 넘길 만큼 막돼먹은 가문이 아니다.
“휴! 욕심에 눈이 멀었어.”
장경모는 형인 장경주를 흘끔 쳐다보고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었다. 장조카와 장녀의 꼬임과 추임에 넘어갔다고 하지만, 사달의 근본 원인은 본인의 욕심 때문이다. 향심섬유 대주주가 되면 천박한 소작농들과 신경전을 펼칠 필요도 없고, 자손 대대로 취직 걱정할 필요도 없다는 말은 백설탕보다 달콤했다. 넘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1981년 10월 25일, 씨비라는 알지도 못하는 채권을 무리하게 매입한 날짜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물론 여유자금으로 채권을 매입했다면 문제 될 일이 없었다.
삼식 캐피탈의 사채를 쓰는 바람에 악몽이 시작되었다. 알토란 같은 상답 50마지기가 이자 비용으로 날아가고, 견디다 못해서 논 150마지기와 임야를 팔아서 사채를 갚았다. 그리고 애물단지 씨비를 주식으로 전환했다.
종손과 다른 일가붙이들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자 압박과 치솟는 전환가격을 감당치 못하고 1984년 5월을 전후에서 주당 28,000원 언저리에서 전환했다. 2년 7개월 만에 손을 들고 채권을 주식으로 전환한 셈이다.
향심섬유의 배당률은 주당 12%로 상당히 높지만, 전환가를 고려하면 2.1%에 불과했다. 그래도 연이율 1%인 씨비를 보유하느니 전환하는 게 그나마 유리했다. 결국, 주식 17,857주에 상답 375마지기를 털어 넣고, 3억 원의 빚까지 졌다. 이런저런 비용을 모두 계산하면 액면가 5,000원인 주식을 50,000원이 넘는 금액에 매입한 셈이다. 보유 주식의 세후 배당금은 890만 원, 매입 비용을 은행에 넣고 이자만 받아도 8천만 원이다. 간장이 녹고 허파가 뒤집어질 노릇이었다.
삼식 캐피탈이 야료를 부리는 바람에 가문이 휘청거렸지만, 누구도 종가 사위인 박인보가 삼식 캐피탈을 조종했음을 알지 못했다. 물론 박인보의 형편도 그리 좋지는 못했다. 삼식 캐피탈을 앞세워 장씨 가문의 막대한 농토를 거둬들이느라 심각한 자금 압박에 시달렸다. 장씨 가문과 박인보의 치킨 게임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장씨 일가는 CB를 전량 주식으로 전환했다. 전환주식수는 장기수와 장상수 형제 53,571주, 장필녀 17,857주, 장경모 17,857주, 장경택 장경남 형제가 17,857주였다. 신주 107,142주가 발행되고, 총 발행주식수가 507,142주로 늘어났다.
당초 208,000주를 보유한 박인보의 지분은 41%로 뚝 떨어졌다. 장기수 형제는 113,571주 22.4%, 장필녀는 57,857주 11.4%, 희자 삼 남매 40,000주 7.9%, 장경모 17,857주 3.5%, 장경택 형제 17,857주 3.5%, 일반주주 52,000주 10.3%로 지분 구성이 바뀌었다.
정리하면 박인보 208,000주 41%, 장씨 일가 207,142주 40.8%, 희자 삼 남매 40,000주 7%, 일반주주 52,000주 10.3%다. 박인보와 장씨의 지분이 동등한 상황에서 일반주주와 삼 남매가 캐스팅보트를 쥔 묘한 형국이 만들어졌다. 잔머리 대가 박인보의 절묘한 숫자놀음이다.
장씨 가문이 동등한 지분에 불구하고 경영권 탈취가 난망인 이유는 10.3% 지분을 가진 일반주주들이 박인보와 친분이 깊은 거래처들이기 때문이었다. 박인보가 무쌍에게 주식을 넘겨주며 경영권을 장담한 배경에 백기사가 있었다.
여하튼 너무 큰 덩어리, 그것도 독이 든 먹이를 삼킨 장씨 일가의 후유증은 너무나 컸다. 월 일억 원이 넘어가는 살인적인 사채이자에 견디다 못해 삼식 캐피탈에 넘어간 토지가 4,000마지기다. 그러고도 악마 같은 이자 덫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했다.
남은 논 60마지기는 은행 담보로 잡혀 있다. 멀쩡한 농토는 밭 스무 마지기가 고작이었다. 논밭에서 나오는 연간 소출은 경작에 들어가는 비용을 제하면 300만 원도 되지 않았다. 사채는 껐지만, 은행이자와 큰 살림을 유지하기엔 턱도 없는 수입이다.
빚에 쪼들리자 살림살이도 파탄 나기 시작했다. 종가는 버티고 있지만, 방계는 집까지 경매로 넘어갈 판이었다. 장경모는 한평생 양반의 법도를 지키며 우아하게 살아온 대지주다. 언제 이런 참람한 지경에 처해보았겠는가? 한여름 밤의 꿈인 듯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억장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형님은 버틸 수 있지만, 이 아우는 갈 데까지 갔습니다. 경택 해임과 경남이도 말이 아임니더. 질부가 이자를 메까준다 카디마는 그것도 게우 석 달 메까주고 고만도삐릿다 아임니꺼. 견디다 못해서 삼식 캐피탈에 토지를 넘겨주고 손 털었다 아잉교.”
장경모가 하소연했다.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아도 형님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체면과 질서마저 무너지면 막장가문이 된다.
“우탁이 어미도 사정이 좋지는 않네. 그래도 지금 주당 가치는 36,000원이 넘어갔지 않나.”
“그래서 박 서방에게 부탁하는 거 아임니꺼. 박 서방이 주식을 인수해주마 깔끔하이 손 털랍니다. 경영권은 틀렸고, 우선에 살기라도 해야지요. 질부가 그건 해 조야지요.”
장경모가 가슴을 펑펑 두드렸다. 장경주는 가슴이 답답했다. 아우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다. 사위가 돌변해서 처가 보기를 씹다 버린 풍선껌 보듯 하는데 어쩌란 말인가. 장경주는 딸에게 원망스런 눈초리를 보냈다. 부부간이 원만했으면 파열음이 있어도 봉합할 여지가 있지만 이젠 좋은 낯으로 만나기는 틀렸다.
“커험!”
장경주는 답답함을 헛기침으로 풀고 입을 다물었다. 머슴 취급했던 사위, 경영권 다툼으로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되어버린 사위를 축출하지 않고는 현 상황을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형님, 이노린을 한 번 더 쓰지요. 돼지 발정제 말입니다.”
한쪽에 찌그러져 있던 장치수가 눈을 번들거렸다.
“틀렸어!”
장 씨가 머리를 흔들었다.
“매형에게 먹일 방법이 없능 기라. 회사에서는 정부장이란 년이 물 한 컵까지 챙기고, 식사는 단골 없이 맨날 여기저기 돌아댕기고, 주치의는 맹꽁이라 손톱도 안 들어가더라. 방법이 없어.”
장상수가 설명을 덧붙였다. 입술만 질겅질겅 씹고 있던 장경택이 불쑥 말했다.
“형님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장조카와 큰애기를 사기로 고소할랍니다. 어제 변호사를 만났심더. 사기 요건이 성립되고도 남는다 캅띠다.”
두웅- 장씨 가문에서 있을 수 없는 폭탄 발언이다. 일순간 넓은 거실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장경주와 장경모, 장필녀, 장상수가 입을 쩍 벌렸다. 다른 사람들은 입을 꾹 다물고 천장을 쳐다보거나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드디어 천생산 마당바위처럼 단단하게 뭉쳐있던 장씨 가문이 삐거덕거리기 시작했다. 상황이 그만큼 나빠졌다는 의미다. 박인보가 기획 연출한 시나리오가 클라이맥스를 넘어 마무리로 치달렸다.
“머라꼬예! 고소요? 지가 집안 잘되자고 한기지 제 혼자 잘먹고 잘 살자고 한 일입니까? 당숙이 이럴 수 있습니가?”
장씨가 째지는 소리로 반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