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602
x 602
제54장 종두득두12
“어허, 이 사람 왜 이리 서두르나.”
마지막 기회와 집밖에 나앉는 우사(창피)에 정신이 번쩍 든 장경남이 일어나려는 이 변호사를 만류했다. 양반의 생명은 체면이다. 체면을 잃으면 양반도 죽는다. 체면을 지키려면 재산이 있어야 한다.
가세가 기울어지는 만큼 촌것들이 허리를 숙이는 각도가 달라졌다. 찬물 마시고 이빨 쑤셔봐야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장경남이 형에게 맹렬히 눈짓했다. 장경택이 ‘내가 살아야 가문도 있지 않으냐.’는 의미를 못 알아차릴 리 없다.
“그리함세. 돈은 언제 준비되는가?”
장경택이 이를 악물고 손바닥으로 상을 탕 내리쳤다.
“오늘 양수도계약서를 쓰고 계약금으로 일억을 드리지요. 실물은 가져오셨습니까?”
“여기 있네.”
장경택이 주권 실물을 넘겼다. 불확실한 십억보다 눈앞의 일억이 당연히 소중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노인은 순진하다 못해 어리석고 귀 얇은 덕분에 거덜난 재산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래서 새옹지마라는 말이 생겼다.
‘박 사장이 표적은 잘 골랐구먼. 쯧쯧!’
이 변호사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안쓰러울 만큼 헐렁한 시골 노인네가 욕심만 잔뜩 부렸으니 거덜 나지 않을 수 없다. 욕정이 없으면 창녀가 존재할 수 없듯이 사기꾼의 토양은 탐욕이다. 박 사장이 그럴 사람은 아니지만, 명의변경만 하고 잔금을 늦추면 어쩔 것인가.
“잔금은 준비되는 대로 송금해 드리지요. 열흘은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통장 번호 주시소.”
조바가 회접시를 들일 때 주식 양수도 절차는 이미 끝났다. 장경택 형제는 만감이 서린 눈으로 수표에 찍힌 영의 행렬을 뚫어질 듯이 노려보았다.
“형님, 난 다시는 주식에 손대지 않을라우.”
“동감일세. 억만금이 생겨도 이따위 개고생은 하고 싶지 않네.”
장경택이 몸서리쳤다. 망할 놈의 주식 때문에 몇 년간 제대로 골병들었다. 본인의 재산도 날렸지만, 공동 투자한 일가붙이들의 성화에 간장이 녹았다. 주식의 주자만 들어도 골이 지끈거렸다.
“한바탕 악몽을 꾼 듯합니다. 역시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요.
장경남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육억 삼천이면 날려버린 토지 절반은 회수할 수 있다. 용궁에 끌려간 토끼가 뽑혔던 간을 돌려받은 셈이다.
“이 변호사, 고맙네!”
“저야 심부름꾼입죠. 인사는 박 사장에게 하셔야죠. 종가의 욕심에 말려들어서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느긋하이 한잔 하이소.”
이 변호사가 마지막까지 이간질했다. 장경남이 일어서는 이 변호사를 잡았다.
“이보게, 비싼 회가 들어왔는데 식사라도 하고 가게.”
“아닙니다. 두 분이 나눌 말씀도 많을 테고, 소생도 오후에 공판 들어가야 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이만.”
인간은 양심에 거리끼면 합리화 거리를 찾게 된다. 이 변호사는 장경택 형제가 본가를 씹을 시간을 제공했다. 변호사란 직업은 갈등을 부추겨서 밥 벌어먹는 직업이다. 이래서 변호사 똥은 개도 안 먹는다고 했다.
협상을 끝낸 이 변호사는 발걸음도 가볍게 횟집을 나섰다. 이기주의는 공동의 선에 앞선다는 박 사장의 지론은 틀림이 없었다. 장경택 형제의 배신으로 인해 장 씨 가문은 자중지란에 빠지게 생겼다.
박 사장은 처가 기둥뿌리를 뽑는데 그치지 않고 가문 전체에 불신과 분란의 씨앗을 뿌렸다. 너구리보다 음흉하고 살모사보다 집요한 인간이다. 수십 년간 온갖 더러운 사건을 접해온 이 변호사도 치를 떨었다. 그는 공중전화로 박인보에게 협상 내용을 보고하고 한마디 덧붙였다.
“나는 박 사장님과 절대로 적이 되고 싶지 않소.”
우웅- 교문을 들어서던 가물치가 속력을 늦추었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풍경이 등장했다. 교문 양쪽에 스쿠툼(로마군 사각 방패)을 방불케 하는 진압 방패와 시커먼 진압봉으로 무장한 전경 중대가 4열 횡대로 도열해 있다. 학기가 시작되자 또 시작이다.
학생 데모대와 경찰의 끝없는 술래잡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전두환이 최규하(일본명 우메하라 게이이치)를 밀어내고 대권을 잡기 전부터 매캐한 최루 가스가 거리에 흐르지 않은 날이 없었다. 캠퍼스에 전경들의 군가가 울려 퍼지고, 가방을 뒤지려는 경찰과 저항하는 학생의 실랑이는 일상다반사였다. 선지피를 흘리며 도망가는 학생도 일상이고, 청바지 차림의 백골단이 학생을 집단 구타하는 장면도 일상이었다.
9월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잠잠했던 데모가 학기가 시작되면서 다시 격화되었다. 데모의 발단은 부천경찰서에서 자행된 권인숙 성고문 사건이었다. 본 사건은 공권력이 추악한 수단을 동원해서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고, 사법부와 언론이 불의한 권력에 동조한 전형적인 반인륜, 반도덕적 사건이었다.
1983년 12월 21일, 전두환 정권이 발표한 학원자율화조치로 인해 학생 데모는 전기를 맞았다. 반정부 데모로 인한 제적생의 복교 허용을 골자로 하는 일련의 유화조치가 학생운동을 대대적으로 촉발시켰다.
12.21조치 목적은 단 한 가지, 정권에 대한 반감 희석이었다. 전두환과 측근들은 국민들의 반감 수위가 얼마나 높은지 제대로 몰랐다. 때린 놈은 맞은 놈이 얼마나 아픈지 모른다. 권력에 취한 독재자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다.
동 조치로 운동권 학생이 복교하고 캠퍼스 상주 경찰병력이 철수하자 무지막지한 탄압에 숨을 죽이고 있던 대학생들이 새해 벽두부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각종 학생 조직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해서 학내민주화와 사회 민주화를 투쟁 목표로 내세웠다. 오판의 대가는 심각했다. 교내시위와 가두시위, 철야농성으로 날이 새고 저물었다.
전두환이 어떤 인물인가? 나한테 당해보고 이러니저러니 말하라는 무지막지한 인간이다. 교문을 가로막은 전경대는 공식적으로 철수했지만, 사복 경찰과 백골단이라 불리는 진압대가 대대적으로 학내에 투입되었다. 이들의 학내 사찰은 일상사였고, 소요가 발생하면 닭장 차 수십 대가 순식간에 출동했다.
사복 진압조, 일명 백골단은 방진을 짜서 데모대를 밀어붙이는 전경과 달리 간편한 사복 차림에 진압봉만 들고 번개처럼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체격 좋고 운동깨나 한 백골단의 악명은 80년대를 풍미했다.
무쌍은 국내 정치에 오불관언 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유럽과 아프리카, 중동을 돌면서 본 것도 많고 들은 것도 많았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고 보는 만큼 알게 된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사건의 이면에는 또 다른 진실이 숨어있는 법이다.
군사 정권의 희생양으로 알려진 최규하는 철저한 방조자이자 방관자다. 계엄 확대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립이 그의 손에서 결정되었고, 1980년 5·17 계엄 확대를 추인한 자도 최규하다. 신군부가 김대중과 김종필을 체포하고 김영삼을 가택 연금했을 때도 입을 꾹 다문 사람이 최규하다.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불의를 바로잡으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은 방관자이자 비겁한 사람이다.
견문이 넓어지고 사고가 유연해지자 독재자의 말로가 보였다. 한국의 현실이 답답하긴 하지만, 아프리카나 중동처럼 막장 수준은 아니었다. 국민의 의식이 깨어나면 독재자가 설 땅은 저절로 사라진다.
또 한가지 이유는 레벨의 문제다. 전두환이 반칙인 존재라면 자신도 반칙인 존재다. 죽음의 천사는 좁은 한국땅에 존재해서는 안 될 파괴적인 존재다. 신군부 인물이 거슬린다고 몽땅 목을 잘라버리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무쌍은 도열한 전경들을 백안시하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역사는 국민의 의식 수준이 낮을 때 정의에 무관심해진다. 한국인의 의식 수준은 그리 낮지 않다. 현 상황은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해결된다. 시간은 온갖 골치 아픈 상황을 해결하는 최고의 트러블슈터다.
“빨리 튀어!”
“씨발, 조져!”
“저 씨발년 놓치면 전부 뒤 질 줄 알아.”
급박한 외침과 욕설, 발걸음 소리가 고요한 도서관을 흔들었다. 학생 대여섯 명이 열람실로 뛰어들었다. 헬멧을 쓰고 진압봉을 든 백골단 십여 명이 노루를 쫓는 승냥이떼처럼 우르르 뒤따라왔다. 와장창- 빠직- 책상이 부서지고 의자가 날아갔다.
고요하던 열람실이 졸지에 원형 경기장이 되었다. 곳곳에서 난투극이 벌어지고 비명과 아우성이 터졌다. 욕설이 난무하고 창문이 깨져 나갔다. 진압봉에 맞은 학생이 피를 줄줄 흘리며 밀대 자루를 휘둘렀다. 다리를 맞은 백골단원이 맴돌고 이단옆차기에 당한 학생이 좌석을 쓸어안고 뒹굴었다.
전세는 순식간에 백골단 쪽으로 기울었다. 열람실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은 눈치만 보고 나서지 않았다. 무쌍은 그들을 나무랄 생각이 없었다. 각자는 각자의 정의가 있고, 각자의 사정이 있다. 그렇게 역사가 만들어지고 흘러간다. 그래도 이건 너무 지나쳤다.
“아악! 놔라 씨발놈아!”
머리채를 잡힌 여학생이 발악했다.
“씨발년, 니가 튀바야 내 손바닥인 기라. 디져라!”
헐렁한 청바지 차림의 백골단이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여학생이 바닥을 구르고 가해자가 올라탔다.
“새꺄, 니나 디져!”
산발이 된 여학생이 다부지게 주먹을 휘둘렀다. 철썩- 발작적으로 휘두른 손이 뺨을 쳤다. 성질이 보통 아닌 여학생이다.
“머 이런 가시나가 있노. 직이 삔다.”
백골단이 사정없이 주먹을 내리꽂았다.
“아악!”
피가 튀고 비명이 터졌다. 이성을 잃은 녀석이 벹트에서 진압봉을 뽑았다. 그대로 두면 여학생이 맞아 죽을 판이다.
“휴우, 지랄도 지랄도!”
무쌍이 한숨을 쉬었다. 일명 백골단이라 불리는 사복체포조가 교내에 돌입해서 데모 학생을 개 끌듯이 끌고 나가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곤봉에 맞아 식물인간이 된 학생도 있고 사망한 학생도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분노한 학생들의 다구리에 백골단이 죽거나 중상을 입는 경우도 허다했다. 레미제라블, 학생도 백골단도 시대가 낳은 희생자다. 죄가 있다면 썩은 군인과 정치인, 권력의 개가 된 언론이다. 아무리 오불관언이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식을 벗어난 폭행까지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씨바, 쥑이고 개값 물어주께.”
부악- 진압봉이 무지막지한 기세로 떨어졌다. 무쌍이 손에 쥐고 있던 지우개를 탁 튕겼다. 정도가 지나쳤을 뿐 명령에 따르는 도구를 해칠 생각은 없었다. 뻑- 따악- 두 종류의 타격음이 울렸다. 진압봉이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반대방향으로 튀어 올랐다.
“아악!”
자신의 진압봉에 이마를 얻어맞은 백골단이 비명을 질렀다.
“언놈이 때렸어? 퍼뜩 안 나오면 직이 삔다.”
커다란 혹이 툭 불거진 백골단이 눈을 부릅뜨고 포달을 떨었다. 그는 본인의 진압봉에 맞았다는 사실도 모르고 진압봉을 재차 휘둘렀다.
“개값은 내가 물어주지.”
핏- 볼펜이 공간을 갈랐다. 퍽- 볼펜이 두꺼운 청바지를 뚫고 허벅지에 푹 꽂혔다. 볼펜은 운동량이 무게에 비례하고 속도에 제곱 비례한다는 물리적 법칙을 충실히 구현했다.
“아악!”
졸지에 변을 당한 백골단의 손에서 진압봉이 툭 떨어졌다. 일부러 힘줄과 혈관을 피해서 볼펜을 박았다. 상한 근육은 곧 복구된다. 무쌍의 기준에서 엄살이 심한 놈이다.
“임마, 비켜! 굶었으면 자갈마당에 가던지. 새끼가 탈 게 따로 있지!”
무쌍이 여학생을 올라타고 있는 녀석을 축구공 차듯이 뻥 걷어찼다. 여학생은 안면이 피 칠갑이고 얻어맞은 광대뼈가 주먹만큼 시퍼렇게 부었다. 다행히 입술이 찢어지고 코피가 터졌을 뿐 코뼈가 내려앉거나 이빨이 상하지는 않았다. 광대뼈가 충격을 흡수한 덕분에 안면 데미지를 면했다. 무쌍은 인당혈(눈썹 사이 정중앙)과 영양혈(콧방울 양옆)을 눌러서 쏟아지는 코피를 막았다.
“개안나?”
“형은 이 꼴이 괜찮아 보이는교?”
여학생이 찢어진 블라우스를 당겨서 가슴을 가렸다. 상의가 찢어지고 브래지어도 뜯어진 민망한 상황에 불구하고 조금도 주눅들지 않았다. 백골단이 체포하려고 설칠 만큼 깡이 대단한 여자애다.
“괜찮지 않구마.”
무쌍이 빙긋이 웃고는 슈트를 벗어서 상체를 가려주었다. 슈트 아래는 얇은 조끼 런닝 한 장이 전부다. 마닐라 밧줄처럼 잘디잘게 쪼개진 근육 섬유로 뒤덮인 완벽한 역삼각형 상체가 드러났다. 여학생을 향했던 수많은 시선이 조각 같은 구릿빛 상체에 꽂혔다. 구타를 당한 여학생도 몽롱한 눈길로 올려다 보았다.
“우와!”
“조각상이다.”
이곳저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저 사람 알아. 다스베이더 해임이다.”
무쌍을 알아본 학생이 소리쳤다.
“저 새끼 밟아!”
지휘자가 새된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백골단이 학생들을 버려두고 우르르 달려들었다.
“허, 이거 참!”
무쌍이 달려드는 백골단을 노려보았다. 잡아먹을 기세로 달려들던 십여 명이 급브레이크를 밟은 자동차처럼 멈추었다. 전장의 살인귀도 감당하지 못하는 살기를 젊은 애들이 감당할 수는 없다. 무쌍은 진압조 애들에게 별 유감이 없었다. 칼에 찔리면 칼을 찌른 놈을 탓하지 칼을 탓하지 않는다.
“뭐해, 씹새끼들아! 방독면 쓰고 밤새 구보하고 싶어?”
검은 전투복에 모자를 깊이 눌러쓴 지휘자가 고함을 질렀다.
“죽여!”
정신을 차린 백골단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앞선 두 녀석이 한 치의 망설임없이 진압봉을 내리쳤다. 표적이 어깨가 아니라 머리다. 무쌍의 눈이 서늘해졌다. 난투극을 벌이다 졸지에 관객이 된 학생들이 비명을 질렀다.